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땀 흘리고 수고하는 모든 노동은 귀하다

사역

MINISTRY

사역

땀 흘리고 수고하는 모든 노동은 귀하다

 2019-06-14      제1249호

공유하기

기획_크리스천의 삶과 신앙시리즈
2. 노동의 품위(땀의 가치)   
 
누군가의 땀의 가치를 비하하거나 조롱하지 말라!
직업의 귀천 따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품위’
 

 
“특별한 기술도 지식도 필요 없는데 시의원보다 월급이 많다.”
얼마 전 한 시의원이 자신의 월급보다 환경미화원의 월급이 더 많다는 발언을 해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직업에는 귀천(貴賤)이 없다는 인식이 아직도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사실 짱깨, 철가방, 때밀이, 잡상인, 딴따라 등 특정 직업과 직업인을 비하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면 몹시 곤란하다. 미개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땀 흘리고 수고하는 모든 노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귀하다. 이것은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진리요, 꼭 갖춰야할 진정한 품위다. 누군가의 땀의 가치를 그 어떤 이유로도 비하하거나 조롱해서는 안 된다.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마저도 직업과 사회적 수준으로 평가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여기, 자칭 좋은 부모와 나쁜 부모가 있다. 길거리에서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을 보고 자칭 나쁜 부모가 말했다. “너 공부 안하면 저런 사람 되는 거야.” 옆에 있던 자칭 좋은 부모는 이렇게 말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저런 사람도 잘 살도록 도와줘야 해.” 
누가 나쁜 부모이고, 누가 좋은 부모일까? 둘 다 잘못됐다. 자칭 나쁜 부모와 좋은 부모 모두 환경미화원보다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느끼고 있고,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을 받은 자녀가 어떻게 성장할까? 모르긴 몰라도 부모 힘 빠지면 무시하고 괄시하는 정도는 거뜬히 하지 않을까? 보고 배운 게 그래서 무섭다. 
 
아무렇지 않게 비하하는 직업?
아무나 될 수 없는 귀한 직업!
 
수많은 사람들이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을까? 운전기사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 재벌, 군 복무 잘하고 오라고 보낸 남의 집 귀한 아들을 하인 부리듯 한 직속상관 부부, 하청기업이나 직급 상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상관 등 일일이 꼽을 수 없을 정도로 갑질이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다. 그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적어도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인 것은 분명하다. 
아직도 일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자극을 준다는 명분으로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커서 저렇게 살고 싶니?”, “공부 열심히 안하면 저런 사람 된다?”고 무시하고 조롱하는 말을 해댄다. 그런데 그 부모들이 놓치는 것이 있다. 세상에서 거저 갖는 직업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지난달 경북 구미시에서 환경관리원 여섯 명을 모집하는데 185명이 지원했다. 경쟁률이 30.8대 1이나 됐다. 2017년 21.7대 1, 2018년 17.2대 1을 훌쩍 넘는 역대 가장 높은 경쟁률이었다. 눈여겨볼 점은 지원자들의 학력이다. 대졸 이상이 52%를 차지했다. 이와 같은 상황은 타 지역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울산 동구 환경미화원을 세 명 채용하는데 113명이 지원했다. 경쟁률이 무려 37.6대 1이었다. 2017년 경쟁률과 비교했을 때 약 두 배 가량 높았다. 지원자의 학력도 전문대졸 이상이 58명으로 과반을 넘었다. 석사학위 소지자도 두 명이나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비하하는 직업이 아니라 아무나 될 수 없는 귀한 직업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환경미화원, 이삿짐센터 일꾼, 정화조 청소하는 일, 고층빌딩 유리 닦는 일 등은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도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그 일이 볼품없다거나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결코 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위험하고 힘들고 더러워서 안하는 일을 대신 맡아 해주는 감사한 사람들이다. 모두가 ‘사’자 들어가는 직업만 선택한다면 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고마운 줄 알아야 한다. 
 
그들도 육체노동자였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위인들도 소위 말하는 육체노동자였다. 엘리야에 이어 놀라운 이적을 행한 선지자 엘리사는 농부였다. 엘리사가 스승 엘리야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12쌍의 황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다(왕상 19:19). 
아모스 선지자도 목자이자 농부였다.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암 7:14). 
사도 바울은 텐트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 이름으로는 사울, 로마식 이름으로는 바울이다. 그는 날 때부터 로마 시민(행 22:25~28)이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씨에서 났고, 베냐민 지파인 순수 히브리인이며,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유대에 정통한 자라고 강조했다(롬 11:1, 고후 11:22, 갈 1:14, 빌 3:5~6). 바울은 모든 백성에게 존경받던 가말리엘 학파의 율법교사(행 22:3)이자 로마 시민이며, 가말리엘 문하에서 유대교를 공부한 신분과 지식이 출중한 사람이었다. 그런 바울의 직업이 천막 만드는 것이었다.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파 유대인 바울이 천막 만드는 일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특이한 사항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허용 가능한 직업이 구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죽으로 천막을 만드는 일은 그야말로 천한 직업이었다. “죽은 동물 가죽 만지는 것은 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율법에 열심인 자들에게 바울의 직업은 혐오와 천대의 대상이었다. 
로마 시민이자 지식인인 바울이 노동을 경멸하는 로마 문화에서 스스로 육체노동자가 되었다. 바울이 율법을 어기는 비천하고 혐오스런 직업을 생업으로 택한 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나님 나라의 전파를 위해 바울은 스스로 낮아졌다. 바울을 두고 누가 비천한 육체노동자라고 폄하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 또한 공생애 시작하기 전에 직업이 목수셨다. 육체노동자였다. 
 
직업의 귀천이 아니라 
‘역할(소명)’이 다를 뿐이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은 자신의 구두를 직접 닦았다고 한다. 비서관이 그것을 만류하자 링컨은 “자신의 구두를 닦는 게 부끄러운 일인가? 세상에 천한 일이란 없네. 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교회에서조차 자신이나 배우자, 자녀의 학벌과 직업, 수입의 많고 적음으로 우월감을 갖거나 혹은 주눅이 드는 경우가 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홍범식 장로(두란노해외선교회)가 이와 관련한 일화 하나를 들려줬다.   
“제가 처음 교회에 왔을 때 하용조 목사님이 그러셨어요. 쟁쟁한 사람들 사이에서 택시기사였던 내가 교회에 잘 적응할까 걱정했는데 잘 해줘서 감사하다고요. 나는 사회적으로 저명한 그분들 사이에서 자격지심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주님의 제자이고,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정체성은 직업의 귀천에 있지 않아요. 그 일을 주님께 하듯 열심과 성심으로 하느냐에 달려있어요.” 
흘리는 땀의 가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직업에 귀천이 있는 게 아니라 역할이 다를 뿐이다. 직업에 따라 다른 사람을 하대하고, 무시하는 행동은 오히려 자신이 천한 사람임을 보여준다.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는 사람에게서 진정한 품격이 묻어 나온다. 물질의 많고 적음, 사회적 지위 등에 관계없이 모든 노동은 신성하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생애 동안 해 아래에서 먹고 마시고 열심히 일해서 보람을 얻는 것이 가장 선하고 분수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이 받은 몫이다”(전 5:18). 
“무엇이든지 네 손으로 할 만한 일을 찾으면 온 힘을 다해 하여라. 네가 가게 될 무덤 속에는 일도, 계획도, 지식도, 지혜도 없기 때문이다”(전 9:10). 
 
 

<전문가 기고>
 
일과 땀과의 관계 그리고 가치 
땀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된다면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내가 어렸을 때 어른들이 사용하던 말 중에 ‘불한당(不汗黨)’이 있었다. 불량배들이나 폭력배 같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때 나는 한자를 잘 몰라서 그 말의 의미를 잘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의 무리’라는 뜻이었다. 이 말인즉,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동시에 정상적인 사람은 땀을 흘리면서 일해야 한다는 것도 내포하고 있다. 이 단어를 통해서 일과 땀과의 관계의 정립할 수 있다. 일하는 사람은 땀을 흘리게 되고, 땀을 흘리는 사람은 곧 일하는 사람이다. 
 
땀 흘리면 부를 이룰 수 있지만, 
쉽게 돈 벌려고 하면 이루지 못한다
 
땀을 흘리는 일은 1차적으로 육체노동을 의미한다. 이것은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현대사회에서도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에 종사하며 신체활동을 많이 하는 일을 의미한다. 잠언에 “밭을 가는 사람은 먹을 것이 넉넉하지만 헛된 것을 꿈꾸는 사람은 찌들게 가난하다”(잠 28:19)는 말씀이 있다. 땀을 흘리면서 일하면 부(富)를 이룰 수 있지만, 땀을 흘리지 않고 쉽게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은 부를 이루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에서 육체노동의 가치를 분명히 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기술문명의 발달과 디지털화로 인해 실제로 땀을 흘리면서 일하는 직업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육체적 노동 외에 정신적인 노동을 하거나 감정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물리적인 땀은 흘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더 많은 수고를 하고 있다. 그 사람들은 물리적인 땀은 흘리지 않지만 그 이상의 수고를 필요로 하는 일을 하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땀 흘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수고가 필요한 모든 일들은 땀을 흘리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원래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땅을 정복하고 만물을 다스리라고 했을 때(창 1:28) 사람은 그 일을 정말 즐겁고, 신나고, 의미 있게 해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 일할 때는 정말 행복했다. 그는 일하면서 육체적인 땀을 흘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흘린 땀은 고통과 수고의 땀이 아니라 즐거움과 행복의 땀이었다. 그런데 아담이 죄를 지으면서 죄의 결과로 땅이 저주를 받게 되고, 사람이 하는 일에 고통이 따르게 되었다. 
“너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네가 일평생 수고해야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것이다”(창 3:17). 
이때부터 사람들이 흘리는 땀은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 저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 저주로부터 회복을 시작했지만(골 1:20), 여전히 사람들은 일하면서 땀을 흘리는 수고를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구원받은 크리스천들은 땀 흘리는 수고를 주께 하듯 해야 한다(골 3:23). 그것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벧전 2:21). 
육체노동을 비롯해서 고통이 따르는 일들을 주께 하듯 해야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적성이 맞지 않거나 그것을 감당하기에 신체적인 한계를 가졌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땀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노동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노동은 좋은 경험이 되고, 영적으로도 좋은 훈련과정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이 공적인 사역을 하기 전에 율법수업을 하지 않고 ‘목수’라는 노동을 했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열정과 필요가 만나는 
지점에 소명이 있다
 
나는 7년 전부터 프랑스에 있는 ‘미션디모데’라는 공동체 교회와 교류하고 있다. 그곳을 방문하면서 가장 도전이 되었던 것은 다음세대의 지도자를 세우기 위해서 젊은이들을 위한 공동체 훈련을 3년에 걸쳐서 한다는 점이었다. 이 훈련과정에는 성경과 신학공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공동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모든 노동에 참여하도록 한다. 남자들은 건축이나 건물 보수, 목공 일을 하기도 하고, 자동차 정비를 한다. 여자들은 건물 관리나 부엌 일, 빨래나 재봉과 관련된 일을 한다. 훈련을 마친 후에도 그 영역의 일을 지속하는 사람도 있고, 설교자가 되거나 다른 직업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이 공동체에서는 목회자이거나 설교자이거나 혹은 또 다른 직업을 가지게 되거나 가정주부로 살게 되었건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데 육체노동은 필수적인 훈련으로 생각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땀 흘리며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도 신학공부를 할 때 경제적인 필요 때문에 다양한 노동을 했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했던 일이 신학교에서 공부한 것보다 더 큰 유익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귀중한 경험이었다. 
한국 교회에서는 신학훈련을 하든지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하든지 땀 흘리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아쉽다. 이는 육체노동의 영적인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프레데릭 뷰크너는 “자신에게 있는 열정과 이웃의 필요가 만나는 지점에 소명이 있다”고 했다. 정말 공감이 되는 말이다. 직업이 소명이 되기 위해서는 그 일이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인 동시에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일이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현실적으로 그런 일을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소명을 찾지 못한다. 땀 흘리는 일에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좋겠는데 많지 않다. 그래서 땀 흘리는 일을 소명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예수님이 목수 일을 하신 것이나 바울이 텐트 만드는 일을 한 것은 개인의 열정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 때문 아니었을까? 개인의 열정과 필요가 만나는 곳에 더 많은 소명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과거에 경제적인 책임 때문에 청소를 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일이 그때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일시적 소명’이었다. 그때의 육체노동 경험은 내 삶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자산이 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실업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기 어렵다. 그러나 땀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된다면 실업 문제를 다소 해소할 수 있을 것 같다. 육체노동을 먹고 살기 위해서 감수해야 할 고난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땀을 흘리는 일이 젊은이들에게 영적인 훈련이 될 수 있고, 미래를 준비하는데 필요한 일시적 소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적어도 크리스천 젊은이들은 실업 문제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 방선기 목사(직장사역연구소)
 
 
<발문>
노동은 먹고 살기 위해 감수해야 할 고난이 아니라  
땀 흘리는 일 그 자체가 영적인 훈련이 될 수 있고, 
미래를 준비하는데 필요한 일시적 소명이 될 수 있다

 작성자   정현주 기자

6,535개 글

리스트보기
검색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1 2 3 4 5 6 7 8 9 10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