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단 - 주의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
주의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
고린도후서 12장 1~10절
/ 이재훈 목사
두란노서원에서 발간하는 잡지 <빛과 소금> 4월호에서 희소 질환을 앓고 있는 분들의 신앙고백을 다루었습니다. 그분들이 앓고 있는 질병 대부분이 매우 생소한 이름들입니다. 눈물이 잘 안 나와서 눈에 염증이 생기기도 하고, 침이 잘 나오지 않아서 밥을 먹을 때나 말을할 때 물을 계속 마셔야 하는 ‘쇼그랜 증후군’이 있습니다. 시야가 점점 좁아지면서 결국 실명하게 되는 ‘어슈어 증후군’도 있습니다. 피부와 점막에 발진와 수포가 계속 생기고 피부가 벗겨져서 옷이나 이불만 덮어도 살점이 달라붙어 떨어지는 ‘스티븐 존슨 증후군’도 있습니다. 일상생활 자체를 고통스럽게 하는 질병들입니다. 이 질병들은 바울이 고백한 ‘육체의 가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회소 질환을 앓는 분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육체의 가시를 통해서 주님을 깊이 만나게 되었고, 은혜에 감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조현병을 앓고 있는 한 분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이 조현병”이라고 고백합니다. 조현병이라는 가시를 통해서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릴 수 있다고 합니다. 육체의 가시가 날마다 자신 안에 있는 교만을 꺾는 영적인 안전장치 같다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도 당시 의학 기준으로 볼 때 희소 질환을 앓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육체의 가시’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갔고, 그 육체의 가시를 통해서 어떻게 주님을 경험했는지를 집중해서 묵상해야 합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교만하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육체의 가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동일한 희소 질환을 앓고 있으면서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있고, 믿음의 눈으로 해석해서 감사의 제목으로 여기거나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족하다”는 고백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해석의 차이입니다.
‘육체의 가시’와 ‘약함’을 자랑하다
“받은 계시들이 지극히 큰 것으로 인해 나로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습니다. 이는 나를 쳐서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7절).
바울은 지극히 큰 계시와 더불어 지극히 아픈 가시를 함께 받았습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천국이라고 일컫는 곳입니다. 바울은 우리를 위해 예비되어 있는 곳이자 새 하늘과 새 땅의 일부를 미리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이 모진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시려고 천국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체험만으로도 바울은 모든 사도들보다 더 큰 영향력과 더 높은 권위를 가지고 사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14년 동안 이 체험에 대해 침묵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체험을 말할 때도 그 경험을 한 사람이 자신이 아닌 것처럼 3인칭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바울을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전체 문맥을 보면 바울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엄청난 계시와 더불어 아픈 가시를 받았고, 이 두 가지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했습니다. 만일 바울에게 지극히 큰 계시만 있고, 지극히 아픈 가시가 없었다면 매우 교만해졌을 것입니다. 반대로 아픈 가시만 있고 지극히 큰 계시가 없었더라면 절망과 좌절에 빠졌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지극히 큰 계시와 지극히 아픈 가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지극히 큰 계시의 체험은 우리를 자신감 있게 하고, 의기양양하게 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간증하면서 사역할 수 있는 엄청난 자원입니다. 지극히 아픈 가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고, 일상생활을 무너뜨리는 고통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지극히 큰 가시를 택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둘 중에서 한 가지를 택하라고 한다면 지극히 아프게 한 가시를 선택했습니다. 바울이 지극히 큰 계시를 경험한 것을 말할 때 자신이 아닌 것처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14년 동안이나 침묵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이 말함으로써 얻는 영적 유익보다 잃어버리는 것이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게 교만이 솟아오르게 되고, 각색되고, 보지 않은 것을 말하게 되고, 본 것을 말하지 않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사도 바울처럼 천국의 일부를 경험하고 나서 많은 사역을 하다가 후반부에 이단으로 빠진 이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체험을 통해서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14년 동안 자신의 체험을 말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이 체험을 모든 고난을 이겨내는 힘으로 사용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체험한 계시를 자랑하기보다 자신을 아프게 하는 육체의 가시와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고통은 우리를 약하게 하고,
그 약함 속에서 은혜를 체험해야 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해 자랑할 것이나 나 자신을 위해서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않겠습니다”(5절).
바울과 상관없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0~12장에 걸쳐서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자랑을 하고 있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어리석어 보이는 일, 유익해 보이지 않는 일을 왜 그가 해야만 했을까요? 대적하는 이들이 스스로를 포장하고, 과장하고, 자랑함으로 대적하게 하고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적자들은 사도 바울은 영적 체험이 없는 사람이고, 자신들이 영적 체험이 있는 사람인 양 포장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로부터 추천서를 받아온 것을 가지고 “바울에게는 추천서도 없지 않느냐”며 바울의 권위를 무너뜨렸습니다. 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다니면서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행했던 바울을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매도했습니다. 자기 포장과 과대한 자기 자랑에 성도들이 쉽게 넘어간 것이 문제입니다. 바울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어떤 체험을 했고, 어떤 사람인지를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자기 자랑의 절정과 핵심에 무엇이 있습니까? 자신이 얼마나 율법에 능통했는지, 자신이 실제 하늘을 경험했는지가 아닙니다.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연약함에 처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가시가 자신을 연약하게 만들지만, 그 연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흘러넘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율법에 해박한 지식과 천국의 일부를 경험한 체험이 아니라 기도해도 고쳐주시지 않는 육체의 가시가 자신을 연약하게 하고, 그 덕분에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에서 인터뷰한 희소 질환을 앓고 있는 분들에게도 일관된 고백이 있습니다. 정말 자랑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이 육체의 가시를 통해서 경험하는 연약함이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 통로라는 것입니다. 고통 그 자체는 누구도 받고 싶지 않습니다. 필립 얀시는 고통을 “아무도 받고 싶지 않은 선물”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고통은 꼭 희소 질환을 겪어야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사업이 부도나야 느끼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이 느끼기에는 황당할 정도로 사소한 것도 고통일 수 있습니다. 고통은 사람마다 기준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왜 고통스러운가’보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았는가’입니다. 남편을 죽인 인디언들에게 다시 들어가 16년 동안 선교사역을 했던 엘리자베스 엘리엇 선교사님이 고통에 대한 책을 썼습니다. <고통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라는 책입니다. 그 책에서 고통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고통은 원치 않는 것을 갖거나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느끼는 기준이나 강도가 아닙니다. 그 고통을 통해 과연 무엇을 경험하고 있고,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서 약함을 경험하고, 그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고통이 없어야 주의 은혜가 넘친다”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고통이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고통이 없으면 주의 은혜가 족해야 하는데, 고통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말콤 멀거리지’라는 분이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고통을 모두 없앤다고 해 보라. 그런 세상은 정말 무시무시한 곳일 것이다. 자만과 교만에 빠지기 쉬운 인간 성향을 바로 잡을 모든 것이 사라졌으니까 말이다. 인간은 지금도 충분히 나쁜데 고통을 겪지 않으면 도저히 못 참아 줄 정도로 나빠질 것이다.”
고통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인간은 사악한데, 만일 인간에게 고통이 없다면 인간은 얼마나 더 악해질까요? 어떤 종류의 고통이든 고통은 우리를 약하게 하고, 우리는 그 약함 속에서 주님의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내가 약할 때가 곧 강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이 자신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육체의 가시가 떠나도록 주님께 세 번이나 간구했을 때 주신 말씀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왜냐하면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약한 것들에 대해 크게 기뻐하며 자랑할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약한 것들과 모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경 가운데 있으면서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하기 때문입니다“(9~10절).
만약 바울의 간구에 주님께서 치유해 주셨다면 더 큰 권위를 인정받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더 많은 주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그냥 두시고, 선물처럼 간직하게 하심으로써 바울을 약하게 하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바울이 받은 지극히 큰 계시를 왜곡해서 사용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겸손하게 하셨습니다. 연약함 가운데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하신 말씀 그대로, 바울이 “주님의 은혜가 내게 족합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주님의 은혜가 내게 족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한 것은 지극히 큰 계시의 체험이 아니라 지극히 아프게 했던 육체의 가시였습니다. 많은 기적이 나타나면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고 고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더 많은 기적, 더 큰 기적을 원하고 바라게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십시오. 이스라엘 역사에 기적이 없어서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했습니까? 불순종했습니까? 출애굽의 기적, 광야의 수많은 기적이 있었지만 그들은 우상을 만들고 불순종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나가게 한 것은 기근이요, 광야요, 다른 민족들의 침략으로 인한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기적을 보여주셨을 때 사람들은 그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 주의 은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는 고백은 오히려 자신의 약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할 때 나옵니다. 성경을 보면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강함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약함이 있고,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약함이지만 하나님 보실 때는 강함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는 애굽의 왕궁에서 40년 동안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가 출애굽의 지도자로 부름을 받은 것은 왕궁에서 40년 동안 교육을 받았을 때가 아닙니다. 모세의 장점이 오히려 약점이 되었습니다. 40년 교육의 결과물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해서 발생한 살인이었습니다. 모세는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광야의 40년 동안 모세는 지극히 연약한 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양들과 더불어 살면서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말을 잘못한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저는 말을 잘못합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실어증에 가까운 상태에 빠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론을 붙여 주셨습니다. 모세의 왕궁에서의 40년 생활이 만들어 낸 교만이 광야에서 씻겨 내려가고 난 이후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반대로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가 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을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까? 그에게 있었던 치명적인 약점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인류를 세상에 존재하게 하는 조상이 되려면 일단 믿음이 좋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를 낳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이 두 가지 조건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갈데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는 후예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보고 배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상을 섬기지 않았겠습니까? 아브라함의 여정을 보면 그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기근이 나자 애굽으로 내려가고, 애굽으로 내려가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것을 보면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자격이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욥입니다. 욥은 창세기 시대의 인물입니다. 욥처럼 의롭고 성실하고 자녀를 많이 나을 수 있는 가정이 믿음의 조상에 딱 맞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셨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연약함, 약점, 단점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오히려 하나님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약점과 단점,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지 않신다고 말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최저의 기준에 해당하는 인물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셔서 역사하십니다.
진짜 그리스도의 능력
바울을 겸손하게 하고, “주님의 은혜가 내게 족합니다”라고 고백하게 한 것은 셋째 하늘을 체험한 계시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늘 아픔을 주었던 육체의 가시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기 때문입니다. ‘머문다’는 것은 로마서 8장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내게 머문다고 할 때 쓰는 단어와 같은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임하면 육체의 가시가 떨어져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왜 주님은 그 가시를 두실까요? 능력이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약함을 참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최고의 능력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려놓으신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능력입니다. 자신을 희생해서 대속제물로 내려놓으신 능력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 숭배하려고 할 때 예수님이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모진 고통은 참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연약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계시 체험이 자신을 강하게 하는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가시가 그를 하나님의 능력에 더욱 의존하게 하고,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났음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말씀하신 주님이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왜냐하면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은혜는 어떤 고통 속에서도 우리에게 충분합니다. 고통이 사라져야 주의 은혜가 족한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육체의 가시와 함께여도 “주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과거와 미래의 은혜를 고백하기는 쉽습니다. 과거는 이미 끝났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 고통 속에서 주의 은혜를 고백하기는 어렵습니다. 은혜가 족하지 않으면 고통이 더 크게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를 압도해 버릴 것입니다.
고통은 결코 주님의 은혜보다 크지 못합니다. 주님의 은혜는 새롭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고통보다 무겁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어떠한 육체의 가시 속에서도 충만합니다. 바울처럼 연약함 가운데 처하게 하실지라도 그 연약함 속에서 “주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진짜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주의 은혜가 우리에게 족한 줄로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주의 은혜가 내게 족합니다.
주님의 능력이 약함 속에서 머물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하옵소서.
고난이 찾아올지라도 그 속에서
“주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 고백하며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1-04-03
제13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