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 강단] 사명을 남긴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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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강단] 사명을 남긴 이별

 2024-09-14      제15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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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을 남긴 이별

<사도행전>  20:17~38
/ 이재훈 위임목사 
 
축복된 관계는 이별이 감동적일 뿐만 아니라 이별을 통해 더욱 성숙을 경험합니다.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의 이별이 그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오순절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순절에 맞춰 예루살렘에 가려면 에베소를 경유해서는 그 날짜를 맞출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바로 항구도시 밀레도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에베소 성도들의  모습이 떠올랐기에 성도들을 대신 한 장로들과 이별을 나누고, 또 권면하기 위해서 밀레도에 그들을 초청합니다. 그리고 장로들과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자신이 어떻게 사역을 해 왔는지 고백하고, 당부하고 싶은 권면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 모습이 정말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서 외에 모든 본문 가운데 가장 감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로 무릎을 꿇고 껴안고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며, 참된 교훈을 나누는 이 모습이 참된 교회이며, 살아있는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공동체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마치고 나서 그들 모두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소리 내어 울면서 바울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 때문에 그들은 더욱 슬퍼하며 바울을 배 타는 곳까지 전송했습니다”(36~38절). 
서로를 위해 평소 기도하던 관계였기에 이별의 순간 더 슬피 울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평소 서로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 관계는 이별할 때도 그렇게 슬픔이 없습니다. 평소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이별의 순간 더 깊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감동적인 이별을 하게 된 것은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해외로 이민을 가면 다시는 못 볼 거라고 생각해서 손을 흔들며 울고불고했던 시대보다 훨씬 이전입니다. 이제는 못 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슬픈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 에베소를 한 번 더 방문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방문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언제 어느 곳에 있든지 그곳이 마지막일 수 있으며, 오늘이 마지막 만남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만난다면 하나님의 감동과 은혜가 계속될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한 기간이 3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다른 곳에 비하면 긴 기간이지만,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3년이 금방 가지 않습니까? 그 짧은 기간에 깊은 영향력을 주고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 여정을 돌아보면서 고백하고 권면합니다. 이 내용이 정말 중요합니다. 한번 말씀을 나누는 것만으로 모두 담을 수 없는 풍성한 내용이 있고, 특히 교회 지도자들은 평생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야하는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겸손과 눈물로 섬긴다
 
오늘 바울의 고백과 권면에서 다섯 가지 중요한 사역 철학이 나타납니다. 첫째 겸손과 눈물로 섬긴다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겸손과 눈물로 주를 섬겼고 유대 사람들의 음모로 시련도 많이 당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는 여러분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저하지 않고 전했고 공중 앞에서 또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여러분을 가르쳐 왔습니다”(19~20절). 
바울이 모든 겸손과 눈물로 주를 섬겼고, 그 겸손과 눈물로 섬겼던 모습을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가르쳤고, 많은 유대인의 음모와 시련 속에서도 인내하며 사역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사역을 회고하면서 자신을 통해 나타난 놀라운 표적과 기적을 말하지 않았다는 게 놀랍습니다. 바울의 몸을 스치기만 해도, 그가 기도만 하면 병자가 낫고, 놀라운 은사와 능력이 나타났던 것을 회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인내하며 눈물과 겸손으로 섬겼는지를 강조했습니다. 자신에게 나타난 은사와 능력을 통해 일어난 역사보다 얼마나 겸손하게 눈물을 흘리며 섬겼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겸손과 눈물’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한국 교회 최고령 목사님이셨던 방지일 목사님이 생각납니다. 젊은 시절 중국 선교사로 섬기셨고, 영등포교회 원로목사님으로 섬기셨습니다. 오래전에 우리 교회에도 몇 차례 오셨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어느 선교 컨퍼런스에서 그분을 뵈었습니다. 아마 그때 90세 초반이셨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선교 컨퍼런스를 하는데 가장 앞에 앉으셔서 지팡이를 꽉 쥐고 앉아 계셨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시차 핑계 대고 졸고, 방에 가서 쉬고 하는데, 한 번도 빠짐없이 앉아 계셨습니다. 손자뻘 되는 강사들이 하는 말을 경청하고 계셨습니다. 제가 정말 감사해서 사진을 찍어 보내드렸더니 책과 함께 친필로 쓴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그 책 제목이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입니다. 그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어느 기자가 목사님을 인터뷰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연로하셨는데도 건강하신지를 질문했습니다. 특별히 하는 운동은 없고 심장운동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심장은 그냥 뛰는데 그게 무슨 운동이 되느냐고 했더니 새벽에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묵상할 때 말씀이 서로 연결되는 것을 체험하고, 통회하는 눈물을 흘릴 때 심장이 고통 치는 것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심장운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겸손에서 나오는 눈물의 사람이셨습니다. 
여러분, 눈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내가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이 있고, 하나님 앞에 겸손할 때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씨를 뿌리는 농부의 눈물은 무엇입니까? 하기 싫은 농사, 힘든 농사, 씨를 뿌릴 때마다 ‘내 운명은 어떻게 이렇게 힘든 일을 할까?’ 하며 흘리는 눈물이 아닙니다. 그 씨가 뿌려진 이후 열매 맺을 것, 하나님이 추수하실 것을 바라보는 눈물입니다. 내가 생명을 심고 거둘 수 있다는 바로 그 눈물이 기쁨이 되어 돌아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눈물은 무엇입니까? 에베소 영혼이 구원 받고, 에베소 도시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비전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故 방지일 목사님의 책에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 
“눈물은 거꾸로 흐릅니다. 눈에서 흘러 하늘에 가 닿습니다. 눈물의 사람이 되십시오. 눈물을 아까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당신이 흘린 눈물을 위로와 감사의 병에 담아 주십니다.” 
바울의 사역 원리 이면에 겸손에서 나오는 눈물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강권하심이 계획을 이끈다
 
둘째, 성령의 강권하심이 계획을 이끕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성령의 강권하심 가운데 예루살렘에 가려고 합니다. 그곳에서 내가 무슨 일을 당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22절). 
바울에게는 늘 사역 계획이 있었습니다. 도시 중심의 계획, 회당을 먼저 방문하는 계획, 로마의 군사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계획,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에 먼저 가고, 방문한 지역을 또 다시 방문하는 계획 등이 <사도행전> 전반에 나타납니다. 또 한편에 그의 계획을 성령님이 강권적으로 바꾸시는 변화들이 나타납니다. 아시아에 집중하려는 그를 유럽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건너가게 하신 것도 성령의 강권하심입니다. 이제 바울이 22절에서 “성령의 강권하심 가운데 예루살렘에 가려고 한다”고 합니다. 바울이 두 번째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상황입니다. 그가 남다른 마음을 가지고 첫 번째 예루살렘에 방문한 것은 20대였습니다. 주후 15년 경 다소에서 자란 바울이 바리새인이 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발걸음이 첫 번째 여행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부모님 세대가 로마가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할 때 포로로 잡혀가서 지금의 튀르키에에 있는 다소라는 지역으로 끌려갔던 것 같습니다. 이른바 강제이민을 당한 것입니다. 다소라는 지역은 길리기아의 수도인데, 로마가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4천 년 전통의 유서 깊은 도시였고, 많은 철학자가 있고, 문화가 발전한 지역이었습니다. 1세기에 가장 교육열이 높은 도시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가 다소를 무시하지 못했습니다. 다소의 어떤 리더십에게는 로마 시민권을 부여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마 바울의 가족도 어떤 이유인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로마에 팔려갔을 때 주인이 자유를 주었든, 로마에 의해 시민권을 받을 자격이 되었든 로마 시민권을 얻어서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사회 리더십이 되려면 바리새인이 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사두개인은 귀족 출신이어야 하고, 베냐민 지파이기 때문에 제사장은 될 수 없었고, 자신이 노력해서 될 수 있는 것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꿈을 가지고 20대에 예루살렘에 온 것입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했고, 인정받는 바리새인으로 성장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었고, 세 차례 전도여행을 하고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그의 나이가 60대가 되었습니다. 40여 년이 흐른 것입니다. 주후 56년경이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은 자신의 꿈을 위한 것이었지만, 두 번째 방문은 성령의 강권하심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성령의 강권하심은 때로 우리의 계획을 더 강하게 촉진시키기도 하지만, 계획을 바꿔서 다른 계획으로 가게 만들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강권하심에 우리의 계획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운 계획을 고집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유연하게 내어드릴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사명을 위해 생명을 드린다
 
셋째, 사명을 위해 생명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직 내가 아는 것은 어떤 도시에 가든지 감옥과 고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을 성령께서 내게 증언해 주실 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서 내게 주신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사명을 다 완성하기 위해서라면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23~24절). 
생명을 다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도록 인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가면 감옥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려 주셨습니다. 성령님이 “그러니 너는 피해라”고 말씀 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의 인격적인 선택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이런 정보를 하나님이 주신다면 ‘나에게 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구나. 나를 보호하려고 하시는 것이구나. 나를 고난에서 벗어나게 하시려는 것이구나’ 해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감옥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님이 알려주셔도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가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한다”며 목숨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감당해야 할 사명에 충성했습니다. 
진정한 부르심은 상황과 환경, 고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강권하심을 따라 걸어가는 성도는 앞에 어떤 어려움과 위험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하나님의 사명을 늘 우선하게 되어 있습니다. 육신의 생명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육신의 생명 안에 주어진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을 확신하는 사람은 때로 육신의 생명이 희생될 지라도 영적 생명을 이루는 사명을 위하여 자신을 드릴 수 있습니다. 
불필요한 희생을 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되, 때로 하나님이 우리를 순교의 길로 인도하신다면 기쁘게 영원한 생명을 증거하고, 드러내고, 지키기 위해서 육신의 생명을 내려놓는 순교의 신앙을 통해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되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과 양떼를 잘 살피라!
 
넷째, 자신과 양떼를 잘 살피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자신과 양 떼를 잘 살피고 조심하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감독자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내가 떠나고 나면 흉악한 이리 떼 같은 거짓 선생들이 여러분 가운데 들어와 양 떼를 해치려 할 것을 압니다. 또한 여러분 가운데서도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제자들을 빼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진리를 왜곡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똑바로 차려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3년 내내 여러분 모두에게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훈계한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제 내가 여러분을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에 맡깁니다. 그 말씀이 여러분을 든든하게 세워 거룩함을 입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 기업을 받게 하실 것입니다”(28~32절). 
‘양떼를 돌보는 것 이전에 자신을 잘 살피라’는 의미는 목자 되신 예수님을 잘 따라가고 있는지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양은 멀리 보지 못합니다. 바로 앞만 봅니다. 앞서 가는 양이 어디로 가는지에 따라 휩쓸립니다. 양은 바로 앞 양 뒤꽁무니에 머리를 향하고 앞서 가는 양이 가는 대로 갑니다. 가장 앞서 있는 양이 목자만 따라가면 문제가 없는데, 목자를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가면 뒤따라가는 양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늘 목자 되신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의 핏 값으로 사신 양떼들을 목자가 가는 방향대로 인도하고 있는지, 목자 되신 그분을 먼저 따르는 양으로서 잘 따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것이 양떼를 잘 돌보는 것입니다. 또 자신을 따르게 하는 거짓 선생들, 진리를 왜곡하는 거짓 이리떼 같은 선생으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 로잔대회가 열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가 되고, 거짓된 사상, 사회적 성을 부르짖고, 심지어 교회 안에도 진리에서 떠나게 하는 자유주의 사상들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 하나님의 양떼를 잘 지키고, 그들을 믿음에 굳게 세우는 교회,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다섯째,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는 나와 내 일행이 필요한 것을 손수 벌어서 썼습니다. 이처럼 내가 모든 일에 모범을 보였으니 여러분도 약한 사람들을 도우며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하신 주 예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33~35절).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주는 자로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주는 삶이었습니다. 자신의 물과 피까지, 몸과 모든 것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바울은 많은 필요가 있었지만, 받는 자가 아니라 주는 자로 사역하기를 원했습니다. 처음 믿는 이들에게서 무언가를 받으면 믿음에 장애가 될까봐 손수 생활비를 벌어서 사역할 만큼 주는 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받는 자의 정신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주는 자의 정신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받는 자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상황이든지 주는 자로 살아가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는 자가 되기 위한 비전이 있을 때 하나님이 축복을 더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다섯 가지 바울의 사역 철학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연결해 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겸손과 눈물의 사람은 성령의 강권하심을 경험합니다. 성령의 강권하심은 생명보다 귀한 사명을 따라 살게 합니다. 그 사명은 하나님이 피로 사신 영혼들을 돌보고, 그들을 위해 주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이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별은 에베소 지도자들에게 사명을 남겼습니다. 바울의 사역으로 세워진 교회가 계속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명과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되는 이별이었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이 천국에 가셨지만 남은 우리에게 육신의 이별을 통해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을 우리가 계속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로 로잔운동을 섬기게 하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 사명을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김다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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