온누리 신문 - [러브소나타 르포]미야자키, 길 위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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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소나타 르포]미야자키, 길 위에 서다

 2022-11-11      제14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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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미야자키, 길 위에 서다
 
미야자키가 변하면 일본이 변한다!  
신화(神話)의 고향에서 발견한 믿음 그리고 새 희망
 
‘신화(神話)의 고향 미야자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미야자키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문구가 이곳의 영적 상태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미야자키는 신화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일본 초대 천황 진무천황(神武天皇, 일본 건국신으로 추앙받음) 신화의 배경지가 바로 미야자키다. 진무천황은 신토(神道; 일본 고유 종교) 최고의 신 ‘아마테라스’(태양신)의 자손이다. 아마테라스는 팔백만 신이 존재한다는 일본에서도 최고위에 있는 신이다. 미야자키는 일본 건국 역사의 기원지라는 자부심과 우상숭배가 가득한 곳이다.  
지리적으로 미야자키는 일본 규슈 남동쪽 태평양을 바라보고 있다. 남국 느낌이 물씬 나는 곳이다. 그래서 ‘일본의 양지(陽地)’라는 별칭도 있다. 미야자키는 ‘평화(平和)의 도시’이기도 하다. 미야자키의 랜드마크인 ‘평화의 탑’이 그것을 상징한다. 그런데 평화의 탑은 그 의미와 거리가 멀다. 평화의 탈을 쓴 제국주의 잔재이기 때문이다. 우상숭배와 거짓 평화의 영이 가득한 미야자키에도 기독교 선각자들이 있었다. 그 흔적을 찾아 미야자키, 길 위에 섰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신화의 고향, 일본 역사의 기원지라고 불리는 미야자키로 가는 길이 꽤 고됐다. 현청 소재지 중에서 신칸센이 놓이지 않은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후쿠오카국제공항에서 구마모토까지 신칸센을, 구마모토에서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장장 4시간 걸려 미야자키에 도착했다. 미야자키는 어떤 곳일까? 인상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께 물었다.  
“미야자키는 신사(神社)가 유명해요. 어딜 가나 큰 신사가 있어요.”
누가 신화의 고향 아니랄까 봐 미야자키에 대해 물으니 신사를 가장 먼저 소개했다. 그렇다면 미야자키 교회 성도들은 ‘신화의 고향’이라는 별칭을 어떻게 생각할까? 모리사키 마리코 성도(72세, 예수그리스도미야자키복음교회)는 “정말 슬프다”는 표현으로 그 답을 대신했다. 
“미야자키는 우상숭배의 고장입니다. 마츠리(축제)도 정말 많이 열립니다. 축제가 열릴 때마다 행렬이 어마어마한데, 그만큼 우상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 정말 슬픕니다. 예수님을 바라봐야 하는데 우상을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우상숭배 고장의 상징
‘미야자키신궁’과 ‘평화의 탑’
 
<진무천황(일본 시조)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미야자키신궁>

board image<한국인 참가자들이 평화의 탑 앞에서 땅밟기와 중보기도를 하고 있다.>
 
 
미야자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미야자키신궁(神宮)’에 갔다. 미야자키신궁은 진무천황을 모시는 신사다. 신궁은 신사 중에서도 천황가와 관련 있는 신을 모시는 신사를 가리킨다. 미야자키신궁은 前 천황 부부를 비롯해 황가 사람들이 꼭 찾을 정도로 유서 깊은 곳이다. 입구부터 고급스러움과 신비스러움이 묻어났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단체객들에게 신궁이야기를 재미있게 설명하는 가이드와 흰 적삼에 붉은색 치마를 입은 신녀(神女)도 4명이나 있었다. 이들에게 미야자키신궁의 역사와 의미가 그만큼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합장해서 절하고, 운세가 적힌 종이를 뽑고, 부적을 사는 모습이 경건하기까지 했다. 일본의 건국신도, 태양신으로 추앙받는 아마테라스도 한낱 우상에 불과한데 말이다. 신궁이 주는 압박감과 두려움, 우상에 절하는 사람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교차했다. 
‘헤이와다이공원(平和台公園)’에 있는 ‘평화의 탑’으로 향했다. 미야자키신궁에서 자동차를 타고 북서쪽으로 6분 정도 가면 공원이 나온다. 평화의 탑은 진무천황이 일본을 건국한 지 2600년이 되는 것을 기념해서 1940년 만들었다. 해발 60미터, 높이가 36.4미터나 되는 거대한 탑이다. 그런데 이 탑에는 이름과 달리 평화가 없다. 탑 앞에 있는 비문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일본 건국 2600년을 기념하는 이 탑은…(중략)… 일본 국내를 비롯해 당시 세계 각지에 있는 일본인 단체 및 우호국들에서 가져온 돌 1,789개로 만들었다.” 
1940년은 일본이 대동아공영론 기치 아래 한창 전쟁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던 시기다. 비문에 적힌 ‘우호국’은 일제 점령지다. 조선을 포함해서 아시아 각국에서 수탈해온 돌들로 탑을 쌓은 것이다. 탑 정면에 ‘八紘一宇(팔굉일우)’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는데, ‘온 세계가 한 집안처럼 지내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표어다. 이 탑은 평화로 포장된 일제의 세계 정복 야욕의 산물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눅 2:14). 
진정한 평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미야자키에 평화의 탈을 쓴 가짜 평화가 아니라 진정한 평화의 왕 되신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다. 
 
미야자키의 기독교 선각자들
이시이 쥬지와 사이러스 클라크

board image<일본의 조지뮬러 ‘이시이 쥬지’ 동상(문화공원 내)>

board image<클라크 거리 표지판>
 
우상숭배의 땅 미야자키에도 기독교 선각자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일본 고아들의 아버지, 일본의 죠지 뮬러 ‘이시이 쥬지(石井十次)’다. 그는 1865년 미야자키현 다카나베초 출신이다. 오카야마와 미야자키에서 일생을 고아 구제에 헌신했다. 이시이 쥬지에게 인생의 방향과 믿음을 전해주고, 그가 의사가 될 수 있도록 학비를 지원해준 사람이 ‘오기와라 도도헤이’라는 크리스천 의사다. 오기와라 도도헤이는 갈피를 못 잡던 이시이 쥬지에게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류애의 마음이다. 이 마음을 잊지 않으면 어느 길을 가더라도 만족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 덕분에 의사가 된 이시이 쥬지가 고아사역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 역시 기독교 신앙이다. 우연히 사정이 딱한 고아 1명을 맡아 키우게 됐는데, 그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가면서 고아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었다. 늘어나는 아이들을 보면서 이시이 쥬지가 고민에 빠졌다. 의사냐, 고아구제냐를 두고 고민하고 있을 때 성경이 그 답을 알려줬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마 6:24). 
‘그래,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자. 의사가 되고 싶은 사람은 많지만, 불쌍한 아이들을 구제하는 사람은 적다. 내 일생을 바쳐 아이들을 섬기자!’  
이시이 쥬지는 의사 일을 포기하고 고아구제에 헌신했다. 1887년 오카야마에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고아원을 설립, 1907년에는 그 수가 1,200명이나 됐다고 한다. 그가 수많은 고아를 먹여 살릴 수 있었던 힘도 신앙과 기도였다. 그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는지 기도하기 위해 앉았던 돗자리가 깊이 파였을 정도다. 이시이 쥬지의 흔적을 러브소나타 미야자키가 열린 메디키트 현민문화센터 가까이에서 발견했다. 문화공원(현민문화센터가 있는 공원) 북서쪽 끝자락에 그의 동상이 있다. 그의 동상 양옆에는 어린이 두 명의 동상도 있다. 이시이 쥬지 동상이 오른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는데, 아이들이 걸어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듯하다.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라고 말하는 것 같다.   
미야자키의 기독교 선각자가 또 있다. 미야자키를 누구보다 사랑한 파란 눈의 이방인 ‘사이러스 클라크(Cyrus Alonzo Clark) 선교사’다. 1892년 미야자키에 온 클라크 선교사는 1924년까지 약 33년 동안 복음 전도와 사회사업에 크게 공헌했다. 교육과 장애인 인권 개선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유치원과 훈맹원(지금의 현립맹학교)을 개설했고, 자택을 여학생 숙소로 개방해 영어와 양재(洋裁), 서양요리를 가르쳤다. 클라크 선교사가 미국으로 떠나던 날 700명의 시민이 모여 그와의 이별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미야자키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미야자키를 사랑했다. 그의 흔적을 JR미야자키역에서 남서쪽으로 약 7분 걸어가면 나오는 ‘사카에마치아동공원’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클라크 선교사의 이름을 딴 도로(거리)도 있다. 그의 동상이 있는 공원과 다치바나거리(미야자키에서 가장 큰 번화가)를 잇는 약 700미터 도로 이름이 ‘클라크 도로(Clark St.)’다. 하나오카 코이치 목사가 사이러스 클라크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새 희망을 노래했다.   
“저는 일본 역사가 시작된 미야자키가 변하면 일본이 변할 거라고 확신합니다. 미야자키가 구원받으면 일본이 구원받는 영적 변화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러브소나타 미야자키가 그 변화의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작성자   정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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