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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들이 보여야 할 품위가 무엇일까?

 2019-06-02      제12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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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크리스천의 삶과 신앙시리즈
1. 크리스천의 품위
 
 
품위(品位), 사람이 갖춰야 할 위엄, 기품, 품격
참된 인격과 믿음, 행위에서 진정한 품위가 나온다
 
 
“그녀를 좋아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그녀에게는 내가 부자들에게서 본 간악함이 없어서였다. 처절한 왕따로 전락한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품위. 내가 그녀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이유다.”
지난해 인기리에 방영됐던 드라마 ‘품위 있는 그녀’에서 박복자(김선아 분)가 우아진(김희선 분)을 보고 읊은 대사다. 박복자가 그토록 원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던 게 바로 품위다. 품위(品位)란 사람이 갖춰야 할 위엄이나 기품, 품격을 말한다. 크리스천에게도 품위가 필요하다. 아니, 반드시 있어야 한다. 
미안한 얘기지만 요즘 품위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정치인, 연예인, 재벌가 자제 등 사회 지도층의 품위 없는 모습이야 하루 이틀 아니라손 치더라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어야 할 교회와 크리스천 중에도 품위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보여야 할 품위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품위 있는 크리스천이 될 수 있을까?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퇴직금을 천 원짜리 지폐로 수천 장 주면서 눈앞에서 세어가라고 하는 사장, “점심시간 아니면 양치질하지 마라”고 한 대기업 임원의 행동에서는 분명 품위라곤 찾으려야 찾을 수 없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노블레스는 프랑스 말로 ‘귀족’이고, 오블리주는 ‘의무’라는 뜻이다. 귀족의 명예만큼 의무를 갖춰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고대 로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사회지도층이 반드시 갖추고 실천해야 할 마땅한 품위로 여긴다. 
우리나라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한 이들이 많다. 그 유명한 경주 최부자,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과 그 일가 등이 기독교에 입각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하며 품위를 드러낸 사람들이다. 
특히 이회영 선생과 그 일가가 귀감이 된다. 이회영 선생과 그 일가는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모든 재산을 정리해서 만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했다. 이회영 선생의 가문은 조선 대대로 고위 문무 관료를 수없이 배출한 손꼽히는 명문가였다. 당시 ‘이회영 선생 가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서울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큰 부자였다. 이회영 선생과 그 일가는 보장된 부귀영화를 버리고 고난과 죽음의 위험이 있는 독립운동을 택했다.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마련한 자금은 서전서숙, 신민회, 헤이그밀사, 의열단 등 항일운동 전반에 사용됐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서 폐교될 때까지 3,500명의 독립군을 배출하기도 했다.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회영 선생과 그 일가는 훗날 혹독한 곤경에 처했다. 밥 한 끼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고, 이회영 선생 여섯 형제 중에서 네 명이 항일운동 중에 사망했다. 이회영 선생 역시 밀고자에 의해 붙잡혀 모진 고문 끝에 66세 나이로 순국했다. 이회영 선생과 그 일가가 대대손손 잘 살 수 있는 길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기독교에 입각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니엘, 다비다, 백부장처럼
 
<사자굴의 다니엘(루벤스, 1615년)>

 
성경에는 품위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그 대표적인 이가 다니엘이다. 다니엘이 처한 상황은 비참했다. 나라는 망했고, 자신은 포로로 끌려왔다. 다니엘은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품위를 절대 버리지 않았다. 구별된 음식을 먹음으로써 자신을 정결케 했고(단 1:8), 바벨론의 지혜자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기도했다(단 2:1~23). 다니엘을 시기한 정적들이 음모를 꾸몄다. 왕 외의 사람이나 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면 사자 굴에 던지는 법령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굴하지 않았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다니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품위와 지조를 버리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런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구해내셨다. 
다니엘이 믿음으로 크리스천의 품위를 지켰다면 ‘다비다’라는 여제자는 선행과 구제를 실천하면서 품위 있는 삶을 살았다(행 9:36~42). 그녀가 얼마나 신실하고 덕망이 높았는지 죽음에서 되살아나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다. 
신약성경 전체를 통틀어 ‘여제자’라는 단어는 오직 이곳에만 나올 정도로 다비다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언제나 선한 일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다. 말 그대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그녀가 병으로 죽자 그녀에게 도움을 받았던 욥바의 모든 과부와 고아들이 베드로를 모시고 와서 다비다가 자신들에게 베풀었던 선행을 보여주며 슬피 울었다. 이에 베드로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는 시신을 향해 외쳤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행 9:40~42).  
가난한 과부와 고아들에게 속옷과 겉옷을 지어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던 다비다의 품위 있는 모습과 섬김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웃들을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했다. 
예수님을 놀라게 한 믿음의 소유자 백부장 또한 진정 품위 있는 사람이었다(마 8:5~13). 그는 인격과 겸손함으로 품위를 드러냈다. 백부장은 자신의 종이 중풍병으로 괴로워하니 고쳐달라며 예수께 청했다. 직접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는 예수님에게 백부장이 놀라운 말을 한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마 8:8). 
로마 제국 군대를 이끄는 지휘관이 종속국의 초라한 목수 출신 랍비에게 이러한 겸손과 믿음을 보인다는 것이 무척 놀랍다. 예수님조차 그런 백부장의 믿음에 찬탄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크리스천의 품위는 어디에서 나올까?
 
값비싼 명품을 몸에 걸치고, 우아하고 조신하게 행동하면 그 사람이 품위 있는 걸까? 결코 아니다. 품위란 내가 갖추는 것이지만 그 평가는 타인이 내린다. 타인이 느끼는 나의 인격, 행동, 언어 수준으로 나의 품위가 매겨진다. 우리가 품위 없는 부자를 졸부라 욕하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의 품위는 어디에서 나올까? 물질, 돈, 권력, 숫자에서 나오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에서 크리스천의 진정한 품위가 드러난다. 비참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은 다니엘처럼, 선행과 구제로 품위를 드러낸 여제자 다비다처럼, 겸손과 사랑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한 백부장처럼 참된 인격과 믿음, 행위에서 크리스천의 품위가 나온다. 사랑과 겸손, 성숙한 인격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때 비로소 세상이 우리를 보고 품위 있는 크리스천이라고 칭찬할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이 우리를 보고 믿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품위 있는 크리스천이 되자. 바울 사도의 간곡한 외침처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  
 
<발문>
“품위란 내가 갖추는 것이지만 그 평가는 타인이 내린다. 
타인이 느끼는 나의 인격, 행동, 언어 수준으로 나의 품위가 매겨진다.”
 
 
<전문가 기고>
1등보다 빛나는 2등의 품위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렇게 하는 행위
 
<쓰러진 1위 선수 챈들러를 부축해 들어오는 루터먼. >
 

 2017년 BMW댈러스마라톤대회에서 결승선을 180미터 남겨두고 1위로 뛰고 있던 선수가 다리에 힘을 잃고 넘어진 사건이 발생했다. 그 뒤를 바짝 붙어 달리고 있던 고교생 선수 아리아나 루터먼은 1위 선수를 가볍게 제치고 이 대회 우승 메달을 목에 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1위 주자를 앞서지 않고 넘어진 선수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몇 걸음 걷다가 다시 힘이 빠져 비틀거리는 선수를 또 다시 붙들며 격려했다. 
“거의 다 왔다. 당신은 할 수 있다. 결승선이 눈앞에 있다”
아리아나 루터먼은 결승선 테이프를 양보했다. 결승선에서 관중들이 열렬히 환호한 선수는 1위 선수가 아니라 2위를 차지한 아리아나 루터먼이었다. 그녀에게 그토록 많은 박수와 발채를 보낸 이유가 무엇일까?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런 행동을 한 것에 대한 일종의 존경심 아닐까? 17살밖에 안 된 어린 소녀가 마음을 다해 한 행동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큰 감동의 선물로 기억될 것이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지만 
 
지난주일, 온누리신문사로부터 ‘그리스도인의 품위’에 대한 글을 요청받고 잠시 고민했다. 그리스도인의 품위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품위’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위엄이나 기품’이라고 정의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품위란 단어의 구체적 모습으로 나는 아리아나 루터먼이 떠올랐다. 기사를 통해 아리아나 루터먼이 12살 때부터 비영리단체를 만들어 연약한 사람들을 돕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일반적이지 않은 그녀의 행동은 나이를 뛰어넘는 위엄을 느끼게 해준다. 
생각해 보니, 작지만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품위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웃으며 인사하는 이웃,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굳이 줍지 않아도 되는데 허리를 굽혀 주워 쓰레기통에 넣는 학생, 굳이 하지 않아도 되지만 환경을 생각해서 무거운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자주는 아니지만 삶속에서 기분 좋은 기억을 선사하는 품위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공통점을 떠올려보니 이런 표현이 반복되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는 ‘고집을 부려 구태여’라는 뜻이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지만 의지적으로 행동하고자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품위 있는 사람의 행동은 평범한 일상을 평범하지 않은 특별한 순간으로 만들어 준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렇게 행동한 사람을 성경에서 찾아본다면 아브라함과 롯을 예로 들 수 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가족처럼 여기고 보살폈다. 그러던 중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가 서로 다투는 상황이 발생했다. 아브라함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롯을 불렀다. 만약 여러분이 아브라함이라면 조카 롯에게 어떤 말을 하겠는가? 더는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을 안 아브라함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됐지만 롯에게 선택권을 먼저 준다(창 13:9). 롯은 온 땅에 물이 넉넉히 보이는 동쪽의 요단 지역을 택한다. 아브라함은 약속대로 롯이 선택하지 않은 가나안 땅으로 향한다. 함께 지낼 수 있도록 도움 준 것을 넘어 롯의 모든 재산을 인정해주고, 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까지 주는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분명 품위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위로하시고 축복하셨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 13:14~17). 
또 다른 예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의 병 고침의 표적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던 그 때, 그들에게 배고픔이 찾아왔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사람들의 주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물으셨다. 빌립의 계산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때 자신의 도시락을 바라보는 한 소년이 있었다.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 물고기가 손에 쥐어져 있다. 그것을 내놓으면 한 끼를 굶어야 할 수도 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 소년은 자신의 도시락을 내놓았다. 제자가 그 도시락을 예수님께 가져다 드렸고, 예수님은 축사하신 이후 사람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주셨다(요 6:11). 한 소년의 내어드림이 5천명을 배불리 먹이고 그 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감사의 통로가 되었다. 
이 외에도 성경 구석구석에는 품위 있는 행동을 한 다양한 그리스도인이 나온다. 그들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지만 자신의 불편함을 감수하며 행동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의 순간을 선물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스도인의 품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기인 
 
그렇다면 일상에서 품위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파워블로거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제임스 클리어는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큰 비밀로 ‘정체성’을 꼽았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대중교통을 이용하겠다’는 다짐이 좋은 목표가 될 수 있지만, 여기에 ‘나는 영과 육이 강건한 사람이 되기 위해’라는 정체성이 분명해지면 그에 따른 습관들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한다. 이는 <골든 서클(Golden Circle)> 저자 사이몬 사이넥이 말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무엇을 하지?’, ‘어떻게 하지?’도 중요하지만 그 시작은 ‘왜 해야 하지?’라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품위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일상에서 작은 행동을 목표로 삼는 것도 물론 중요하고 의미가 있지만, 그 전에 그런 행동을 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우리 죄를 위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온갖 멸시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여 이 땅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는 표현할 수 없는 큰 선물을 주셨다. 이 선물을 거저 받은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어떤 정체성을 가진 사람인지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가 받은 대로 품위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지만 예수님을 닮은 사랑의 모습으로 섬기고 사는 것이 십자가 사랑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의 품위 있는 모습이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품위 있는 삶을 살고 싶은데 그 구체적 방법을 모른다면 이 말씀을 보기를 원한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다”(눅 6:31). 
필자는 ‘감사학교’라는 워크숍을 통해 현장에 나가서 타인의 감사를 만드는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가령 시장(市場)이라는 현장에서 감사할 수 있는 제목을 만들어보라고 하면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온다. 시장에서 쓰레기 줍기, 붕어빵 사서 먹으면서 맛있다고 말하기, 무거운 짐 들어드리기, 웃으며 상인과 인사하기 등 시장에서 30분 동안 이러한 활동을 해보면 사람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볼 때가 있다. 굳이 웃으며 고맙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짐을 들어주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칭찬 안 해도 되는데 그렇게 하는 모습이 일상에서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일상의 좁은 틀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품위 있는 그리스도인의 사랑 표현이 필요하다. 이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피조세계가 하나님이 성품으로 회복되고, 공동체가 하나 되는 복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 때, 용기 있게 행동으로 옮기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 시작과 마지막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일 때 우리의 작은 행함이 천국의 열매로 맺혀질 것이다. 
/ 한건수 교수(수원 온누리교회, 국민대 교수, G.LAB 소장)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지만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섬기고 사는 것이 
십자가 사랑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의 품위다.”
 
 
 

 작성자   정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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