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단] 가서 제자 삼으라
가서 제자 삼으라
<마태복음> 28:16~20
/이재훈 위임목사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실 때마다 주신 말씀은 매우 간단하고 직선적이었습니다. “나를 따르라.” 3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도 매우 간단하고 직선적이었습니다. “가서 제자 삼으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두 가지 부르심을 받은 이들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결국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부르신 목적이 ‘가서 제자 삼는 제자’로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 명령이 기록된 것은 <마태복음서>가 기록된 목적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구원으로의 부르심이며,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이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로의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복되게 하신 것은 모든 민족의 복의 통로가 되게 하는 계획이었던 것처럼, 에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제자를 부르신 까닭은 모든 민족의 제자를 삼는 사역자로 부르는 것입니다.
갈릴리로 가야하는 두 가지 이유
예수님이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을 주신 곳이 갈릴리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열한 제자와 함께 갈릴리의 한 산에 오르셨을 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만난 곳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 번 만난 제자들은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어리둥절하고 당황하며 두려웠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라. 그곳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마 28:10).
그래서 열한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서 예수님이 일러주신 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예루살렘에 주로 계셨고, 제자들도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을 만나시고 승천하시는 게 더 간단하지 않았을까요?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는 적어도 120km 이상 떨어진 거리였기 때문입니다.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가서 다시 만나자고 말씀하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제자들을 만나고, 그곳에서 승천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우리가 만나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명백하게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전후 문맥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이유입니다.
첫째, 부르심을 받은 자리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갈릴리는 그들이 제자로 부름을 받은 지역입니다. 제자의 삶을 돌아보는 자리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이 부름을 받았던 곳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는지, 그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했는지 그 첫 순간을 기억하고, 그곳에서 주신 말씀들을 기억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앞으로 어디로 향해야 할지를 알기 원한다면 어디에서부터 시작됐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기 원한다면 우리가 누구의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되새겨야 합니다.
둘째, 갈릴리가 가진 선교적 의미 때문입니다. 당시 갈릴리는 유대의 변두리였습니다. 이방과의 접촉이 많고, 이방 민족의 침입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구약 말씀에 갈릴리를 어둠과 그늘이 가득한 곳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갈릴리를 표현할 때 언제나 ‘이방인의 갈릴리’라는 표현을 함께 썼습니다. 그만큼 변두리였고, 이방의 침략도 많았고, 이방인들이 섞여 사는 지역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철저한 유대 민족 중심의 도시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이 아닌 이방인의 도시라고 불리는 갈릴리에서 승천하시면서 이 명령을 주신 이유는 선교적 의미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소명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 지역에만 머물며 그들끼리 어떤 종교적 체계를 이루고,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며, 그들만의 예수님을 기억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이방으로 퍼져 나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 장소를 통해서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열한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경배 드렸습니다. 이제 제자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기에 그분께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때로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시기도 하고, 그들에게 귀한 가르침을 주시셨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을 경배하였다’는 표현은 여기서 처음 나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달을 때만 진정한 경배가 나오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가 드려지지 않는 까닭은 우리가 예배드리는 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예배공동체에서 진정한 선교가 일어납니다. 예배공동체와 선교공동체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참된 예배자요, 참된 선교공동체가 됩니다. 예배와 선교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선교의 목적은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가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배자들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 선교의 목적입니다.
“제자 삼으라”는 명령,
선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뵙고 경배드렸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의심했습니다”(17절).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도, 그 명령을 받고도, 승천하시는 모습을 보고 있음에도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어떤 경우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의심이 여전히 있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명령을 주셨습니다. 베드로의 모습과 제자들이 도망하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예수님이 잘못 보신 게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배신했고 자살했고 열한 명만 남았습니다. 더군다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의심하고 있는 이들을 예수님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이 명령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이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속에 여전히 의심이 있고,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의구심이 있기에 ‘나는 이 명령에 해당되지 않는다’라고 변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열한 명 중에도 여전히 의심하고 있는 이들을 예수님이 부르시고, 그들을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의 모든 의심은 확신이 되고, 불안은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까? 이 명령을 주신 분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다가오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내게 주어졌다’”(18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을 이루심으로써 이 명령을 주실 수 있는 권세를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권세를 가지신 분이 우리를 이끌어 가고 계시고,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을 <마태복음>에서 가장 포괄적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체계적으로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그 명령은 “제자 삼으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19~20절).
한글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이 명령에 네 개의 동사가 나옵니다. ‘가라’, ‘제자 삼으라’, ‘세례를 주라’, ‘가르쳐 지키게 하라’. 그런데 원문으로 보면 명령형 동사는 딱 한 가지입니다. “제자 삼으라”입니다. 그것만 동사이고, 나머지는 분사형입니다. 분사형은 문법적으로 동사를 보완하기 위하여 보조하는 형태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갑니까? 제자 삼기 위해서입니다. 왜 세례를 줍니까? 제자 삼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세례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부활을 경험하는 새 생명의 체험이 세례입니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은 교사가 학생을, 부모가 자녀를 세심하게 가르쳐 주듯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온전히 가르침으로 인해서 제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문화권에도 가는 것이고,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함으로써 궁극적인 목적은 “제자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이루는 것입니다. 참된 선교는 제자 삼는 것입니다. 2024년 열렸던 4차 로잔대회 서울선언 72항에서 하나님 백성의 선교가 제자 삼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을 다시 강조했습니다. 제자 삼으라는 명령이 곧 선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우리가 이 부르심을 받을 때 놀라워해야 하는 세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 장차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이 명령을 동일하게 주셨습니다. 열한 명은 모든 제자를 대표하는 이들이기에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둘째, 그 대상이 모든 민족입니다. 셋째, 이 명령을 받은 제자의 숫자가 열한 명이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 거주하고 있던 소수의 열한 명에게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이 명령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다음날부터 잠을 못 이루었을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열한 명의 제자가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것이 가능할까요? 예수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또 하셔야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열한 명이 어떻게 모든 민족을 제자 삼습니까? 열한 명으로부터 출발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고, 그 열한 명을 통해 예수 믿고 제자 된 이들은 그 시대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만나는 한 사람을 통해서 놀랍게도 온 세상에 복음이 전해지고, 예수님의 제자가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갑니다.
문제는 이 명령을 얼마나 무겁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가입니다. 만일 교회가 이 명령을 가볍게 여기면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많은 교회가 다툼과 분열로 얼룩지고, 능력을 잃어버리고, 예배의 감동이 없고, 기도의 역사가 없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로 귀결됩니다. 이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 명령을 ‘선택’으로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열한 명으로 시작된 명령의 순종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 또 다른 사람을 제자 삼았습니다. 그들이 또 다른 사람을 제자로 삼은 것입니다. 그 시대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 삼으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에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할 뿐만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메말라 가는 영혼들을 총체적으로 섬겨야 합니다. 배고픈 자들의 빵이 되어 주기도 하고, 난민들의 울타리가 되어 주기도 하고, 생명의 위협에 처한 이들을 보호하고, 법적인 노예로 있는 이들을 자유케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20절b).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현재의 사실입니다. 언젠가 이루어질 약속이 아니라 이 명령에 순종하는 자와 함께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의 함께하심을 체험하지 못할까요? 예수님의 이 명령과 상관없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함께하신다는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여러 나라와 민족에 파송된 선교사들을 돕고 지원하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온누리교회 모든 성도가 이 명령을 무겁게 받아들이며 순종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6-01-10
제157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