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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다성경 스터디투어 참가자 간증] 이탈리아에서 외친 ‘할렐루야’ 열린다성경 스터디투어 참가자 간증 이탈리아에서 외친 ‘할렐루야’ “아는 만큼 보입니다!”라는 선포와 함께 기도, 종교개혁사 예습, SUM 연습, 복음 전도 책자와 말씀 카드, 직접 뜬 손뜨개 카드지갑 등을 열심히 준비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이루어진 10박 12일의 성지순례를 글로나마 다시 한번 되새긴다. 서빙고, 부천, 인천온누리교회에서 모인 40명이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이 상실된 곳에 복음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탈리아 땅을 밟았다.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로마에서부터 매일 새벽기도와 찬양, 류모세 목사님의 종교개혁사 강의가 이어졌다. ‘바울 참수터’로 알고 있는 세분수교회에서 사도 바울이 갇힌 감옥과 참수형장 등을 보면서 누군가의 눈물 맺힌 훌쩍임이 고요함을 깨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둘러서서 묵상과 예배드리는 시간을 가졌다.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 숨어 지냈던 지하 6~7층으로 이루어진 무덤 ‘카타콤베’로 향했다. 지하를 돌아보는데 숨이 막히는 어둠을 느끼며 그 시절을 상상으로나마 그리다 소스라치는 나를 발견했다.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파란 하늘 아래 심긴 사이프러스나무가 나를 얼마나 안도하게 하는지 믿음의 선지자들 앞에서 부끄러웠다. 이탈리아 남부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 시칠리아 팔레르모를 시작으로 몬레알레, 아그리젠토, 시라쿠사, 레기온, 나폴리, 폼페이, 오르비에토, 아씨시, 피사, 카놋사, 피렌체, 베니스, 밀라노 등 유적지와 박물관, 미술관과 성당을 방문했다. 종교적, 정치적으로 경건의 모양, 진리를 알고 믿고자 하는 이들의 처절한 몸부림,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유적을 지켜 반성과 발전을 이어가기 위한 이탈리아인들의 굳은 결의가 느껴졌다. 예술적 영혼을 몸 바친 예술인들의 삶을 보고, 듣고, 느끼는 시간이기도 했다. 중세에서 멈춘 듯한 도시 시라쿠사에서 시작해서 이탈리아 대표 유적지 광장이 있는 곳이면 항상 SUM과 복음 전도를 했다. 그때마다 우리가 먼저 감동했고, 우리를 호기심에 바라보던 이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졌다. 우리는 발목 골절로 깁스를 하고, 갈비뼈에 금이 가서 압박붕대로 동이고, 심한 디스크 통증과 무릎 관절염 등으로 힘들 수밖에 없는 지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일정 내내 예수님의 이름으로 돕는 배필들과 함께 이탈리아 어디에서든 기쁨이 넘치는 ‘할렐루야’를 외쳤다. 이탈리아 최고중심지에서 몸으로, 목소리로, 복음 전도지와 선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울려 퍼지게 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찬양을 바라보던 이들과 내 안에 그 기억과 감동이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 이진 집사(부천온누리교회) *‘열린다성경’ 독일(2025년 1월 24일~2월 4일) 문의: 010-4902-1022

     2024-04-20  제1488호

  • 칼럼

    [권사칼럼] 원더풀 라이프는 계속된다! 권사칼럼 원더풀 라이프는 계속된다! 김형석 교수(전 연세대 철학과)가 ‘원더풀 라이프’ 세미나의 첫 문을 열어주셨다. 더욱 뚜렷한 면모로 입술의 열매를 나눠주시며 인간의 존엄성으로 우리를 일깨워 주셨다. “인생은 고생이지만 사랑이 있는 고생이라면 멋있지 않은가?”라면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 나눠주셨다. 그 강의를 듣고 있는 늦은 밤, 기억의 창고에 걸어뒀던 나의 70대가 떠올랐다. 60대 중반부터 여러 육신의 아픔을 겪다가 70세를 바라보는 겨울에 팔이 골절됐다. 팔에 깁스해서 주저앉아 있을 때 하나님이 나에게 감사하라고 하셨다. “감사할 게 없는데 어떻게 감사해요?”라고 투덜거렸는데도 계속 감사하라는 마음을 주셨다. 하나님의 강권 가운데서 “어떻게 감사하지?”라고 묻다가 감사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에 한 번 한 사람에게 감사편지를 쓰기로 했다. 그렇게 3년 가까이 편지를 보내니까 편지 보낼 사람이 생각나지 않아서 “나는 나에게 감사하는가?”라고 물었다. 나에게 편지를 쓰려고 앉았는데 가시처럼 걸려있었던 어떤 기억이 툭 튀어나왔다. 그것을 정리하고나서야 무의식에 걸어두었던 올무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두란노서원 출판부에 사무엘 울만의 시 <청춘>으로 시작되는 ‘들어가는 말’을 보내 출판을 타진했다. 두란노서원에서는 저작권 문제에 걸린다며 첫걸음에 퇴자를 당했다. 나는 2001년 등단해서 한국문인협회에 등록된 시인이다. <내 뼈의 뼈>, <풀섶 풀잎사귀 귀로 앉아>, <몇 갈래 길에서 이미마을로>, <이슬은 영원하다> 4권의 시집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좋아도 남의 시를 쓸 수 없는 마당에 내 시로 교체하면 어떨까?’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수요예배에서 영화감독 김상철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마약에 중독된 상황이 너무 안타깝다는 그 마음이 공감되고, 깊은 울림을 주었다. 나도 그들을 돕는 사역에 동참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번째 스무 살이라며 특별한 오브제를 만들어 준 딸 덕분에 내 나이가 들통났다. ‘정말 80년을 살았구나’ 스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불만이 들끓고 있는 사회에 ‘감사’라는 화두를 던질 수 있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내 등을 떠밀 듯 책을 출판하게 하셨다. 이미 준비된 글로 말이다. <내가 나에게 쓰는 감사편지>라는 제목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표지를 고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한 천사를 보내 주셨다. 그 더분에 놀랍게 예쁜 책이 출간되었다. 모든 수익금은 베텔중독센터에 보내기로 했다. 그날 밤, 김형석 교수가 뇌는 나이를 먹지 않는다면서 100세 시대를 살아내시는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셨다. 하나님이 60대에 나에게 시(詩)를 선물로 주셨고, 70대에는 감사를 주셨다. 이제 80대에는 무엇을 더하여 주실까? 하나님 뵙는 그 날까지 원더풀 라이프는 계속될 것이다. 나의 85세를 꿈꾼다. 서점에서만 책을 샀던 시대가 지나고, 이제는 온라인으로 책을 사는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가 몰랐던 시대마저 하나님의 관점에서 일을 이루시고, 새롭게 다가오는 미래의 문을 어떻게 열어주실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 장갑생 권사(강촌공동체)

     2024-04-20  제1488호

  • 성인

    [맛있는 말씀해설]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맛있는 말씀해설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야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뜻 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은 결코 우리의 순종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의 희생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께 용서를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의 절대적인 용서를 받은 성도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다. <마태복음> 18장에는 1만 달란트를 주인에게 탕감받은 종의 비유가 등장한다. 그는 감당할 수 없는 빚을 탕감받고도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두고 빚을 끝까지 받아내려고 한다. 주인은 이 일을 듣고 노해서 1만 달란트 탕감한 것을 취소한다. 그리고 백 데나리온 빚진 종에게 했던 그대로 그 종을 감옥에 가두고 1만 달란트를 갚을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 비유를 들으며 1만 달란트 탕감받은 종의 어리석음을 비웃지만, 사실은 우리가 바로 그 종과 같은 사람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기가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기보다 그에게 복수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내가 힘이 없어서 못하는 복수를 하나님이 대신해 주셨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이미 받았다면 당연히 용서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머리로는 나에게 죄지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야 함을 알면서도 마음이 안된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습니다(롬 7:18)”라는 바울의 고백을 우리도 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주기도문 외에도 용서에 대해 같은 말씀을 하셨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저주한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것을 발견하고 말씀드릴 때 하신 말씀이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막 11:25).” 이 말씀도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다.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께 값없이 용서받은 우리는 우리에게 죄를 지은 다른 사람을 조건 없이 용서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시기 전에 ‘믿음’에 대한 말씀을 먼저 하셨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가 마르는 능력보다 더 큰 기적이 믿음을 통해 일어날 수 있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3). 예수님은 산이 뽑혀 바다로 던져지는 믿음을 말씀하신다. 이것을 누가 정말로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스스로 결심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됨을 간접적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산을 옮길 믿음과 마찬가지로 용서도 그렇다. 용서도 우리의 결심이나 논리로 되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 임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도 연약하고 강팍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여전히 예수님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우리가 그 문을 열어서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면, 믿음도 용서도 모두 내 안의 예수님을 통해 가능하게 된다.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치료해주시면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부어주신다.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용서를 강요하기 위해 주신 게 아니다. 주기도문은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함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 이은일 장로(성동광진공동체,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2024-04-20  제1488호

  • 칼럼

    [장애인주일을 보내며] 가장 낮고 연약한 자들의 천국 장애인주일을 보내며 가장 낮고 연약한 자들의 천국 장애인예배공동체 ‘사랑부’의 태동과 역할 온누리교회가 세워진 지 2년이 지난 1988년 봄이었다. 당시 유치부 교사로 섬기던 나영지 교사의 눈에 한 명의 남자아이가 보였다.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말도 없이 혼자 노는 아이를 보고 발달장애가 있음을 확신했다. 그 아이를 위한 별도의 공과를 만들고,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한 게 온누리교회 장애인예배공동체 ‘사랑부’의 첫 발걸음이었다. 함께 섬기고자 하는 교사들이 모이고, 발달장애인 아이들을 위한 예배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집안에만 있던 장애인 자녀들을 이끌고 교회에 오는 부모들이 하나둘씩 모였다. 1989년 봄에는 교역자가 세워지면서 정식으로 장애인 주일학교가 시작됐다. 장애인 주일학교는 교회 성장과 함께 점차 규모가 커졌다. 36년이 지난 지금은 서빙고(3개), 양재(2개), 강동, 부천, 인천온누리교회에 총 발달장애인 300명과 교사 200명이 모이고 있다. 성장과 부흥을 이루었다. 또한 발달장애인들로 구성된 사랑챔버(1999년 창단)와 온사랑합창단(2011년 창단)이 음악으로 장애인 인식개선과 공연 등 활발한 문화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한 사람의 관심과 헌신 그리고 기도 36년 전에는 발달장애인을 ‘정신지체’ 또는 ‘지적장애’로 불렀다. 그만큼 장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심했을 뿐 아니라 부모들이 그 자녀를 어떻게 키우고 양육해야 할지도 잘 몰랐다. 더구나 사랑하는 자녀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모들이 한동안 절망과 낙심에 빠져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자신의 잘못 때문에 자녀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자책하며, 우울증을 겪는 가정도 있었다. 발달장애인과 그 가정에 대해 요즘같이 사회적 돌봄 제도나 복지시스템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하나님은 나영지 교사 한 사람을 부르셔서 어느 장애아이를 관심 있게 보게 하셨고, 그 아이에 대한 긍휼한 마음을 품게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아이와 가정의 회복을 위한 기도와 헌신을 하게 하셨다. 이 모든 과정이 교회사역의 기본원리이고, 이상적인 선교 방법론임을 깨달았다. 이렇듯 사랑부는 장애로 인해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연약한 영혼들을 섬기고,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회복과 치유를 위해 아름다운 예배공동체를 이루어 왔다. 아직 사랑부가 없는 수원, 대전, 남양주, 평택, 양지, 영종온누리교회에도 발달장애인 한 아이를 찾는 하나님의 손길을 고대하며 사랑부 신설을 위해 기도하고, 준비하고 있다. 성경에 나타난 장애인의 의미와 그 역할 성경에 나타난 장애인의 의미와 역할이 있다. 첫째,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하시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께서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창 1:27).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참 좋았습니다”(창 1:31).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지적이고, 육체적인 기준이 아니다. 상대적이고, 평가되거나 비교될 수 없는 최고의 가치와 존엄성을 의미한다. 또한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았다”는 의미는 어떤 기준과 조건이 충족되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모든 창조물을 무조건 기뻐하신다는 의미다. 장애인이 부족하고 연약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은 존재다. 둘째, 장애인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선한 도구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의 죄도 그 부모의 죄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나타내시려는 것이다’”(요 9:2~3). 예수님 당시에도 ‘장애는 죄’라는 부정적인 인식과 사회적 편견이 있었다. 제자들도 장애를 죄의 결과로 보는 왜곡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은 장애가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 장애를 통해 하나님의 일, 구원과 회복을 이루는 선한 도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병든 자와 연약한 자를 치유하심으로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나타내는 증거이고, 선포다. 많은 부모가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죄책감과 절망에서 벗어나 한줄기 소망의 빛을 보았다고 고백한다. 믿지 않는 부모들이 사랑부에 장애인 자녀를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고, 열심히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이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느낀다. 셋째, 장애인은 세상의 지혜와 강한 것들에게 교훈과 책망을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지혜와 힘 있는 자들이 성공하고, 남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게 세상의 이치이며 원리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나에게 이익인가, 손해인가?’ 또는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를 기준 삼아 판단한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안에서 사람의 지혜와 강함, 계산은 한 낮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고, 이슬과 같다. 오히려 미련하고 약해 보이는 자들을 택하셔서 교만한 자들에게 교훈을 주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내면의 성찰과 겸손함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한다. 온누리교회의 보석 같은 존재인 발달장애인 청년들로 구성된 ‘사랑챔버’와 ‘온사랑합창단’의 연주를 볼 때마다 세상의 높고 세련된 전문가의 기교 보다 하늘의 낮고 순수한 연주가 더 큰 감동과 은혜가 되고, 우리의 오염된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 시켜주는 것도 그 때문이다. 넷째, 장애인은 하나님 나라의 찬양자이고, 건강한 교회의 성숙함을 나타내는 축복의 통로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눅 14:21). 예수님은 천국의 시민들을 묘사하면서 연약한 장애인들을 많이 언급하셨다. 천국 잔치에 많은 사람이 여러 이유로 초청을 거부하자 주인은 가난한 자들과 장애인들을 급히 오게 해서 잔치를 벌인다. 이는 장애인들의 마음이 겸손해서 천국에 들어오기에 적합하기 때문이고, 그들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세상에서는 장애인을 돌봐주거나 배려해야 할 긍휼의 대상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천국에서는 장애가 없는 찬양하는 자로서 예수님과 함께 영광스럽고 온전한 모습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아울러 장애인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건강한 교회의 성숙함을 나타내는 축복의 통로다. 그래서 세상에서 소외당하는 연약한 장애인을 섬기고, 품는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하는 건강한 교회라 할 수 있다. 연약한 장애인들을 통해서 교회공동체에 사랑, 섬김, 긍휼 등 선하고 아름다운 선순환이 계속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두 번째 계명인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김준홍 장로(장애인사역본부 담당) <온누리교회 장애인 예배> 서빙고 누리사랑부(성인) 주일 11시 콘서트홀 꿈사랑부 주일 9시 신관 202호 사랑부 주일 9시 콘서트홀 예수사랑부 주일 11시 30분 한동홀 양재 사랑부 주일 9시 비전홀B 예수사랑부 주일 11시 30분 비전홀B 강동 사랑부 주일 11시 30분 사랑홀 부천 사랑부 주일 11시 30분 꿈아이홀 인천 사랑부 주일 9시, 11시 30분 사랑홀

     2024-04-20  제1488호

  • 칼럼

    [초대 사랑부 교사의 고백] 그렇게 ‘사랑부’가 시작되었다! 초대 사랑부 교사의 고백 그렇게 ‘사랑부’가 시작되었다! 1987년 특수교육을 전공한 나는 자연스럽게 장애 아동과 구원, 교회와 예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 교회에 장애아동부서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에서 배운 바에 의하면, WHO(세계보건기구)가 전 세계 인구의 10%가 장애를 가지고 있고, 그로 인한 어려움이 있다고 발표했다. 당시 나는 ‘온누리교회에도 장애 자녀를 둔 가족이 많을 텐데 그들이 왜 교회에 없을까?’ 질문했다. 당시에는 가정에 장애 자녀가 있으면 가능한 숨기고 싶고, 숨겨야 하는 사회적 편견이 있었다. 몹시 마음이 아팠다. 그 무렵, 온누리교회에서 열린 데니스레인 목사의 <창세기> 강해설교 집회에서 ‘장애 아동을 위한 예배가 교회에 세워져야 한다’는 답을 얻었다. 데니스레인 목사가 설교 중에 “하나님은 이 세상에 사람을 만드시고, 그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장애가 있어도 하나님의 전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사람들과 만나서 교제하는 게 창조 목적임을 깨달았다. 당시 나는 유치부 교사로 섬기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명의 친구가 유치부 예배에 참석했다. 그 친구에게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예배 시간마다 돌보기 시작했다. 이 일이 교회에 알려지면서 장애 자녀들이 한 명, 두 명 예배에 참석했다. 그렇게 ‘사랑부’가 시작되었다. 당시 이항봉 전도사가 사랑부를 섬겼고, 사랑부에서는 ‘예수님, 저두요!’라는 제목의 공과를 만들었다. 예배뿐만 아니라 제주 한라원, 포항 한동대 등지로 가족수련회도 갔다. 한동안 사랑부 친구들과 교사들이 짝이 되어서 유치부에서 중등부까지 함께 예배드리고, 성경공부를 했다. 하지만 사랑부 친구들이 가진 여러 행동 특성으로 인해서 다른 부서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게 쉽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해서 학급을 달리하는데, 교회에서도 과연 나눠야 할까?’ 갈등하는 시간을 많이 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랑부 친구들이 다른 부서에서 예배드리는 것보다 다른 부서 친구들이 정기적으로 사랑부에 와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게 더 좋은 방법 같다. 사랑부 친구들이 다른 부서에 가면 다수 속에 소수로 존재하고, 단순히 공간적으로 함께하는 것뿐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부서 친구들이 정기적으로 사랑부에 와서 함께 예배드리면 사랑부 친구들은 평소대로 예배를 드리고, 주인의 마음으로 다른 부서 친구들을 맞이할 수 있다. 다른 부서 친구들은 사랑부 예배를 드리면서 장애인과 함께 드리는 예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사랑부 예배를 생각하며 때때로 두 가지 오류에 빠지기 쉽다. 첫째, 장애인은 무조건 구원을 받을 천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로마서> 3장 10절 말씀처럼, 모든 인간은 죄 중에 태어난 죄인이고,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함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우리의 지식과 물질, 건강과 힘이 구원에 이르게 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장애가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해야 하는 데, 장애인을 열외로 둘 수 없다. 둘째, ‘장애인이 어떻게 십자가의 도를 깨달을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다. 구원의 첫걸음인 죄를 깨닫는 것은 우리의 지식이나 능력이 아니다. 세상의 허다한 유명한 학자나 지식인들도 성령님이 아니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한다(요 16:7). 사랑부 예배에서 나의 죄인 됨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눈물로 고백하는 친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가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고백할 수 있구나”가 아니라 “그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구나”라고 여기는 게 옳다. 모든 민족을 제자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에 장애인이 열외가 되어서는 안 된다. 1988년 한 명으로 시작한 온누리교회 사랑부가 지금은 인원이 많이 늘었다는 게 정말 기쁘고 감사하다. 실수하지 않으시며,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모든 성도가 서로를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아름답게 바라보기를 바란다. 내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것처럼, 남을 대접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온 누리에 흘러넘치기를 기대한다. 장애인들이 어디에서든지 예배드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 나영지 성도(초대 사랑부 교사)

     2024-04-20  제14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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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포 -굿윌스토어 도봉점을 가다] “장애인에게는 일자리가 행복이자 기쁨입니다” 르포 -굿윌스토어 도봉점을 가다 “장애인에게는 일자리가 행복이자 기쁨입니다” 굿윌스토어 기증 캠페인에 적극 참여해야 하는 이유 온누리교회가 4월 21일과 28일 ‘굿윌스토어’ 기증 캠페인을 한다. 온누리교회는 매년 4월 재사용이 가능한 의류, 신발, 잡화, 생활용품 등을 기증하는 굿윌스토어 캠페인에 동참하고 있다. 굿윌스토어 캠페인에 참여하는 교회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그 참여도가 높다. 성도들이 재사용이 가능한 물건을 기증하면 굿윌스토어 매장에서 판매하고, 그 재원으로 장애인들의 일자리가 창출된다. 장애인들의 자립을 돕는 꼭 필요한 캠페인이 아닐 수 없다. 성도들의 굿윌스토어 캠페인 참여가 실제 장애인들에게 어떤 영향과 변화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굿윌스토어 도봉점을 찾아갔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임승진 형제(영업팀)는 굿윌스토어에서 일한 지 11년차다. 굿윌스토어에 오기 전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지금은 굿윌스토어 영업팀 에이스이자 수어 통역사로 활약하고 있다. 임승진 형제가 처음부터 수어를 할 줄 알았던 것은 아니다. 굿윌스토어에서 일하면서 배웠다. 수어를 배우는 게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지금은 명실상부한 굿윌스토어 도봉점의 대표 수어 통역사다. “전에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일했는데 사람들과 관계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저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10년 전 목사님 추천으로 굿윌스토어에 왔는데 이곳에서 일하는 게 정말 행복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어려웠는데, 직장 동료들과 관계가 좋아서 기쁜 마음으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장애인이 직장을 구하는 일이 참 어려운데 굿윌스토어에는 장애인의 취업 문이 활짝 열려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영업팀에서 저의 장점을 잘 발휘할 수 있고, 수어로 청각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이 소통하는 것을 도울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최재훈 형제(물류팀)는 대학 시절 공사장에서 아르바이트하다가 추락사고를 당했다. 몇 년 동안 재활치료를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우울증이 심하게 왔다. 결국, 정신장애 판정을 받았다. 그는 도봉구 보건소에서 바리스타 교육을 배워서 굿윌스토어 매장에 있는 카페직원으로 취업했다. 지금은 물류팀으로 부서를 옮겼다. 그는 날마다 “직장을 다니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모른다”고 고백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일하러 갈 곳이 있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을 보내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감사인지 모릅니다. 굿윌스토어에 오기 전에 다른 일을 많이 했는데, 나쁜 상사를 만나거나 불가피하게 퇴직했습니다. 제가 정말 힘든 상황에 있을 때 굿윌스토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굿윌스토어에서는 장애인들이 마음껏 일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얼마 전에 자립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자립한다는 게 두렵기도 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별거 아니더라고요.(웃음) 함께 일하는 장애인 직원들에게도 얼마든지 자립할 수 있다는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하지수 자매(콜센터)는 4년 전 대인기피증이 심했는데 극복하고, 취업에 도전하기로 했다. 가족과 굿윌스토어에 물건을 사러 갈 때마다 ‘여기서 일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바람대로 이루어졌다. 굿윌스토어에서 전화로 고객을 응대하는 일이 어려울 법도 한데 하지수 자매는 늘 친절을 잃지 않는다. “엄마랑 언니랑 물건사러 왔던 굿윌스토어에 취업했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굿윌스토어는 직원들을 많이 배려해 주고,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들이 좋아서 일하는 게 즐겁습니다. 게다가 다양하고 좋은 물건을 값싸게 살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콜센터에서 고객을 응대하는 일이 힘들 때도 있지만, 저만의 노하우를 살려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언제나 웃으면서 말해서 듣는 고객들의 기분이 덩달아 좋아진다는 칭찬을 많이 듣습니다.” 홍서윤 자매(사무보조)는 굿윌스토어 7년 차 직원이다. 전에는 인쇄소에서 일했는데 회사가 폐업하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다시 일자리를 찾던 중에 굿윌스토어 사무보조 채용 공고를 보고 곧바로 지원했다. 다시 취업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굿윌스토어에서 일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매우 만족한다고 고백했다. “장애인은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굿윌스토어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모두 좋아서 편안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 편안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다닐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굿윌스토어가 정말 좋습니다.” 장은혜 과장(굿윌스토어 도봉점)이 온누리교회 성도들이 왜 굿윌스토어 기증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소외된 장애인들에게는 일자리 그 자체가 행복이자 기쁨이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이 직원으로서 인정받고,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일할 수 있다는 게 굿윌스토어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온누리교회 성도님들이 재사용이 가능한 물건을 적극적으로 기증하면 장애인들의 일자리가 만들어집니다. 장애인들이 자립하도록 돕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작은 물건 하나라도 기증하고, 매장을 방문해서 구매해주시면 그것이 곧 장애인들의 자립을 돕는 것입니다. 굿윌스토어 기증 캠페인에 많은 참여를 부탁합니다.”

     2024-04-20  제1488호

  • 칼럼

    [크리스천을 위한 부부상담] 생각과 인식의 차이  크리스천을 위한 부부상담 생각과 인식의 차이 설거지는 매우 일상적인 일이다. 어느 가정에서든 식사하고 남은 조리도구와 음식물이 묻어 있는 그릇을 씻어내는 반복적인 작업이 이뤄진다. 협업이 잘 이뤄지는 가정은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분업이 잘 이뤄질 뿐만 아니라 설거지도 적절하게 업무 분담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소소한 가사를 분담해서 실행하는 중에 부부가 갈등을 겪기도 한다. 특히 갓 결혼한 부부라면 결혼 연수가 많은 부부보다 소소한 가정 업무에서 충돌과 당혹감을 경험할 가능성이 크다. 싱크대 안에 들어있는 그릇만 닦아내는 것을 설거지의 의미로 이해하는 남편이 있을 수 있다. 남편이 설거지를 싱크대 안에 있는 그릇을 닦는 것으로 인식한다면, 싱크대 안에만 집중해서 설거지할 것이다. 그런데 남편과 달리 아내가 이해하는 설거지의 의미와 범위가 싱크대를 넘어서 주방 전체를 정리하고 깨끗이 하는 것이라면, 소소한 마찰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 설거지의 범위가 싱크대에 머물러 있는 남편이 최선을 다해도 아내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기대하는 설거지의 이해와 범위가 싱크대를 넘어서 주방의 구석구석인 경우, 남편이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게 그릇만 씻어서 당황하고, 불만이 생길 수 있다. 서로 소통하는 부부라면 설거지에 대해서 진솔하게 대화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설거지는 여기까지예요”라고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기대하는 바를 이야기했음에도 여전히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배우자를 보면 당황스러움과 불만을 넘어 짜증과 화를 경험하기도 할 것이다. “몇 번 이야기했는데 왜 기대에 미치지 못해요?”, “당신이 온전하게 일하지 못해서 또 내가 해야 하잖아요! 한 번에 할 수 있는 일을 두 번 하니까 정말 피곤해요!” 등 퉁명스러운 말을 쏟아낼 수도 있다. 단순한 충돌에서 멈추지 않고, 일상에서 서로 다른 기대와 실망이 심각한 부부 갈등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일상의 소소한 갈등 가운데 있는 부부는 유치하지만 옳고 그름의 문제라고 여기고 싸울 수 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데도 말이다. 부부사이에서 일어나는 충돌의 원인은 단지 견해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생각의 차이를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면 매우 곤란하다. 틀린 게 아니라 경험하고 이해하는 게 다르기에 발생하는 일들이다. 따라서 부부는 더욱 마음을 열고, 대화해야 한다. 사소한 것이지만 사소하지 않은 것처럼 대화하는 게 필요하다. 생각과 인식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소소한 충돌은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나타난다. “아이를 좀 봐주세요”라고 했을 때 말 그대로 아이를 바라보기만 하는 배우자가 있다. 육아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아이를 어떻게 보는지 알 수 없어서 바라만 보는 경우도 있다. 배우자가 아이를 본다는 의미를 ‘아이가 안전한지 눈여겨보는 것’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면, 아이가 넘어지거나 다치지 않는 상황이라면 그냥 바라만 보는 행동을 할 수 있다. 반면 엄마들에게 아이를 본다는 것은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이를 봐달라고 부탁할 때는 아이의 안전과 신체적, 정서적 반응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보며, 돌봄을 시도할 것을 기대한다. 여기서도 옳고 그름으로 ‘아이를 본다’는 의미를 논쟁하면 끊임없는 갈등이 발생한다. 인식과 생각의 폭과 범위가 다르다는 의미로 접근하는 게 바람직하다. 따라서 부부는 차분하게 서로 마음을 열고 이야기해야 한다. 이야기하면서 서로 가진 다른 생각을 조율하고, 설명하고, 이해하고, 용납해야 한다. 서로 다른 이해와 생각의 폭이 생기면 먼저 자신의 관점만 주장하지 말고,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는 게 필요하다. 온유함으로 대화하기 위해서는 꿍한 마음을 잠시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넌 이것도 못해?”라고 생각하는 자기중심적 입장도 내려놓아야 한다.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견해도 적극적으로 말하고, 배우자의 말도 충분히 들어야 한다. 간혹 사소하다고 생각되는 일에 대화를 회피하는 부부가 있다. 자존심 상해하거나 “어휴, 내가 하고 말지”라면서 배우자에게 말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오래 함께 살아가야 하는 부부는 사소한 거라도 입 밖으로 끄집어내 대화할 필요가 있다. 사소한 것, 생활의 작은 습관 차이, 인식의 차이를 온유함으로 꺼내서 대화 주제로 삼을 필요가 있다. 온유함으로 대화한다는 것은 배우자에게 비아냥거리거나 쏘아붙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도대체 아이를 본다는 게 정말 눈으로만 본다는 의미인 양 가만히 있는 것이 말이 돼?”, “도대체 아빠가 왜 그래?”, “아기 엄마가 왜 그 모양이야?”라는 식으로 쏘아붙이거나 비아냥거리면, 부부의 마음이 더 멀어질 것이고,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질 것이다. 소소한 갈등이 훨씬 큰 고통으로 다가올 수 있다. 틀린 것이 아닌 다름이 일상에서 발견된다면, 자신의 관점을 잠시 내려놓고, 공손하게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항상 옳은 사람, 늘 틀린 사람은 없다. 때론 옳을 수도 있고 때론 틀릴 수도 있는 게 사람이다. 불완전 두 사람이 결혼했기에 자신이 생각하는 확신은 잠시 내려놓고, 배우자의 생각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서로 대화하다 보면 어느새 서로가 어느 정도 공감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접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담쌓지 않으며, 대화할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하다. “어휴 내가 하고 마는 것이 속 편하지!”, “뭘 더 기대하겠어, 당신에게서!”라는 식으로 마음을 닫아버리면 배우자는 동역자가 아니라 짐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다. 부부는 이해와 생각의 정도, 범위를 맞춰가야 한다. / 황규복 박사, 김숙경 소장 부부(두란노 결혼예비학교 부부 강사, <사랑해서 결혼한 당신에게> 저자)

     2024-04-20  제1488호

  • 대청

    [멘토가 멘티에게] ‘하나님의 답’을 발견하자! 멘토가 멘티에게 ‘하나님의 답’을 발견하자! “내 꿈과 하나님의 꿈이 다를까요? 제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꿈을 분별해서 찾을 수 있을까요?” 책 <목적이 이끄는 삶>을 최근 다시 읽어봤다. 청년 시절 이 책 제목이 참 매력적이었다. 늘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만 같았던 청년 시절이었기에 ‘이 책에 어떤 답이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당시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이번에 다시 마주했을 때는 감탄하며 읽어 내려갔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당시에는 ‘내가 찾는 답’이라는 어떤 프레임이 내 눈을 가리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 시절 내가 간절하게 찾고 있던 것은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한 답이었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이 자신의 답답한 인생의 해답을 찾기 위해 무려 다섯 명의 남편을 거쳤던 것처럼, 나 역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직장 생활이 거의 모든 에너지를 빨아들였는데도, 남아있는 에너지를 긁어모아 그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했다. 그 노력마저 포기하면 인생이 그대로 가라앉아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찾는 답’이라는 프레임을 가지고 그렇게도 버둥거리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답‘은 보이지 않았다. 하나님은 당신을 나의 프레임에 맞추는 분이 아니셨다.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프레임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할 때까지 제법 많은 세월이 흘러야 했다. 나의 프레임을 만족시켜 주는 신은 사실 따로 있었다. 성경은 그것을 ‘우상’이라고 부른다. ‘내가 찾는 답’이라는 프레임에는 두 가지 전제가 숨어 있다는 것도 나중에 깨닫게 됐다. 우선은 그 답이 내가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선택에는 정답과 오답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이 “이 산입니까? 아니면 저 산입니까?”라고 물었던 것처럼, 우리도 인생의 방향에 대해 “이게 맞습니까? 저게 맞습니까?”라고 질문하곤 한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이 물었을 때 예수님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녀와 동일한 프레임을 가지고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이 지금이냐고 물었을 때도 예수님은 “그것은 아버지의 소관이니 너희는 알 것 없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그렇게 구체적이고도 납득할 만한 답을 구하는 우리의 프레임에 매이지 않는 분 같다. 우리의 프레임대로 답을 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너희가 알 바 아니다”라는 말씀을 통해서 오히려 우리가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하시고 있다. 사실 내 자신의 프레임을 정직하게 살펴봤을 때 그 답이 합리적이고 내가 납득할 만한 경우에만 따르겠다는 생각이 은밀히 숨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내 인생에서 무엇이 납득할만한 것인지는 내 자신이 최종적으로 판단하기를 원하는 마음, 내가 인생의 주인이고자 하는 근원적인 죄성의 프레임이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 역시도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려는 프레임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은 그것이 자신을 망하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탕자는 이제는 종이라도 되겠다며 아버지께로 돌아왔고, 하나님은 그런 그를 무척이나 반가워하셨고 기뻐하셨다. 그런 탕자의 모습처럼, 내 인생의 주인이 되려던 나의 숨겨진 프레임이 드러나고 발가벗겨졌을 때, 비로소 내 인생에도 ‘하나님의 답’이 들리기 시작했다.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그분을 인정하여라. 그러면 그분이 네 갈 길을 알려주실 것이다” (잠 3:6). 영화 ‘바베트의 만찬’에서 로렌스 장군이 이렇게 고백한다. “한 치 앞도 못 보는 연약한 인간은 자신이 인생에서 모든 결정을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으로 인해 두려워 떱니다. 하지만 우리의 결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때가 되고 우리의 눈이 열리면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자비가 무한하다는 것을 …” / 허식 멘토(CHPlus청년부)

     2024-04-20  제1488호

  • 칼럼

    [특별기고] 사랑은 진리를 이야기한다!  특별기고 사랑은 진리를 이야기한다! 아마도 ‘탈성전환’을 경험한 사람들보다 사랑이 단순히 ‘관용’이라는 환원주의적 개념에 도전하는데 최적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최근 ‘포커스 온 더 패밀리’와 ‘콜슨 센터’가 공동으로 개최한 ‘라이트하우스 보이스’ 행사에서 로라 페리 스몰츠가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인이 상대방이 선호하는 말을 사용해야 하고, 불쾌감을 주지 않을 말과 행동만을 해야 하며, 겉으로만 신경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관해 이야기했다. 사랑을 불쾌감을 주지 않는 행동과 말로만 축소하려는 유혹은 모든 거짓말과 마찬가지로 반쪽짜리 진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교만하거나 무례히 행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는 것’으로 묘사한다. 또한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권면한다. 하지만 사랑은 친절하고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 그 이상이다. 사랑은 진리를 말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사랑이 자기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을 고집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은 분명하게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말한다. 사실 진리와 도덕의 기반을 이 방정식에 대입해 보면, 오늘날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끊임없는 압력(많은 사람이 지적했듯이 오히려 관용적이지 않은 압력)은 세상에 순응하라는 압력이다. 바울도 이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로라 페리 스몰츠는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진리를 말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현실적인 대가를 잘 알고 있다. 실제로 그녀는 ‘라이트하우스 보이스’ 행사에서 의료전문가와 상담사, 친구들이 진리를 말하는 대신 어떻게 거짓을 말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진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세상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진리를 말한다는 것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너무 쉽게 하곤 한다. 하지만 정말 정직하게 말하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번은 기도하는 중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 교회에는 세상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우상 숭배, 즉 세상이 볼 때 가장 사랑스러운 교회, 내가 아는 한 가장 사랑스러운 기독교인이라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우상 숭배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항상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싶지만, 원수의 가장 큰 전술 중 하나는 마치 우리가 서로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즉, 혐오스러운 기독교인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미움을 받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너희에 대해 좋게 말하면 화가 있을 거라고 하셨다. 그들이 내 메시지를 거부한다면 그들은 당신의 메시지도 거부할 거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그분을 떠났다고 말씀하셨지만, 그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시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씨앗이 자라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나도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내가 했던 말에 감사를 표현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로라의 말이 맞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성 어거스틴은 올바른 질서를 따라 하는 사랑의 중요성에 관해 이야기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이웃을 먼저 사랑하려고 노력한다면 하나님을 성공적으로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할 때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이유는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제멋대로 하는 망상, 거짓, 반항에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기 때문이다. 이웃을 기쁘게 하는 데 너무 신경을 써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하게 되면 안 된다. 진정한 사랑은 결국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와 반역, 깨어짐까지 받아 주신 그리스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분의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지금 세상에 가장 필요한 사랑의 본보기이자 원천이다. / 존 스톤스트리트, 자렛 헤이든(콜슨 센터 작가) 원문:breakpoint(20240403)

     2024-04-20  제1488호

  • 성인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시간] 시간을 구속하라!(Redeeming the time)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시간 시간을 구속하라!(Redeeming the time) 기독교 세계관은 우리의 모든 관점과 삶의 기준을 예수 그리스도께 맞추는 것이다. 주일예배 때 올려드리는 ‘하늘 보좌’ 찬양의 가사처럼, 매일의 일상이 하나님 임재 앞에 엎드리는 경배가 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먼저 사랑하시고(요일 4:19),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때 ‘의무가 아닌 기쁨’이 된다. 나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순종하기 위해 성령 안에서 말씀과 기도로 매 순간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성경의 첫 단어 ‘태초’는 시작이라는 시간의 개념을 포함한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통로로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기 전에 가장 먼저 시간을 창조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가장 기본적 요소인 ‘시간’에 대한 바른 성경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 시간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시간 밖에 계시며,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고, 모든 시간을 동시에 아우르신다. 하나님은 어제, 오늘, 내일과 같은 시간적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 영원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은 영원히 유효하며, 은혜와 사랑도 영원불변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이 땅의 시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영원한 차원에서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간 개념이 성경 말씀의 시제와 문장의 구성에 영향을 미친다. 성경에서는 비교적 유연한 시제를 사용한다. 과거, 현재, 미래 시점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문장에서 혼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과거 사건을 현재와 같은 상황으로 묘사하거나 미래 사건을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서술하기도 한다. 성경적 시간관에서 끝은 모든 것의 종결이라는 의미와 최종적 목표의 완성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십자가의 끝은 부활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죽음이 끝이 아니라 최종적 완성 즉,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라는 소망을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다른 피조물과 달리 인간만이 과거와 눈앞의 현재, 먼 미래를 특정한 관점에서 조망할 수 있다. 우리의 시간 인식은 과거의 기억을 불러올 수 있고, 미래의 비전을 현재 살아있는 요소로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의식은 현재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시간이란 어떤 변화하는 사건이나 현상을 기술하는 데 사용하는 물리량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간 안에 두셔서 변화하고, 성장하고, 성숙하도록 하셨다. 현재의 순간은 영적 성장과 변화를 이루는 기회이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소중한 시간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며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축복이다. 이 시간을 어떻게 선용할 수 있을까?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라는 <에베소서> 5장 16절 말씀이 중요한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을 아끼다’의 원어적 의미는 ‘시간을 구속하는 것(redeeming the time)’이다. 오스 기니스는 그의 저서 <오늘을 사는 이유>에서 ‘시간을 구속하는 것’의 성경적 개념을 설명했다. 그것은 어떤 한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강력한 진리의 메트릭스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복음을 일상의 삶으로 살아내는 걸음과 시대를 이해(understanding the times)하고,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것(대상 12:32)이다. 그는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걷기’, ‘시대의 징표를 읽기’, ‘자신의 세대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하나님은 목적을 가지고 각 사람을 현재(now), 여기(here)에 두셨다. 우리의 시간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시 31:15). 비록 시대가 악할지라도 이 믿음이 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를 사는 것을 특권으로 여기고 감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소명에 기쁨으로 헌신할 수 있다. / 강애리 목사(온누리세계관학교, 바른교육진흥원)

     2024-04-20  제1488호

  • 주일강단

    [주일 강단] 순교가 선교의 문을 열다 순교가 선교의 문을 열다 사도행전 7:54~8:3 / 이재훈 위임목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이 질문 앞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과연 나의 생명과 바꿀 수 있을 만큼 귀중한 것인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생명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려고 우리 모두 힘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생명을 내걸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시대와 상황에 있었던 성도들 가운데 기쁘게 예수님을 믿는 삶을 선택했던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영원한 생명이 자연적 생명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을 확신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이 시대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그 어떤 고난과 핍박이 주어지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기에 순교의 도전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순수하지 못하고, 때로 허영과 위선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신앙을 신앙답게, 교회를 교회답게 인도해 주고, 온 세상을 향한 선교의 문을 열어 준 것은 순교였습니다. <사도행전>의 첫 번째 순교자가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탄과 같았고, 동시에 교회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문이 열렸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담대하게 진리를 증거하는 모습 오늘 본문에 나타난 스데반의 모습은 그가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순교란 위대한 어떤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이 어떤 상황 에서 믿음의 선택을 했기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순교란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데반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첫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진리를 증거하는 장면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진실 앞에 담대합니다. 진리를 전하는 데 어떤 희생이 요구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에 고소당한 이유는 예수님이 고소당한 이유와 동일합니다. 성전과 율법을 모독했다는 ‘신성모독죄’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요한복음> 2장 19절에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다는 이유로 성전을 모독했다고 정죄를 받았습니다. 또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등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한 존재로 말씀하셨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정죄와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을 받을 때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구약 역사를 관통하는 설교를 합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으로 이어지는 핵심적인 줄기가 구약 역사의 맥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에게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통해 약속하신 분이 예수님이신데, 당신들이 성령을 거역하고 그 예수님을 죽였다고 지적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다윗에서 그친 것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분노하며 중지시켰기 때문입니다. 계속 들었다면 이어졌을 텐데 설교가 중지되었습니다. 스데반은 그들을 향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이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또 그들이 신성시하는 성전과 율법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보여주는 모형이었기에 더는 그것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음을 설교했습니다. <시편> 66편을 인용해서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집에 거하시는 분이 아니다. 모든 율법을 성취하시며 오신 예수님을 당신들이 못 박아 죽였다”고 진실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진실을 왜곡했고, 거짓 선동을 일으켜 스데반을 고소했습니다. 스데반은 살기 위해 진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역사의 주인이시고, 중심이시며, 심판자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가 꽉 막힌 사람들이여, 당신들도 여러분의 조상처럼 계속해서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조상이 핍박하지 않은 예언자가 있었습니까? 그들은 심지어 의인이 올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고 이제는 당신들도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당신들은 천사들이 전해 준 율법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51~53절).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영적 상태를 담대하게 지적했고, 예수님을 죽인 죄를 드러냈습니다. 진실을 증거하는 일에 담대했던 예수님처럼, 모든 불법 재판과 심문 앞에서 담대하고 진실을 증거하셨던 예수님처럼, 스데반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해 담대하게 진리를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모습 둘째, 분노하는 이들 앞에서 그들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사람들은 진리를 들었을 때 분노하며 이를 갈았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라 스데반을 보며 이를 갈았습니다”(54절). 스데반은 자신을 향해 이를 갈고 분노하는 이들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은 사탄의 영으로 충만했고, 악의 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 충만해서 그들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 오른 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광경에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56절). 스데반은 자신의 용기로 이 상황을 이겨낸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오른 편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본 예수님의 모습을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고 표현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 예수님을 묘사할 때 본문에서는 ‘서 계셨다’고 하고, 또 다른 곳에는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신다’고 표현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초대교회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말할 때는 심판자이심을 의미하고, 서 계신다고 말할 때는 우리를 변호하시고 중보하시는 분임을 의미한다.” 스데반이 본 것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는 예수님, 우리를 변호하시고, 중보하시는 일을 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봤다는 것입니다. 곧 스데반을 위하여 중보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을 바라본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 놓여 있는 십자가의 고통을 바라보지 않으시고, 그 너머에 있는 기쁨을 보셨습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위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히 12:2). 예수님이 십자가 너머에 있는 영광과 기쁨,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는 기쁨을 바라보셨기에 십자가를 감당하셨던 것처럼, 스데반도 자신을 향하여 이를 갈고, 분노하며, 죽이려 하는 그들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자신을 위해 중보하고 변호하시는 예수님,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기에 기쁨으로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다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우리도 스데반처럼 믿음의 승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모습 셋째, 스데반이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며 죽이려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장면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들이 돌로 칠 때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스데반은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여,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이 말을 끝낸 후 그는 잠들었습니다”(59~60절). 스데반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면서 드린 두 개의 기도와 동일하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아 주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스데반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이 자신을 못 박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신 것처럼, 스데반도 “주여,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와 스데반의 기도는 동일하게 복수의 기도가 아니라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스데반이 어떻게 예수님의 기도를 동일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살아계신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에게 충만했기에 십자가 죽음 앞에서 예수님의 기도와 자신을 돌로 치는 그들 앞에서 스데반의 기도가 동일하게 터져 나온 것입니다. 용서의 기도가 일으킨 변화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는 어떤 변화를 일으켰습니까? 함께 못 박힌 한 편의 강도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원래 양편에 있는 모든 강도가 예수님을 조롱했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함께 못 박힌 강도들이 모두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편 강도가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함께 조롱했던 이에게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반복해서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소리가 바로 옆에 있던 강도들에게 들렸을 것입니다. ‘이런 죽음을 당하면서도 용서하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그 기도를 들을 때 성령님이 역사하심으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이 깨달아지고, 믿어졌기에 함께 죽어가는 죄수에게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가 함께 십자가 죽음을 경험한 한편의 강도를 구원했다면, 스데반의 기도는 어떤 열매를 낳았을까요? 곧바로 누군가 구원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힌트가 있습니다. 앞으로 누군가 변화될 거라는 힌트가 나옵니다.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낸 후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목격자들은 자기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58절). 이 사울은 바울입니다.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바울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사도행전> 전반부에 사울이라는 이름이 더 많이 나오는 것은 부르심을 받기 이전이었기 때문이고,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바울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쓴 것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기에 헬라식 이름을 사용한 것입니다. 바울이 스데반의 순교 장면에 나타납니다. 그는 구경꾼이 아니라 스데반 죽음의 협력자, 나아가 책임자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돌을 든 자들이 바울 앞에 자신의 옷을 벗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행위들은 그가 어떤 법적 효력을 발생시키는 책임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누가는 바울에 의해 전도 받고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기록할 때 틀림없이 바울의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회심한 이후 스데반의 죽음을 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돌에 맞는 장면, 그 순간에 자신이 그 현장에 있었던 것을 누가를 통해 표현하도록 한 것입니다. 당시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히 여기고 그것을 기쁘게 여기는 상태였지만,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그가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이방인의 사도가 된 그 출발을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로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께 부름을 받고, 이방인의 사도로 쓰임 받게 된 것은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자신을 죽이는데 앞장서고 참여하는 이들을 용서하는 스데반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셨기에 그 무리 책임자로 있었던 사울을 부르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역사하신 은혜를 바울이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를 통해 이 장면을 기억하고, 자신의 이름을 거기에 넣도록 한 것입니다. 스데반의 기도응답으로 하나님이 사울을 부르셔서 사용하셨습니다. 사울의 기도로 누가가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서 중보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지금도 이 땅에 회심의 역사,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이들의 중보기도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회심과 구원의 역사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로 강도가 변화된 것처럼,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로 바울이 변화된 것처럼, 바울의 기도로 누가가 변화된 것처럼 계속 중보의 기도, 특히 용서의 기도는 복음의 역사가 능력 있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응답이 됩니다. 스데반의 순교, 핍박 신호탄이자 복음 퍼지는 영적 폭탄 스데반의 순교는 초대교회에 주어진 핍박의 신호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예루살렘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 성도들이 흩어졌습니다. 성도들은 흩어지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핍박 속에서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초대교회 공동체에 머무르고, 자발적으로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가둘 수 없습니다. 때로 하나님이 핍박을 통해서 흩어지게 하셨고, 흩어짐은 곧 복음의 확산으로 이어졌습니다. 성도들이 핍박 속에서 흩어져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안드레는 아시아 여러 국가를 다니며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매달린 십자가의 두 끝이 가로로 땅속에 파묻혀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네로 황제에 의하여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바로 매달릴 수 있는가?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울도 역시 네로 황제에 의해 로마에서 참수를 당했습니다. 야고보, 빌립, 마태, 마가, 누가, 맛디아, 도마 등도 순교했습니다. 요한만 밧모섬에 갇힌 채 광산에서 일하면서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 그 또한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는 여정에 포함되어 더 오래 살았을 뿐입니다. 네로 황제는 로마에서 일어난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며 잔인하게 박해했습니다. 그 이후 초대교회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는 A.D. 107년 순교를 당했는데, 그는 순교의 자리로 나아가면서 일곱 개의 편지를 남겼습니다. 유명한 <이그나티우스의 편지들>입니다. 이 편지를 보면 그분은 살고자 애쓰지 않고 도리어 순교하기를 사모했습니다. 자신을 구해달라는 기도의 부탁은 하나도 없습니다. 용기 있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 부탁이었습니다. 그 편지 일부 내용을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단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 울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해주시오. 나는 고난당할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할 것이며, 언젠가 자유스럽게 그와 함께 다시 부활할 것이오. 나는 그리스도의 순수한 떡으로 바쳐질 수 있도록 짐승들의 이빨에 찢겨져야 할 하나님의 밀알이라오.” 거룩한 확신과 부활에 대한 소망과 담대함만 있을 뿐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핍박의 신호탄이었지만, 동시에 복음이 온 세상에 퍼지는 영적 폭탄이 되었습니다. 스데반은 우리가 도저히 본받을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와 동일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는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일꾼이었을 뿐입니다. 여러분,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할 때 진실 앞에서 담대할 수 있습니다. 상황과 환경이 아닌 예수님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핍박한 원수까지 용서하고, 또 다른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닮을 수 있었다면, 우리에게도 스데반처럼 예수님 닮은 모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동행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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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신앙에세이] 기도는 절대 죽지 않는다! 신앙에세이 기도는 절대 죽지 않는다! 2022년, 코로나19로 인해 멈췄던 해외 아웃리치가 재개되었다. 그만큼 아웃리치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고, 선교지를 향한 뜨거운 마음이 솟구쳤다. 어느 때보다 기도로 잘 준비한 아웃리치였다. 요르단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부푼 마음으로 아웃리치를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팀원들의 나눔이 심상치 않았다. “하나님이 이번 아웃리치를 보내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아직 이곳에서 특별한 은혜를 얻지 못했습니다”, “정말 요르단에 온 게 맞았는지 고민이 됩니다” 등 청년들의 나눔을 들으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겉으로는 나빠 보이지 않았고, 특별히 힘든 사역도 없어서 지쳐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며, 아웃리치를 준비했는데 팀원들의 마음이 왜 그랬을까? 그때부터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오늘의 나눔은 어제와는 달라야 할 텐데…”, “팀원들이 꼭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아웃리치가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각자 하나님의 기적과 합당한 열매를 결국 발견했을까? 아쉽게도 그럭저럭 소소한 은혜를 가지고 한국에 돌아왔다. 아웃리치 인솔자였던 나는 스스로 책망하며 침체의 시기를 보냈다. 석 달 뒤, 우연히 양재온누리교회를 지나가다가 익숙한 얼굴을 만났다. 두란노국제선교회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귀국한 선교사님이셨다. 선교사님은 나를 보자마자 들뜬 목소리로 아웃리치팀이 다녀간 이후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고 말씀하셨다. 선교사님이 가정방문을 약속하고 찾아가려는데 많은 가정이 갑작기 약속을 취소했다고 한다. 낙담하며 포기하고 돌아가려는 찰나 우연히 한 가정에 방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복음을 전하고 나왔는데 그 가정에서 전화가 왔다고 했다. 선교사님이 다녀간 이후 꿈을 꿨는데 예수님이 빛처럼 다가와서 그 가정의 아버지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셨다는 것이다. 당뇨가 치유되는 역사도 일어났다고 했다. 그의 딸도 우울증으로 자살 충동을 느끼며 살고 있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치유되었다고 했다. 그 일로 인해 모든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간증하셨다. 이 기쁜 소식 말고도 수많은 기적을 말씀해 주셨다. 그 선교사님이 우리 아웃리치팀의 기도 덕분이라고 고백하셨다. 우리의 기도로 놀라운 일들이 매일 일어나고 있다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얼마나 눈물이 났는지 모른다. 하나님께 참 감사했다. 돌아봤더니 아웃리치를 위해 기도한다고 했지만, 나와 팀원들의 개인적인 유익을 위한 기도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아웃리치에서 은혜받게 해주세요”, “팀원들이 큰 은혜와 열매를 보고 돌아와 공동체가 부흥하게 해주세요”, “아웃리치를 다녀오면 삶에서 축복이 넘쳐나게 해주세요”와 같이 모두 나와 팀원들의 유익을 위한 기도였다. 사실 아웃리치의 목적은 개인적인 목표 성취가 아니라 현지에서 수고하시는 선교사님이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선교사님께 도움을 드리는 것이 아웃리치의 우선순위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놓쳤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아웃리치팀의 기도제목보다 크고, 선하게 응답하셨다. 그것도 더 좋은 방법으로 들어주셨다. 당장 기도가 응답 되지 않아서 답답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기도는 절대 죽지 않는다. 가장 좋은 시기에 응답 되기를 기다릴 뿐이다.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면 바로 응답 되고, 아래로 떨어지면 썩어져 땅에서 열매가 나고, 기도가 증발하면 비가 되어서 내린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기도하는 것보다 크고 선하게 응답하시고,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 / 송동주 목사(남양주온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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