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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 신문 - [주일 강단] 제자리를 찾아가는 신앙

[주일 강단] 제자리를 찾아가는 신앙

2023-12-02 제1469호

제자리를 찾아가는 신앙

창세기 35장 1~7절 
/ 이재훈 위임목사 
 
때로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영적 상태를 보여 주기도 합니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거나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는 것이 우리의 영적상태입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역사에 나오는 지리적 위치는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네 가지 땅입니다. 애굽, 광야, 가나안, 바벨론이 핵심적인 지명인데, 우리의 영적상태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땅입니다. 첫째, 애굽은 우상숭배의 땅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우상으로 섬기는 상태를 지역으로 표현하면 ‘애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광야는 불신앙과 방황의 땅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방황했던 지역이 광야입니다. 불필요한 땅이지만, 우리의 불신앙으로 인해 걸어야 하는 땅입니다. 셋째, 가나안은 순종으로 들어가는 축복의 땅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믿음으로 순종했을 때 누리는 영적 축복의 땅입니다. 넷째, 바벨론은 불순종으로 인해 징벌을 받아 가게 되는 땅입니다. 약속의 땅을 허락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했을 때 추방 받아 가게 되는 곳이 바벨론입니다. 
 
거주했던 지역이 보여주는 영적 상태
 
야곱이 거주했던 지역이 그의 영적 상태를 보여줍니다. 크게 네 지역이 등장합니다. 
첫째, 그가 어려서 아버지 이삭과 함께 자란 ‘브엘세바’입니다. 그곳은 야곱에게 애굽과 같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조상들이 섬겼던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움켜쥐려는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었던 땅입니다. 둘째, 그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하다가 하나님을 만난 ‘벧엘’입니다. 그 땅은 그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한 영적 가나안과 같은 땅입니다. 셋째, 그가 도망했던 ‘하란’은 그가 합당하지 않은 모습으로 인하여 도피해야만 했던 영적 바벨론 같은 땅입니다. 넷째, ‘세겜’이라는 땅입니다. 그 땅은 야곱에게 광야와 같은 땅입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온전히 서 있지 못하고, 영적으로 방황하던 시기에 머물렀던 곳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땅에 머물고 있습니까? 야곱은 물리적으로는 가나안에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바벨론에 있을 수 있고, 세겜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땅에 서 있는지가 영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야곱이 형에서와 화해 한 이후 머문 땅이 세겜입니다. 벧엘에서 약 20km 떨어진 산기슭에 있는 구릉지역입니다. 그곳에서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그가 세겜에 머문 이유는 여러 조건이 좋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 있고, 누구나 살고 싶은 도시였을 것입니다. 이제 형과도 화해해서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없이 사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가정에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의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했고, 이에 대한 복수로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성에 있는 모든 남자를 죽이는 대학살이 일어났습니다. 엄청난 일입니다. 야곱이 30년 전 형과 아버지를 속이는 일로 인하여 일어난 위기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당시 야곱의 가정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유목민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미 그 땅에 정착하고 있는 가나안 족속, 특히 세겜성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다가올 복수를 생각하면 야곱이 심히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곱의 가정에 위기가 생긴 이유
 
야곱의 가정에 왜 위기가 생겨났을까요? 첫째, 변화되지 않는 야곱의 모습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야곱은 세겜에게 딸이 강간을 당했어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성 남자들을 학살했을 때도 야곱은 ‘나는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뿐입니다. 왜 위기 속에서도 야곱은 미온적이고, 하나님의 뜻을 찾지 못하는 것일까요? 세겜에 머무는 10년 동안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기보다 자기 자신의 소욕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옛 자아의 영향력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로 살기보다 여전히 야곱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드렸던 서원을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서원했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면 벧엘에 단을 쌓고, 십의 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 서원을 지키지 않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와 화해한 이후 벧엘로 가지 않고, 세겜에서 10여 년 동안 살고 있었습니다. 세겜에서의 생활이 야곱이 하나님과 맺었던 서원을 잊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지만, 야곱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맺었던 약속을 잊어버렸습니다. 자기 손해입니다. 딸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을 때 자신이 어디 있는지를 살피고 돌이켜야 했습니다. 아들들이 대학살을 벌였을 때도 무엇이 잘못됐는지 살피고 돌이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영적으로 광야에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세겜이 영적 광야였습니다. 방황의 땅입니다. 육체적으로는 가나안 땅에 돌아왔지만, 그는 영적으로 여전히 광야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야곱의 위기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
 
“만약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약속한 것이 있으면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네게 그것을 반드시 요구하실 것이니 그러면 네가 죄지은 것이 될 것이다”(신 23:21). 
하나님과의 서약을 지켜야하는 까닭은 그 서약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서약을 잊어버렸습니다. 30년 전 약속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30년 전에 하나님과 동행하던 삶이 있고, 믿음의 삶을 살았더라면, 그때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우리는 잊어버렸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십니다. 야곱이 벧엘로 가지 않고 세겜에 머물렀기에 이 모든 일이 생긴 것입니다. 세겜이라는 위치 자체의 문제도 있지만, 야곱이 세겜에 계속 머물렀던 영적인 상태가 위기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야곱이 세겜으로 향하지 않고 벧엘로 갔더라면, 하나님과 약속을 기억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어떤 삶이 펼쳐졌을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위기에 처한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이번에도 야곱이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에 머물러라. 그리고 거기에서 네가 네 형 에서로부터 도망칠 때 네게 나타나셨던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라’”(1절).
위기에 빠진 야곱의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입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는 것은 “제자리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있어야 할 자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위기의 처했을 때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야곱의 영혼이 떨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곧장 반응하고 순종했습니다. 
 
“벧엘로 올라가라!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라!”
 
“야곱이 자기 집 사람들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지니고 있는 이방 신상들을 없애 버리라. 너희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옷을 갈아입으라. 일어나서 벧엘로 올라가자. 내가 그곳에서 내 고난의 날에 내게 응답하시고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셨던 하나님께 제단을 쌓을 것이다’”(2~3절). 
하나님이 “벧엘로 올라가라. 그리고 거기서 제단을 쌓아라”고 간단하게 말씀하셨지만, 야곱은 그 말씀만 들어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습니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말씀은 단순한 여행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겜에 머무는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알고, 벧엘로 그냥 올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권속에게 “너희들이 지니고 있는 이방 신상들을 없애 버려라. 자신을 정결케 하고 옷을 갈아 입으라”고 지시합니다. 이것이 벧엘로 올라가는 선결 조건입니다. 
하나님이 “벧엘로 올라가라”고만 말씀하셨는데 야곱이 구체적으로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옷을 갈아입고, 정결케 하라고 지시한 것을 보면 자신의 가족 안에 우상이 있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몰랐던 게 아니라 알고도 묵인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대게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이미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르는 것을 행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알지 못하던 것을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 평상시에 ‘이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다’고 깨닫고 있었지만 지키지 않았던 것, 묵인하고 있었던 것, 모른 체 했던 것들이 나타납니다. 야곱의 가정에도 그것들이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시작 되었을까요? 라반의 집에서 도망 나올 때 ‘드라빔’이라는 가족 수호신 같은 우상을 라헬이 가지고 다녔습니다. 야곱이 묵인한 것입니다. 그 이후 세겜에 정착하면서 온갖 이방 신상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가정 안에 우상이 가득했는데 야곱이 묵인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벧엘로 올라가라”라고 하셨을 때 야곱이 무엇을 먼저 행하고 벧엘로 올라가야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예배의 자리로 나오기 싫어하는 이유는 예배 자리 자체가 싫어서가 아닙니다. 참된 예배자로 나아갈 때는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 하니까 싫은 것입니다. 우상을 버려야 하기 때문에 예배의 자리로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지 않은 이유는 자기 집안에 우상이 많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묵인하고 미루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상이란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어떤 물질적인 실체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외에 나의 절대적인 관심을 가져가는 모든 것입니다. 돈이 될 수도 있고, 일이 될 수도 있고, 명예가 될 수 있고,  취미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살고, 그 속에서 목적을 찾으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G.K.체스터턴이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그칠 때 우리는 아무것도 경배하고 있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경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삶은 아무것도 예배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다른 그 무엇을 예배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지 않은 이유는 다른 것들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집안에 우상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라”고 하면 “무엇을 돌이키라는 말입니까?”라고 질문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엇을 행해야 할지 압니다. 하나님이 그 분별력을 이미 주셨고, 그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돌이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경배하는 대상을 닮습니다”
 
“우상을 만드는 사람들은 우상처럼 될 것이요, 우상을 의지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시 115:8).
우리는 경배하는 대상을 닮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을 닮은 존재가 되어 갑니다. 우상을 섬기면 우상처럼 변해갑니다. 
야곱은 단호하게 자신의 가족을 정결케 하고, 30년 전 하나님과 맺은 그 약속을 지키며,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벧엘로 가는 그 과정도 위험합니다. 세겜성과 그 이웃 민족들이 함께 공격해 올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것을 정결케 하고, 벧엘로 올라가려는 야곱과 그의 가족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길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변 성읍 사람들에게 두려운 마음을 주셔서 아무도 그들을 쫓아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야곱과 그의 일행 모두가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가 자기 형에게서 도망칠 때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셨기 때문에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습니다”(5~7절). 
야곱이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하나님이 보호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갈 때 특별한 보호하심을 경험합니다. 야곱이 있어야 할 자리, 세겜에 가기 전 먼저 와야 할 그 자리, 30년 전 하나님과 맺었던 그 자리로 돌아왔을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을 다시 확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라. 한 민족과 여러 민족들이 네게서 나올 것이며 왕들이 네 몸에서 나올 것이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또한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11~12절).
야곱이 자신의 가정에 위기가 생겼을 때 처음에는 ‘왜 하나님이 이런 일을 주시는가? 왜 약속을 안 지키시는가? 왜 보호해 주시지 않고, 축복하시지 않는가?’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는 ‘내가 하나님의 보호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곳에 있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방법으로 안전과 행복을 얻으려고 하면 결코 안전하지도, 행복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하나님과 약속을 지키며 걸어가는 인생은 그 어떤 세상의 위협과 위험한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삶을 통해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만을 예배하기 위해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하나님과 마땅한 관계 속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갈 때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엘벧엘의 축복,
하나님의 집에 거하시는 그 하나님
 
야곱이 벧엘로 돌아와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고 했습니다.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벧엘을 엘벧엘로 바꿨다는 게 의미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장소가 중요했는데, 이제는 그곳에 임하신 하나님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이름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집에 거하시는 그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입니다. 
신앙생활 초기에는 예배당에 오는 것 자체가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르면 안 됩니다. 예배당에서 만난 하나님이 아니라 그 예배당에 임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모든 일상에서도 만나야 합니다. ‘엘벧엘의 하나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야곱의 모습을 통해서 과연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지, 제 자리에 있는지, 하나님의 약속을 따르는 자리에 있는지, 하나님과 약속을 지키는 자리에 있는지, 우상에 끌려가는 것은 아닌지, 우리 삶에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 가득한 자리가 있는 것은 아닌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정결한 예배자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체험하고, 엘벧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김다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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