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단] 선동인가 감동인가
선동인가 감동인가
<사도행전> 21:37~40, 22:22~29
/이재훈 위임목사
요즘 ‘사이버렉카’라는 단어가 등장했습니다. 온라인에서 특정인에게 일어난 이슈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비판하는 일에 참여하는 콘텐츠로 이익을 얻거나 이익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그 일을 이슈화하는 유튜버에 대한 별칭입니다. 세상은 지금 사이버렉카들에 의해 선동의 시대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열렸던 복음주의 선교대회인 서울-인천 제4차 로잔대회를 ‘종교통합운동’이라고 끊임없이 선동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울-인천 제 4차 로잔대회 내용이 CGN으로 오전 저녁 모두 생중계 되었는데도 내용은 전혀 들어 보지도 않고, 아직도 그 선동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10년, 20년 함께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 하던 목사님들이 그것이 절대 아니라고 권면해도 듣지 않고, 선동적인 사이버렉카들의 터무니없는 주장과 선동에 의식화되어 버린 성도들이 그렇게 많을 줄 몰랐습니다. 여러분, 누군가로부터 받은 동영상이나 SNS 내용을 절대로 쉽게 믿지 마십시오. 스스로 찾아보는 내용도 조심해야 합니다.
해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선동은 미디어가 발전한 요즘 시대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도 선동에 의해서 매우 억울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누군가 사도 바울을 가리켜 ‘4천명의 자객을 이끌고 폭동을 일으켜 광야로 나간 이집트 사람’이라고 지목했습니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 선동에 휩싸여서 사도 바울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 이집트 사람은 사도 바울이 아닙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 사람은 수천 명의 사람을 일으켜서 예루살렘을 정복하려고 했고, 결국 로마 펠릭스 총독이 그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반란을 제압했습니다. 그 일의 주동자가 도망을 했는데, 다시 온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라고 누명을 씌운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믿었고, 그 선동에 넘어가서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그때 나타난 선동이 또 있었습니다. 또 다른 선동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이 만든 게 분명합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유대민족과 율법과 성전을 반대하며 가르치다가 성전에 이방인까지 데려와 더럽혔다”고 선동했습니다. 그 선동을 유대인들이 그대로 믿었고, 그러 인해 군중들이 난폭해져서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군인들이 사도 바울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이 사도 바울을 둘러매고 밖으로 나갔을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얼마나 억울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당시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에게 씌운 죄목은 ‘변절자’입니다. 로마 정부가 보기에 ‘반란자’로 오해가 되도록 사도 바울에게 누명을 씌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변절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요?
저도 얼마 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서울-인천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면서 유기성 목사님과 함께 ‘변절자’라는 호칭을 받았습니다. 서울-인천 제4차 로잔대회가 열린 장소 근처에 ‘유기성, 이재훈 변절자! 회개하라!’는 문구가 붙은 것도 봤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이처럼 쉽게 선동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의 생각이 점점 깊어지기보다는 순간적인 뉴스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책을 깊이 읽고 모든 사실을 두루 살피면서 면밀하게 생각하기 보다는 아주 짧은 영상, 자극적인 영상에 도취되어서 사고가 점점 마비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유튜브는 어느 한 영상을 보면 그와 유사한 주장을 하는 영상들이 알고리즘으로 계속 따라오기 때문에 세상 전부가 그렇게 보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세뇌가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이 매우 무서운 선동의 시대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성난 군중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이 법치주의 국가이고, 로마 정부가 통치하는 여러 나라들을 합법적이고 합리적으로 통치하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로마제국의 또 하나의 위대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군중심리와 선동에 휩쓸리는 상황에서 사도 바울 한 사람을 보호하고, 그가 로마 시민권이 있다는 것을 모를 때에도 무고하게 희생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면서 해명할 기회를 주는 법치국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수많은 사람이 선동에 휩싸여 흥분하고 있는데도 청중들에게조차 정중하고, 예의 있고, 품위 있는 언어로 연설을 합니다. 그 연설은 선동을 잠잠하게 하는 감동적인 연설이었습니다.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바울의 연설이 선동적인 이들의 말과 달리 감동을 주는 메시지였던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그 내용이 자신이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2장부터 바울의 신분이 죄수로 바뀝니다. <사도행전> 26장까지 계속 죄수의 신분으로 끌려 다닙니다. 사도 바울은 죄수로서 여섯 번 자기 해명을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두 번, 가이사랴에서 네 번 해명을 하게 됩니다. 이 여정을 어느 학자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이라는 말에 빗대서 ‘죄수역정(The Prisoner’s Progress)’이라고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죄수로서 보낸 여정은 어떻게 하면 자신이 억울함에서 벗어날 것인지를 해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과정을 통해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내면과 인격은 억울한 일을 당해 보면 나타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고, 증오가 일어나고, 복수심도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제가 어느 유튜버가 “유기성, 이재훈 변절자”라고 하는 말을 듣고 흥분해서 유기성 목사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가만히 있어야 되겠습니까?”라고 했더니 유기성 목사님이 너무나 평온하게 “그동안 제가 과분한 칭찬을 많이 받았는데 욕도 좀 먹어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셨습니다. 유기성 목사님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는데, 저는 막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억울한 일을 당해 봐야 인격이 나옵니다. 그 사람의 내면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해명의 기회를 얻었으면 자신이 문제없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시간을 사용하고 싶지 않을까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상황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변호하는데 시간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보여준 감동입니다. 그는 자신이 위기에 처하고, 죄수의 신분에 있을 때조차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타나기를 원했습니다.
세상을 선동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랬을까요? 선동하는 이들은 모두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감동시키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초점을 둡니다.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해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변혁
둘째, 그 내용이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해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변혁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현재 모습이 “유대인에 대한 변절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한 변혁(transformation)”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22장 전체에서 고백하는 내용의 핵심은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나는 그분이 살아났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제자들이 그런 소식을 전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난 믿지 않았는데 내가 부활하신 그분을 만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분은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나를 부르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과 이후에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자신의 비전과 야망, 꿈을 청취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제거하는 일이 바리새인으로서 자신에게 합당하고 생각하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변혁을 경험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강렬한 빛이 임해서 그의 눈이 잠시 보지 못했지만, 그 빛이 그의 영혼을 파고 들어서 강렬한 하나님 영광의 빛을 비춤으로 변화 되었습니다.
“‘어둠에서 빛이 비치라’고 명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셨기 때문입니다”(고전 4:6).
빛을 통해서 잠시나마 눈이 멀게 됐지만, 그의 영혼이 빛을 보게 된 것을 표현하는 내용입니다. 일반적으로 표현하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목표를 세우고 변화를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겠다고 목표와 비전을 설정해서 노력하는 것도 일부 변화를 만듭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야말로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변혁’이라는 더 강렬한 단어를 쓸 수 있습니다. 단지 체인지(change)가 아니라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것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온전한 믿음은 내 머리 속에 어떤 지식을 더 넣는 게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남을 통해서 변화 되는 것입니다. 지식은 내 머릿속에 담겨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지식이 많아질수록 더 교만하고, 자신의 생각에 더 갇혀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예수님과의 만남은 내 지식을 바꿉니다. 새롭게 합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많은 성경 지식이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해석되지 않는다면 자신을 교만하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그랬고, 율법주의자들이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자신이 어떻게 변혁이 됐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해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변혁
셋째, 그 내용이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해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변혁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나의 비전이 아니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부르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비전으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부르셨다는 부르심, 그 부르심에 사로잡힐 때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엄밀히 말해서 ‘비전’보다 ‘부르심’이라는 단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만든 비전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비전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나의 비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을 부르셨을 때, 그 부르심의 내용을 아나니아에게 가서 듣도록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2장 10절을 보면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거라 거기서 내가 할 일을 모두 일러줄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직접 알려 주실 수도 있는데 왜 굳이 아나니아에게 가서 듣게 했을까요? 사도 바울의 부르심은 개인적인 부르심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부르심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부르심을 가지고 활동했을 때 누군가 “맞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이다”라고 대변해 줄 수 있는 이들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첫 번째 사람이 아나니아였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를 통해서 그 부르심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아나니아가 또 다른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의 부르심에 대해 설명해 줍니다. 그 부르심을 듣게 된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울을 인격적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 하느냐?” 이름을 두 번 부르신 것은 매우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왜 나를 핍박 하였느냐?”고 하셨을 때 사도 바울이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직접 핍박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을 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발견됩니다. 예수님은 핍박받는 성도들과 함께 핍박받고 계십니다. 여기서 그분이 우리의 머리시며, 우리가 그분의 몸으로써 한 몸이라는 바울의 교회론이 나옵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을 뿐인데 예수님이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핍박이 곧 예수님에 대한 핍박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일시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바울이 엎드려졌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기간 동안 사도 바울이 영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변혁을 경험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영에 대하여 눈이 밝은 사람이 되는 변화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가?
<사도행전> 21장 후반부터 22장 전체에 이르기까지 사도 바울이 해명의 길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해명할 기회에서 자신의 변명이나 억울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고, 그분이 나를 어떻게 만나 주셨으며, 내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간증합니다. 그래서 감동이 있습니다.
여러분, 선동의 시대, 선동에 끌려가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선동하는 자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을 받아 부활하신 예수님만을 나타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무엇이 따라야 할 것이고, 무엇이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인지 분별하기가 어려운 때가 많습니다. 그 분별의 기준은 분명합니다. 자신을 드러내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가?입니다. 이 한 가지 기준으로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따라가야 할 것인지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악법저지를 위한 2백만 연합예배를 주창하신 부산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님이 온누리교회 모임에서 말씀하시면서 눈물 흘리는 진심 어린 모습을 보면서 그분이 정말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지키고, 대한민국을 지키고, 그리스도를 드러내고자 하는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함께 참여하고자 합니다. 세상의 선동이 아닌 성령의 감동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10-19
제15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