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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누리 신문 - “당신 마음속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오!”

“당신 마음속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오!”

2019-07-14 제1254호

기고
명화와 함께 읽는 성경

루카 지오르다노의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정화’ 

board image<루카 지오르다노가 그린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정화’(러시아 에르미타주 미술관 소장).>
 
 
나폴레옹 1세의 황제 대관식(1804년)이 어디서 열렸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지나 롤로브리지다와 안소니 퀸이 주연한 영화 ‘노트르담의 꼽추’(1957년)의 배경이 어딘지 아는 사람은 많다. 이 영화가 유명한 탓도 있지만, 영화 이름에 정답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도 디즈니에서 만든(1996년) 동명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랐기 때문인지 원작자가 빅토르 위고인 줄은 몰라도 영화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배경으로 했다는 것은 모두 안다. 
지난 4월, 그 노트르담 대성당(1163~1250년)에 불이 났다. 다행히 첨탑과 일부 목조건물만 태우고 진화되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전성기 고딕양식의 백미로 꼽힌다. 적당한 높이에 둥근 아치를 가진 기존 로마네스크양식은 교회 내부가 비좁고 어둡다. 반면 고딕양식은 모든 지지대를 외부로 빼내면서 탁 트인 넓은 내부 공간이 특징이다. 하늘을 향해 드높이 솟아오른 첨탑도 두드러진 특징이다. 첨탑은 천상의 절대자 하나님을 숭배하는 중세 서구인들의 열망을 반영한다. 그런데 이 첨탑이 타버렸다. 세계 각지에서 엄청난 복구 성금이 모였다지만 귀중한 문화유산이 일부라도 소실된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그 성전에서 예수님은 
왜 벼락같이 진노하신 걸까?  
 
오늘은 성전정화 사건을 다룬 요한복음 2장 13~22절을 묵상하고자 한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은 유월절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성전으로 가신다. 성전 안에서 예수님은 소, 양, 비둘기 등을 파는 사람들과 환전상들을 목도하시고 격노한다. 심지어 노끈으로 만든 채찍으로 소나 양 등을 몰아내고, 환전상들의 상까지 엎어버린다. 비둘기 파는 사람들도 나무란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오늘 본문과 함께 묵상할 그림은 17세기 이탈리아 바로크 미술의 거장 루카 지오르다노(1634~1705년)가 그린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정화’이다. 지오르다노는 성전에서 상인들을 채찍으로 몰아내는 예수님의 단호한 모습과 그에 대비되는 놀랍고 두려운 마음으로 밀려나는 상인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 147:3) 주시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고 하신 사랑의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벼락같이 진노하신 걸까?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거늘, 너희들은 어찌하여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느냐?”(막 11:17). 
그렇다. 상인들은 만민이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신성한 장소를 경건함과는 거리가 먼 장사치들의 호객소리와 구매자들의 흥정소리에 찌든 시끌벅적하고 무질서한 도떼기시장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게 강도 소굴이 아니고 무엇이랴. 
원래 돈이란 것이, 상거래가 어찌 나쁜 행위이겠는가. 소나 양과 비둘기 같은 동물이 무슨 죄가 있으랴. 하지만 동물이나 사람이나 제각기 있어야 할 자리가 있는 법이다. 각자가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지 않고, 분수를 벗어나는 순간 비극이 시작된다. 
지오르다노의 그림에는 예수님의 채찍질에 쫓겨나는 상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유감스럽게도 상인들의 낯빛에는 두려움과 황당함만 보일 뿐, 회개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의 참뜻을 짐작조차 못하는 것이다. 
돈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영적 재산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흘러가야 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는 예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정의를 구별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돈이 인간의 세속적 정의에 매이는 순간 사람을 옭아매게 된다. 예수님을 파는 대가로 은전 30냥을 챙긴 유다처럼 돈이 배반과 배신의 상징으로 변해버리기도 한다. 
 
순결과 희생제물의 상징이
배신, 부자유, 탐욕, 불화의 상징으로 
 
지오르다노의 그림 양쪽에는 각각 소와 양이 보인다. 양은 원래 순결한 희생제물을 상징한다. 이것이 확대되어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 받은 사람들을 나타내기도 한다. 허나 성전 안으로 끌려온 양은 자유를 잃고 심리적 노예상태가 된 우리를 상징한다. 
소 역시 양과 더불어 대표적인 희생제물이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제 주인이 놓아준 구유를 알건 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사 1:3)라는 말씀에 따라 이콘(기독교에서 그리스도나 마리아 또는 성인들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지켜보는 겸손한 동물로 추켜세워진다. 그러나 성전에 끌려온 소는 우리의 탐욕과 정욕의 상징으로 추락한다.  
지오르다노의 그림에는 보이지 않지만, 순결함을 상징하는 비둘기만큼 성화에 많이 등장하는 동물도 드물 것이다. 노아의 홍수 이후 올리브가지를 물고 돌아온 비둘기는 지상에 다시 도래한 평화를 상징한다. 또한 비둘기는 하나님의 성령을 상징한다. 성자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로 강림”(눅 3:22)하셨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하는 그림이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강림하는 기적을 묘사하는 그림에서도 비둘기가 나타난다. 그러나 성전에 끌려온 비둘기는 쉴 새 없이 구구거리면서 상대방 부리를 쪼는 불화의 상징이자, 부단히 날개를 퍼덕거리며 안식을 취하지 못하는 산만함의 상징으로 변질되었다. 
이처럼 ‘만민이 기도하는 아버지의 집’에 배신의 상징, 정신적 부자유의 상징, 탐욕의 상징, 불화와 산만함의 상징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난장(亂場)을 만들고 있다. 사랑과 공의의 예수님이라 한들 어찌 좌시하겠는가! 
그나마 루카 지오르다노의 그림은 어두운 노란색과 황갈색을 주조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색조를 사용하는 바람에 다른 화가들의 그림보다는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가 덜 격정적으로 보인다. 같은 주제로 그림을 그린 체코 델 카라바조나 야코프 요르단스 같은 화가는 짙은 붉은 색을 주조로 진노를 강조하고, 엘 그레코는 차가운 푸른색을 주조로 하여 서슬 퍼런 분노를 표현했다. 
 
더 중요한 것은 
‘참된 성전으로서의 우리 몸’
 
미셸 푀이예에 의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빌려 강생(降生)하시면서 그리스도의 몸이 새성전이 되었고, 건축물인 구성전을 대신하면서 율법의 시대가 끝났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둘로 갈라진 것이나(마 27:51), 오늘 본문처럼 “너희가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는 말씀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 참다운 새성전이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강생하신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고, 정화하심으로써 우리의 몸도 하나님이 거하시는 참된 성전으로 거듭났다. 
예수님이 성전을 더럽힌 상인들을 축출하신 진정한 의미가 뭘까? 노트르담 대성당처럼 성전이라는 외적 건축물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참된 성전으로서의 우리 몸’을 거룩하게 보전하라는 것이다. 
우리 내면을 더러운 시장 바닥처럼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깨끗한 성전으로 보전할 것인가. 예수님은 강력한 어조로 우리의 결단을 요구하고 계신다. 이제 우리가 응답해야 할 차례다. 
/ 김진국 집사(한강공동체, 융합심리학연구소장)

 
<발문>
내면을 더러운 시장 바닥처럼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깨끗한 성전으로 보전할 것인가 
예수님은 강력한 어조로 결단을 요구하고 계신다 
이제 우리가 응답해야 할 차례다 
작성자 정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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