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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결단의 오늘 

[주일강단] 결단의 오늘 

2025-11-29 제1566호

결단의 오늘 
<여호수아> 24:14~28
/이재훈 위임목사
<여호수아> 24장 마지막 말씀입니다. 23장에서 여호수아는 자신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되었을 때 지도자들을 모아서 유언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 24장에서는 또다시 지도자들을 ‘세겜’에 모아서 고별 설교를 합니다. 자신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유언을 했는데, 하나님이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있는 힘을 다해 다시 한 번 백성들을 세겜에 모아 설교하는 것입니다. 
23장에서 여호수아는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신 하나님을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 굳게 붙잡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는 당부를 했습니다. 신앙의 중간 지대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고 당부했었는데, 오늘 또다시 동일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세겜이라는 지역이 의미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세겜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에 정착했을 때 처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렸던 장소입니다. 야곱이 방황하는 가운데 회개하고, 자신의 우상을 모두 파묻고, 하나님 앞에 결단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세겜은 하나님 앞에 예배의 장소요, 회개의 장소요, 결단의 장소입니다. 지금 여호수아가 건강상의 이유로 움직이기 쉬운 지역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세겜에서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전한 메시지는 23장과 동일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그분을 예배하고, 사랑할 것을 선택하고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겨라!”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성실하고 진실하게 그분을 섬기라.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 저편과 이집트에서 경배하던 신들을 던져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라. 그러나 만약 너희 마음에 여호와를 섬기는 일이 내키지 않으면 그때는 너희 스스로 누구를 섬길 것인지,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에서 섬겼던 신들이든, 지금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아모리 사람의 신들이든 오늘 선택하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길 것이다”(14~15절).
14절에서 ‘그러므로’는 1절에서 13절 말씀을 요약하는 것입니다.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역사를 다시 한 번 회고하게 합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가나안, 여호수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회고하면서 그들이 끊임없이 우상을 섬겨 왔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조상들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는 그곳의 신들을 섬겼고, 이집트에 있을 때는 태양신을 섬겼습니다. 애굽에 임했던 열 가지 재앙은 그 신들이 헛된 것임을 보여주는 심판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는 바알과 아세라, 풍요의 신, 또 신생아를 제물로 바치는 몰렉 같은 끔찍한 신들을 끊임없이 섬겼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에서 지적합니다. 어느 시대, 어떤 지역에 살든 그 시대의 우상에 사람들이 휩쓸리는 것입니다. 이 시대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우상에 휩쓸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아무것도 섬기지 않는다. 신을 믿지 않는다”라고 말하는데, 틀린 말입니다. 무신론이란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무신론도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것보다 더 어려운 믿음입니다. 더 어려운 믿음을 굳게 붙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을 믿고, 세상의 경험을 믿고, 존재하지 않는 우상을 믿고 살아갑니다. 
여호수아가 도전하는 것은 우상들을 섬기든지 아니면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결단을 하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선택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라고 역설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의지와 선택으로 하나님을 섬겨야만 진짜 신앙이 되고,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서 축복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강요로, 어쩔 수 없어서, 시켜서 하는 신앙은 자라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는 부모가 대신 선택을 해줘야 합니다. 그러나 자녀가 자랄수록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해야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신앙도 자신의 선택으로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야 자신의 신앙이 되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나의 어떤 선택도 없이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구원받기 이전에는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았다는 것은 이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선택의 능력이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선택하라”고 결단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를 섬길 것이다.” 

한국어 성경과 영어 성경에서는 미래 시제만 사용했지만, 히브리어 시제는 훨씬 더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나와 내 집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을 선택해 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여호수아> 전체, 여호수아의 인생을 봐도 그는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아론을 중심으로 금송아지를 섬길 때도 우상을 거부했습니다. 12명의 정탐꾼의 일원이 되어 가나안을 정탐했을 때도 믿음의 선택을 했습니다. 모세의 후계자로 부름을 받아 가나안 정복 전쟁으로 이끌 때에도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순종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을 벗는 선택을 했습니다. 가나안의 정복 역사 속에서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백성들에게도 믿음의 선택을 하라고 결단을 촉구합니다.
믿음은 결국 선택으로 나타난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결국 선택으로 나타납니다.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연으로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운명은 선택으로 결정됩니다. 많은 사람이 마치 지하철 노선표처럼, 건물의 설계도처럼, 드라마 시나리오처럼 모든 게 정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예정을 운명론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결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기계처럼 끌려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정은 전제가 아니라 결과로 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 돌이켜 볼 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예정하셨구나, 선택하셨구나”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강요>의 저자 칼빈도 예정의 교리를 구원론 다음에 썼습니다. 구원받은 자들의 고백이요, 결과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구원받기로 예정되고, 누군가는 구원 못 받기로 예정되어 있으니 전도할 필요도 없고, 선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전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운명은 하나님이 다 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선택하든지 하나님의 예정대로 된다는 것은 신앙을 잘못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넣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선택할 때 운명을 새롭게 열어주십니다. 우리의 내일이 오늘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예배하는지가 내일의 운명을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지난 세월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회개하고 돌이키는 선택을 오늘 결단하면, 내일은 하나님이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십니다. 우리에게 호흡이 있는 한 하나님과 새롭게 출발할 기회는 언제든지 존재합니다. 오늘의 결단이 중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마지막 사력을 다해서 다시 한 번 백성들에게 권면하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결단하면 내일의 미래는 하나님이 바꿔주십니다. 이러한 믿음이 필요하고, 이 나라와 민족을 향해서도 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선택을 대신해 주기를 바랍니다. 고대 근동의 수메르, 앗시리아, 바벨론 사람들의 문자에 남아있는 기록 90%가 예언에 대한 내용이라고 합니다. 앗시리아 사람들은 죽은 동물의 간을 보고 신의 뜻을 분별했다고 합니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별의 움직임을 보고 행운이나 불행을 맞추고, 때로는 별자리에 맞춰서 국가 간의 조약을 맺고, 전쟁하고, 상인들은 비즈니스 계약을 체결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들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택의 능력을 포기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섬기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심에도 불구하고, 섬기지 않으니 눈과 귀가 보이지 않고 막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길 것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겨 왔던 자신의 인생에서 하나님이 뜻을 보여주시고, 자신의 선택과 함께 하셨다는 것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도전에 백성들이 순종으로 응답합니다. 백성들이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거룩하시며, 질투하시는 하나님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섬길 수 없다. 그분은 거룩한 하나님이시며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허물이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만약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의 신들을 섬기면 그분이 너희에게 잘해 주셨다 할지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고 너희를 죽이실 것이다’”(19~20절). 
백성들이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습니다. 여호와를 버리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면, “그래, 잘했다. 바로 그거다”라고 칭찬할 것 같은데, 여호수아는 “아니다. 너희들은 여호와를 섬길 수 없다”라고 좌절시키는 것 같은 말씀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좌절시키려는 게 아니라 더 견고한 결단을 내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여호와를 섬길 수 없다”라는 말씀은 너희들의 각오와 결단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더 견고한 결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 박힌 단단한 못처럼, 단단한 결단을 하도록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말뜻은 이것입니다. 
“너희들이 여호와를 섬긴다고 지금 고백했느냐? 내가 보기엔 그 정도 고백과 결단으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정확하게 너희들이 알아야 한다. 우리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 거룩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너희들이 만일 그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치실 것이다. 제대로 알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해라. 너희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질투하신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지금 섬기겠다고 하는 것이냐?”
더 강하게 촉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질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나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 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다.”
질투라는 단어를 우리는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간의 질투와 하나님의 질투는 다릅니다. 인간의 질투는 자기 것이 아닌 것을 탐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투는 그분의 소유에 대한 질투입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것을 그분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때 질투하시는 것입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우리들을 구원하신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켜서 백성 삼으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의 질투는 정당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른 것에 빼앗기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의 시간과 물질, 관심과 삶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드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질투하십니다. 그 질투로 인해 하나님이 때로 우리에게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배우자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을 때 “나는 괜찮아.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해도 용서하고 괜찮아. 나는 관용이 있는 사랑이야”라고 말한다면 진짜 사랑입니까? 사랑하기에 서로 독점해야 합니다. 부부가 서로 상대방만 원할 때 그것을 편협하다, 잘못됐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진짜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전적인 섬김과 사랑을 요구하시는 게 우리를 불행하게 하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사랑하고 섬기는 게 최고의 행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닌 다른 우상을 섬길 때 그 자체가 불행이고, 더 나아가 징벌이 됩니다. 우상을 계속 섬기면 그 자체가 징벌로 들어가는 겁니다. 불행한 삶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의 결말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우상과 미신을 섬기는 자들을 하나님이 내버려 둔 적이 없습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섬겨야 행복하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당신만을 섬기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자신이 경배하는 신을 닮습니다. 무엇을 예배하는가, 무엇을 섬기는가가 그 사람을 결정짓고 변화시킵니다. 만일 섬기는 대상이 보잘것없는 우상이라면, 그 사람은 세상을 그렇게 볼 것입니다. 자신도 그렇게 볼 것이고,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길 때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고,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볼 것입니다. 세상도 그렇게 볼 것입니다. 질투하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질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힘을 받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열정이 솟아오릅니다. 질투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그분에 대한 열정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합니다. 그 영혼들을 긍휼히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백성들 앞에서 여호수아가 결단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섬기기로 결단하십시오” 
 
“그러자 백성들이 여호수아에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섬기겠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스스로 여호와를 선택하고 그분을 섬기기로 했으므로 스스로 증인이 된 것이다.’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증인입니다.’ 여호수아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 가운데 있는 이방 신들을 없애 버리고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리라.’ 그러자 백성들이 여호수아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그 음성에 순종하겠습니다’”(21~24절). 
높은 산을 산책 삼아 오를 수 없습니다. 에베레스트 산을 산책 가는 차림으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고 높은 산으로 향해야 합니다. 높으신 하나님을 섬기고자 할 때 대충대충  마음으로 섬길 수 없습니다. 세상이, 사탄이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의 헛된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고 순종하겠습니다’라는 결단이 우리에게 매일매일 흘러넘쳐야 합니다. 흐르지 않으면 우리는 우상에 휩쓸립니다. 오늘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 앞에 결단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혹은 오늘이 아닌 내일 하겠다고 미루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만 섬기기로 결단하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여호수아> 말씀을 통해 ‘믿음의 결단’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나님만 섬기기로 결단하는 
모든 주의 백성들을 축복하시고, 
그 결단을 주장하시고, 열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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