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단] 가룟 유다 : 그가 나가니 밤이러라
가룟 유다 : 그가 나가니 밤이러라
<요한복음> 13:21~30
/이재훈 위임목사
열두 제자 중에서 마지막 제자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명단 가장 마지막에 항상 나오는 제자, 예수님을 배반한 제자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슬픈 구절 중 하나가 오늘 본문 <요한복음> 13장 30절입니다. 개역개정에서는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글 성경의 ‘밤이러라’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보면 세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밤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짧은 문장에 유다라는 제자의 비극적인 인생을 압축합니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빛과 어둠’이라는 주제가 대조됩니다. “그가 조각을 받고 나갔더니 밤이다”라는 것은 단순한 시간 표기가 아닙니다. 유다의 영적 상태와 운명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유다의 퇴장과 어둠의 시작을 연결함으로써 그의 악행이 어둠에 속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택하신 제자
<요한복음> 1장 5절에서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9절에서는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더라”고 했는데, 그 말씀이 유다에게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곁에서 3년 동안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둠을 선택했습니다. 정반대 인생도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제자로 그는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빛 가운데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빛이신 예수님과 함께 동행했으면서도 빛이 아닌 어둠을 사랑해서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가룟 유다’라는 이름 앞에 붙여진 ‘가룟’은 지역 이름입니다. 어느 지역인지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해석의 가룟은 ‘이스카리옷’, 히브리어로 ‘이쉬 그리옷’입니다. ‘그리옷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유다 지파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고, 유대 지방입니다. 나머지 열한 제자는 모두 갈릴리 출신입니다. 가룟 유다만 유대 지방 출신입니다. 이것조차도 그가 다른 제자들과 깊이 어울리지 못했던 이유일 거로 분석하기도 합니다. 갈릴리의 제자들보다 훨씬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바라본 이유로 여기기도 합니다.
유다는 제자 공동체에서 돈을 맡았던 회계였습니다. 이 직책은 신뢰를 전제로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셨을 때 아무도 유다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명절에 쓸 것을 사라”고 하시는 줄로 알았거나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하시는 줄로 생각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유다의 겉모습은 완벽했습니다.
가룟 유다도 예수님이 직접 택하신 제자였습니다. 밤을 새워 기도하신 후에 선택한 제자 중 한 사람입니다. 유다도 산상수훈의 말씀을 배웠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전도도 했고, 귀신을 내쫓는 능력 행함의 통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유다가 처음부터 배신의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가 배신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유다를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택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시작이 아니라 과정에서 일어났습니다. 유다의 배신은 한 번의 실수가 아니라 오랜 시간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유다가 왜 예수님을 배신했는가?
‘유다가 왜 예수님을 배신했는가?’라는 질문 앞에 가장 쉽게 떠오르는 대답이 돈에 대한 탐욕입니다. 은 삼십 냥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것인데, 매우 부족한 대답입니다. 그것은 거대하게 쌓여 있는 마른 장작더미에 불을 붙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돈에 대한 탐욕이 배신의 유일한 동기라고 복음서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가 돈에 대한 탐욕이 많아서 배신한 거라면 스승을 그 작은 돈에 팔아넘기는 것보다 계속 돈궤를 맡고 있는 게, 그래서 도둑질하는 게 더 큰 수익 아닐까요? 또 그의 주된 관심이 돈을 모으는 일이라면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머리 둘 곳 없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분명 돈과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됐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을 때 그것을 어느 정도 포기한 제자이기도 합니다. 돈에 대한 탐욕 때문이라면 그가 후회하며 돈을 대제사장들에게 돌려주고, 자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탐욕에 가득 찬 사람은 양심도 팔아넘기기 때문에 후회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건이 불을 붙인 계기는 되었지만, 그보다 깊은 이유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잘못된 메시아 사상
그리고 탐욕과 위선
적어도 다섯 가지 뿌리가 있습니다. 첫째, 잘못된 메시아 사상입니다. 정치적 왕국을 꿈꿨던 그의 사상적 배경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의 메시아관은 근본적으로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그룹에서 세 번째 나오는 다대오, 유다, 시몬의 공통점은 모두 ‘열심당원 같은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시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 할 때마다 유다는 신났을 것입니다. ‘이런 능력을 보이신 분이라면, 이런 말씀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면, 이렇게 거룩하고 순수한 분이라면 유대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서, 제2의 모세가 되어 로마로부터 유대 나라를 독립시켜 주기에 충분하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리가 몰려올수록 피하셨고, <마가복음>에서 여러 차례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다는 계속 실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로마를 비판하고, “저 가이사를 끌어내려야 된다. 유대가 독립돼야 된다”라고 선포만 하시면 유대 민족이 하나가 되어서 정치적 꿈을 이룰 수 있을 텐데, 예수님은 관심 없는 것처럼 뒤로 물러나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2장에 나온 것처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말씀하신 것도 유다의 마음에 안 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유다에게 계속 실망으로 누적되고, 분노로 발전되었고, 결국 배신에 이르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둘째, 탐욕과 위선의 모습입니다. 3년 동안 그는 위장 생활을 했고, 점진적으로 그 위선이 깊어졌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유명한 사건이 나옵니다.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을 때 유다가 비판했습니다.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은 것을 비판했습니다. 얼마나 의로워 보입니까? 그러나 위선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6절에서 그의 의도를 드러냅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말합니다. ‘훔쳐갔다’는 것은 미완료 시제로,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 지속적으로, 습관적으로 행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탐욕은 하루아침에 사람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작은 합리화부터 시작해서 지속적인 자기기만을 거쳐 그 사람 전체를 삼켜버립니다.
유다는 완벽하게 자신을 위장했습니다. 3년 동안 다른 제자들과 함께 먹고 기도하고 사역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의 본심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이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했을 때 제자들은 놀라면서 “주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연이어 질문합니다. 놀랍게도 유다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얼마나 위선적입니까? 탐욕과 위선이 그를 사로잡은 것은 처음부터가 아니었습니다. 과정 중에 점점 탐욕과 위선의 지배를 당했습니다.
자기 보호, 보존의 본능
사단의 전략적인 개입
셋째, 자기 보호, 보존의 본능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증오로 바뀐 것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두 번째 이유와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유다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여러 번 제자들의 문제를 꿰뚫어 보시며 지적하셨습니다. 가장 많은 지적을 받은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책망을 받을 때마다 돌이켜서 점점 변화되어 갔습니다, 유다도 예수님의 눈길과 말씀을 통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정반대로 갔습니다. 이것이 악한 자기 보호 본능입니다. 게다가 유다는 매우 상황 파악이 빨랐던 사람입니다. 가장 현실적인 사람, 돈 계산을 잘하는 사람, 상황 파악이 가장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 같은 갈릴리 어부 출신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끝까지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만 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을 통해서 산헤드린 공회와 로마 당국이 예수님을 내버려두지 않을 것을 가장 먼저 간파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김으로써 적어도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배신자는 살려줄 것이다’라는 자기 보호의 본능을 보입니다. 야비한 본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넷째, 사단의 전략적인 개입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가룟 유다에 대한 사단의 개입을 두 단계로 묘사합니다. 첫 번째는 13장 2절에서 “마귀는 이미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를 배반할 생각을 넣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넣었다’는 단어를 씁니다. 27절을 보면, “유다가 빵을 받자 사단이 그에게 들어갔습니다”라고 합니다. 생각을 넣는 것에서 들어가는 것으로 전환됩니다. 유다의 탐욕과 위선이 사단에게 기회를 주었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할 때 마귀가 그를 지배해버린 것입니다. 마귀는 한순간에 우리를 통째로 삼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생각이 들어오고, 그 생각이 우리의 의지를 사로잡는 데까지 나아가는 과정에서 사단을 내몰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허용하면 결국 지배해버리는 것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완고함
다섯 번째,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완고함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사랑을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이었습니다. 13장 1절에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끝까지’라는 표현을 ‘유다까지’라고 바꿀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발도 씻기셨고, 식사하는 가운데 빵 조각 하나를 떼어 주셨습니다. 최고 중요한 손님에게 주는 행위였습니다. 빵 조각을 떼어 건네주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은 돌이킬 수 있는 기회, 마지막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유다는 마지막 사랑까지 받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예수님께 닫혀 있었고, 그 순간 마귀에게 마음을 활짝 연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마음을 닫는 만큼 사단이 들어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마음을 활짝 열지 않으면, 마귀가 활짝 들어온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만큼 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유다는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은 유다의 최후의 모습을 기록하는데, 그가 ‘뉘우쳤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은 삼십을 그들에게 되돌려주며 뉘우쳤고, 자살했습니다. 여기서 뉘우침은 감정적 후회를 의미합니다. 진정한 회개, 돌이킴이 아닙니다. 베드로처럼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 그냥 후회한 것입니다. 유다에게는 적어도 세 번의 회개 기회가 있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말씀하셨을 때이고, 또 하나는 겟세마네에서 유다에게 “네가 입맞춤으로 나를 배반하느냐”라고 하셨을 때도 회개할 수 있었고, 마지막 은 삼십을 돌려주며 가책을 느꼈을 때도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의 기회 모두를 저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심령이 몹시 괴로우셨다”라고 말씀합니다. 심령이 몹시 괴롭다고 하신 표현이 세 번 나옵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십자가를 내다보시며, 그리고 유다의 배반을 말씀하실 때입니다. 예수님이 괴로우신 것은 배신감 때문이 아닙니다. 유다 영혼이 어둠 속으로 들어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괴로워하신 것입니다. 어둠 속에 있는 수많은 영혼을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 조각을 받고 나가니 밤이었다”
“유다가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습니다. 예수께서 가룟 유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27절).
배신을 촉구하신 게 아닙니다. 회복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실행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에 예수님의 친구가 메시아를 배신할 것이 예언되었다면 누군가는 예수님을 배신해야 하는 것 아니었는가? 그렇다면 유다는 하나님 예정의 희생자가 아닌가?’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유다복음>이라는 위경에서는 유다를 미화합니다. 그가 원치 않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행했던 ‘비운의 운명’으로 해석합니다. 이는 성경을 왜곡하는 잘못된 주장입니다. 종교 개혁자 칼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배반과 죽음이 예언되어 있다고 해서 유다가 변명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예언을 이루고자 그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악한 마음 때문에 그 일을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어떤 사람도 죄 짓는 것을 예정하지 않으십니다. 죄란 철저히 인간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배신은 자기 의지에 대한 책임이 있을 뿐입니다. <누가복음> 22장을 보면 유다가 먼저 갑니다. 대제사장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어떻게 예수 넘겨줄지를 먼저 제안합니다. 그가 제안을 받은 게 아니라 먼저 제안했고, 먼저 주도적으로 의논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원치 않은 악역을 맡은 게 아닙니다. 스스로 원하는 것을 선택한 악인이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그가 배신자라는 것을 알고 내버려 두심으로 이용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여러 번 경고하셨고, 그 길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지만, 그가 끝까지 거부하고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그를 사랑하셨을 뿐이며, 포기하지 않으셨을 뿐입니다. 은혜를 거절한 것은 유다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악한 선택을 아셨고, 그의 악을 선으로 이기시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를 악인으로 규정하며 이 사건을 끝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죄 역시 그에게만 해당되는 유일무이한 죄로 여겨서도 안 됩니다. 우리도 유다 같은 배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유다의 배신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직접 택하신 열두 제자 중에서 한 사람이 배신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사단의 먹이와 표적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가까이 있었던 제자마저 탐욕과 위선으로 회개하지 않음에 이르렀다면, 우리는 얼마나 큰 탐욕과 위선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신앙의 동기를 점검해야 합니다. 유다가 잘못된 신앙의 동기를 가졌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작은 타협의 위험도 경계해야 합니다. 유다의 배신도 작은 탐욕에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뒤에 숨어 있는 내면을 끊임없이 살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후회가 아닌 회개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유다의 비극은 죄를 지은 것만이 아닙니다. 죄에서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돌아왔습니다. 유다도 예수님을 넘겨준 행위로 끝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배신과 유다의 배신을 보면 유다는 입맞춤으로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려줌으로써 배신한 것이고,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말로 배신한 것이기 때문에 외형적으로 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그러나 돌이키지 않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유다의 이야기를 끝맺는 말 “그가 그 조각을 받고 나가니 밤이었다”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 빛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어둠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나가는 길이 빛의 길인가? 아니면 어둠의 길인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다행히 아직 완전한 어둠은 아닙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예수님 앞으로 날마다 나아가며 배신의 뿌리를 끊임없이 끊어내고, 온전한 제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6-04-04
제158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