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단] 피할 곳이 필요한 이들에게
피할 곳이 필요한 이들에게
<여호수아> 20:1~9
/이재훈 위임목사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했을 때 그 땅이 각 부족, 족속들에게 정의롭게 분배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정의롭게 분배된다’는 것은 기계적으로, 인원수에 따라 똑같은 면적을 나눠 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툼과 분열이 없도록 하려고 제비 뽑는 것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분쟁과 다툼을 없애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습니다. 제비를 뽑지 않을 수 있는 여러 예외가 허용됐습니다. 자진해서 어떤 땅을 원할 때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 합당하다고 여겨질 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이 “우리는 이곳에 머물기 원합니다. 단 우리는 함께 정복하는 것은 참여하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받아들인 경우입니다. 또 한 가지는 갈렙과 유다 지파가 자진해서 헤브론 산지, 가장 위험하고 힘든 땅을 정복하겠다고 자진한 경우입니다. 남다른 헌신을 하는 경우입니다. 희생하는 선택을 했을 때 존중되고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반면 요셉 지파처럼, “우리는 인원이 많고 두 지파나 되는데 땅이 너무 좁습니다. 땅을 더 주십시오”라고 요청했을 때는 “스스로 개척하라”고 여호수아가 거절하며 도전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정의는 기계적 정의, 기계적 분배가 아닙니다.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은 존중되고, 더 많이 수고한 사람들이 존중받는 모습을 이끌어 내고, 노력하지 않고 얻으려는 나태하고 안일한 사람들에게는 도전하고 스스로 일하도록 일깨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일하지 않고 노는 사람에게도 열심히 일한 사람과 동일하게 주는 기계적 정의가 결코 아닙니다. 선한 영향력이 사회에 미치게 되는 것, 그것 자체를 보상으로 여기는 것이 올바른 정의입니다.
“도피성을 지정하라”
가나안 땅이 분배되는 마지막 시점에서 하나님이 “도피성을 지정하라”는 명령을 여호수아에게 주십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모세를 통해 지시한 도피성들을 지정하라고 말하여라. 그래서 뜻하지 않게 실수로 살인한 자가 그곳으로 피신해 피로 복수하려는 사람으로부터 보호받게 하여라’”(1~3절).
의도치 않게, 고의가 아닌, 미움이 아닌 우연한 사고로 인해서 사람을 죽이게 된 사람이 복수를 바로 받지 않도록 보호하는 제도로 도피성을 만들어 피난처로 삼게 하셨습니다. ‘도피’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어감을 많이 줍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도피하는 경우에 많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꼭 필요한 도피도 있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보다 훨씬 심한 보복을 당할 위험에 처한 사람들, 당장 피하지 않으면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는 사람이 피해야 할 곳은 필요합니다. 정말 억울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피할 곳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과 사회에서 종종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아셨기에 ‘도피성’이라는 제도를 제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아이디어가 탁월한 수준의 사랑과 정의가 담겨 있는 제도라는 것을우리가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조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읍의 장로들이 심사를 하게 돼 있습니다. 합당하다고 여겨질 때 받아 줍니다. 혐의가 완전히 밝혀질 때까지, 재판의 과정을 거치고 혐의 없음이 확인되면 그 도피성에서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 곳에 살아야합니다. 진짜 잘못한 것이라면 복수를 받도록 내어 줬습니다.
이 성을 요단 동편에 세 개, 요단 서편에 세 개를 지정합니다. 요단 서편에는 납달리 산지의 갈릴리 게데스,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 유다 산지의 헤브론이 지정됐고, 요단 동편에는 르우벤 지파의 베셀, 갓 지파의 길르앗 라못, 므낫세 지파의 바산 골란 지역입니다. 골고루 분포된 이유는 어디서든지 다가갈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곳에 가는 그 길도 잘 닦아 놓도록 했고, 표지판까지 마련하도록 했습니다.
가나안 땅 분배의 마지막 지점에서 도피성을 지정한 것이 놀랍습니다. 전쟁이 잦고 폭력적인 당시 사회에서 하나님은 한 생명이 억울하게 희생되지 않도록, 보복 사회로 치달았던 그 시대에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귀한 제도입니다.
“누구든 사람을 쳐 죽이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다만 의도적으로 일부러 죽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의 손에 넘겨주신 일이면 그는 내가 정해 놓은 곳으로 도망치게 해야 한다”(출 21:12~13).
의도적으로 죽인 게 아니라면 도망갈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의도성을 기준으로 사람의 죄를 판단하는 게 없었던 시대입니다. 무조건 누군가의 피해를 받으면 보복에 나서는 시대였습니다. 보복이 또 다른 보복을 낳는 시대에 이 아이디어를 통해 그 사회를 하나님의 질서로 다스리고, 하나님 나라 모델을 보여주도록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적개심이 없이 누군가를 갑자기 밀치거나 아무 의도가 없이 무언가를 던졌거나 혹은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만한 돌을 미처 보지 못하여 어떤 사람을 맞아 죽게 했다면 그는 원수도 아니고 해칠 생각도 없었으므로
회중은 그 살인자와 그 피를 복수하고자 하는 사람 사이에 이런 규례들을 따라 판단해 주어야 한다. 회중은 그 피를 복수하고자 하는 사람에게서 그 살인자를 보호해야 하며 그를 그가 피했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내 주어야 한다. 그는 거룩한 기름으로 기름 부음 받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거기 머물러 있어야 한다”(수 35:22~25).
의도하지 않은 실수로 인해서 누군가를 죽이게 된 경우는 보호해 주고, 도피성 제도를 통해 생명을 보호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죽이고 목숨을 부지하려고 거기 피신하는 사람에 관한 규범으로 자기 이웃을 악의 없이 우연히 죽이게 된 사람을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자기 이웃과 함께 나무를 베려고 숲에 들어갔는데 나무를 쓰러뜨리려고 도끼를 휘두르다가 도끼머리가 날아가 그 이웃을 쳐서 죽게 만들었다고 하자. 그런 사람은 그 성들 가운데 하나에 피신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신 19:4~5).
합당한 확인이 될 때까지 그 사람을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느슨하게 해서 했든지, 아니면 의도하지 않은 건지를 확인할 때까지는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피성에 오면 장로들이 판단하는 중요한 재판관 역할을 했고, 재판 과정을 통해서 고의성 여부를 확인하고, 만일 의도하지 않았다면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 도피성에 살도록 했고, 대제사장이 죽은 이후에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도피성 제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 그리고 사랑
도피성 제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첫째, 실수를 범해 죽음의 위기에 처한 생명을 보호하는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자비로운 정의, 사랑의 정의입니다. 사람들은 복수하는 정의를 생각합니다. 의도성 없는 실수도 정죄하는 것을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복수심을 표현하는 정의로 나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는 사랑에 근거한 정의입니다. 재판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처벌 중심의 사회가 아닌 회복 중심의 사회를 보여줍니다. 의도성 없는 실수에 대해서 하나님의 자비로운 정의를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둘째, 지나친 복수심을 억제하는 정의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복수를 장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복수를 억제하는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것은 피해 받은 사람이 복수하는 게 아니라 어떤 국가나 공권력에 의한 정당한 대가를 치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 복수를 개인에게 맡기면 어떨까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복수를 맡겨 놓으면 당한 것보다 심하게 복수하려고 합니다,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는 악순환을 방지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이러한 정신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도치 않게 실수로 누군가를 죽게 할 경우에 그 사람이 잘못한 것보다 훨씬 심각한 피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보호해 주는 제도입니다.
셋째, 실수라고 할지라도 치러야 할 대가가 있는 정의입니다. 도피성으로 도망한 사람은 실수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용서하고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의도하지 않은 실수였다는 게 증명돼도 그 사람에게 치러야 할 대가는 그 도피성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보호해 주기도 하지만 일종의 구금 효과가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대가입니다. 고귀한 생명을 잃게 한 실수에 대한 대가로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 제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발견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대제사장의 죽음과 이 사람이 자유케 되는 것을 연결시켜 놓은 것의 의미입니다. 일종의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죽음을 그 사람 죄의 대가를 치르는 죽음으로 하나님이 간주하시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죽음으로 살인한 자의 죄 값을 치른 것으로 간주함으로 자유케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죄 값을 치르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신 제도입니다. 구약 곳곳에 하나님의 십자가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도피성은 그냥 눈감아 주는 곳이 아닙니다. 누군가 대신 죄 값을 치름으로 살 길을 열어 주는 곳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함께 만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사랑을 행하는 정의이며, 하나님의 사랑은 정의로운 사랑입니다. 여러분, 정의를 부르짖는다면 반드시 살펴봐야 하는 것이 ‘내 마음에 어떤 사랑이 있는가’입니다. 복수에서 나오는 정의인가 아니면 사랑에서 나오는 정의인가가 중요합니다. 사랑을 부르짖는 경우라면 ‘정의가 뒷받침이 되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자녀를 사랑한다고 해서 무분별한 행동을 방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옳지 않다고 말해 주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견책하고, 책망하는 것도 사랑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누군가에게 정의를 외칠 때 우리 마음에 진정한 사랑이 있어야 정의입니다. 정의 없는 사랑, 사랑 없는 정의, 어떤 것도 올바른 사랑과 정의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함께 만나는 자리입니다. <시편> 어느 말씀에 의하면, 사랑과 정의가 서로 입 맞추었다고 합니다.
도피성은 결국 예수님의 위대한 십자가 사역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도피성의 문이 항상 열려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도피성에는 이방인이나 여행객들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문도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야만인이나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도피성 안에서만 보호 받을 수 있고, 다른 곳에서는 보호받을 수 없는 것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피함으로만 우리는 보호를 받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어디서나 쉽게 도피성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늘 우리 곁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문을 잠그시지 않습니다. 그분을 깨울 필요가 없습니다.
도피성과 예수님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도피성은 실수로 죽인 자만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피성보다 더 가까이 계십니다. 도피성을 찾아가는 사람은 때로 실패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를 찾는 자는 결코 실패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도피성으로 안내하는 안내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피할 곳이 필요합니다. 누구나 실수하고, 때로는 의도한 죄로 인해서 영혼의 도피성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께로 피하십시오. 그분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올바른 정의가 있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정의입니다. 그 징계를 달게 받을 때 우리가 하나님이 이루시는 거룩한 백성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온 열방에 나타내실 것입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5-11-08
제156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