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강단]
마음에 세우는 기념비
여호수아 4:1~7, 19~24
/ 이재훈 위임목사
믿음은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를 바라보게 합니다. 과거를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믿음의 내용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성경에 우리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명령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특히 <이사야>에서 과거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를 상반되게 말씀합니다. 먼저, “과거를 기억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지나간 일들을 기억하지 말라, 과거에 연연하지 말라’”(사 43:18).
“과거를 기억하라”는 말씀도 <이사야>에서 나옵니다. “예전의 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니 나밖에 다른 신이 없다. 나는 하나님이니 나 같은 이가 없다”(사 46:9).
어떤 말씀에서는 “과거를 기억하라”고 하고, 또 다른 말씀에서는 “기억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구절만으로는 그 의미를 다 해석할 수 없습니다. 전후 문맥을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가 연연하는 것들, 이 세상에 집착하는 것들, 죄악의 습관들을 비롯해서 기억에 담아둘 필요가 없는 것들을 기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만이 유일한 분이시며, 진정한 신이시며, 하나님 외에 다른 분이 없다는 것은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기억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은 기억과 중요한 관계
믿음은 기억과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은 기억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고, 잊어버려야 될 것을 깊이 기억합니다. 많은 사람이 과거에 대한 기억이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잘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잊어버려야 할 나쁜 기억들은 깊이 간직하고, 깊이 간직해야 할 좋은 기억들은 쉽게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기억은 단지 정보를 저장하는 뇌의 물리적인 활동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과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기억을 초월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갈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기억을 초월해서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 과거 기억이 치유되어야 합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삶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시간이 모든 상처를 아물게 한다’는 말은 사실 틀렸습니다. 치유되지 않는 상처들, 또 새롭게 되지 않는 기억들이 우리 삶을 붙잡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후회란 무엇입니까? 쓰라린 기억입니다. 죄책감은 절망적인 기억입니다. 감사는 즐거움으로 가득 찬 기억입니다. 이 기억의 치유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라!”
오늘 본문에서 요단강을 건넌 뒤에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십니다.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도록 기념비를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단강이 마른 뒤에 요단강 한복판에서 돌 열두 개를 가져와 길갈에 세우도록 하십니다. 이 명령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너희가 지나온 길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는 경험에서 그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 기적으로부터 미래를 열어가고, 과거를 새롭게 하는 기억을 얻기를 원하셨습니다. 강을 건너기 전에는 미래의 하나님이 행하시고, 인도하실 것을 기대하도록 격려하셨습니다. 강을 건너온 뒤에는 과거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지를 잘 아십니다. 단지 기억력의 문제를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상처입고 억울한 일은 평생 잊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믿음의 실체입니다. 내 기억 속에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기억이 가득하면 믿음이 견고한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는지를 기억하는 것은 믿음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때로 교만이 됩니다. 자기 자랑이 되고, 자기 공로의식이 됩니다. 내가 무엇을 했는지는 잊어버려야 합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사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습니까? 오른손이 하는데 왼손이 어떻게 모를 수가 있습니까? 그 말씀은 “의식하지 말라, 기억하지 말라, 자신이 선한 일을 행한 것도 기억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마지막 때 예수님이 “내가 헐벗을 때에 네가 나를 위해 옷을 입혀주었고 굶주릴 때 먹여주었다”고 말씀하시니까 그 사람이 “내가 언제 먹여드렸고 입혀드렸습니까?”라고 합니다. 기억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베푼 선행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그마하게 행한 선한 일을 평생 기억합니다.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도 기억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 될 때 건강한 믿음이 됩니다.
현재의 믿음, 미래를 열어가는 능력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가 명령한 그대로 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 지파의 수에 따라 요단 강 한복판에서 돌 12개를 그들이 묵을 곳에 가져와 거기서 쉬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요단 강 한복판에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서 있던 자리에 돌 12개를 세워 두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돌들이 오늘날까지도 거기에 있습니다”(8~9절).
지파마다 한 사람씩을 세워 열두 명에게 요단 강 한복판에서 돌을 취하여 기념비를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길갈에 열두 돌을 세웁니다. 그런데 9절을 보면 “제사장들이 서 있던 자리에 돌 열두 개를 세워두었다”고 말씀합니다. 해석상의 논란이 있습니다. 9절을 보면 ‘제사장들이 서 있던 자리’에 돌 열두 개를 세워두었다고 했는데, 20절을 보면 ‘길갈’에 열두 돌을 세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구절이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고, 두 곳 모두에 세운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명령은 “너희는 요단 강 한복판에 제사장이 서있던 곳에서 돌 12개를 갖고 너희가 오늘 밤 묵을 곳에 두라”입니다. 그래서 길갈에 열두 돌을 세운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9절에 제사장들이 그 언약궤를 메고 있던 요단 강이 마른 그 한복판에도 돌을 세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양쪽에 세워진 것입니다. 9절 말씀을 자세히 보면 ‘여호수아는’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는 그 돌을 취한 자리까지 기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돌을 그 강바닥에서 취해서 오늘 밤 묵을 곳, 길갈에 세우도록 말씀하셨고, 그것을 준행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서있던 곳에서 돌을 취한 순간 여호수아는 그 자리도 기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돌을 취한 자리에다가 돌무더기를 여호수아 주도하에 열두 개를 또 세운 것입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왜 거기까지 세웠느냐?”고 책망하실 분이 아닙니다. 이 구절을 여호수아의 자발적인 생각으로 그 자리도 기억하고 싶어서 세웠다고 보면 서로 모순이 아니라 전체적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돌이 몇 개냐 보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재의 믿음이고, 미래를 열어가는 능력이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단지 과거의 추억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도 일하셨지만 지금도 일하시고 앞으로 행하실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념비를 세우도록 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기념물,
예수님의 십자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여러 가지 기념비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념물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세상 어느 종교가 사형틀을 상징으로 삼겠습니까? 다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십자가를 예쁘게 포장해서 그렇지, 실제 십자가는 끔찍한 사형틀입니다. 복음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이상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성경이 예수님의 죽음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위대한 사람들의 생애에서 죽음은 생애의 마지막에 기록될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살아있을 때 행적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을 강조하고 있고, 예수님도 자신의 죽음이 인생의 핵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만찬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에서 가장 중요한 기념비가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십자가가 기념비로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보이는 물질적인 십자가는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율법적으로 생각하면서, 마음에 십자가가 기념비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마음에 영혼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길갈에 기념비를 세운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마음에 기념비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들의 후손들과 주변 나라들에게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기억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훗날 너희 자손들이 아버지에게 이 돌들은 무슨 뜻이 있습니까?’하고 물으면 너희는 너희 자손들에게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강을 건넜다’라고 알려 주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홍해에서 너희가 다 건널 때까지 우리 앞에서 홍해를 말리셨듯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다 건널 때까지 너희 앞에서 요단강을 말리신 것이다. 이것은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이 여호와의 손이 강함을 알게 하려는 것이요, 너희가 평생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려는 것이다”(21~24절).
이 말씀에 왜 이 돌들을 세우도록, 기념비를 세우도록 하셨는지가 나옵니다. 너희 자손들, 이 땅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믿음을 가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내 아들 솔로몬아, 하나님을 네 아버지로 알고 온 마음을 드리며 기꺼이 그분을 섬겨라.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살피시고 사람의 생각과 의도를 헤아리신다. 만약 네가 그분을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약 네가 그분을 버리면 그분이 너를 영원히 버리실 것이다”(대상 28:9).
“젊은 시절에 너는 네 창조자를 기억하여라. 고통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 “인생에 낙이 없다”라고 할 때가 오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기 전에, 비 온 후에 다시 먹구름이 끼기 전에 그렇게 하여라“(전 12:1~2).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게 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미래를 열지 못하는 이유는 어린 시절부터 기억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억보다 인생의 발목을 잡는 기억들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이든, 친구로부터 받은 상처이든, 이 사회가 준 기억이든 잘못된 기억이 젊은이들에게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미래가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게 중요합니다. 믿음의 적은 망각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 믿음의 능력이 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