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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상한 갈대 위에 드리운 날개

[주일강단] 상한 갈대 위에 드리운 날개

2026-05-15 제1589호

상한 갈대 위에 드리운 날개
<룻기> 2:1~13
/ 이재훈 위임목사
 
가정을 생각하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진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정 안에서 때로 불행해 보이는 과정을 통해서 아름다운 결말로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적은 언제나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선하신 목적으로 가는 길이 언제나 평탄하지만은 않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괴롭고 힘들어하는 여정을 통해서 선한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의 시야는 매우 좁아서 하나님의 섭리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는 것은 하나님은 단지 우리를 편안한 삶으로만 인도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한 갈대 같은 나오미의 가정
 
<룻기>는 절망과 고난에 빠져 있던 ‘나오미’라는 여인의 가정이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에 쓰임 받는 가정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책입니다. <룻기> 1장에 나타난 나오미의 가정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매우 쓴 맛을 보았습니다. 쓰디쓴 하나님의 섭리, 매우 준엄해 보이는 하나님의 고난을 받았습니다. 베들레헴이 고향이었던 이 가정이 모압으로 이주하고,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두 이방 여인을 며느리로 들였지만, 한 명은 돌아가고, 룻만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에게 나오미가 외쳤습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마라. 마라라 부르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치셨고 나를 고통 가운데 두셨기 때문이다.” 
‘나오미’란 이름의 뜻은 기쁨입니다. ‘마라’는 ‘쓰다’입니다. 쓰디쓴 인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괴롭게 하셨고, 쓰디쓴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룻기> 2장에서 하나님의 쓰디쓴 섭리가 달콤한 섭리로 변화됩니다. 어떻게 상처 입고 절망 가운데 있는 가정이 하나님의 소망으로 다시 살아나는지 그 섭리를 보여 줍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사 42:3). 
상한 갈대는 아주 강한 바람에 의해서 한 번 꺾여진 갈대입니다. 원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없을 것처럼 꺾여진 갈대입니다. 더 강한 바람이 불면 끊어져 버릴 것 같은 갈대입니다. 나오미의 가정이 상한 갈대와 같은 가정이었습니다. “나를 마라라 부르라”는 그 외침은 상한 갈대의 외침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상한 갈대 같은 가정들이 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깊은 상처와 갈등이 있는 가정입니다. 스스로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절망 속에 있는 상한 갈대 같은 가정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상한 갈대 같은 나오미의 가정에 하나님의 날개가 펴지기 시작했습니다.
 
상한 갈대 위에 드리워진 날개
 
“여호와께서 당신의 행실에 대해 갚아 주실 것이오. 당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날개 아래로 보호받으러 왔으니 그분께서 당신에게 넉넉히 갚아 주실 것이오”(룻 2:12).
보아스는 나오미의 가정을 알고 있었고, 모압 여인 며느리 룻을 알고 있었습니다. 룻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룻의 발걸음을 단지 착하고 선한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받으러 온 믿음의 행위’로 해석한 것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는 분이 그 갈대 위에 날개를 드리우시는 것입니다. 부러진 갈대를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보호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룻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입니다. 상한 갈대 위에 드리워진 날개가 상처 입은 가정에 소망이 찾아오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움직이고 계신다
 
오늘 말씀은 이 질문에 대답합니다.
“상한 갈대처럼 상처 입은 가정에 어떻게 소망이 찾아오는가?”
첫째, 하나님은 우리가 절망할 때 먼저 움직이고 계십니다. <룻기> 2장은 룻이 생계를 위해 이삭을 주우러 나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당시 이삭을 줍는 것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최저 생계를 유지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시어머니를 위해 자진해서 이삭을 주우러 나갔습니다. 시어머니가 시킨 것도 아닙니다. 룻은 먼저 시어머니에게 허락도 구합니다. 자신이 나오미의 며느리라는 것을 동네 사람들이 알기 때문에 어쩌면 어머니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일 수도 있어서 “이삭을 주우러 나가도 될까요?”라고 허락을 구하고 나갔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밖으로 나가 추수하는 사람들을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녀가 일하고 있던 곳은 엘리멜렉의 친척인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룻 2:3).
‘우연히’라는 단어를 씁니다.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그녀의 우연이 우연히 일어났다.”
두 번 ‘우연’이라는 단어를 써서 강조합니다. 이렇게 표현한 것은 우연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연이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할 때, 우연이 아님을 강조할 때 이런 표현을 씁니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연처럼 보이는 일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우연이 겹쳐 있습니다. 첫 번째 우연은 룻이 일꾼을 따라갔는데 보아스의 밭이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우연은 바로 그날 보아스가 자신의 밭을 방문했다는 것입니다. 부유한 지주였던 보아스는 매일 밭에 나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왠지 밭에 나가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우연이 겹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 두세 가지 우연처럼 보이는 일이 연이어 겹쳤다면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일이 두세 번 연이어 일어나거나 동시에 일어나면 하나님의 완벽하신 섭리임을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이 두 가지 우연은 나오미가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이미 일어났습니다. 나오미가 절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이미 보아스를 준비하고 계셨고, 룻을 준비하고 계셨고, 추수 때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이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우연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나오미는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이미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상한 갈대 같은 가정에 소망이 찾아오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절망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이미 움직이고 계십니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절망할 때에도 일하고 계신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심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 가정이 나오미처럼 절망 속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먼저 움직이고 계심을 믿음으로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이미 소망의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절망의 가정에 기대 이상의 넘치는 은혜를
 
둘째, 하나님이 절망의 가정에 기대 이상의 넘치는 은혜를 보내십니다. 보아스가 밭에 도착해일꾼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한다”라고 인사합니다. 그랬더니 일꾼들도  “여호와께서 주인 어르신께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때는 사사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을 찾아보기가 힘든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주인과 일꾼들이 이렇게 인사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경건한 가정이 룻의 일터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보아스가 룻을 발견합니다. 종일 열심히 일하는 룻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룻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것보다 넘치는 은혜를 베풀어 줍니다. 다섯 가지 은혜가 룻에게 베풀어집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다른 밭에 가지 말고 자신의 밭에 계속 있으라”고 말합니다. 다른 남자 일꾼들에게 “룻을 절대로 건드리지 말라”고 말합니다.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음껏 마시라”고 하고, 식사에 초대해서 베풀기도 합니다. 마지막이 은혜롭습니다. 원래 이삭은 떨어진 것만 주울 수 있는 것이 율법인데, 일꾼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일부러 이삭을 빼서 떨어뜨려라. 주울 수 있게.”
룻의 자존심을 지켜 주면서도 넘치도록 채워 주는 섬세한 이 마음은 법과 의무를 초월하는 은혜의 행위입니다.
보아스가 이렇게 행동한 것은 그의 세계관, 가치관, 인생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요, 자신이 가진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룻의 헌신을 단순한 효성이나 미덕으로만 해석한 것이 아닙니다. 보아스는 룻의 행동을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받으러 온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날개’는 <시편> 기자들의 깊은 신앙 고백이 담겨 있는 단어입니다. 
내 영혼이 주를 신뢰하오니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난이 지나갈 때까지 피할 것입니다” (시 57:1).
“하나님께서 너를 그 깃털로 감싸 주시니 네가 그 날개 아래로 피할 것이며 그 진리가 네 방패와 성벽이 되리라”(시 91:4).
<시편> 곳곳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돌보심, 은혜를 사모할 때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피하기를 기도했던 언어로 룻의 삶을 해석한 것입니다. 모압에서 빈손으로 베들레헴으로 따라온 이방 여인의 발걸음,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던 룻의 고백이 바로 여호와의 날개 아래 피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날개가 되는 사람과 사역
 
<룻기> 3장에 가면 이 ‘날개’라는 단어가 보아스의 옷자락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히브리어 ‘카나프’라는 단어가 3장 9절 “당신의 옷자락으로 저를 덮어 주십시오”라고 룻이 보아스에게 간청할 때 쓰였습니다. 2장 12절에서 ‘여호와의 날개’라고 했던 ‘날개’라는 단어가 ‘옷자락’이라는 단어로 쓰인 것입니다. 직역하면 “당신의 날개로 저를 덮어 주십시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날개가 없으니 옷자락이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이 단어를 통해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룻을 위해 “여호와의 날개 그늘 아래 보호받으러 온 네게 하나님께서 상 주시기를 바란다”라고 기도했던 보아스가 자신이 하나님의 날개가 된것입니다. 기도한 사람이 기도의 응답이 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개를 위해 기도한 보아스가 스스로 하나님의 날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상한 갈대와 같은 가정에 날개를 펴 주실 때 기도하는 사람이 그 가정의 날개가 되도록 하십니다.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그 가정을 구원하는 여호와의 날개가 되게 하십니다. 보아스가 바로 그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날개가 되는 사역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이홈 사역’은 매우 귀합니다. 버림받은 한 생명을 보호하고 양육하기 위해 위탁 가정이 되고, 입양 가정이 되는 하나님의 날개입니다. 마음으로 낳은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날개가 되는 가정입니다. 제이홈 사역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룻을 위해 기도해 주다가 자신이 룻의 응답이 된 보아스처럼, 우리 모두 가족과 자녀를 위해 기도하다가 하나님 날개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당시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재산을 사 줌으로써 생계를 이어가도록 도움을 줬습니다. 그걸 위해서는 룻을 아내로 맞이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을 그 시대는 고엘, ‘기업을 무른다’, 영어로는 ‘리디머’, ‘구속자’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보아스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은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이 가리키고 있는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보아스와 룻을 통해 이 땅에 태어나는 다윗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진정한 구속자이심을, 절망 가운데 있는 모든 가정에 소망을 주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믿음의 눈이 열릴 때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보인다 
 
셋째, 믿음의 눈이 열릴 때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보입니다. 룻이 일을 마치고 어머니에게 돌아가 모은 이삭을 가져다 드렸고, 자신이 일한 밭 주인의 이름이 보아스라고 말했을 때 나오미가 말합니다.
“나오미가 며느리에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내리시기를 바란다! 그가 죽은 우리 식구들에게 친절을 베풀더니 살아 있는 우리에게도 그칠 줄 모르는구나.’ 그리고 이어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 가까운 친척이니 우리를 맡아 줄 사람 가운데 하나다’”(룻 2:20).
나오미는 보아스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남편 엘리멜렉의 친척이며, 자신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사람인 것을 알았지만, 보아스가 희생하고 헌신해 줄 수 있다는 것을 감히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잊어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나오미가 믿음의 눈을 열게 되었고, 소망을 품게 되었고, 방향을 잡게 되었고,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오미가 보아스를 이미 알았지만 보지 못했듯이, 하나님이 준비해 놓고 계신 것을 우리가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절망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곁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소망의 길을 발견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 가운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장된 표현이지만, 이 속담 뒤에 있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늘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모두 무너진 것 같은 상황에도 하나님이 계신 하늘은 열려 있습니다. 가정에 하늘 문이 열리는 축복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구속자가 되었듯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 나오미와 룻의 가정을 구속하고 은혜를 베풀었듯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값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위해 하나님의 날개를 구하다가 자신이 날개가 되었듯이,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다가 하나님의 날개가 되셨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자녀를 위한 하나님의 날개 그늘로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날개 그늘을 경험할 때, 또 다른 누군가의 하나님 날개로 쓰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가정은 결코 우리 스스로 이루어 갈 수 없습니다. 가정의 행복도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날개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 평강을 누리는 가정이 됨을 감사하고, 절망스러운 일이 있다면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는 가정되기를 바랍니다. 나오미의 가정이 하나님의 날개를 경험한 것처럼, 상한 갈대 같은 모든 가정에게 여호와의 날개 그늘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남현영 기자 hyun0@onnu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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