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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 신문 - [주일 강단] 성령님을 따르는가, 다루려는가 

[주일 강단] 성령님을 따르는가, 다루려는가 

2024-04-27 제1489호

성령님을 따르는가, 다루려는가 

사도행전 8:4~25
/ 이재훈 위임목사
 
바람이 불길을 더 크게 만드는 법입니다. 교회에 대한 핍박의 바람은 교회를 무너뜨리기보다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성령님이 일으키시는 대반전의 역사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으로 시작된 교회에 대한 핍박이 더욱 심하게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성도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씨앗이 흩뿌리게 되듯핍박의 바람으로 인해서 예루살렘 성도들이 곳곳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그들이 외로움과 절망 속에 있는 게 아니라 흩어진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증인이 되리라”하셨고, 성령이 임하신 결과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질 거라고 하셨지만, 당시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그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 어떤 의미에서 순종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공동체가 너무 아름답고, 은혜로웠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핍박으로 인하여 시작된 핍박의 물결으로 인해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원하지 않는 곳으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핍박은 교회를 위축시키기보다 본래의 사명으로 돌아가게 만들었고,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거되도록 했습니다. 성령님이 이루시는 대반전의 역사입니다. 세계 역사에서도 이와 같은 일들을 많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1949년 중국에서 공산당이 선교사들을 모두 추방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세운 중국내지선교회 소속 637명의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추방되었습니다. 큰 핍박이 일어났는데 지금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기독교인이 존재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이고, 가장 교회를 제한하고 핍박 하는 국가인데,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 가장 많은 국가가 중국입니다. 아이러니한 상태 아닙니까? 중국은 신앙의 자유가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신앙의 자유가 있고,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들은 오히려 교회가 침체하고, 극심한 통제가 있는 국가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 추방당한 선교사 중에서 286명이 다른 아시아 국가에 재배치되어서 아시아 복음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여러분, 중국에서 모든 선교사들이 추방되면 중국 교회는 끝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1949년 중국내지선교사들이 모두 추방될 때 제2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틀림없이 중국에 엄청난 영적인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 믿고, 그 증거들이 있습니다. 조직화된 건물을 가진 교회들이 핍박 속에서 사라지는 것 같지만, 함께 영향력을 발휘하는 성도들은 증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대반전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핍박의 시작은 형벌이 아닙니다.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땅 끝까지 이르러 전해지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나타난 그 사건을 보고 그곳에 초막 세 개를 짓고 머무르기를 원했던 것처럼,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계속 예루살렘에 머물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이 강력하게 핍박이라는 통로를 사용하셔서 그들을 복음의 증인으로 만드셨습니다. 성령의 바람에 순종하지 않으면 성령의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한민족이 전 세계에 750만 명 이상 흩어져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그들이 디아스포라가 된 이유는 각기 다를 것입니다. 사업을 위해, 교육을 위해, 우리나라에 어떤 상처가 있어서 흩어져 있겠지만, 세계 복음화에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기여하는 것을 볼 때, 한민족의 흩어짐 또한 <사도행전>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한 심각한 문제와 풀리지 않는 고난은 복음이 증거되기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일의 전반부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을 따르면 언제나 대반전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절망에서 소망이 이끌어지고, 좌절에서 축복을 만들어 내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바라봐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사마리아를 뚫고 들어갔다!
 
“빌립은 사마리아에 있는 한 도시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빌립의 말을 듣고 그가 일으키는 표적들을 본 사람들은 모두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찢어질 듯한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고 많은 중풍 환자들과 지체 장애인들이 나았습니다. 그리하여 사마리아 도시 안에 큰 기쁨이 생겼습니다”(5~8절).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입니다. 그의 직업은 의사입니다. 의사의 시각에서 이것을 귀신의 역사라고 섬세하게 분별했습니다. 과학적 지식을 기초로 병을 고치는 그가 바라볼 때 이것은 영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질병이 기적적으로 낫는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표적들을 그가 본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빌립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빌립이 전하는 말씀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성령 표적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듣고, 믿게 하려고 표적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에 표적과 함께 복음이 전해지고, 그 도시에 믿는 이들이 나타났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수백 년 동안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의 출입금지구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전 722년 앗시리아에 의해 사마리아가 점령을 당합니다. 앗시리아가 했던 정책은 바벨론보다 훨씬 잔인하고, 교활했습니다. 잔인하게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교활하게 그 너머를 바라보았습니다. 바벨론은 피지배 민족을 보호하고 어느 정도 존중했습니다. 반면 앗시리아는 혈통을 섞었습니다. 이른바 사민정책입니다. 앗시리아의 주민들을 사마리아로 데려와 강제 이주시키고, 사마리아 사람들을 앗시리아로 데려가 섞어버렸습니다. 강력한 이주 정책과 사마리아와 앗시리아의 혼혈정책을 써서 정체성을 말살시키는 것입니다. 정통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순수 혈통주의에 빠져 있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상종조차 하면 안 됐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는 항상 돌아가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는 사마리아를 뚫고 들어갑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 갔을 때, 그곳은 들어가서는 안 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 앞에서는 어떤 장벽도 없습니다. 문화적 장벽, 역사적 장벽, 사람들의 심리적 장벽도  뚫고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믿는 이들이 증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에 들어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에 들어갑니다. 빌립은 헬라파 유대인이기 때문에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베드로와 요한,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사마리아로 가서 사역을 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가 그들 가운데 임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세례’ 체험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곳에 도착해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받기를 기도했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아직 성령이 내리시지 않았고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손을 얹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14~17절). 
사마리아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변화되는지를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빌립의 전도로 인해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시의 세례는 오늘날 물세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에게 성령이 내리지 않았다는 것은 오순절 예루살렘에 임했던 성령의 세례와 같은 역사를 아직 체험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으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 상태의 간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와서 안수했더니 그들 또한 성령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기에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교파마다 해석도 다릅니다. 빌립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 어떤 교파에서는 그때 믿게 된 것 자체가 성령의 세례이므로 ‘성령의 세례’라는 말 자체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성령이 아직 내리지 않았고,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를 통해 성령을 받았다는 말씀은 어떤 의미가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도 해석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미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이니 성령의 세례를 부인하는 것은 본문에 근거하면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물세례를 받은 이후 기계적으로 성령의 세례를 규범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들이 구원받은 다음에 성령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구원을 얻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분이 성령님이신데, 그분을 믿고 받아들였지만, 아직 성령님을 온전히 따르고 사로잡히는 충만함을 경험하는 체험이 없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셨다고 고백했지만, 아직 온전히 주인 되지 못 하는 상태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하심과 성령의 세례는 시기별, 사람마다 다릅니다. 오늘 본문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다음에 성령세례를 받는 이들도 있고, 물세례를 받을 때 동시에 받는 이들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먼저 성령의 세례를 받고 나중에 물세례를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시점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령의 체험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체험은 예수님을 입술로만 “내가 믿습니다”는 고백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온전한 주인 되심을 확신하는 것이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한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고, 온전히 성령님을 따르는 삶을 살겠다는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구원의 확신이 분명해 집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고, 순교할 수 있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나는 구원 받았나?”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글쎄요 제가 좀 더 열심히 해야 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분들은 100% 성령의 세례가 없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확신한다는 것이 구원의 보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으로 받아들인 자는 구원이 임한다고 했으니 구원받는 것입니다. 
유월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좌우 인방과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내가 그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모두 연락해서 그 피를 받아서 발랐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피를 바르면 보고 넘어가리라”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양의 피를 바르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하셨으니 감사합니다”라고 믿음으로 잠을 푹 잤을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밤새 잠을 못자고 ‘피의 양이 너무 적어서 못 보시면 어떻게 하지?’ 그래서 도배를 하듯이 바르고도  밤을 샙니다. 여기서 불안해서 잠 못 이룬 그 집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을까요? 죽음의 사자가 들어갔을까요? 안 들어갔을까요? “너는 못 믿으니깐 들어가야겠다”면서 들어갔을까요? 아닙니다. 의심과 불안과 염려가 있었지만, 약속대로 바르긴 발랐습니다. 그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고 하신 대로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지나가고 나서야 안심한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확신과 능력 없이,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 없이 믿는 단계에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내리신다는 것은 바로 그 단계에서 확신과 능력 가운데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나는 예수의 사람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되고 싶습니다. 나는 내 생명에 위협이 올지라도 예수님을 선택하겠습니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지만,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기 전까지 의심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승천하시는 모습을 보고도 의심했습니다. 그 단계 있는 제자들은 구원 못 받는 사람들입니까? 성령의 세례는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세례가 임하는 그 상황을 사모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증거되는 상황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도 이런 체험이 있다고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확신이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나도 에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나도 스데반처럼 순교할 수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사모하는 영혼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임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의 세례 체험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는 기쁨,
죽음이 두렵지 않은 기쁨

 
성령님을 따를 때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이 기쁨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은 기쁨의 삶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모두 가짜 기쁨입니다. 상황과 환경이 바뀌면 사라지는 것은 진정한 기쁨이 아닙니다. 경제 형편이 나아지고, 건강할 때 주어진 기쁨은 지나가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는 기쁨입니다.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죽음 앞에 서면 사라지는 기쁨이 아니라 죽음이 두렵지 않은 기쁨입니다. 이런 일들이 사마리아에서 일어났습니다. 
사마리아에서 마술로 명성을 날렸던 시몬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함으로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 “내가 돈을 줄테니 그 능력을 나에게도 달라”고 요청합니다.
역사적으로 성령님이 역사할 때 항상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사탄은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스데반에게 했던 것처럼 직접적, 전투적으로 공격하기도 하고, 시몬과 같은 사람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하용조 목사님 표현에 의하면, ‘성령님을 세속화하고 상품화하고 물질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님을 자신이 다룰 수 있는 대상인 것처럼 그렇게 속이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가 온전히 따라야 할 분이지, 우리가 다룰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시몬은 자신이 가진 돈으로 성령님을 다루려고 했습니다. 성령님은 물질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다루는 대상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고, 예수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시며 살기 위해 임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다루는 분이 아닙니다.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러나 베드로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당신은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20절). 
하나님의 복음이 증거되기 위해 선물로 주신 성령님의 역사에는 온전한 순종, 순전한 헌신, 그리고 순교만이 어울릴 뿐입니다. 선물로 주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가지고 자신의 이익과 다른 목적에 사용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결코 허락하시지 않고, 망하게 하십니다. 한때 성령의 은사를 선물로 받은 사역자들이 마치 성령님을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처럼 사역하다가 망했습니다. 결국 열매도 없었습니다. 역사상 많은 사례가 있었습니다. 한때 성령님을 사모해서 하나님의 은사를 받고, 복음이 증거되는 일에 순수하게 쓰임 받았던 이들이 어느 한 순간 시몬처럼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성령님을 상품화하고, 마치 성령님을 자신이 다루는 것처럼 생각하는 교만에 빠지게 될 때 복음의 문이 막힙니다.
여러분, 성령님의 역사에 많은 일이 동반되어 나타날 수 있지만, 어느 때 변질될까요? 선교와 상관없이 이루어질 때입니다. 복음이 증거되는 일과 상관없어질 때입니다. 빌립이 표적의 의미를 말했습니다. 말씀을 믿게 하려고 표적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게 하는 일과 상관없는 성령의 은사들은 그것이 치유이든, 어떤 것이든 간에 시몬과 같이 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하나님의 선물로 존중해야 합니다. 그 선물이 주어진 이유는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사역을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깊은 체험을 원하십니까? 내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를 증명하기 위해 간구하지 마시고, “하나님, 저도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의 입술을 통해 복음이 증거되고, 저의 삶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구하십시오. 그때 성령님이 임하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시몬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물질적인 것과 연관시켜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은 성령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강하게 체험하는 삶이 언제 가능합니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려고 할 때 가능하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을 자신의 뜻대로 다루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탄을 기쁘게 하는 시몬처럼 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을 따르고 순종하십시오. 복음이 증거되는 일이 헌신하십시오. 그때 성령님이 강하게 여러분을 붙잡아 주시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을 더욱 온전히 따르고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바로잡습니다.
지난 주 신문(4월 21일자) 주일강단 본문에 ‘<시편> 66편을 인용해서’라는 문장은 
‘<이사야> 66장을 인용해서’가 옳기에 바로잡습니다.
작성자 김다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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