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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 신문 - [주일 강단] 율법의 짐을 벗고 은혜의 힘을 얻다

[주일 강단] 율법의 짐을 벗고 은혜의 힘을 얻다

2024-07-20 제1501호

율법의 짐을 벗고 은혜의 힘을 얻다

<사도행전> 15:1~21
/ 이재훈 위임목사 
 
<사도행전> 15장은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시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왔을 때 복음에서 벗어난 진리를 전하는 이들과의 갈등으로 인하여 처음으로 예루살렘에서 열린 교회 총회입니다. 이 회의를 ‘예루살렘 공의회’라고 부릅니다.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모세가 가르친 율법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와 큰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오랜 토론과 논쟁 끝에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이 문제를 다뤄서 올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복음에 기초한 진리인지를 명확하게 하자’고 함으로써 예루살렘에서 회의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 회의에서 매우 중요한 결정과 합의가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 회의를 시작으로 교회 역사적으로 많은 회의가 있었습니다. 수세기에 걸친 회의 끝에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는 결정을 교회가 함께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 첫 번째 회의가 바로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의회입니다.  
 
율법과 상관없이 이방인들도 
오직 은혜로만 구원 받는다

 
“오랜 시간 동안 토론한 끝에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도 알다시피 얼마 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운데서 나를 선택해 이방 사람들도 내 입술을 통해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게 하셨습니다. 그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방 사람들에게도 성령을 주셔서 그들을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믿음으로 깨끗하게 하셔서 우리와 그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째서 우리 조상이나 우리가 질 수 없었던 무거운 짐을 이방 신자들에게 지워서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하십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믿습니다’”(7~11절).
베드로가 하나님이 율법을 폐지하셨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이 하던 모든 기능이 성취되었기에 더는 조문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고백했습니다.  
“온 회중이 조용해지면서 바울과 바나바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를 이야기했습니다”(12절).
바울과 바나바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를 한 구절로 요약했습니다. 특히 베드로와 야고보가 이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의 발언을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시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 권위를 인정받던 야고보가 구약 <아모스> 말씀을 인용하면서 율법과 상관없이 이방인들도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는 것임을 설교합니다. 
“예언자들의 말씀도 이것과 일치합니다. 기록되기를 ‘이 일 후에 내가 돌아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을 것이다. 폐허가 된 것을 내가 다시 짓고 내가 회복시킬 것이다. 그러면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 받는 모든 이방 사람들이 주를 찾을 것이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이 일을 알게 해 주신 여호와의 말씀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 판단으로는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방 사람들을 괴롭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상으로 더러워진 음식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는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래전부터 모세의 율법이 각 도시에 전해져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것을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15~21절).
하나님이 율법에 근거해서 세워진 다윗의 장막은 무너지게 하셨지만, 다시 일으키시는 다윗의 장막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우시는 장막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통해 모든 이방인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구원까지 포함하는 것이 <아모스> 말씀이라고 야고보가 강해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이제 이방 사람들에게 짐을 지게 함으로써 그들이 구원을 받는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명확하게 첫 번째 원칙을 제시한 것입니다. 
 
관계를 고려한 ‘배려’와 
‘전통’과 ‘정통’을 구별
 
야고보가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우상으로 더러워진 음식, 음행, 목매어 죽인 짐승의 고기, 피를 멀리하자고 편지하자’는 중재안을 내놓습니다. 야고보가 금하도록 권고한 것은 네 가지를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원칙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율법에 익숙하게 살아왔던 유대인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네 가지는 지키도록 권고하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에 대해서는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나는 자유하다. 먹을 수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바울의 원칙은 자유지만, “만일 내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음으로써 시험에 드는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다면 나는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원칙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믿음이 연약한 자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관계를 고려한 배려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야고보가 제시했던 안과 통하는 결정입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지키면서 동시에 배려할 수 있는 것들은 배려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사역이 원칙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디모데와 디도에게도 어떤 때는 할례를 하지 말라고 했다가, 어떤 때는 할례를 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할례가 조건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할례를 받지 않는 사람을 상대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걸림돌을 제거하고 그들과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할례를 하라고 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하나의 차원에서 누군가에게는 할례를 행하라고 하고,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틈에 들어갈 때는 하지 말라고 합니다. 관계 때문에 원칙을 무너뜨리는 경우가 있고, 원칙 때문에 관계를 무너뜨리는 때도 있습니다. 원칙과 관계가 충돌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결정에 이르게 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복음이 전해짐으로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구원하시는데 교회가 방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절대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될 사람들에게 방해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전통과 정통을 구별했기 때문입니다. 전통은 오랜 시간이 흐름으로써 고착된 것입니다. 전통은 변화될 수 있습니다. 모든 전통이 옳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통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문장을 만들어 봤습니다. “정통(orthodox)이 전통(tradition)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전통이 정통을 변질시킵니다.” 교회의 오랜 습관이 복음에 합당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이라는 이유로 옳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든 전통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익숙해질 뿐입니다. 전통이 정통에 합당하다면 계속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유대인들에게는 절대적인 전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의 전통은 버릴 수 있게 되었는데, 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데 장애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라는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익숙한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그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매우 놀라운 결정이고, 복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결정입니다. 단지 오래된 것이라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통성이 있는 것이라면 바꿔서는 안 됩니다.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율법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갈 5:4). 
율법을 통해 의롭다고 인정받으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짐을 벗게 하고, 은혜의 힘을 얻게 하는 결정입니다. 종교개혁 이전에 최초의 종교개혁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를 탄생시킨 종교개혁의 3대 모토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입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시대에 국한된 유물이 아니라 정통입니다. 중요한 원칙입니다. 오직 성경이라는 것은 교회의 어떤 결정보다 성경이 앞선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입니다. 성경의 내용은 오직 은혜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교회가 제대로 붙잡았을 때 바로 서게 되었고, 이 진리를 버리거나 오해했을 때 심각한 배교와 어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둠에 빠진 결과가 중세였습니다. 안디옥교회에서 이방인들이 믿음만이 아니라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교개혁 이전의 중세교회와 똑같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을 예로 듭니다.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훨씬 이전이었습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되는 것이지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는 것을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사도 바울도 증거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정통은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행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실제적인 의로움이 없어도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까? ‘전가(imputation)’라는 단어를 기억하십시오.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은 세 가지 전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그 죄가 전가되어서 우리도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인인 상태에서는 우리 안에 그 어떤 의로움이 없고, 스스로 의롭게 될 수도 없습니다. 둘째,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로 인해 죽임을 당하셨을 때 우리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 제도는 제물을 바치는 자의 죄가 전가되었음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구약의 율법으로 장차 오실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죄가 그분께 전가되는 날이 올 것을 예언하는 제도였습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로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죄인 된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그분의 외로움을 우리에게 전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선한 행실이나 공로나 의가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주어진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서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든 삶의 결정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의 결정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의 결정이어야 합니다. 율법의 짐을 지우지 않고 은혜의 힘을 얻는 결정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 우리가 누리는 자연은 모두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행함을 따라 우리를 대하지 않으시고, 오직 그리스도의 행함을 따라 우리를 대하시는 분입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것을 명확하게 결정했습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김다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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