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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2)-에베소교회 

[주일강단]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2)-에베소교회 

2025-01-18 제1525호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2)-에베소교회 
요한계시록 2장 1~7절 
/이재훈 위임목사 
 
요한이 환상들을 통해 받은 메시지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어린양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 핵심메시지를 제외하면 <요한계시록>의 많은 환상이 이상한 종말론으로 혼란해지고 맙니다. 예수님이 단지 성도들에게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려 주기 위해 계시록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은 분명하고 명확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만물이 새롭게 될 것입니다. 이 명확한 목적 아래 많은 환상을 통해서 ‘현재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어린양을 따르는 삶을 살 것인가’라는 메시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어린 양 따라 새 예루살렘에서 살 것인가? 
용을 따라 바벨론에서 살 것인가?
 
크게 두 진영의 대립이 계속 전개됩니다. 용의 진영(바벨론)과 어린 양의 진영(새 예루살렘)의 격돌과 전투, 전쟁이 반복됩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뱀과 여자의 후손과 싸움이 계속 될 것”이라는 말씀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진영에는 일곱 영, 여자, 일곱 교회, 충성된 증인들, 네 생물, 24장로, 천사들 등 새 예루살렘을 위해 준비된 존재들이 나타납니다. 새 예루살렘은 장차 도래할 도성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반면, 용의 진영, 사탄의 진영은 야수들(바다와 땅에서 올라온)이 나타납니다. 또 큰 음녀가 있고, 이세벨, 니골라당 등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살해합니다. 이들의 주요 거처는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은 시대를 초월해서 우상 숭배하는 모든 영역을 가리킵니다. 요한이 환상을 보았던 시대의 바벨론은 로마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모든 시대에 존재하고, 이 시대에도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 우상을 숭배하게 하고, 음란에 빠지게 하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생명들을 죽이는 영역과 진영을 ‘용의 진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진영의 싸움은 이 시대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시대, 모든 성도에게 주어지는 도전은 ‘어린 양을 따라 새 예루살렘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용을 따라 바벨론에서 살 것인가’입니다. 이 두 가지 질문 중에 선택해야 합니다. “바벨론의 통치자들은 어린 양을 미워하고, 어린 양을 따르는 이들을 박해하지만, 어린 양은 승리할 것이고, 어린 양을 따르는 이들도 승리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교회는 없다,
모든 교회는 계속 성숙해야 한다
 
“그들은 어린 양을 대적해 싸울 것이나 어린 양이 그들을 이길 것이다. 이는 그가 만주의 주시며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또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 곧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은 충성된 사람들도 이길 것이다”(계 17:14). 
용과 어린 양이 싸우면 당연히 용이 이긴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양이 이길 것입니다. 그는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정체성은 사자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와 함께 있는 사람,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이길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메시지입니다. 어느 시대든 어린 양을 따르는 이들은 승리합니다. 어린 양이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했을 뿐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사도 요한을 위협적인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밧모섬에 유배시켰습니다. 용의 진영이 어린 양의 진영에 속한 이들을 핍박하고, 박해하고, 죽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린 양을 따르는 이들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앞부분에 어린 양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가 나옵니다. 당시 실존했던 일곱 교회가 선별돼 하나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요한을 통해서 이 편지들을 당시 소아시아 있었던 일곱 교회들이 공유하고 회람했습니다. 에베소교회 성도들도 버거모교회에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읽을 수 있었고, 다른 교회들도 또 다른 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 밖에도 여러 교회가 있었겠지만, 이 지역이 당시 가장 큰 도시들이었습니다. 그중에서 다섯 지역은 인구 10만 명인 도시였습니다. 당시에는 매우 큰 도시였습니다. 그 지역의 일곱 교회에 하나님이 서신을 보내심으로 모든 교회에 메시지를 주시고자 했습니다. 당시 일곱 교회에만 주신 게 아니라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가 대상입니다. 
일곱 교회에 주신 편지들을 보면, 하나님이 각 교회에게 맞춤 진단을 하십니다. 각 편지를 보면 “내가 안다”는 내용이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각 교회의 정확한 사정과 형편을 아셨습니다.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빛 가운데 계신 하나님 임재가 각 교회의 상태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의 공통적 특징이 있습니다.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을 소개하는 내용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 각 교회에 대한 칭찬과 책망이 나옵니다. 마지막에는 도전과 약속이 나옵니다. 어린 양을 따르는 제자들이 어떻게 그 시대에 합당한 제자들이 될 것인지를 설명하십니다. 공통적인 내용은 모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책망 받지 않은 교회도 있었지만, 그들이 완전 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 때문에 그분의 은혜 밖으로 쫓아내시지는 않습니다. 교회마다 칭찬할 점이 있고, 책망 받을 점이 있습니다. 격려할 점이 있고, 도전받을 점도 있습니다. 교회들의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 주면서 어느 교회도 완전한 교회가 없고, 모든 교회는 계속 성숙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배소교회에 대한 칭찬과 책망
 
일곱 교회 중에서 첫 교회인 ‘에베소교회’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에베소교회에 대한 칭찬입니다. 첫째, 그들은 많은 수고를 하는 교회였습니다. 둘째,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 핍박 속에서도 인내했습니다. 셋째, 거짓 사도들을 잘 분별하고 진리를 사수하는 교회였습니다. 시대마다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늘 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그것을 잘 분별했습니다.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는 공동체는 거짓을 분별하는 칭찬받을 일을 합니다. 그러나 에베소교회에도 책망할 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네게 책망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네가 첫사랑을 버린 것이다”(4절). 
여러분, 어린 양되신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고, 그 감격으로 그분을 사랑하던 첫사랑을 버리면서도 수고하고 인내하고 거짓을 분별하며 진리를 수호하는 헌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첫사랑을 버린 이유는 사랑이 가장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보다 쉬운 일을 한 것입니다. 수고하고 헌신하고 거짓을 분별해 싸우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선한 것입니다. 나쁜 게 없습니다. 가장 중요하고 최선의 것인 사랑 없이도 우리는 덜 중요하고, 차선의 것들로 삶을 채울 수 있습니다. 게으르면서도 다른 것을 열심히 함으로써 그것을 보충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망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 어떤 사역의 양이나 열심, 헌신보다 우리 안에 첫사랑이 여전히 있는지를 보고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열심히 활동하면서 채우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만일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남을 돕고 또 내 몸을 불사하게 내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고전 13:3). 
에베소교회는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거짓을 분별하는 일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교회 역사적으로 보면 교리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헌신한 이들이 사랑으로 하나 되는 일에 실패한 사례가 많습니다. 순수성(purity)을 강조하고 지키다 보면 통합(unity)이 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열이 많이 됩니다. 교리적 순수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대개 관계가 나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통합에만 방점을 두면 순수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거룩함과 화평함을 좇지 않으면 주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처럼, 순수성과 통합의 균형을 잡는 게 참 어렵습니다. 에베소교회는 교리적 순수성을 지키다가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랑 없는 수고를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그 어떤 열심과 헌신, 섬김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첫사랑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 첫사랑은 마지막 사랑이 되어야하고, 그 사랑이 계속해서 우리 삶의 근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는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생각해 보아 회개하고 처음에 행했던 일들을 행하여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네게로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길 것이다”(5절).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란 처음 했던 일을 다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촛대를 옮길 것”이라고 심각하게 말씀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첫사랑을 잃어버리면 실상은 바벨론을 사랑하고 따르는 이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늘 첫사랑을 회복하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날마다 십자가에 가까이 가면 됩니다. 그러면 첫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에베소교회에게만 주신 경고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주시는 경고입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할 것이다”(7절). 
‘이기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이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칭찬과 책망을 듣고, 그분이 주시는 도전에  순종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에게 주시는 약속은 ‘생명나무’입니다. 영생입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데, 일곱 교회마다 다른 표현을 씁니다. 에베소에는 ‘생명나무 열매’라고 했는데, 서머나는 ‘생명의 면류관’이라 했고, 버가모에는 ‘흰 돌’, 두아디라는 ‘샛별’, 사대는 ‘흰옷’, 빌라델비아는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된다고 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보좌에 함께 앉힌바 된다’고 했습니다. 다 함께 영생을 누리는 모습을 다양한 표현으로 쓴 것입니다. 동기를 부여해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생명나무가 회복된 모습으로 강 좌우에 있어서 영원히 사는 나라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결국 이 말씀은 에덴이 회복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곱 교회에게 공통적으로 “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에게 하신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야말로 말씀에 귀 기울이는 세상 유일한 공동체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교회만이 진정 어린 양을 따르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교회에 주신 “어린 양을 따르라”는 명령에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박지혜 기자 wisdom7@onnu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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