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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성육신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주일강단] 성육신1. 말씀이 육신이 되어 

2025-12-06 제1568호

성육신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한복음> 1:14~18
/이재훈 위임목사
 
복음의 가장 중요한 진리 두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먼저 믿고 깨달아야 될 진리가 바로 ‘성육신의 진리’입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에 우리에게 구원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성육신하신 몸이 죽으셨고, 부활하셨기에 그분의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역사의 특별한 의미와 우리의 구원과 생명의 진리가 되는 것은 그분이 성육신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성육신’이라는 단어 자체는 나오지 않습니다. 영어로 ‘Incarnation’이라는 단어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는데, ‘육체가 되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에서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절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모든 것이 그 말씀을 통해 지음을 받았고 그 말씀 없이 된 것은 하나도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이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말씀’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로고스(Logos)’입니다. 당시 헬레니즘을 이룬 스토아철학의 중심 체계에 있었던 단어입니다. 스토아철학을 따랐던 사람들은 우주를 움직이는 절대적인 이성, 보편적인 이성, 질서와 체계를 만드는 이성적 존재가 있다고 믿었고, 그 이성을 로고스라고 불렀습니다. 한편, 유대인들이 이루었던 헤브라이즘(Hebraism), 히브리에서는 만물을 다스리는 지혜를 ‘호크마’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지혜, 호크마를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호크마’라는 단어 대신 ‘로고스’를 사용한 이유는 누구를 대상으로 쓰인 책이냐에 의해 설명됩니다. 헬라 문화에 익숙한 유대인을 전도하기 위해, 그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해 쓰인 책이기 때문에 히브리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로고스라는 헬라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몸을 취하신 ‘성육신’
 
<요한복음> 1장에서 만물을 창조하신 그 말씀, 로고스이신 분이 왜 육신이 되셨는지를 설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왜 이 말씀이 육신이 되셨는가?’입니다.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신 분과 동일한 말씀이 타락한 만물을 새롭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신 그 말씀이신 분이 만물을 구원하신 일을 행하십니다. 인간이 처한 비참한 상황 때문입니다. 만물이 처한 곤경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에게 이성을 넣어 주셨습니다.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 말씀이신 그분을 반영하는 존재, 그분과 대화하고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사망의 법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열매를 먹고, 불순종하는 날에는 “정녕 죽을 것이다”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으로 인해서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온 것이고, 인간은 사망의 법아래 속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을 결코 취소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그 말씀을 취소하시지 않는 한 인간은 멸망, 영원한 사망 가운데 처하게 됩니다. 진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말씀을 취소하신다는 것은 자신을 배신하는 일이며, 선하심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불순종해서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된 그 상태를 두고 보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속성을 함께 공유한 존재가 영원한 멸망에 처하도록 내버려 두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한계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해법은 무엇일까요? 말씀의 은혜를 잃어버린 이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사망의 법에 속한 인간들이 스스로 회개하고, 그 법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직 하나님, 말씀 그 자체이신 분, 태초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그분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말씀이시기에 만물을 재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말씀으로 재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썩을 것을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인간을 대신해 고난 받고 구원받으려고 세상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 말씀이 세상에 들어오셨고, 우리와 동일한 몸을 입으셨습니다.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우리와 똑같은 몸을 취하셨습니다. 그것이 성육신입니다.
 
모든 이에게 부활의 생명을… 
 
사람들은 믿기 어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도 ‘가현설(Docetism)’이라는 주장이 많은 사람에게 퍼졌습니다. ‘가짜로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성육신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잠시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나셨을 뿐이다.  다시 하나님으로 되돌아가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것을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시며 만물의 창조자이신 분이 동정녀 안에 자신의 몸을 예비하도록 하셨고, 그 몸을 통해 그 안에 거하셨습니다. ‘육신’이라는 단어를 쓴 것도 독특합니다. ‘사람’이라는 단어를 쓸 수도 있었을 텐데, ‘육신’이라는 한자를 사용했습니다. 육신을 뜻하는 헬라어 ‘사크스(Sarx)’는 ‘육체 덩어리’라는 뜻입니다. 당시는 ‘몸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이원론적인 사상이 팽배했습니다. 그들이 악하다고 여기는 육체 덩어리가 되셨습니다. ‘거하셨다’는 단어는 ‘장막을 친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막을 치고 이주하며 거주했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백성들 가운데 장막을 치고,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고, 우리가 볼 수 있고 또 들을 수 있는 육신의 장막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이신 분이 육신이 되신 것은 육신 가운데 있는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비참한 인간들, 육체 덩어리와 같은 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몸으로, 우리와 똑같은 아기로, 연약한 아기로, 애처롭게 우는 아기로, 사람들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연약한 아기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주는 사랑’과 ‘그와 같이 되는 사랑’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없는 사람에게 일부 주는 것도 귀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람과 동일한 상태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사랑이 아닙니다. 성육신의 놀라움은 낮아짐입니다. 그리고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말씀이신 분이 육신이 되신 이유는 죽음으로 만물을 구속하기 위함입니다. 말씀이신 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사망의 선고가 내려진 그 권세를 깨뜨려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망의 형벌 아래 있는 상태에서 건져내기 위해서는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통하지 않고는 사망의 법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죽음이 집행되어야만 하고, 죽음이 집행되면서도 그들을 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녕 죽으리라” 하신 그 말씀도 이루어지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인간과 피조물이 사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말씀이신 그분이 육신이 되셔서, 모든 죽음을 대신 담당하시고, 그분의 죽음 안에서 모든 이들을 다시 살리는 재창조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말씀이신 그분은 죽으실 수 없습니다. 영원히 죽지 아니하시는 존재이신 그분이 죽으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가능한 몸을 취하신 것입니다. 죽음이 가능한 몸이 되심으로 그분이 만인을 대신하는 죽음의 대가를 치르시고, 그분의 죽음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부활의 생명을 나누어 주심으로 재창조의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시다” 
 
만일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분은 우리를 구원할 자격이 없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 비슷한 분’으로 생각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인간과 동시에 하나님이실 수 있냐는 의문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본 시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틀림없이 예수님은 인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특별한 분인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일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비슷한 본질을 가진 분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몇 백 년 동안이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습니다. 
반대로 성육신하신 분이, 예수님이 참 인간으로 오시지 않았다면 역시 메시아가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이 필요한 인간의 고통을 모르고, 인간의 문제를 경험하지 않고, 아무런 접촉점이 없다면 우리를 대신하는, 대표하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를 대신하는 분일뿐만 아니라 대표하는 분이어야 합니다. 완전한 인간이어야 합니다. 이 문제가 주후 451년까지 갔습니다. 칼케돈이라는 곳에서 500명 이상의 감독이 함께 모여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시다.” 
‘참’이란 말은 100%,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이신 그분, 만물을 창조하신 그분이시며, 그분은 육신이 되셔서 완전한 100% 인간이십니다. 그 회의에서 현재 이집트 지방인 알렉산드리아 쪽에 있는 교회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더 중시했고, 지금의 튀르키예 지역에 있던 안디옥 교회들은 예수님의 인성을 더 중시해서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역사적인 고백과 선언이 나온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다”라는 고백이 역사 속에 이루어졌습니다. 성육신하신 그분의 존재와 역사,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이 변화가 일어나고, 교회 안에서 그것을 깨닫고 고백하고 의논하고 기도하면서 그분이 누구신가를 나타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말씀이신 분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셨기에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인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상상했고, 논쟁했고, 보려고 노력했지만 결론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육신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본체와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하나님의 영광이 내 안에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 왕이 존재한다는 말을 듣기만 해서는 실감이 안 납니다. 그런데 왕이 내가 사는 집에 와서 앞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함께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성육신하신 그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 독생자의 영광이 나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대신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이신 분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롬 5:8).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 사랑의 모습입니다. 성육신하신 분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취소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 말씀이 취소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줍니다. “정녕 죽으리라” 하신 그 말씀대로 죽음이 집행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집행을 말씀이신 그분이 우리의 몸이 돼서, 우리를 대신해 담당하심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육체 덩어리와 같은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을 나누어 주셨기에 재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우리의 위기와 곤경, 모든 상태를 벗어날 수 있게 역사하신 사건이 바로 성육신하신 그분의 오심이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그래서 성육신 사건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성육신 교리는 우리를 진리로부터 벗어나지 않도록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주기 위해 놓인 길과 같다.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우리의 여정의 목적지가 되시며 또한 그분은 사람으로서 우리가 걷는 길이 되신다.”
두 단어가 중요합니다. 목적지가 되시는 것, 우리의 길이 되시는 것. 그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목적지가 되시며, 그분은 인간이시기에 우리의 길이 되십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삶의 목적지가 되고, 길이 될 때 하나님 말씀의 재창조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성육신하신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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