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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신앙에세이] “나를 따르라” 신앙에세이 “나를 따르라” 2026년 온누리교회 표어가 ‘나를 따르라’이다. 거기에 작은 부제가 붙어 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는가? 그 의미는 무엇일까? 예수님을 따르려 할 때 가장 큰 방해가 되는 게 다름 아닌 ‘자기’, ‘나 자신’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란 심리학 용어로 ‘에고(ego)’를 말한다. 에고는 우리 삶 주위에 둘러친 일종의 방어막과 같은 것이다. 에고는 늘 두려움에 차 있고 항상 위협을 느끼기 때문에 자신을 꼭 움켜쥐고 있다. 그것은 지나치게 방어적이고 매우 경쟁적이어서 자기중심적인 특성을 나타낸다. 물론 자기 보호라는 긍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 주도권을 온전히 돌려드리는 측면에서는 큰 문제가 된다. 즉, 나의 주도권을 포기하지 못하면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국 싸워야 할 대상은 바로 에고이다. 마귀 사단이 우리의 가장 큰 대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가장 큰 적은 나 자신이다. 위험한 적은 결코 외부에 있지 않다. 내부에 있다. 신앙 영성의 핵심은 사단을 대적하는 게 아니라 내 욕심과 자아(에고)를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있다. 예수님이 자기가 달려 죽으실 십자가를 친히 지고 가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못 박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무엇인가? 흔히들 자기 삶에서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이나 문제를 자기 십자가로 해석한다. 전 생애 동안 포기하지 못하고, 실패한 삶이 만들어 낸 무거운 짐들을 십자가로 보는 것이다. “주님, 저에게 문제가 많습니다. 이것이 제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이오니 잘 지고 가도록 도와 주세요…” 그러나 그런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른다. “너희가 지고 가는 것은 십자가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너희에게 준 자유와 은혜를 잘못 사용해서 얻게 된 무거운 짐일 뿐이다.” 거짓된 짐과 십자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거짓된 짐은 우리 스스로 만든 삶의 어려움이다. 내 욕심과 자아를 만족시키려고 쌓아 놓은 쓰레기 같은 일들이다. 그것들이 우리를 옥죄고 힘들게 하며 늙어 가게 한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우리가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당신의 멍에를 대신 메라고 말씀하신다(마 11:28~30). 그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멍에란 무엇일까? 바로 십자가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이나 무겁고 두렵기까지 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오히려 마음의 쉼을 주고, 삶을 가볍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참되 쉼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만든 헛된 짐을 내어 버리고, 그분이 주신 십자가를 져야 한다. 이 십자가는 우리의 자아를 죽이고, 새롭게 거듭나게 할 사명의 짐이다.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의 짐이다. 이것을 받을 때 곧 우리의 걱정 근심이 사라지고, 인생의 방황이 종결된다. 예수님이 주신 사명의 짐은 무척 무겁고 불가능해 보이지만, 사실은 가볍고 마음에 안식을 준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다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겉보기에는 힘들고 어려워 보일지라도 내적으로는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걱정 없이 헌신하면 된다. 올 한 해, 기쁜 마음으로 새롭게 주신 사명의 짐을 지고, 즐거이 예수님을 따라가기를 소망한다. / 허원희 목사(과천의왕공동체)

     2026-01-31  제1575호

  • 주일강단

    [주일강단] 야고보: 세상을 깨우는 우레의 아들 야고보: 세상을 깨우는 우레의 아들 <누가복음> 9:51~56, <사도행전> 12:1~3 /이재훈 위임목사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성격 또한 매우 다양했습니다. 늘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향의 베드로가 있었던 반면, 그의 동생 안드레는 조용히 뒤에서 섬기기를 더 좋아하고, 또 다른 누군가를 연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제자였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형제이지만 정반대의 캐릭터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3장 17절에서 예수님이 이 형제들에게 ‘우레의 아들들’이라는 뜻의 ‘보아너게’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동생 요한에게 ‘우레의 아들’, 즉 천둥번개와 같은 의미로 ‘보아너게’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우레의 아들들’이라고 했으므로 요한도 그러한 성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불같이 급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우레 같이 분노가 터지는 성격을 꾸짖는 의미로 이름을 붙이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름을 새로 지어 주시는 것은 현재나 과거가 아닌 미래에 초점을 두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 상태를 꾸짖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미래와 비전을 미리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신 것은 장래에 그가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될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와 계획을 담아 주신 것입니다. 이 해석 원리를 적용하면, 야고보에게 ‘우레의 아들(보아너게)’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은 그의 현재 성격이 불같이 거칠지라도, 그 너머에 세상을 깨우는 우레 소리와 같은 사람으로 쓰임 받을 것을 미리 선포하신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야고보의 성품이 한순간에 변화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 사건 속에서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그의 성품이 변화되어 제자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타협하지 않는 강직함과 열정의 사람 먼저 그는 타협하지 않는 강직함으로 부유한 미래를 포기합니다. 당시 ‘세베대’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 그는 갈릴리 수산업계의 소위 ‘큰 손’이라 불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어부를 고용하고, 배들을 소유한 선주였습니다. 동시에 그는 레위 지파 후손으로 당시 대제사장 가문과 매우 가까운 관계였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 어물을 판매할 여러 상점도 가지고 있었고, 대제사장의 집에도 자주 출입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증거로 세베대의 아들이자 야고보의 형제인 요한이 대제사장의 집에서 예수님이 재판받으실 때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출입이 가능했던 것을 들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아버지 세베대의 영향력으로 요한도 알려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합니다. 아버지 세베대는 야고보와 요한이 가업을 이어받아 더 발전시킬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을 듣고 부친의 사업과 배들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 단호한 결단은 그들 안에 있는 때로는 불같이 급하지만 타협하지 않고 중간이 없는 강직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안락함을 박차고 타협하지 않는 강직함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부유한 미래를 포기하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람보다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뜨거운 열정과 가능성을 예수님이 보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열정은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때로 자신의 야망과 독선으로 인해 위험한 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가능성이 실제로 나타났습니다. 야고보가 세속적인 야망으로 위험한 불이 될 뻔 한 일이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9장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가실 때 야고보와 요한을 선발대로 보내셨습니다. 아마도 그 지역에서 투숙할 곳을 찾고 준비하도록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이 머물 곳을 찾지 못한 채 돌아왔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유대 사람들에 대한 상처와 차별로 인해 그들을 냉대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이라서 냉대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 모두를 냉대했던 사회적 분위기 탓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의 불친절과 거절에 분노한 야고보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이 사람들을 멸망시켜 달라고 할까요?” 불같은 성격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관계에는 깊은 앙금과 미움, 증오가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그들을 불을 내려 멸망시켜야만 하는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지역을 지나가고자 하셨고, 여러 차례 사마리아를 통과하시면서 한 여인을 구원해 주셨으며, 그 지역에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을 때, 사마리아를 넣으신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는 당연히 포함되지만, 땅 끝으로 가기 전에 사마리아라는 지역을 의도적으로 언급하신 것입니다. 당시 세상이 네 지역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이 도저히 넘고 싶지 않은, 불을 내려 진멸하기를 원하는 이들을 예수님이 선교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신과 뜻이 맞지 않으면 심판부터 생각하는 야고보의 열정은 방향을 잘못 잡으면 편협한 독선이 되기 쉽습니다. 사랑이 없는 열정은 타인을 정죄하는 불의의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에 대하여 하늘에서 불이 내려도 마땅하다고 바라보는 것은 위험한 불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적대감에 대하여 동일한 적대감과 보복심으로 대하는 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많은 종교 전쟁과 종교 재판이 그랬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리지 않으니 스스로 불을 만들어 사람들을 징벌했던 모습이 야고보에게서 나타나고, 우리에게서도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야고보의 열정은 때로 세속적인 야망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희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원합니다’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었으면 좋겠느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주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 중 하나는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 10:35~37). 야고보와 요한은 세속적인 야망으로 예수님이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좌우편에 앉기를 원했습니다. 그가 생각했던 영광의 자리는 세속적인 힘을 가진 위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바라보신 영광의 자리는 십자가의 자리였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되시는 순간은 곧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영광을 통해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곧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광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구원 계획이 완성되는 자리였습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영광이 될 수 있는가?’ 끊임없이 자기의 야망과 자기를 증명하려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야고보 또한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자신의 수고에 대한 보상과 세속적인 야망, 예수님이 이루실 나라에 대한 오해를 통해 자신이 위대해지는 것을 꿈꿨습니다. 그로 인해 제자들과 끊임없는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열 제자들도 이 말을 듣고 분노했는데, 그들도 똑같이 영광의 자리를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의 끓어오르는 열정이 때로는 세속적인 야망에 휩쓸려 위험한 불이 될 수도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사도행전> 12장을 통해 그의 꺼지지 않는 열정이 순교의 우렛소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14년 뒤, 그는 열두 제자 가운데 가장 먼저 순교자가 됩니다. 우렛소리로 쓰임 받은 첫 번째 순교자 “그 무렵 헤롯왕이 교회를 박해하려고 교회에 속한 몇몇 사람들을 체포했습니다. 헤롯은 먼저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습니다. 이 일을 유대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을 본 헤롯은 이어 베드로도 잡아들였습니다. 이때는 무교절 기간이었습니다”(행 12:1~3). 여기서 헤롯왕은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입니다. 분봉왕과 같은 지역을 통치하는 왕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 구체적으로는 유대 지도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사도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려고 몇몇 사람을 체포했는데, 가장 먼저 희생시킬 사람을 골랐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증오하는 대상을 먼저 제거하려 했던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을 먼저 제거해야 교회가 두려워할 것이라 판단했을 것입니다. 헤롯 아그립바가 보기에 반교회적 세력인 유대 지도자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고 위험한 인물이라고 여겼던 사람은 베드로가 아닌 야고보였습니다. 베드로는 두 번째로 잡혀갑니다. 이것을 보면 야고보가 불같은 열정으로 때로는 위험한 언행을 보이기도 했지만, 예수님이 3년의 공생애를 통해 그를 변화시켜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차례 그에게 특별한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변화산에 오르실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동행하게 하심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는 순간도 함께 목격하도록 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예수님이 고통 속에 기도하시는 모습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 체험들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 야고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사도, 반교회적 세력이 가장 먼저 제거하고자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후 옥에 갇혔다가 기적적으로 풀려났지만, 야고보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이 야고보는 미워하셔서 빨리 죽게 하시고, 베드로는 더 사랑하셔서 감옥에서 풀어주시고 초대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되게 하신 게 아닙니다. 야고보는 짧은 순간 사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으신 죽음의 세례를 함께 경험한 첫 번째 제자가 되었습니다. 한때 세속적인 욕망으로 예수님 우편에 앉기를 원했지만, 첫 번째 순교자로서 예수님의 우편에 앉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야고보의 불같은 열정을 그저 지적하고 판단하고 정죄해서 버리지 않으시고, 세상을 깨우는 우렛소리가 되도록 변화시키셨습니다. 여러분, 우레는 짧게 울립니다. 그러나 세상을 진동시키며 사람들을 깨웁니다. 야고보의 사역은 다른 사도들에 비해 매우 짧았습니다. 우레처럼 짧게 울리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강렬한 우렛소리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깨우고, 안일했던 교회를 깨우고, 복음의 야성을 깨우는 우렛소리가 되었습니다. 권력을 탐하던 야망은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과 복음 증거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는 거룩한 우레만 남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걸으면 도리어 세상을 깨우는 우렛소리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야고보와 비슷하게 통제되지 않았던 열정이 세상을 깨우는 우렛소리가 된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성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젊은 시절 그는 지적 교만과 정욕에 휩쓸려 방황했습니다. 에너지가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그 열정이 하나님이 아닌 쾌락과 궤변을 따를 때 그는 마니교와 성적 타락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예수님 제자의 삶을 살기 시작했을 때, 그 열정은 세상을 깨우고 교회를 깨우는 우렛소리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어거스틴이 남긴 <고백록>을 비롯한 여러 문서가 없었더라면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두운 중세 시대가 아닌 짧은 시대를 살았던 어거스틴의 우레와 같은 생애가 종교개혁의 원동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의 변화를 통해 우리는 세 가지 방향을 점검해야 합니다. 첫째, 내 안에 끓어오르는 열정의 동기를 끊임없이 점검해야 합니다. 나의 이름을 위한 열정인지,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열정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둘째, 영광의 자리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예수님의 고통과 십자가에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셋째, 내 힘과 능력으로 성격을 고치려 하지 말고, 성령의 임재와 불을 구해야 합니다. 야고보의 파괴적일 수 있었던 불같은 열정을 우레의 아들다운 순교의 불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입니다. 야고보가 변화될 수 있다면 우리도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시몬이 베드로라는 이름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된 것처럼, 야고보가 우레의 아들로 쓰임 받을 수 있었다면, 우리도 현재의 모습에 낙심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변화된 미래의 모습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6-01-31  제15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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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s] "예수님의 제자 된 목회자” 지난 1월 26~28일 열린 '2026 목회사관학교'. 2026 목회사관학교 온누리 어워즈에서 수상한 30년 이상 근속 목회자들(왼쪽부터 황종연, 도육환, (이재훈 위임목사), 박종길, 강부호, 이기훈 목사). "예수님의 제자 된 목회자” 1월 26~28일‘2026 목회사관학교’개최 국내외 온누리교회 목회자 360여 명 참석 2026 온누리교회 목회사관학교가 ‘나를 따르라’ 를 주제로 1월 26일(월)부터 28일(수)까지 오크밸리 그랜드볼룸에서 열렸다. 국내외 온누리교회 목회자(전임, 파트), 협력 교회, 온누리교회 출신 담임목회자, 선교사 등 총 360여 명이 참석했다. 2026 목회사관학교에서는 공동체성경읽기, 주제 강의, 소그룹 나눔,특강, 기도회, 패널토의 등의 프로그램이 이어졌다. 첫날 주제 강의는 이재훈 위임목사가 ‘ 공동체성경읽기’ 를 주제로 했다. 이 위임목사는 “아무리 탁월하고 감동적인 설교도 하나님 말씀 그 자체의 권위보다 높을 수 없다”면서 “말씀 자체보다 설교에 익숙해진 현실을 돌아보며 설교 중심 예배에 대한 건강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예배 안에서 ‘ 공동체성경읽기’ 를 시작함으로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을 더욱 사모하게 하고, 그 말씀이 성도들의 삶을 바꿔가도록 돕는 목회자들 되기를 바란다”고 권면했다. 목회사관학교 첫날 오후에는 마크최 목사 ‘ 나의 목회 이야기’ , 조호영 목사 ‘ 나의 사역 이야기’ , 목회자 특순, 박종길 목사 ‘ 교역자의 경건 생활’ 특강, 소그룹 나눔 및 발표, 기도회, 온누리 어워즈 등이 이어졌다. 온누리 어워즈에서는 이한규 목사(맨인블랙상: 최다 장례사역 교역자), 전진 목사(강대상: 우수 설교교역자), 김용산 목사(온누리루키상: 우수 적응 교역자), 배윤주 전도사(전파상: 전임 같은 파트 교역자), 김재승 목사(기름부음상: 최장거리출퇴근 교역자)가 수상했다. 둘째 날에는 공동체성경읽기, 박신웅, 전현규 목사 ‘ 나의 목회 이야기’ , 이기훈, 이기원 목사 ‘ 나의 사역 이야기’ , 신국원 교수 ‘ 기독교 세계관과 선교적 비전’ 주제 강의, 강부호 목사 ‘ 교역자의 기도 생활’ 특강, 소그룹 나눔 및 발표, 패널토의, 기도회, 온누리 어워즈 등이 이어졌다. 이날 온누리 어워즈에서는 30년 이상 근속한 목회자들을 축하하고 격려했다. 박종길(서빙고온누리교회), 강부호(양재온누리교회), 도육환(영종온누리교회), 이기훈(사회선교본부), 황종연(Acts29 비전빌리지) 목사가 수상했다. 셋째 날에는 공동체성경읽기, 최성민 목사 ‘ 나의 사역 이야기’ , 신무환 장로 ‘ 평신도의 세상살이로 나타내는 복음적 세계관’ 주제 강의, 소그룹 나눔 및 발표, 폐회예배, 기도회 등을 했다. 폐회예배에서는 박종길 목사가 ‘ 다시 시작하라’ (수 17:14~18)를 주제로 설교했다. 박현식 목사(동경온누리교회)는 “국내외 온누리교회 모든 목회자가 한자리에 모여서 말씀 안에서 다시한번 세워지는 귀한 시간이었다”면서 “예수님을 따라 더 낮아지고, 더 섬기고, 더 순종하는 목회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우수진 전도사(서빙고 차세대)는 “공동체성경읽기에 대한 큰 도전을 받았다”면서 “말씀을 잘 낭독하고 삶에 깊이 새기며, 예수님을 따르는 교역자가 되고 싶다”고 소망했다. 목회사관학교는 2003년부터 시작된 온누리교회 목회자 수련회다. 국내외 온누리교회 목회자들이 모여 비전과 목회 철학, 사역 방향 등을 공유한다. / 홍하영, 박지혜 기자 예수제자학교(JDS) 참가자 모집 2월 말부터 9월 말까지 서빙고, 양재 주간, 저녁반 예수제자학교(JDS) 참가자를 모집한다. 2월 말부터 9월 말까지 서빙고 주간반, 저녁반, 양재 주간반, 저녁반을 운영한다. 예수제자학교는 성도들이 예수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을 발견하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 삶을 살도록 돕는 평신도 제자훈련이다. 서빙고 주간반은 2월 26일(목)부터 9월 22일(화)까지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전 10시 시온홀에서 시작된다. 서빙고 저녁반은 2월 28일(토)부터 9월 19일(토)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30분,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30분 시온홀에서 열린다. 양재 주간반은 2월 24일(화)부터 9월 22일(화)까지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전 10시 온유홀에서 진행된다. 양재 저녁반은 2월 20일(금)부터 9월 19일(토)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30분,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30분 온유홀에서 한다. 참가를 원하는 성도들은 서빙고와 양재온누리교회 로비에 마련되는 안내데스크나 아이스쿨(ischool.ionnuri.org)에서 신청하면 된다. 회비는 70만 원(전도여행비 별도). 문의: 02-3215-3534 / 홍하영 기자 사순절 창조질서회복 캠페인 2월 18일부터 4월 5일까지 2026 사순절 창조질서회복 캠페인을 한다. 사회선교본부 생명과 환경팀 주도로 2월 18일(재의 수요일)부터 4월 5일(부활주일)까지 진행한다. 올해 사순절 창조질서회복 캠페인 주제는 ‘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다. 부제는‘자기부인의제자도’이다. 올해 사순절 창조질서회복 캠페인 실천사항은 현대인의 삶을 위협하는 각종 중독과 무절제함을 끊어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1주 차 ‘ 디지털 디톡스: 내 손안의 우상을 내려놓다’ , 2주 차 ‘ 건강한 식습관: 내 몸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 , 3주 차‘ 생태 회복: 소유보다 나눔, 채움보다 비움’ , 4주 차 ‘ 바른 언어생활: 죽이고 살리는 혀의 권세’ , 5주차 ‘절제와 성실: 운이 아닌 은혜로 사는 삶’ , 6주차 ‘ 겸손과 순종: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 7주차 ‘나를 따르라: 부활의 증인으로’ 가 주제다. 문의: 02-3215-3434 / 홍하영 기자 2월부터 예배순서 일부 개편 15분 전 찬양과 기도, 예배 중반‘공동체성경읽기’ 2월부터 예배순서가 일부 개편된다. 15분 전부터 찬양과 기도로 예배를 준비한다. 예외적으로 예배 전 찬양과 기도가 진행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배 5분 전 진행하던 ‘ 공동체성경읽기’ 는 예배 중반에 한다. ‘ 온누리 공동체 성경읽기표’ 를 따라 모든 성도가 함께 성경 본문을 듣고 읽는다. 예배 시간은 변동 없다. 온누리성경읽기 진도표는 온누리교회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으면 된다. 주일예배 공동체성경읽기(신약∙시편),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개인성경읽기(구약∙신약), 토요일과 일요일 개인성경읽기(잠언, 전도, 시편∙구약)를 하면 1년 동안 성경일독을 할 수 있다. / 박지혜 기자 파워웨이브 연합수련회 ‘PASSION 2026’ 차세대 파워웨이브 연합수련회 ‘ PASSION 2026’(이하 패션집회) 2차 집회가 2월 1일(일)부터 3일(화)까지 대전 배재대학교에서 ‘ Unshakable’ (흔들리지 않는)을 주제로 열린다. 서빙고(1부), 양재(고등부), 남양주, 대전, 세종, 도곡, 양지, 인천, 평택, 서산온누리교회와 안산, 평택M센터 파워웨이브 학생들이 참가한다. 2차 패션집회에서는 개회예배, 저녁집회, 파워페스티벌, 주제 강의, 선택 강의, 폐회예배 등의 순서가 이어진다. 주제 강의는 김선재 목사(차세대사역본부장), 송바울 전도사(한터사역), 박위 형제(유튜브 위라클 채널 운영)가 한다. 선택 강의는 ‘ 하나님이 만드신 진짜 나를 찾다’ , ‘ 디자인, 하나님을 닮은 창조의 언어’ 등을 주제로 이어진다. 문의: 02-3215-3521 / 홍하영 기자

     2026-01-31  제15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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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s] 온누리교회 13번째 캠퍼스‘서산온누리교회’ 온누리교회 13번째 캠퍼스‘서산온누리교회’ 서산온누리교회 캠퍼스 전환 및 예배당 이전 감사예배 드려 이재훈 위임목사, 온누리교회 리더십 및 성도 등 190여 명 참석 서산온누리교회(충청남도 서산시 안견로 213 삼일빌딩 4층)가 온누리교회 13번째 캠퍼스로 전환됐다. 이를 축하하고 감사하는 ‘ 서산온누리교회 캠퍼스 전환 및 예배당 이전 감사예배’ 를 지난 1월 21일(수) 서산온누리교회 본당에서 드렸다. 이재훈 위임목사, 박종길 목사, 최영민 목사, 당회서기 민문기 장로 등 온누리교회 목회자 및 리더십, 서산온누리교회 성도 등 190여 명이 참석했다. 서산온누리교회 캠퍼스 전환 및 예배당 이전 감사예배는 박종길 목사(서빙고온누리교회) 인도, 당회서기 민문기 장로 기도, 이재훈 위임목사 설교, 이성민 담임목사(서산본향교회) 축사, 장경식 장로, 함일성 장로, 최영민 목사(서산온누리교회) 감사의 말씀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이날 이재훈 위임목사는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막 2:18~22)를 주제로 말씀을 전했다. 이 목사는 “우리가 끊임없이 새 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는 다음 세대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며 “서산온누리교회가 예수님이 나의 신랑 되신 기쁨을 늘 기억하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권면했다. 최영민 목사는 “1994년 기도 모임으로 시작된 서산온누리교회가 32년의 여정을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면서 “서산온누리교회는 앞으로도 지역사회를 겸손히 섬기고, 열방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더욱 매진하겠다”고 다짐했다. 서산온누리교회는 지난 2004년 기도처로 태동했다. 지역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지역주민들에게 칭찬받는 교회로 자리매김했다. 2025년부터 최영민 목사가 담당목사로 섬기고 있다. /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파워웨이브 연합수련회 ‘PASSION 2026’ 1차 1월 30일~2월 1일, 2차 2월 1~3일 배재대학교 차세대 파워웨이브 연합수련회 ‘ PASSION 2026’ (이하 패션집회)이 막 오른다. ‘Unshakable’ (흔들리지 않는)을 주제로 대전 배재대학교에서 1차와 2차로 나뉘어 진행된다. 주제 말씀은 <히브리서> 12장 28절이다. 차세대를 세상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의 뿌리를 내리는 거룩한 세대로 세우는 것이 목표다. 1월 30일(금)부터 2월 1일(일)까지 열리는 1차 집회에는 서빙고(2~4부), 양재(중등부), 강동, 부천, 수원, 영종, 하랑센터 파워웨이브를 비롯해 몽골 현지 학생들이 참가한다. 2차 집회는 2월 1일(일)부터 3일(화)까지 진행된다. 서빙고(1부), 양재(고등부), 남양주, 대전, 세종, 도곡, 양지, 인천, 평택, 서산온누리교회와 안산, 평택 M센터 파워웨이브 학생들이 참가한다. 2026 패션집회에서는 개회예배, 저녁집회, 파워페스티벌, 주제 강의, 선택 강의, 폐회예배 등의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김선재 목사(차세대사역본부장), 송바울 전도사(한터사역), 이훈형 대표이사(와우산레코드), 박위 형제(유튜브 위라클 채널 운영)가 강의한다. 청소년들의 실제적인 고민을 다루는 선택강의도 풍성하다. 강동민 센터장(온누리청소년센터) ‘ 하나님이 만드신 진짜 나를 찾다’ , 강하선 디자이너 ‘ 디자인, 하나님을 닮은 창조의 언어’ , 고대곤 교수 ‘ 하나님 왜 그러셨어요?’ , 김지연 약사 ‘ 중독 없는 차세대를 위한 실전 가이드’ , 오경숙 본부장(창조과학회) ‘ 하나님의 설계’ 래퍼 지푸 ‘ 8비트 랩으로 고백하는 Unshakable Faith’ 등을 주제로 강의한다. 문의: 02-3215-3521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2026 목회사관학교 1월 26~28일 오크밸리 그랜드볼룸 2026 목회사관학교가 ‘ 나를 따르라’ 를 주제로 1월 26일(월)부터 28일(수)까지 오크밸리 그랜드볼룸에서 열린다. 온누리교회 전임 및 파트 목회자, 해외 비전교회, 협력 교회, 온누리교회 출신 담임 목회자, 선교사 등 총 362명이 참석한다. 이번 목회사관학교에서는 공동체성경읽기, 주제 강의, 소그룹, 나눔, 특강, 기도회, 패널토의 등이 이어진다. 한편, 지난 1월 23일(금) 서빙고온누리교회 두란노홀에서 ‘ 2026 상반기 Acts29 비전 콘퍼런스’ 를 개최했다. 30개 해외 비전교회 목회자들과 협력 위원, 스태프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Acts29 비전 콘퍼런스에서는 찬양, 양웅 장로 대표기도, 축복의 시간, 오범규 장로 격려, 권역별 인사 및 협력위원 소개, 이재훈 위임목사 비전의 말씀, 권역별 모임 등의 순서가 이어졌다. / 홍하영 기자 2월부터 예배순서 개편 예배 중반에‘공동체성경읽기’ 2월부터 예배순서가 일부 개편된다. 예배 5분 전 진행하던 ‘ 공동체성경읽기’ 를 예배 중반에 한다. ‘ 온누리 공동체 성경읽기표’ 를 따라 모든 성도가 함께 성경 본문을 듣고 읽는 시간을 가진다. 예배 시간은 변동 없다. 온누리성경읽기 진도표는 온누리교회 홈페이지(www.onnuri.org, 교인지원센터, 자료실)에서 다운받으면 된다. 주일예배 공동체성경읽기(신약·시편),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개인성경읽기(구약·신약), 토요일과 일요일 개인성경읽기(잠언, 전도, 시편·구약)를 하면 1년 동안 성경일독을 할 수 있다. 예배 시작 15분 전부터는 찬양과 기도로 예배를 준비한다. 예외적으로 예배 전 찬양과 기도가 진행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 박지혜 기자

     2026-01-24  제15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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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주호의 홀리바디(Holy Body)] 교회를 다녀도 삶이 변하지 않는 이유 [정주호의 홀리바디(Holy Body)] 교회를 다녀도 삶이 변하지 않는 이유 교회를 다녀도 삶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학교에 다닌다고 성적이 저절로 오르지 않고, 직장에 출퇴근만 한다고 해서 저절로 업무 성과가 나거나 연봉이 오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수동적이고 맹목적인 삶은 학교, 직장, 교회에서 나를 변화 시킬 수 없다. 학교에서 무언가 하나라도 집중해서 배우려고 하고, 직장에서 시키지 않은 일도 하려고 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것처럼, 교회에서도 설교를 멍하니 듣고 나와서는 내적, 심적, 영적 변화가 생길 리가 만무하다. 남으로부터가 아닌 나로부터 출발하는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오랫동안 주일마다 개근하고도 믿음의 개근상 하나 받지 못할 수 있는 분들은 ‘믿음으로 거듭난 크리스천’이라고 하기보다는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이라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다. <야고보서> 1장 22~24절에서도 듣기만 하고 삶이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한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나 역시 불신자에서 교회를 들락날락하던 교인으로, 결국에는 하나님을 믿기까지 상당히 오랜 세월이 있었다. 내가 경험한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 방법 하나는 바로 ‘Why’였다. 스스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하나님은 있는가? 하나님이 있다면 왜 나를 태어나게 하셨는가? 그럼 왜 나는 한국인으로 태어났나? 왜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나? 왜 나는 우리 부모님 가정에서 태어났나? 왜 나는 남들과 다른 성장 배경을 가졌나? 왜 나는 지금 이 일을 하는가? 왜 나는 이런 성격, 인격, 성향을 가졌나? 왜 나는 어떤 일에 기뻐하고, 어떤 일에 슬퍼하는가? 왜 나는 이런 가치관을 가졌는가? 왜 나는 살아가야 하는가? 왜 나는 결국 인생을 다하고 죽는가? 왜 나는 남이 아닌 나인가? 왜 나는 내가 아는 다른 인생의 모습과 다른가? 왜 나는 신앙을 가져야만 하는가? 왜 나는 나인가? 수많은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인문 서적을 읽으며 답을 구하려고 했다. 또 세미나를 찾아가 훌륭한 사람들을 만나 조언을 구하기 위해 인생의 시간을 소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생의 질문이 아무리 많아도 답은 하나라는 진리를 발견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면 살아가는 동안 생기는 수없이 많은 질문, 즉 삶을 헤쳐가는 동안에 생기는 수많은 걱정과 근심과 시련, 고난과 역경, 고민을 단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 복잡했던 모든 것이 일순간 마음에서 정리되고 인생이 간단해진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면 인생의 모든 문제가 온전히 나의 숙제로 남아 매일 밤 잠을 못 이루게 하는 근심과 걱정이 된다. 필자는 우리가 Why를 날마다 생각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Why에 대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만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늘 하루를 살아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다. 밤에 잠을 청할 때는 하나님과 연관 있는 의미 있고 값진 하루의 인생을 감사할 수 있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시 42:8). 이 말씀처럼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곧 하나님이 새 생명을 주시는 것이고, 밤에 잠드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는 작은 죽음의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날마다 태어나고, 또 날마다 죽음을 지나는 셈이다. 은혜를 매일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오늘 하루 내가 한 말과 행동, 그리고 마음이 하나님 뜻에 합했는지 돌아보게 된다. 오늘 밤 잠든 뒤 내일 아침 눈을 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품에 안길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항상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는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 말씀을 되새겨보자.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최고의 인생은 바로 오늘이다. 최고의 순간은 바로 지금임을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오늘이 가장 좋은 날임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신나게 하루를 기대하며 살기를 건강전도사 정주호가 응원한다. / 정주호 대표(중종로공동체, 스타트레인 대표, 재활과학박사)

     2026-01-24  제15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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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Issue)바로보기!]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 127:1). [이슈(Issue)바로보기!]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 127:1). 1963년, 첫아이를 유산으로 잃은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 부부의 네 번째 아기 패트릭(Patric)이 임신 36주에 출생체중 2.1kg으로 오티스(Otis) 미 공군 병원에서 태어났다. 패트릭은 출생 즉시 하버드대학 부속 보스톤 아동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지만, 출생 39시간 만에 사망했다. 당시에는 신생아 전문 소아과 의사가 없는 시절이었다. 그래서 소아심장과에서 호흡부전에 빠진 패트릭을 치료하기 위해 성인 이산화탄소 중독을 치료하는 대형 고압산소탱크에 넣고 치료를 시작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어른이 들어가도 충분할 만큼 거대한 산소탱크 창 너머로 겨우 2kg 남짓한 갸날픈 패트릭이 죽어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케네디 대통령은 신생아와 미숙아 진료 연구를 위해 2억 5천만 달러를 지원하는 법을 승인한다. 거액의 연구비 지원으로 ‘신생아학(Neonatology, Newborn Medicine)’이라는 새로운 소아 진료 분야가 신설되었다. 연구가 계속됨에 따라 세계적으로 매년 수십만 명의 신생아와 미숙아들이 목숨을 구하게 됐다. 저출산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2000년까지 60만 명 수준을 유지하던 신생아 수는 2020년을 기점으로 20만 명으로 급격하게 감소했다. 출산율은 가임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거로 예상하는 아이의 수를 의미하는데, 현재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약 0.7명 수준이다. 이는 사상 최저 기록이자 세계적으로도 가장 낮은 수준에 해당한다. 부부 두 사람이 평생 자녀를 한 명도 채 안 되는 0.7명을 낳는 구조가 지속하면서 한국은 지구상에서 소멸할 1순위 국가가 되어 버렸다. 정부는 2006년 이후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80조 원의 예산을 투입해 왔다. 결혼할 여건을 만들려고 신혼부부에게 주택을 우선 공급하고, 육아휴직을 장려하며, 불임여성의 임신을 의료보험에서 돕고 있지만, 출산율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출산율을 올리는 여러 지원 방법 중에 이미 태어난 미숙아를 살리는 일 역시 중요하다. 케네디 대통령의 미숙아 아들 패트릭 역시 지금 태어났다면 99% 이상 생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요사이 미숙아를 ‘이른둥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는 조선 시대 재상 한명회가 있으며, 세계적으로 보면 천재로 불리는 이른둥이들이 많다. 역사적 인물로는 아이작 뉴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찰스 다윈, 마크 트웨인, 윈스턴 처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이 있다. 연예인은 시드니 포이티어와 스티비 원더 등이 있다. 인류를 위해 지대한 공헌을 한 유명한 과학자, 정치가, 연예인들이 이른둥이로 태어났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만약 이들이 생명을 얻지 못했다면 인류에게 커다란 손실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해가 갈수록 미숙아 분만이 증가하고 있다. 1990년대에는 미숙아 출생 빈도가 신생아 100명당 2명이었는데,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6명까지 증가했다. 앞으로는 신생아 100명 중 10명이 미숙아로 태어날 거로 예상된다. 우리나라에서 미숙아 츨산이 많아지는 원인은 고령 산모의 출산 증가와 함께 불임여성의 배란촉진제 사용과 인공수정 등의 영향으로 쌍둥이 출산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른둥이를 신생아집중치료실 인큐베이터에서 치료하다 보면 자괴감이 들 때가 많다. 과거에는 주치의인 내 말 한마디 한마디를 따라 부모가 치료를 계속하겠다는 결정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치료를 중단한 채 퇴원해 결국 사망에 이르기도 했다. ‘내가 무엇이기에, 도대체 내가 무엇이기에 내 말 한마디에 미숙아의 치료가 계속되기도 하고, 때로는 부모가 치료를 포기하게 되는가? 내 말 때문에 한 생명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가 있는 것인가?’라는 깊은 고뇌에 빠지게 된다. 현대 의학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만, 치료 결과는 아기마다 다르다. 같은 치료를 했음에도 어떤 아기는 살고, 어떤 아기는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생존한 아기들 가운데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아기가 있는가 하면, 일부 장기에 이른둥이로 태어난 흔적이 남아 장애를 겪는 경우도 있다. 장애의 정도 역시 심각할 때가 있고, 비교적 가벼운 어려움에 그치기도 한다. 태어나고 몇 시간도 세상에 머물지 못할 아기를 하나님은 왜 태어나게 하셨을까? 생명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신생아 진료 전문 소아과 의사로서의 무력함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이것이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 127:1). 인큐베이터에서 치료받는 미숙아에게는 인공호흡기 치료를 위한 기관지 삽관, 수액 공급과 혈액 검사를 위한 배꼽동맥 줄 삽입 그리고 심장 박동 측정을 위한 심전도와 체내 산소 농도를 파악하기 위한 모니터 등 수많은 연결 줄이 작디작은 몸을 감싸고 있다. 심장 박동과 혈압, 산소포화도를 측정하는 감시 장치에서는 쉬지 않고 경고음이 울린다. 심지어 수유용 수액관이 막히기만 해도 수액 펌프에서 경고음이 울린다. 온종일 이른둥이의 몸에 부착된 수많은 감시 장치들이 쉬지 않고 경보음을 울려댄다. 고뇌와 의문에 싸인 나에게 위로가 되었고, 의지가 되었던 성경 말씀이 바로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파수꾼의 경성함(깨어있음)이 허사로다’였다. 실로 현대 의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수많은 파수꾼이 24시간 내내 깨어 아기 상태를 감시하고 있지만, 이른둥이 생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다시금 깨닫는다. / 이철 장로 (OCC 공동체, 하나로의료재단 명예 원장, 전 연세의료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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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일강단

    [주일강단] 안드레: 연결하는 제자도  안드레: 연결하는 제자도 <요한복음> 1:35~42 /이재훈 위임목사 예수님이 열두제자를 세우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그 많은 무리에서 소수의 제자들을 택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는데, ‘12’라는 숫자에 중요한 의미를 두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가 12명만 있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12명을 따로 뽑아(이들을 사도라 부르시고) 자기와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내보내셔서 전도도 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귀신을 쫓는 권세도 주셨습니다”(막 3:14~1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새 세상에서 인자가 자기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게 되면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 19:28). ‘12’라는 숫자를 신약에서 반복하는 것은 12명만 위대하다 뜻이 결코 아닙니다. 12라는 숫자는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새 예루살렘과 새 이스라엘의 완성이 12라는 숫자가 가져다주는 메시지였습니다. 12사도의 이름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공통적으로 시몬 베드로부터 시작해서 가룟 유다의 이름으로 끝납니다. 영향력 순서대로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간에 있는 명단은 약간씩 상이합니다. “예수께서 세우신 12사람들은 베드로라 이름 지어 준 시몬, ‘우레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너게’라 이름 지어 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동생 요한,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열심당원 시몬과 예수를 배반한 가룟 유다였습니다”(막 3:16~19).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약간 상이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름이 여러 개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서는 이 이름으로, 다른 복음서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나오는 제자가 두세 명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을 보면 베드로, 야고보, 요한가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 기적에도 있었고, 일종의 소그룹 리더 역할을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격과 성품으로 섬김 안드레는 네 번째로 등장합니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는 두 번째 나옵니다. 마태와 누가는 안드레가 베드로의 동생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두 번째로 올려놓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형제입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형제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벳새다라는 어촌 출신입니다. 이들이 후에 가버나움으로 옮겼는데, 그곳도 어촌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가 가버나움에서 야고보와 요한을 만났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두 형제는 모두 어부였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첫 번째 그룹이자 핵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서 여러 사건에 등장하는 핵심 역할을 했지만, 안드레는 그들만큼 자주 등장하지 않습니다. 서신을 쓰지도 않았고, 초대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리더로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 때 베드로와 야고보처럼 나서서 발언하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참된 제자의 모습이 분명 있습니다. 첫째, 위치가 아니라 인격과 성품으로 섬기는 모습입니다. 안드레는 12제자 중에서 가장 먼저 예수님을 따른 제자였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안드레를 ‘프로토클레토스’라고 불렀는데, ‘프로토’는 제일 먼저라는 뜻이고, ‘클레토스’는 부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름 자체가 ‘제일 먼저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어떠한 알력이나 다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에서 가장 먼저 부름을 받았고,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소개해 줬는데도 자신의 위치를 주장하거나 내세우거나, 요구하는 모습이 전혀 없었습니다. 만일 가장 먼저 부름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위치를 주장하기 시작하면 그 공동체는 경직되고 분열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은사와 섬김과 성품에 따라 그 역할이 주어지는 게 중요합니다. 단지 얼마나 오래 출석했는지가 어떤 위치와 역할을 결정하기 시작하면 교회 공동체는 영적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바람직한 것은 이 둘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안드레에게는 자신이 주목받지 않아도 늘 조용하고 겸손히 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여러 명단에 보면 언제나 ‘시몬 베드로의 형제다’라고 언급됩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예수님께 더 인정받고자 노력하지 않고, 중심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베드로나 야고보, 요한이 가장 중심에 있었고, 베드로는 늘 나서기를 좋아하는 모습이 분명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서로 높은 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안드레는 다른 제자들과 갈등의 중심에 서지 않았습니다. 천성적인 성품일 수도 있겠지만, 안드레가 세례 요한을 따르던 제자였다는 면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철저한 금욕 생활을 했고, 인내와 절제가 요구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로 먼저 생활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마음으로, 남보다 두드러지지 않아도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며 조용히 섬기는 영성이 훈련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을 따르지 않고 말씀을 따르는 둘째, 안드레를 통해 배우는 제자도는 사람을 따르지 않고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안드레가 세례 요한을 따르다가 이제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 요한은 자기 두 제자와 함께 다시 그곳에 서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그 말을 듣고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를 따라갔습니다”(35~37절).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였습니다”(40절). 요한이 <요한복음>을 썼습니다. 그는 늘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제자는 대개 요한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가장 먼저 따랐던 제자가 자신이기에 그대로 쓴 것입니다. 안드레와 요한이 세례 요한을 따르다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26절을 보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이 증언했던 그분이 지금 세례를 주고 있어서 다 그분께로 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경쟁자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는 세례를 주는 일을 주로 했기 때문에 이름이 세례 요한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례를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불평하고 있습니다. 질투와 경계의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하늘에서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내가 전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보다 앞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증언할 사람들이 바로 너희들이다. 신랑을 얻는 자는 신부다. 신랑의 친구는 그 신랑의 음성을 들으면 그 음성으로 인해 매우 기뻐하는 법인데 나는 그 기쁨으로 충만하다. 그분은 흥해야겠고 나는 쇠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다가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을 보니 기쁘다는 것입니다. 나는 신랑의 친구일 뿐이고, 그분이 신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따르던 이들이 예수님께 가는 것을 경계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기뻐했던 세례 요한의 영성이 올바른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증언을 듣고 곧바로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사람이 안드레와 요한입니다. 안드레와 요한은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 움직인 안드레와 요한이 올바른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게 오면서 자기 부모 아내와 자식과 형제 혹은 자매와 자기 생명일지라도 나보다 더 사랑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6~27). 안드레에게는 사람이 아닌 말씀을 따르는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걸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따랐기 때문에 안드레를 예수님이 제자로 초청하신 것입니다. 연결하는 다리 ‘안드레’ 셋째, 가로막는 벽이 되지 않고 연결하는 다리가 되는 모습입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자신의 형 시몬을 예수님께 연결합니다. “안드레는 가장 먼저 자기 형 시몬을 찾아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메시아는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41절). 자신과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시작해서 예수님께 인도하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형 시몬이 고분고분 따라올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담대하고 단호하게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메시아를 만났습니다”라고 자신이 체험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안드레는 최초의 전도자 모습을 보입니다. 전도자는 메시아를 만난 직후부터 가능합니다. 좋은 것을 발견하고 체험한 사람은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드레는 메시아를 만났기 때문에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진정 만났다면,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았다면 모든 성도가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안드레는 오병이어 기적의 통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가르치신 후에 굶주린 수천 명의 사람들을 보시고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에서 떡을 사서 이들을 먹이겠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빌립이 대답했습니다. “조금씩만 주어도 200데나리온으로도 모자랍니다.” 그때 안드레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소년을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제자들 중 하나이며 시몬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가 말했습니다. ‘여기 한 소년이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게 얼마나 소용이 있겠습니까?’”(요 6:8~9). 빌립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안드레는 적은 가능성을 가지고 그 소년과 예수님을 연결했습니다. 안드레가 그 많은 사람 중에서 한 소년이 도시락 가지고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아마도 이 소년은 안드레와 밀접한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 소년만 도시락을 쌌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안드레는 연결하는 제자였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안드레는 한 그리스인, 헬라 이방인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통로가 됩니다. 한 그리스인이 빌립을 찾아와서 예수님 뵙기를 청합니다. “명절에 예배드리기 올라온 사람들 중에 그리스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벳새다 출신 빌립에게 와서 간청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예수를 뵙고 싶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이어 안드레와 빌립이 함께 예수께 말했습니다”(요 12:20~22). 빌립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부탁했으면 거절당할 가능성이 많다고 본 것입니다. 그 사람은 왜 빌립에게 갔을까요? ‘빌립’은 이방 이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제자 중에서 가장 그리스인과 통할 수 있는 사람을 택한 것입니다. 빌립은 예수님께 가장 연결이 잘 될 사람으로 안드레를 지목했습니다. 이방인들에게까지 마음이 열려 있고, 편견 없이 한 영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성품이 안드레에게 있다는 걸 알고 데려간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볼 때 안드레는 최초의 이방인 선교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안드레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섬기지만, 한 영혼 한 영혼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안드레에 대해 언급된 것은 이게 전부입니다. 그렇지만 역사적인 전승과 설화에는 안드레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안드레는 러시아에서 유명한 선교사였고, 그리스에서는 순교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드레는 신실한 제자로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께로 연결하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벽에 부딪히는 것 같은 느낌이 있고, 어떤 사람을 만나면 또 다른 영역으로 들어가는 다리가 되어줍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로 사람들을 연결하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겸손과 인내, 사랑과 자신을 내어 드리는 믿음으로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고 연결하는 제자가 되십시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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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누리교회 13번째 캠퍼스 ‘서산온누리교회’  온누리교회 13번째 캠퍼스 ‘서산온누리교회’ 서산온누리교회 캠퍼스 전환 및 예배당 이전 감사예배 이재훈 위임목사, 온누리교회 리더십 및 성도 190여 명 참석 서산온누리교회(충청남도 서산시 안견로 213 삼일빌딩 4층)가 온누리교회 13번째 캠퍼스로 전환됐다. 이를 축하하고 감사하는 ‘서산온누리교회 캠퍼스 전환 및 예배당 이전 감사예배’를 지난 1월 21일(수) 서산온누리교회 본당에서 드렸다. 이재훈 위임목사, 박종길 목사, 최영민 목사, 당회서기 민문기 장로 등 온누리교회 목회자 및 리더십, 서산온누리교회 성도 등 190여 명이 참석했다. 서산온누리교회 캠퍼스 전환 및 예배당 이전 감사예배는 박종길 목사(서빙고온누리교회) 인도, 당회서기 민문기 장로 기도, 이재훈 위임목사 설교, 이성민 담임목사(서산본향교회) 축사, 장경식 장로, 함일성 장로, 최영민 목사(서산온누리교회) 감사의 말씀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이날 이재훈 위임목사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막 2:!8~22)를 주제로 말씀을 전했다. 이 목사는 “우리가 끊임없이 새 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는 다음 세대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며 “서산온누리교회가 예수님이 나의 신랑 되신 기쁨을 늘 기억하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권면했다. 최영민 목사는 “1994년 기도 모임으로 시작된 서산온누리교회가 32년의 여정을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면서 “서산온누리교회는 앞으로도 지역사회를 겸손히 섬기고, 열방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더욱 매진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성민 목사(서산본향교회)는“서산온누리교회가 온누리교회 13번째 캠퍼스 교회로 전환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고 믿는다”면서 “앞으로도 교제와 연합을 통해 서산을 대표하는 사도행전적 바로 그 교회로 세워지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서산온누리교회는 지난 2004년 기도처로 태동했다. 지역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지역주민들에게 칭찬받는 교회로 자리매김했다. 2025년부터 최영민 목사가 담당목사로 섬기고 있다. /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2026-01-24  제15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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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s]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차세대 파워웨이브 연합 수련회‘PASSION 2026’ 1차 1월 30일~2월 1일, 2차 2월 1~3일 대전 배재대학교 차세대 파워웨이브 연합수련회 ‘PASSION 2026’(이하 패션집회)이 막 오른다. 올해 패션집회는 대전 배재대학교(배재로 155-40)에서 1차와 2차로 나뉘어 진행된다. ‘PASSION 2026’ 주제는 ‘Unshakable(흔들리지 않는)’ 이다. <히브리서> 12장 28절을 주제 성구로 삼았다. 학업과 진로, 관계 등 수많은 변화와 불안 속에서 사는 청소년들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견고한 믿음의 세대로 세워지는 데 초점을 맞춘다. 1차 패션집회는 1월 30일(금)부터 2월 1일(일)까지 진행된다. 서빙고온누리교회 파워웨이브 2~4부, 양재 중등부, 강동, 부천, 수원, 영종 파워웨이브, 하랑센터, 몽골 현지 학생들이 참가한다. 2차 패션집회는 2월 1일(일)부터 2월 3일(화)까지 한다.서빙고 파워웨이브 1부, 양재 고등부, 남양주, 대전, 세종, 도곡, 양지, 인천, 평택, 서산, 안산M센터, 평택M센터 파워웨이브 학생이 참가한다. 이번 패션집회에서는 개회예배, 저녁집회, 파워페스티벌, 주제 강의,선택 강의, 폐회예배 등의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저녁집회에서는 김선재 목사(차세대사역본부장), 송바울전도사(한터사역), 박위 형제(유튜브 위라클 채널 운영)가 강의한다.선택강의도 다양하다. 강동민 센터장(온누리청소년센터) ‘ 하나님이만드신 진짜 나를 찾다’ , 강하선 디 자이너 ‘ 디자인, 하나님을 닮은 창조의 언어’ , 고대곤 교수 ‘ 하나님 왜그러셨어요?’ , 오경숙 본부장(창조과학회) ‘ 하나님의 설계’ , 래퍼 지푸 ‘ 8비트 랩으로 고백하는 Unshakable Faith’ 등을 주제로 강의한다. 김선재 목사(차세대사역본부장)는 “세상은 끊임없이 요동치지만, 우리가 속한 하나님 나라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면서 “이번 수련회를 통해 청소년들이 불안한 현실 속 에서도 영원히 변치 않는 복음의 반석 위에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를 바란다”고 권면했다. 문의: 02-3215-3521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나를 따르라! 1월 26~28일‘2026 온누리 목회사관학교’ 2026 온누리 목회사관학교가 1월 26일(월)부터 28일(수)까지 오크밸리 그랜드볼룸(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오크밸리1길 66)에서 열린다. ‘나를 따르라’ 를 주제로 진행되는 이번 목회사관학교에는 온누리교회 목회자(전임, 파트), 해외 비전교회, 협력 교회, 온누리교회 출신 담임 목회자, 선교사 등 목회자 358명이 참석한다. 2026 목회사관학교에서는 공동체성경읽기, 주제 강의, 소그룹 나눔, 특강, 기도회, 패널토의 등이 이어진다. 주제강의는 이재훈 위임목사 ‘공동체성경읽기’ , 신국원 교수 ‘ 기독교 세계관과 선교적 비전’ , 신무환 장로 ‘ 평신도의 세상살이로 나타내는 복음적 세계관’ 을 주제로 한다. 특강은 박종길 목사 ‘ 교역자의 경건생활’ , 강부호 목사 ‘ 교역자 의 기도생활’ 을 주제로 한다. 목회사관학교는 2003년부터 시작된 온누리교회 목회자를 위한 수련회다. 국내 온누리교회 목회자들과 해외비전교회, 협력 교회 등 국내외 온누리교회 목회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비전과 목회 철학, 사역 방향 등을 공유한다. / 홍하영 기자 2026 상반기 Acts29 비전 콘퍼런스 1월 23일 오전 10시 서빙고온누리교회 두란노홀 해외 비전교회 목회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 2026 상반기 Acts29 비전 콘퍼런스’ 를 1월 23일(금) 오전 10시 서빙고온누리교회 두란노홀에서 개최한다. 2026 Acts29 비전 콘퍼런스에서는 전체모임, 권역별 모임 등을 한다. 이번 콘퍼런스에는 30개 해외 비전교회 목회자와 협력위원, 스태프 등 50여 명이 참석해 온누리교회 의 영성과 목회 비전을 공유한다. 해외 목회 현장의 어려움과 경험 등을 함께 나누며 위로받고, 영적 재충전과 친목을 도모할 예정이다. / 홍하영 기자 서산온누리교회 캠퍼스 전환 및 이전감사예배 서산온누리교회가 온누리교회 13번째 캠퍼스로 전환된다. 이를 축하하고 감사하는 예배를 1월 21일(수) 오후 7시 30분 서산온누리교회 본당(충남 서산시 안견로 213)에서 드린다. 서산온누리교회는 지난 2004년 ‘ 사도행전적 교회’ 의 비전을 품고 기도처로 설립됐다. 복음 전파와 제자 양육에 힘쓰며 지역 사회를 섬기는 교회로 자리매김해 왔다. 2025년부터 최영민 목사가 담당목사로 섬기고 있다. / 박지혜 기자 2026 오직예수 신년새벽기도회 종료 2026 오직예수 신년새벽기도회가 은혜 가운데 종료됐다. 지난 1월 5일(월)부터 17일(토)까지 국내 온누리교회 모든 캠퍼스에서 ‘ 나를 따르라’ 를 주제로 진행됐다. 이재훈 위임목사와 캠퍼스 담당 목사들이 소주제별로 말씀을 선포했다. 윤서영 학생(꿈이자라는땅)은 “오직예수 신년새벽기도회에 참석해 보고 싶어서 이모와 함께 교회에 왔다”면서 “새 학기를 앞두고 새로운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고, 교회 생활도 더욱 성실히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말했다. 김선리 집사(서빙고온누리교회)는 “이번 오직예수 신년새벽기도회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 나를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면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 위해 기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계속 기도하겠다”고 고백했다. / 박지혜 기자

     2026-01-17  제1573호

  • 주일강단

    [주일강단] 베드로: 우선순위의 재편  [주일강단] 베드로: 우선순위의 재편 <누가복음> 5:1~11 /이재훈 위임목사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이 가장 먼저 행하신 일은 제자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의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로 알고, 올바로 믿게 하려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명의 제자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의도를 가지고 열두 명의 제자를 세우신 게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부르신 것은 장차 행하실 사역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는 일종의 예언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서 택하셨다는 것도 중요한 관점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를 움직이는 중심지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변에서 제자들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비범한 목적을 이루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 장차 변화될 모습을 바라보시며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르신 열두 제자들의 구성을 보면 놀라울 정도로 다양했습니다. 기질과 관심사도 달랐고, 사회적 직업도 달랐습니다. 핵심 네 사람은 어부였고, 같은 동네 벳새다 출신이었습니다. 어부와 전혀 상관없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시몬은 당시 세리 같은 사람들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폭력을 써서라도 로마 제국과 싸워야 하며, 처단해야 한다고 여겼던 ‘열심당원’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사람, 경멸받는 사람이었던 시몬과 마태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였다는 게 매우 충격적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출신 배경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극단적인 반대 입장에 섰던 두 사람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였다는 것은 모든 것을 녹여내는 복음을 능력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열두 제자들과 예수님의 관계 3단계 열두 제자들과 예수님의 관계가 3단계로 전개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예수님을 따르긴 했지만 간헐적으로, 사정이 허락될 때 따르는 무리입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든지, 예수님이 특별한 가르침을 주셨을 때만 따르던 군중으로서의 제자들입니다. 그들도 예수님을 분명 따랐습니다. 그러나 사정이 허락될 때, 간헐적으로만 따랐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자신의 직업까지 포기하고 예수님과 생활하면서 따릅니다. 모든 제자들이 이 단계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는 예수님과 생활까지 함께 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사도로 보내심을 받아서 또 다른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은 이 단계에 이르도록 제자들을 훈련하는데 최우선 순위를 두셨습니다. 열두 제자 명단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이 베드로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가장 오랜 시간 친밀한 관계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항상 지도력의 위치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벳새다 출신, 원래 이름은 시몬입니다. 시몬에게 예수님이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안드레와 함께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왔을 때 이름을 베드로로 바꿔 주셨습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게바는 바위, 반석이라는 뜻의 헬라어 ‘페트라’의 아람어식 발음입니다. 게바나 베드로, 페트라는 같은 이름입니다. 베드로는 매우 성급했고, 좌충우돌하고, 때로는 신뢰하기 어려운 약속을 남발하고, 자신을 과대평가하며, 호언장담하는 안정적이지 않은 성품이었습니다. 반석처럼 견고하고 묵직하게, 차분하게 정돈되기 보다는 항상 말이 앞서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름과 걸맞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장차 베드로가 매우 안정적인 사람으로 변화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앞서 말씀드린 1단계의 제자로 살았습니다. 2단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는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세계관이 찢어지는 순간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많은 무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게네사렛 호숫가에 모였습니다. 게네사렛은 갈릴리 호수입니다. 어떤 때는 바다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3절을 보면, 예수님이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가르치셨습니다. 의도적으로 시몬의 배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주신 이름대로 베드로와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첫 번째 단계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시몬의 배에서 말씀을 가르치신 예수님이 그물을 씻고 있는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를 상당히 당황하게 했습니다. 네 가지 이유로 따르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첫째, 그물을 씻고 있다는 것은 일과를 마쳤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미 밤새도록 그물을 내려 보았지만,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셋째,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밤에는 얕은 쪽, 아침에는 깊은 쪽으로 고기가 몰리는 법입니다. 더 어려운 시간대, 더 어려운 곳에서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입니다. 넷째, “그물을 내리라”는 말씀의 원어를 보면 복수로 쓰여 있습니다. 가진 그물을 다 내리라는 뜻입니다. 이 상황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베드로는 당연히 ‘아니요’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평범하지 않은 결단을 내립니다. 말씀대로 그물을 내리기로 결정합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가진 장점이자, 그가 수제자로 쓰임 받은 이유입니다. 그는 안정적이지 못하지만, 때로 과감한 결단을 하고, 평범하지 않은 결정을 내리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잠재력을 보셨을 것입니다. “시몬이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려 보겠습니다’”(5절). 자신의 경험과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행동을 해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자신의 경험과 상식, 피곤을 내려놓고, 경험하지 못한 세계 속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비상식적인 게 아니라 초상식적입니다. 자신의 경험과 상식에 묶여 사는 것을 뛰어넘어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 알지 못한 세계, 보지 못한 세계로 발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순종은 온전한 순종이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권세, 말씀의 권세, 능력 행하시는 권세 앞에서 감히 거역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주변에 모여 있던 무리 앞에서 예수님을 존중하는 마음도 고려되었을 것입니다. 그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베드로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현실주의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던 베드로의 세계관이 그물처럼 찢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는 실제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도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나의 경험에 갇혀진 세계관이 깨어지고,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를 인정하는 변화가 제자의 삶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결정적인 사건 “시몬 베드로가 이 광경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했습니다. ‘주여, 제게서 떠나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8절). 뜻밖의 고백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해서 많은 물고기를 잡았으면 기뻐하고 감사하고 놀라워하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일 텐데, 갑자기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이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 기적을 통해 두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단지 훌륭하신 선생님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님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둘째, 자신이 죄인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는 어부로서의 자존심을 가지고 그물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불신과 의심, 불만 등이 혼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경외심,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는 자각능력이 베드로에게 있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부적합한 사람인지를 깨닫는 겸손이 베드로의 또 다른 장점입니다. 우리에게도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놀라운 기적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작고, 연약하고, 더러운 자인지를 깨닫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이며 시몬의 동료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10절).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 1:17).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배를 뭍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예수를 따라갔습니다”(누 5:11). 첫 번째 단계의 제자에서 두 번째 단계의 제자로 넘어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단순한 순종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갈릴리 어부들은 예루살렘의 바리새인들보다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학식도 부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미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르심 앞에서 따지지 않고 즉시로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른 것입니다. 이들의 행동을 충동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고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인 됨의 고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고,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 깨닫는 분명한 인격적인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습니다. 고기를 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두 차례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첫 번째가 이 사건이고, 두 번째는 예수님 부활하신 이후 베드로가 다시 어부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질문하시고 그를 다시 부르신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원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 21:22). 베드로의 생애 전체가 “나를 따르라”는 두 번의 부르심 앞에 놓여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의 부르심과 <요한복음> 21장의 부르심 사이에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족하고 연약하고 많이 흔들리고 좌충우돌하던 베드로를 허용하셨습니다. 사단에게 넘어가 배신하고 좌충우돌했던 그를 이름에 합당하게 변화시키셨습니다. 끝까지 자신을 따르는 제자로 변화시키셨습니다. 그 목적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3단계의 제자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 제자의 궁극적인 목적은 또 다른 사람을 제자 삼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단계의 제자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시몬을 베드로로 부르시고, 흔들리고 실패하고 배신하고 도망치는 그를 또다시 부르셨습니다. 결국 베드로의 이름처럼, 믿음의 초석이 되게 하시고, 그의 신앙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반석 같은 지도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한번 부르신 제자는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다면 결코 내버려 두지 아니하십니다. 그 부르심 앞에 얼마나 빨리 순종하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 살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6-01-17  제1573호

  • 국내캠퍼스

    [News] "선교는 온누리교회의 심장입니다!" “선교는 온누리교회의 심장입니다!” 1월 10일과 11일 2차‘2026 선교헌금 작정’ 선교헌금작정서, QR코드, 온라인, 전화 참여 2차 ‘ 2026 선교헌금 작정’ 을 1월 10일(토)과 11일(일) 국내 온누리교회 모든 캠퍼스 예배에서 한다. 이날 온누리교회 모든 예배에서 나눠주는 ‘ 선교헌금작정서’ 를 작성해서 제출하거나 영상예배 QR코드, 온누리교회 유튜브 채널 더보기란, 온누리교회 홈페이지(onnuri.org), 전화로 참여할 수 있다. 선교헌금 작정을 희망하는 성도들은 ‘ 자동 이체(CMS)’ 나 ‘ 봉투’ 중에서 한 가지 방법을 선택하면 된다. 개인정보, 금액 등을 정확하게 작성해야 한다. 개인정보 수집 및 제공 동의도 반드시 해야 한다. 선교헌금 증액 및 해지는 전화(02-3215-3616)로 문의하면 된다. 자동 이체 방식으로 선교헌금을 봉헌하는 성도들은 자동으로 연장된다. 자동이체 날짜는 매월 25일이다. 봉투로 선교헌금을 봉헌하는 성도들은 ‘ 선교헌금작정서’ 를 다시 작성해서 제출해야 한다. 이찬양 선교사(잠비아)는 “고통스러운 고난을 견디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힘은 ‘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는 하나님의 약속과 온누리교회 성도님들의 사랑 덕분”이라며 “늘 기도와 선교헌금으로 변함없는 사랑을 채워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관련 기사 4면>. 한편 2026 선교사 간증집 <눈물이 기쁨 되어>를 출간했다. 전 세계에서 사역하는 온누리교회 파송 선교사 19유닛의 간증이 담겨있다. 1월 11일(일) 예배 이후 성도들에게 배포한다. 온누리교회 홈페이지에서 PDF 파일로도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문의: 02-3215-3616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2026 오직 예수 신년새벽기도회 17일까지 오전 5시 30분 각 캠퍼스 본당 2026 오직 예수 신년새벽기도회가 ‘ 나를 따르라’ 를 주제로 1월 17일(토)까지 오전 5시 30분 국내 온누리교회 모든 캠퍼스 본당에서 이어진다. 온누리교회 유튜브 채널과 CGN에서 실시간 중계한다. 2026 오직 예수 신년새벽기도회 2주 차에는 1월 12일(월) 정재욱 목사 ‘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마 7:7~11), 13일(화) 신동식 목사 ‘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 14일(수) 양재경 목사 ‘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6~69), 15일(목) 노규석 목사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20), 16일(금) 변대섭 목사 ‘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1~5), 17일(토) 이재훈 위임목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를 주제로 메시지를 전한다. 토요일에는 모든 세대가 함께 참여하는 연합예배를 드린다. 이정민 성도(서빙고온누리교회)는 “그동안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세상과 나 자신을 믿고따랐던 것을 회개하며 작은예수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있다”면서 “새해에는 예수님을 따르고 닮아가는 제자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 /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공동체성경읽기’시작 유튜브 채널, 2부 새벽기도회, 공동체성경읽기 모임 ‘공동체성경읽기’ 가 시작됐다. 공동체성경읽기는 세 가지 방법으로 참여할 수 있다. 첫째, 매일 자정 유튜브 ‘ 365 성경읽기’ 채널(www.youtube.com/@every365bible)에 업로드되는 ‘ 절기별 영상’(하루 15~17분 분량)을 시청하면 된다. 2월부터는 온누리교회 공동체성경읽기 앱을 통해 시청할 수 있다. 공동체가 함께 참여할 때는 공동체별 SNS 단체대화방을 개설하고, 공동체 총무나 순장, 정해진 사역자가 매일 자정에 업로드되는 영상 링크를 공유하면 된다. 성경 읽기 진도표는 온누리교회 홈페이지 하단(교인지원센터→자료실)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책갈피형 성경 읽기 진도표도 제공한다. 책갈피형 성경 읽기 진도표는 1월 한 달 동안 온누리교회 안내데스크 및 헌금함에 비치한다. 둘째, ‘ 서빙고온누리교회 2부 새벽기도회’에 참석한다.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6시 30분 선교관 비전홀에서 진행된다. 셋째, ‘ 공동체성경읽기 모임’ 에 참여한다. 구체적인 일정과 장소 등은 추후 공지한다. 문의: 02-3215-3239 / 박지혜 기자 차세대 패션집회 ‘Unshakable’ 1차 1월 30일~2월 1일, 2차 2월 1~3일 2026 차세대 파워웨이브 연합수련회 패션(PASSION, 이하 패션집회)이 막 오른다. 1차 1월 30일(금)부터 2월 1일(일), 2차 2월 1일(일)부터 3일(화)까지 배재대학교(대전광역시 서구 배재로 155-40)에서 ‘ Unshakable(흔들리지 않는)’ 을 주제로열린다. 2026 패션집회에서는 개회예배, 저녁집회, 파워페스티벌, 주제 강의, 폐회예배 등의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참가를 원하는 차세대들은 부서별로 제공된 참가 신청 링크에 접속해서 신청서를 작성하면된다. 김선재 목사(차세대본부장)는 “패션집회 ‘Unshakable’ 에 참가하는 모든 청소년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란다”고당부했다. / 홍하영 기자

     2026-01-10  제1572호

  • 주일강단

    [주일강단] 가서 제자 삼으라  가서 제자 삼으라 <마태복음> 28:16~20 /이재훈 위임목사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실 때마다 주신 말씀은 매우 간단하고 직선적이었습니다. “나를 따르라.” 3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도 매우 간단하고 직선적이었습니다. “가서 제자 삼으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두 가지 부르심을 받은 이들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결국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부르신 목적이 ‘가서 제자 삼는 제자’로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 명령이 기록된 것은 <마태복음서>가 기록된 목적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구원으로의 부르심이며,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이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로의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복되게 하신 것은 모든 민족의 복의 통로가 되게 하는 계획이었던 것처럼, 에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제자를 부르신 까닭은 모든 민족의 제자를 삼는 사역자로 부르는 것입니다. 갈릴리로 가야하는 두 가지 이유 예수님이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을 주신 곳이 갈릴리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열한 제자와 함께 갈릴리의 한 산에 오르셨을 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만난 곳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 번 만난 제자들은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어리둥절하고 당황하며 두려웠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라. 그곳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마 28:10). 그래서 열한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서 예수님이 일러주신 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예루살렘에 주로 계셨고, 제자들도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을 만나시고 승천하시는 게 더 간단하지 않았을까요?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는 적어도 120km 이상 떨어진 거리였기 때문입니다.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가서 다시 만나자고 말씀하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제자들을 만나고, 그곳에서 승천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우리가 만나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명백하게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전후 문맥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이유입니다. 첫째, 부르심을 받은 자리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갈릴리는 그들이 제자로 부름을 받은 지역입니다. 제자의 삶을 돌아보는 자리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이 부름을 받았던 곳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는지, 그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했는지 그 첫 순간을 기억하고, 그곳에서 주신 말씀들을 기억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앞으로 어디로 향해야 할지를 알기 원한다면 어디에서부터 시작됐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기 원한다면 우리가 누구의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되새겨야 합니다. 둘째, 갈릴리가 가진 선교적 의미 때문입니다. 당시 갈릴리는 유대의 변두리였습니다. 이방과의 접촉이 많고, 이방 민족의 침입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구약 말씀에 갈릴리를 어둠과 그늘이 가득한 곳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갈릴리를 표현할 때 언제나 ‘이방인의 갈릴리’라는 표현을 함께 썼습니다. 그만큼 변두리였고, 이방의 침략도 많았고, 이방인들이 섞여 사는 지역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철저한 유대 민족 중심의 도시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이 아닌 이방인의 도시라고 불리는 갈릴리에서 승천하시면서 이 명령을 주신 이유는 선교적 의미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소명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 지역에만 머물며 그들끼리 어떤 종교적 체계를 이루고,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며, 그들만의 예수님을 기억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이방으로 퍼져 나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 장소를 통해서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열한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경배 드렸습니다. 이제 제자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기에 그분께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때로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시기도 하고, 그들에게 귀한 가르침을 주시셨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을 경배하였다’는 표현은 여기서 처음 나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달을 때만 진정한 경배가 나오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가 드려지지 않는 까닭은 우리가 예배드리는 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예배공동체에서 진정한 선교가 일어납니다. 예배공동체와 선교공동체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참된 예배자요, 참된 선교공동체가 됩니다. 예배와 선교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선교의 목적은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가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배자들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 선교의 목적입니다. “제자 삼으라”는 명령, 선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뵙고 경배드렸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의심했습니다”(17절).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도, 그 명령을 받고도, 승천하시는 모습을 보고 있음에도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어떤 경우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의심이 여전히 있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명령을 주셨습니다. 베드로의 모습과 제자들이 도망하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예수님이 잘못 보신 게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배신했고 자살했고 열한 명만 남았습니다. 더군다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의심하고 있는 이들을 예수님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이 명령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이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속에 여전히 의심이 있고,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의구심이 있기에 ‘나는 이 명령에 해당되지 않는다’라고 변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열한 명 중에도 여전히 의심하고 있는 이들을 예수님이 부르시고, 그들을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의 모든 의심은 확신이 되고, 불안은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까? 이 명령을 주신 분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다가오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내게 주어졌다’”(18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을 이루심으로써 이 명령을 주실 수 있는 권세를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권세를 가지신 분이 우리를 이끌어 가고 계시고,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을 <마태복음>에서 가장 포괄적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체계적으로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그 명령은 “제자 삼으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19~20절). 한글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이 명령에 네 개의 동사가 나옵니다. ‘가라’, ‘제자 삼으라’, ‘세례를 주라’, ‘가르쳐 지키게 하라’. 그런데 원문으로 보면 명령형 동사는 딱 한 가지입니다. “제자 삼으라”입니다. 그것만 동사이고, 나머지는 분사형입니다. 분사형은 문법적으로 동사를 보완하기 위하여 보조하는 형태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갑니까? 제자 삼기 위해서입니다. 왜 세례를 줍니까? 제자 삼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세례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부활을 경험하는 새 생명의 체험이 세례입니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은 교사가 학생을, 부모가 자녀를 세심하게 가르쳐 주듯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온전히 가르침으로 인해서 제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문화권에도 가는 것이고,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함으로써 궁극적인 목적은 “제자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이루는 것입니다. 참된 선교는 제자 삼는 것입니다. 2024년 열렸던 4차 로잔대회 서울선언 72항에서 하나님 백성의 선교가 제자 삼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을 다시 강조했습니다. 제자 삼으라는 명령이 곧 선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우리가 이 부르심을 받을 때 놀라워해야 하는 세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 장차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이 명령을 동일하게 주셨습니다. 열한 명은 모든 제자를 대표하는 이들이기에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둘째, 그 대상이 모든 민족입니다. 셋째, 이 명령을 받은 제자의 숫자가 열한 명이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 거주하고 있던 소수의 열한 명에게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이 명령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다음날부터 잠을 못 이루었을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열한 명의 제자가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것이 가능할까요? 예수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또 하셔야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열한 명이 어떻게 모든 민족을 제자 삼습니까? 열한 명으로부터 출발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고, 그 열한 명을 통해 예수 믿고 제자 된 이들은 그 시대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만나는 한 사람을 통해서 놀랍게도 온 세상에 복음이 전해지고, 예수님의 제자가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갑니다. 문제는 이 명령을 얼마나 무겁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가입니다. 만일 교회가 이 명령을 가볍게 여기면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많은 교회가 다툼과 분열로 얼룩지고, 능력을 잃어버리고, 예배의 감동이 없고, 기도의 역사가 없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로 귀결됩니다. 이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 명령을 ‘선택’으로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열한 명으로 시작된 명령의 순종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 또 다른 사람을 제자 삼았습니다. 그들이 또 다른 사람을 제자로 삼은 것입니다. 그 시대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 삼으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에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할 뿐만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메말라 가는 영혼들을 총체적으로 섬겨야 합니다. 배고픈 자들의 빵이 되어 주기도 하고, 난민들의 울타리가 되어 주기도 하고, 생명의 위협에 처한 이들을 보호하고, 법적인 노예로 있는 이들을 자유케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20절b).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현재의 사실입니다. 언젠가 이루어질 약속이 아니라 이 명령에 순종하는 자와 함께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의 함께하심을 체험하지 못할까요? 예수님의 이 명령과 상관없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함께하신다는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여러 나라와 민족에 파송된 선교사들을 돕고 지원하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온누리교회 모든 성도가 이 명령을 무겁게 받아들이며 순종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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