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단] 나를 따르라(3) 사슴이 알려준 제자도의 비밀
나를 따르라(3) 사슴이 알려준 제자도의 비밀
<시편> 42:1~11
/ 이재훈 위임목사
<시편> 42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첫걸음으로 ‘하나님께 대한 갈망’이 중요한 요소라고 가르쳐 줍니다. 이 갈망은 감정의 영역이지만, 우리의 의지를 움직이고 생각을 변화시킵니다. 올바른 지식이 있고, 행하려는 의지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정서가 죽어 있다면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
헐떡이는 것은 몸 전체가 목이 마를 때, 몸 안에 있는 모든 모공이 목말라 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사슴은 좀처럼 소리를 내지 않는 짐승인데, 헐떡거리는 소리를 낼 정도라면 얼마나 간절히 목이 마른 상황인지를 보여줍니다(시 42:1). 사슴은 몸 안에 물을 저장할 저장소가 없기에 수시로 수분을 보충해야 합니다. 신앙생활과 비교해 보면, 우리는 낙타를 부러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예배드리면 물을 저장해서 살고, 일주일에 한 번씩만 물을 마시면 되니까 얼마나 편안하고 경제적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낙타가 아니라 사슴입니다. 사슴은 물에 아주 예민하고 자주 마셔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목마름이 살아있는 신앙과 없는 신앙은 매우 다릅니다. <시편> 기자는 목마른 사슴처럼,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갈망이 살아있습니다. 사슴이 알려주는 제자도의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의 갈망이 깨어나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발걸음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갈망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종교적 활동에 불과합니다. 선물은 받지만,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갈망은 가지지 않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문제입니다.
<시편> 기자가 갈망하는 것은 예배 자체가 아닙니다. 어떤 종교적 활동도 아닙니다. 성전도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목말라 합니다(시 42:2).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시편> 기자는 어떻게 이 깊은 갈망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그의 갈망은 편안하고 안락한 자리가 아니라 척박한 광야에서 얻어졌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갈망이 깊어지는 자리는 가장 척박한 광야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실제로도 광야에 있습니다. 더 넓게 표현하면 세 겹의 광야에 있습니다.
세 겹의 광야에서
첫째, '사회적 광야'입니다(시 42:3).
한두 번 사람들에게 조롱받은 게 아닙니다. 종일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사회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비난입니다. “너를 보니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다”, “당신을 보니 예수님 믿고 싶지 않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조롱입니다. “교회를 보니 예수님 믿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듣게 한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아닐 것입니다. 반대로 최고의 칭찬은 “당신을 보니 하나님을 믿고 싶다”, “당신을 보니 하나님이 살아 계시네”, “교회를 보니 나도 예수님 믿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라는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사회적으로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낙심과 절망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고 “너의 이 불안하고 낙심에 있는 모습을 보니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 사람은 실제로 '물리적 광야'에 있습니다(시 42:6).
요단 땅, 헤르몬 산, 미살 산은 지금 이스라엘 최북단 시리아 국경 지역입니다. 요단강의 발원지입니다. 미살 산은 아마 헬몬산의 여러 봉우리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어떤 일인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이 <시편> 기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북쪽 변방으로 피신해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반역했을 때 함께 도피했던 고라 자손 중 한 사람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정확하게는 말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합니다. <시편> 42편 4절에서 그는 하나님의 집을 다니며 명절을 지키러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뻐 외치며 찬양하고,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무너지게 합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할 때 사람들은 무너져 내립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시편> 기자는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더 깊어졌습니다. 만일 그가 예루살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면, 이 <시편>을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시편>의 가장 감동적인 고백들의 공통점은 모두 광야에서 쓰였다는 것입니다. 깊은 광야에서, 험한 광야에서 하나님을 향한 깊은 고백과 갈망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는 '영적 광야'에 처해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조롱만 받은 게 아니고, 물리적인 광야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침체와도 싸우고 있습니다. <시편> 42편 5절과 11절에 반복되는 문구가 있습니다. “오 내 영혼아, 왜 그렇게 풀이 죽어 있느냐? 왜 내 속에서 불안해하느냐?”인데, 여기서 ‘풀이 죽어 있다’와 ‘불안해하다’라는 동사를 분석해 보면 아주 흥미롭습니다. 풀이 죽어 있다는 건 의기소침해서 가라앉은 상태이고, 불안해한다는 것은 으르렁거리며 끓어오르는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가라앉고, 한편으로는 끓어오릅니다.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불완전한 상태입니다. 영적인 침체에 빠진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며, 섬기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부르고, 자신의 영혼을 사슴으로 비유하며, 그분을 향한 갈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 침체의 상태를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표현합니다. 영적 침체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고, 친밀함을 경험했던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이전에 하나님과 깊은 사귐과 교제 가운데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 단절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매너리즘이 아닙니다. 매너리즘은 갈망이 없는 것입니다. 영적 침체는 갈망이 있기에 괴로운 것입니다. <시편> 42편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광야에 있던 한 영혼,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물리적으로도 광야에 있고, 영적으로 어둠 가운데 있는 영혼의 갈망이 역설적으로 더 강렬해졌다는 것입니다. 사슴이 헐떡거리며 시냇물을 찾는 것 같이, 강렬하게 하나님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갈망을 통과하고 헤쳐 나오는 방법
이 <시편> 기자는 갈망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갈망을 통과하고 어떻게 헤쳐 나오는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이 침체와 가라앉음 속에 있을 때 그는 하나님을 섬겼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하나님을 예배했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찬송 받으셨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믿음의 여정에서 은혜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둘째, 자기 자신에게 계속 말합니다. 5절을 보면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부릅니다. 여러분, 가만히 삶을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매일 누군가와 말하고, 누군가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염려의 말, 절망의 말, 두려움의 말, 근심의 말, 비교 의식의 말, 후회의 말이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계속 자기 자신에게 말하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태어난 새 사람이 우리의 옛사람을 향해 계속 말해야 합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불안해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고 책망하고 명령할 수 있습니다. 옛사람이 끊임없이 말하는 것에 끌려가면 안 됩니다.
셋째, 영혼은 하나님을 찬송함으로 그 갈망을 이어갑니다. “내가 오히려 그분을 찬양하리라”는 말씀에서 ‘오히려’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환경이 다 바뀐 뒤에 감정이 좋아지면 찬송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여전히 광야의 한복판에서 상황은 바뀌지 않아도 하나님을 찬송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갈망이 깊이 익어가는 곳은 찬송의 자리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는 그분을 갈망하고, 광야의 한복판에서 그 갈망이 더 깊어집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한 갈망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조롱을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끝까지 놓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시편> 42편을 붙잡고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고, 아버지를 갈망하며 살아가셨다면, 우리도 이 <시편> 말씀을 붙잡고 목마른 한 마리의 사슴처럼, 광야 속에서도 하나님을 갈망하고, 찬송하는 자리로 끊임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삶의 분주함이 그 갈망을 대체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갈망 없는 신앙생활은 활동에 불과합니다. 우리 안에 잃어버린 갈망이 깨어나도록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광야 속에서 이 갈망이 더 깊어짐을 감사하십시오. 매일 아침 <시편> 42편 5절 말씀을 여러분의 영혼을 향하여 먼저 말하십시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6-06-05
제159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