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주민들의 영을 깨우고 복음 전하는 서점
그 보석 같은 청년들을 만났다
북한 주민들의 영을 깨우고 복음 전하는 서점
탈북민 최영일 성도의 간절하고 소중한 기도제목
얼어붙은 고용시장, 천정부지 치솟는 집값, 코로나19까지….
이 시대 청년들은 요즘 어떻게 살고 있을까? 살기가 얼마나 팍팍했으면 주위 청년들이 하나같이 “요즘 사람 구실 하기 너무 힘들다”면서 우는 소리를 참 많이 한다. 크리스천들은 살기가 더욱 힘들다. 세상 속에서 살면서 모범까지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크리스천 청년들에게는 대인관계와 직장생활에서 완수해야 하는 숙제가 하나 더 있는 셈이다. 삶과 신앙, 일과 신앙이 조화를 이루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은데 말이다. 그래서 삶과 신앙이 조화를 이루는 크리스천 청년들이 보석보다 귀하다. 그 보석 같은 청년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만났다. 그 네 번째 주인공은 통일 이후를 준비하고 있는 탈북민 최영일 성도(하나공동체)다.
/ 김영선 기자 k4458@onnuri.org
북한에는 ‘3계층 51개부류’라는 신분제도가 있다. 이 신분제 중에서 최하위가 바로 기독교 가정이다. 기독교는 김일성 일가의 우상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기 때문이다. 북한 공산당은 기독교 가정을 개마고원, 탄광, 철도 등지로 강제이주 시키고 서로를 감시하며 신분 상승의 기회를 철저하게 제한시킨다.
최영일 성도의 외가와 친가는 기독교를 믿는 가정이었다. 최영일 성도의 친가는 평양과 더불어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렸던 평안북도 선천에서, 외가는 중국 길림성 류하현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해방 이후 평양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북한 공산당은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양가를 양강도 신파군(현 김정숙군)으로 강제 이주 시켰다. 그곳에서 최영일 성도의 부모님이 만나 가정을 꾸렸다. 최영일 성도 가정은 강제 이주를 거듭한 끝에 함경북도 온성군 탄광에 자리를 잡았다. 중국 땅이 훤히 보이는 곳이었지만 세뇌교육과 학습된 무기력 때문에 탈북은 생각지도 못했다.
“저는 2남 1녀 중에서 장남이었습니다. 중고등학생 때 학급에서 공부를 꽤 잘했습니다. 대학시험을 보고 진학을 하려는데 아버님이 ‘너는 출신성분 때문에 대학에 가도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없다’고 만류하시더라고요. 아버님과 어머님이 우리 가정은 기독교 때문에 고초를 겪는다고 말씀하신 적은 없지만, 눈치로 알고 있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아버님을 따라 탄광에서 일했습니다.”
최영일 성도는 성인이 될 때까지 조부모나 부모에게 복음을 전혀 듣지 못했다. 조부모까지는 신앙이 전수 되었는데 부모세대에 이르러서는 신앙이 단절됐기 때문이다.
“대대로 전수되던 신앙이 북한 공산당에 의해 뚝 끊겼습니다. 성경도 없고, 기독교적인 말은 입 밖으로 내뱉을 수도 없었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어렸을 때 친할머니께서는 자주 제 머리맡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계셨는데 기도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라디오로 처음 들은 ‘복음’
최영일 성도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남한 방송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접했다.
“저희 철도부에 제가 좋아하던 고향 선배 한 분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그 선배의 아내가 처가에 갔다면서 저를 집으로 초대하셨습니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자려고 누웠는데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그 선배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라디오로 남한 방송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남한 방송에 완전히 중독돼서 밤마다 라디오를 붙잡고 살았습니다.”
최영일 성도가 처음 들은 남한 라디오는 KBS 한민족교육방송과 극동방송이었다. 최영일 성도에게 남한 방송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라디오에서 남한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북한에서 배우기로는 남한은 미제 군홧발에 밟히는 식민지였는데 라디오로 듣기로는 정말 대단한 나라였거든요. 더욱 충격적인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사랑하라’, ‘용서라하’는 고리타분한 소리를 믿는 바깥세상이 미쳐 돌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웃음).”
탈북 그리고 9년 동안의 훈련
최영일 성도는 라디오로 남한 방송을 들으면서 현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탈북했다. 중국에서 한 선교사를 만났는데 그 선교사 덕분에 최영일 성도의 삶에도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제가 중국에는 먹을게 쌓여있다고 가족들에게 탈북을 제안했는데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탈북했습니다. 떠돌고 떠돌다 한 신부님을 통해 선교사님 한 분을 소개받았습니다. 그 선교사님 댁에서 몇 달을 함께 지냈습니다. 그때는 복음을 향한 저의 마음이 한 톨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신앙 서적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심심하기도 하고 궁금해서 성경과 신앙서적을 읽었는데 성경에는 제 상식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내용이 정말 많았습니다. 선교사님께 조금씩 물어보면서 천천히 복음에 젖어 들었습니다.”
중국 선교사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북한에 남아 있는 최영일 성도의 가족 탈북을 도왔다. 이일을 계기로 최영일 성도가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복음을 받아들였다.
“하나님의 역사라는 단어 말고는 제 삶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가족들은 안전한 지역으로 흩어지고 저는 9년 동안 중국 지하교회와 신학교를 돌면서 신앙훈련을 받았습니다.”
정말 고마운 하나님의 사람들
“영일 형제 이제 한국으로 갑시다.”
시드니 온누리교회 한 성도가 여비를 후원하고, 중국 선교사들이 금식기도를 하면서 최영일 성도 가족의 한국행을 도왔다.
“정말 기적같이 제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라오스에서 배낭여행객을 만나 크리스천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를 소개받은 적도 있습니다. 그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사장님이 마침 태국에서도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어서 정말 안전하게 태국 한국대사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석 달 동안 태국 대사관과 연결된 교회에서 머물렀는데 그때 태국 대사님이 온누리교회 고 윤지준 장로님이셨습니다. 날마다 새벽기도를 나오셔서 탈북민 한명 한명과 악수를 해주셨는데 그 손이 얼마나 따듯했는지 모릅니다. 정말 큰 위로가 됐습니다.”
꿈에 그리던 한국 땅을 밟은 최영일 성도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온누리교회다.
“제가 교회를 선택하는 기준은 단 하나입니다. 통일이 됐을 때 북한 주민들에게 알맞은 교회가 어딜까입니다. 중국에 있을 때 온라인으로 많은 교회 예배를 드렸는데 자유롭고 격의 없는 온누리교회 예배가 제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영일 성도가 한국에서 두 번째로 찾은 곳은 학교와 서점이다.
“통일이 되면 북한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저부터 배워야겠더라고요. 그래서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지난해에는 박사학위도 받았고요. 공부하면서 꿈이 하나 생겼습니다. 북한에도 양질의 서점을 만드는 꿈입니다. 북한 주민들의 영을 깨우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저의 사명입니다. 온누리교회 성도님들께서 복음 통일을 위해서, 북한 주민들의 복음화를 위해서 끝까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21-04-03
제13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