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과거로부터의 자유
<마태복음> 9:9~13
/이재훈 위임목사
일본의 도자기 기술 중에서 ‘킨츠기’(Kintsugi)가 있습니다. 깨지거나 금이 간 도자기를 옻칠과 금가루를 이용해서 수리하는 전통 공예 기술입니다. 깨진 그릇을 버리지 않고, 깨어진 곳을 감추는 대신 순금으로 채워 넣어서 이전보다 훨씬 귀하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단순히 물건을 고치는 것을 뛰어넘어 상처를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다는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깨진 그릇들이 순금으로 채워져 아름다운 디자인이 되고, 멋진 작품이 되는 예술입니다. 이 기술의 의미는 깨어진 과거를, 상처 입은 과거를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삶에 영적으로 적용해 보면 과거의 상처와 아픔, 심지어 죄와 허물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힌바 되어 용서받고 변화되면 아름다움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깨지면 가치 없게 여겨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깨진 그릇 같은 우리를 순금 같은 은혜로 채우셔서 이전보다 아름다운 그릇으로 빚으십니다.
예수님이 세리 마태를 부르신 이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새롭게 빚어진 인생이 마태에게서 나타납니다. <마가복음> 2장과 <누가복음> 5장에 마태가 나오는데 다른 이름으로 소개됩니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소개합니다. 마태가 알패오의 아들이라면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형제지간이 됩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형제가 세 그룹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야고보가 두 명이기 때문에 구별하기 위해서 큰 야고보, 작은 야고보라고 하고, 앞에 누구의 아들이라고 붙이기도 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리로 살던 마태는 깨어진 인생의 전형이었습니다. 세리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영혼을 팔아먹은 민족의 반역자요, 매국노로 여겨졌습니다. 동족의 돈을 갈취해서 로마에 바치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복음서에서 ‘세리와 죄인들’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죄인들’이라고 한꺼번에 묶지 않고 세리를 앞에 떼어놓은 것은 ‘죄인 중의 죄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죄인 중에 가장 형벌 받을 죄인’이라는 의미로 구분한 것입니다. 그들은 회당이나 성전에 발을 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재판의 증인으로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세리가 멀리 서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모든 관계가 단절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회로부터 단절되고 소외된 세리들의 죄가 큽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매우 탐욕스럽고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몇몇 세리가 세례 받으려고 찾아와 질문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그 질문에 세례 요한은 “정해진 것보다 많은 세금을 걷지 말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에 당시 세리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가 나타납니다. 그들은 정해진 세금보다 많이 걷었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로마 제국의 권력을 등에 업고 길을 가던 사람을 멈춰 세워서 수색할 권한도 있었습니다. 결혼한 여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수색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어떤 세리들은 여행자들이 도저히 낼 수 없을 정도의 세금을 부과하고, 낼 돈이 없으면 높은 이자로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이 로마 제국과 그들의 주머니로 들어간 것입니다. 마태가 바로 이와 같은 세리였습니다. 물론 세리 중에서도 삭개오 같이 양심의 가책을 느낀 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았기에 사회적 평판이 가장 나쁜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가 소속된 세관은 가버나움에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정부는 편의상 팔레스타인을 두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은 로마가 행정관을 파견해 다스리고, 갈릴리 지역은 당시 헤롯 안티파스라는 사람을 세워서 통치했습니다. 직접적인 관할을 받는 세리는 아니었지만, 헤롯 안티파스 역시 로마의 비호를 받는 지도자였기에 가혹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마태는 쓰레기 같은, 깨어진 그릇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런 마태를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며 부르셨습니다. 그의 죄로 인한 깨어짐 위에 은혜의 금가루로 입혀주신 것입니다. 가버나움의 세관에 있던 마태를 예수님이 먼저 찾아가셔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당시 세리에 대한 평가를 모르시고 부르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당시 사회 분위기를 모르거나 마태의 직업을 모르시는 게 아닙니다. 세관에 있던 마태를 의도적으로 찾아가신 것입니다. 당시 세리들이 받는 비난과 조롱을 아셨지만, 세리 중에서 제자를 부르신 것입니다. 당시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던져지는 모든 비난과 조롱을 함께 감당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사람들의 인기나 인정을 받으려는 게 아니라는 것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당시 민감한 여론을 의식하셨다면 절대로 하실 수 없는 일입니다.
마태라는 사람, 또 당시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캔들이 될 것이고, 비난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먼저 부름을 받은 베드로, 안드레, 요한, 빌립, 나다나엘은 전통적인 유대인이요, 어부입니다. 나다나엘은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은 비난받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리 마태는 다릅니다.
가장 비난받는 죄인의 죄까지 짊어지고,
구원의 대상에서 누구도 제외될 수 없다
예수님이 마태를 부르신 것은 이 땅에서 가장 비난받는 죄인의 죄까지 짊어지고, 구원의 대상에서 어느 누구도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의도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마태를 부르셨을 때 주저하지 않고 따랐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명성을 듣고 따른 게 아니라 마태가 이미 예수님의 여러 행적을 통해서 ‘저분은 누구인가?’라는 진지한 물음을 던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마태복음> 9장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오셔서 여러 행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 베드로의 장모 집에 모여든 많은 병자를 고치신 일,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고 그 귀신이 돼지 떼로 들어가게 하신 일 등이 그것입니다.
세리는 가버나움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에 대한 정보를 늘 수집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세금을 걷기 위해서 여러 정보 채널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가버나움에서 일어나는 일을 누구보다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태는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듣고, 그분이 함께하시는 사람들을 보고는 단지 훌륭한 도덕 선생일 수 없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 정도 수준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삭개오처럼 세리의 일을 하고 있었지만 분명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자신을 배척했기에 이미 포기된 인생으로 여기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따르라”고 부르시는 예수님 앞에서 이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사랑과 은혜, 포용과 관대함에 이끌렸을 것입니다. “네가 세리의 일을 회개하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불러주신 예수님의 음성에 이끌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부르실 때도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너의 집에 머물러야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이 수군거린 것은 ‘삭개오가 어떤 인물인 줄 알지 못하고 저렇게 하신 건 아닌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삭개오를 향해서 “네가 범한 죄를 모르느냐? 너의 모든 부정한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책망도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삭개오를 불러주셨습니다. 마태를 부르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태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마티디아’(Mattithiah)에서 유래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선물을 뜻하는 ‘마탄’과 여호와를 의미하는 ‘야’가 결합된 형태입니다. 그 이름대로 그에게 하나님의 선물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대상은 소수 교양 있고 도덕적인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온 백성, 모든 사람에게, 마태와 같이 죄 가운데 있어서 사람들의 증오와 배제의 표적이 된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선물이 주어진다는 것이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의 뜻입니다. 세리 중에서 제자를 부르신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잘 보여주는 부르심입니다.
마태가 연 잔치의 세 가지 의미
“이 말을 듣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2~13절).
예수님은 건강하고 의로운 사람을 부르시기 위해서 오신 게 아닙니다. 병들어 있는 죄인을 부르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의사의 존재 가치는 환자에게 있습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의사라도 환자가 없으면 그 존재 이유가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의사로 비유하셨습니다. 당시 마태는 도덕적 중병에 걸린 환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을 불러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당시 의인이 있고 죄인이 따로 있다는 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사람이 중병에 걸린 환자이기에 예수님이 의사로 오신 것입니다.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스스로 의롭다 여기며 착각하고,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는 모든 자를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마태와 같은 죄인들, 다른 세리들과도 교제하셨습니다. 세리 가운데 마태만 부르시고 그하고만 교제하신 게 아니라 다른 세리들과도 교제하셨습니다. 이것이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이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교제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레위는 예수를 위해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많은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눅 5:29).
여기서 ‘레위’는 마태입니다. 마태가 잔치를 베푼 것은 그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자신의 동료 세리들을 만나게 해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잔치의 의미를 세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자신이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함께 나누고 축하하기 위해서입니다. 일종의 결혼 잔치와 같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주께 드린 결혼 잔치와 같이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을 축하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둘째,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식탁의 교제는 어떤 문화권에서든지 동일함과 동질감을 가져다줍니다. 같은 식탁에 함께 나온다는 것, 원수 같은 사람일지라도 함께 식사하는 것 자체가 벽을 허물고 관계를 회복하는 첫 번째 발걸음이기도 합니다.
마태와 같이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세리들 같은 죄인으로 취급받는 사람들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을 초대해서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여기에서 온누리교회 맞춤전도집회가 나왔습니다. 맞춤전도집회의 성경적 근거를 마태에게서 얻은 것입니다. 같은 그룹, 같은 문화권의 문제를 고민하고, 같은 영역에 있는 사람들을 초청해서 식사를 나누면서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는 집회가 맞춤전도집회입니다. 온누리교회는 2000년대 초반부터 대상을 세분화해서 때로는 연령으로, 때로는 직업으로, 때로는 같은 문제를 가진 직업군으로 구별해서 마태의 잔치와 같이 함께 식사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셋째, 마태의 과거 삶에 대한 단절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마태는 이 잔치를 기점으로 과거의 수치스러운 삶으로 돌아가는 다리를 끊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한 자리에서 ‘이제 그분의 제자가 될 것이다, 더 이상 세리의 삶을 살지 않겠다’는 선포와 알림의 의미도 있습니다. 그의 동료들은 마태의 새로운 삶의 증인으로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비난받던 죄인 세리에서
하나님의 선물을 증거하는 사도로
세리 출신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은 당시 유대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되고 소외된 이들까지도 만나셨습니다. 이 사역이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에 있었던 놀라운 흐름입니다.
제자로 부름을 받은 마태가 어떻게 쓰임을 받았습니까? 사도들의 행적은 전승을 통해서만 알려지기 때문에 때로는 확실하지 않는 기록이 있어서 인용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마태의 경우는 그가 쓰임 받은 증거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이라는 복음서입니다.
세리 마태는 <마태복음>의 저자로서 교회 역사로 확인됩니다. <유세비우스>라는 교회사에 등장하기도 하고, 마태가 복음서의 저자라는 여러 중요한 근거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누구를 대상으로 기록되었습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당시 유대 사회로부터 출교 당하거나 분리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인용이 많이 나옵니다. 사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는 <마가복음>으로 알려집니다.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서기 역할을 했던 마가가 기록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열두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의 증언에 기초해서 쓰였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도 정확하게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직접 경험한 게 아니기 때문에 매우 짧은 기록, 때로는 구조가 정확하게 갖춰지지 않는 상태에서 기록됐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마태라는 제자가 직접 목격한 내용들이기 때문에 <마가복음>보다 훨씬 질서를 가지고 기록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자신이 기록한 <마태복음>에 자신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을 때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기록한 것은 일종의 고백록입니다. 이런 메시지입니다. “나는 원래 사도나 복음서의 저자가 될 수 없는 세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 이렇게 변했습니다”라는 고백이 <마태복음>에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세리로서의 분석력과 치밀함, 특히 수리적인 분석력이 나오는 장면은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꼼꼼한 장부 기록 기술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마태는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다가 기둥에 묶여 화형 당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세리 출신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의 사례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온전해지고 깨끗해진 이후에 부르시는 게 아니라 여전히 죄의 세관에 있을 때 부르십니다. 또한 세상에 죄 없는 자를 찾으러 오신 게 아니라 깨어진 영혼을 부르셔서 고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 은혜의 부르심 앞에 우리 모두 응답해야 합니다. 마태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난받던 죄인 세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선물을 증거하는 사도로 변화된 것처럼, 우리 역시 죄인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하나님의 선물을 누군가에게 전해주는 마태와 같은 제자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깨어진 과거가 있습니다. 상처가 있습니다. 죄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감추고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드러내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은혜의 금빛으로 우리를 다시 칠해 주셔서 더 아름다운 인생으로 빚어 가실 것입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