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강단] 성령과 주의 말씀
성령과 주의 말씀
<사도행전> 19:1~20
/ 이재훈 위임목사
마케도니아 지역을 중심으로 2차 선교여행을 했던 바울 일행이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바울의 여러 차례 선교여행은 언제나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왔다가 또다시 여행을 떠나고,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고, 재정비해서 또다시 여행을 떠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2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바울은 그동안 복음을 전했던 지역을 다시 방문하기를 원합니다. 세 번째 여행에서는 에베소라는 지역을 방문합니다. 에베소는 당시 인구 2십만 명의 대도시였습니다. 바울이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1차 선교여행 때 복음화 하려고 했었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지역입니다. 하나님이 다시금 문을 열어주셔서 아시아 지방을 다니면서 결국 에베소에 이르게 됩니다. 에베소 지역에서 3년 가까이 지내면서 장기적인 사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때와 우리의 때가 다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인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일이 연기되면 실패한 것이며, 꿈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지만, 연기된 하나님의 계획이 놀랍고 풍성한 열매를 가져옵니다. 우리 시간표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계획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의 계획, 나의 시간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고 조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우리가 이루어가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계획이 다르구나’라고 여기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평강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거절은 영원한 거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연기는 더 큰 열매를 거두게 하시려는 계획인 줄 믿습니다.
성령님의 역사와 성령 세례의 축복
에베소 지역에서는 두 가지 특별하고 두드러진 사역이 나타납니다. 첫째, 성령님의 역사와 성령 세례의 축복이 나타납니다. 바울이 에베소의 몇몇 제자들에게 “여러분은 믿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그들의 신앙에서 점검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더욱 성장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에는 분명한 성장의 단계가 있습니다. 연약한 어린아이의 신앙이 있고, 강건하고, 확신 있고, 능력 있는 신앙이 있습니다. 날마다 의심과 유혹에 휩쓸리고 무너지는 신앙이 있는 반면 다른 누군가를 붙잡아 줄 수 있는 성숙하고, 강인한 신앙이 있습니다. 나 중심적인 신앙에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사람들에게 증거되기를 원하고, 하나님 나라 중심의 신앙으로 변화되는 뚜렷한 신앙의 변화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성령님의 세례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세례가 성령님이 행하시는 사역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시는 사역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누구도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분명합니다. 새 생명을 주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런데 거듭나 새 생명을 얻은 성도임에도 구원받은 자, 거듭난 자,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축복과 확신, 성숙함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성령의 세례를 경험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고 할지라도 성령의 세례를 경험하지 못한 성도들은 언제나 연약합니다. 확신과 기쁨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주로 모시지 못합니다. “나의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고백하지 못합니다. 누군가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증거하지 못합니다.
R.A. 토레이는 이것을 ‘잠재적 사건’과 ‘체험적 사건’이라는 단어로 구별해서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면 그리스도 몸의 지체로 연합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이 됩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직 확신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단계를 ‘잠재적 사건’이라고 비유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거듭남을 설명하실 때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거듭남이 이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은 거듭남의 신비는 우리가 어느 한 시점, 어느 한 체험을 거듭남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것들은 거듭난 이후 우리가 체험하는 느낌의 경험이지, 거듭남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신비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시키는 잠재적 사건으로써 신비로운 일입니다. 성령의 세례가 임하심으로 우리가 그것을 체험적 사건으로 확신하게 됩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믿는 모든 성도와 한 몸임을 느낍니다. 체험합니다. 실감합니다. 깨닫습니다. 그렇게 행동합니다. 나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싶어도 그리스도의 한 몸 됨,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 절제합니다. 감정도 절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된 다른 지체들을 배려합니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여러분이 믿을 때…”라고 질문합니다. 그들은 이미 믿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바로 그때’라고 해석할 수 있고, ‘예수님 믿고 난 후에’라고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어떤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이 사람들은 아직 믿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19절에서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 비로소 진정 믿게 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분들은 성령의 세례가 거듭남과 동일한 거라고 주장하는 해석의 관점입니다. 그런데 이 관점이 어색한 이유가 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누가가 기록한 책인데, 수식어를 붙이지 않고 그냥 ‘제자들’이라고 한 것은 분명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을 말하는 것이지 다른 제자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제자들’이라고 한 것 자체가 이미 믿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또 ‘믿는다’는 단어를 쓸 때는 언제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성령을 받았습니까?”라고 질문한 것입니까? 그 의미는 내가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체험이 있느냐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내가 자각할 수 있느냐, 인식할 수 있느냐, 체험했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 그 자체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성령의 세례는 체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고 체험하는 것은 거듭난 이후 성령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심으로 체험하는 것이지 거듭난 그 순간을 우리가 특정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도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음에도 아직 성령이 내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곳에 도착해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받기를 기도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아직 성령이 내리시지 않았고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행 8:15~16).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의 세례가 임하지 않은 사람은 구원은 받지만 구원받은 사람으로써의 능력과 확신, 증인의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세례를 사모해야 합니다. 이것은 선물입니다. 율법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성령의 세례가 온다는 법칙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모든 역사를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성령 세례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에게도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세례의 체험을 허락해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주님 되심을 고백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나에게도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주옵소서”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세례란 성령 충만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체험입니다. 성령 충만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사건이 성령의 세례입니다. 그 이후 계속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제자들에게 “여러분이 믿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그들이 “아니오. 우리는 성령의 있음도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을 듣고 믿었지만, 성령님을 알지 못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존재도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성령님을 ‘잊혀진 하나님’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만큼 잊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님이 잊힌 하나님이 아니시기를 바랍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도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고, 그분도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셔서 행하신 일을 우리가 믿게 하고, 우리를 그분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능력을 부어주시는 분임을 믿으십시오. “성령님, 내 안에 온전히 오시옵소서. 나를 주관하셔서 내 안에 임하시옵소서”라고 간구하며 성령님을 환영하고, 사모하고, 그분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기를 소원하십시오, 그분이 반드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줄 믿습니다.
성령의 세례가 임할 때
“바울이 말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자기 뒤에 오실 분을 믿으라고 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입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곧바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손을 얹자 성령이 그들에게 내려 그들이 방언으로 말하며 예언하게 됐습니다. 그들은 모두 열두 사람 정도였습니다”(4~7절).
이들은 요한의 세례만 받았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요한의 세례는 그저 착한 행위를 위한 서약에 불과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가 임하지 않으면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령의 세례가 임하는 패턴을 보면 일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을 때 동시적으로, 어떤 사람 믿고 난 이후에, 어떤 사람은 물세례를 받을 때 동시적으로, 어떤 사람 물세례를 받은 훨씬 이후에, 어떤 사람은 물세레를 받기 이전에 성령의 세례를 먼저 받습니다.
성령의 세례가 임할 때 우리는 확신을 누리고, 기쁨을 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주로 모시고 살아가고,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이 됩니다. 때로는 은사와 함께 나타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은사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아무런 은사도 없이 능력과 확신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은사, 섬김의 은사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두란노 서원과 사역자 파송
둘째, 두란노 서원을 통해 사역자들을 훈련해서 아시아 전역에 파송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이 두란노 서원에서 훈련받은 이들에 의해서 세워지고, 목회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 가운데 몇 사람은 마음이 완고해져 믿기를 거부하고 공공연하게 그 가르침을 비방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데려다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가르쳤습니다. 이 일이 2년 동안 계속돼 아시아 지방에 사는 모든 유대 사람들과 그리스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듣게 됐습니다”(9~10절).
에베소에 있는 두란노 서원은 두란노라는 사람의 개인 서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을 비방하고 대적하자 작은 서원에 제자들을 따로 데려다가 2년 동안 가르칩니다. 이것이 신학교 훈련 기관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일행만이 아니라 아시아 전 지역에 파송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이들을 훈련하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와 주의 말씀의 역사가 연결되어 순환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는 성령과 주의 말씀에 사로잡힌 교회였습니다. 교회사를 통해 나타난 모든 부흥도 동일한 모습입니다. 에베소에 성령의 세례가 임했을 때 18장에 나오는 아볼로라는 사람의 말씀 사역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아볼로는 성경에 능통해서 주의 말씀을 많이 가르쳤지만, 복음의 진리를 확실하게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바울의 동역자입니다. 그들은 로마에서 예수를 믿었는데 클라오디오 총독의 칙령으로 쫓겨나서 고린도에 왔다가 바울을 만나고, 그와 함께 에베소에 정착한 신실한 동역자였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덕분에 아볼로가 더욱 분명하게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역의 토대 위에 성령의 세례가 임했습니다. 성령의 세례가 임한 사람들은 주의 말씀에 대한 더 깊은 갈급함이 있습니다.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말씀을 배웠다고 했는데, 자료에 의하면 그들이 모인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3~4시였습니다. 무더운 날씨 때문에 사람들이 오지 않는 시간, 비어있는 시간입니다. 모이기 어려운 그 시간에 그들은 더 모였습니다. 주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 때문입니다. 얼마나 말씀을 사모하면 육신의 피로,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주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은 성령의 세례 받은 사람들의 중요한 특징이고, 주의 말씀의 사모함은 또 다른 성령의 역사 통로가 됩니다. 여러분, 성령과 주의 말씀은 언제나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동행합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주의 말씀을 향하게 되고, 주의 말씀을 향하는 자들은 언제나 성령의 역사 통로가 됩니다. 그때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11~12절).
에배소에 있던 많은 우상들, 마술로 인하여 귀신들이 성행하던 그 지역에서 하나님이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에베소에서 바울을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자 마술을 하는 유대인들이 흉내를 내서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힘입어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이용할 정도였습니다. 유대 사람 대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이 선포하자 악한 영이 “내가 예수를 알고 바울도 안다. 그런데 너희는 누구냐?”고 했습니다. 바울도 알고, 예수님도 알지만 너희는 누구냐고 묻는 것입니다. 악한 영에게 놀림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선포하면 악의 영이 떠납니다. 그런데 믿지 않으면서 이용하려고 하면 “너는 누구니?”라고 귀신이 조롱합니다. 우리가 악한 영을 대적하고 내쫓을 때 악한 영이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고 너도 안다”고 대답하기를 축원합니다.
성령님과 주의 말씀의 역사가
사회적 영향력으로 일어났다!
그때 사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에베소는 우상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마술의 도시였습니다. 엄청난 마술책이 횡행했습니다. 그러니 귀신들도 횡행했습니다. 에베소에서 마술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회개하자 자신들이 의지하던 마술 책을 모두 불에 태우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에베소에 사는 유대 사람들과 그리스 사람들이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주 예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믿게 된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자신의 악한 행위들을 고백하고 공개했습니다. 마술을 하던 많은 사람들은 그 책들을 모아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태워 버렸습니다. 그들이 그 마술 책들의 값을 매겨 보니 모두 5만 드라크마 정도가 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주의 말씀은 점점 힘 있게 퍼져 나갔습니다”(17~20절).
5만 드라크마는 오만 명의 하루 품삯입니다. 한 사람의 139년 연봉에 해당합니다. 매우 많은 돈입니다. 에베소 도시가 변화된 것입니다. 회개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재산을 불태워 버린 것입니다. 자신들의 행위가 얼마나 거짓되고, 악한 것임을 깨닫고 회개한 것입니다. 성령님과 주의 말씀의 역사가 사회적 영향력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이 일어난 이후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사회 변혁이 있습니다. 노비 제도가 폐지되고, 축첩제가 폐지되고, 조혼이 철폐되는 등 사회의 구습들이 변혁되었습니다. 성령과 주의 말씀은 단지 예배당 안에서의 변화가 아닙니다. 반드시 그 사회의 불리함, 정직하지 못한 것, 더러움, 악의 영들이 판치는 모든 것들이 변화되는 물결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적 교회의 모습입니다. 한국 교회가 성령과 주의 말씀을 의지해서 사회 변혁의 열매를 맺기를 원합니다. 에베소와 같이 우상의 도시, 마술의 도시, 귀신이 판치는 한복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서 귀신도 놀라 떠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8-31
제150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