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예수님의 흔적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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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예수님의 흔적이 있습니까?

 2023-01-21      제14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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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흔적이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6:11~18
/ 이재훈 목사
 
모든 사람에게는 지우고 싶은 인생의 흔적이 있고, 남기고 자랑하고 싶은 인생의 흔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지우고, 무엇을 남기고 자랑하고 싶습니까? 
예수님이 남기신 세 가지 흔적이 있습니다. 첫째,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졌고, 십자가는 교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둘째, 빈 무덤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 증거로 빈 무덤을 흔적으로 남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가두고 있던 무덤의 문이 열렸고, 무덤이 비어 있었습니다. 그 빈 무덤이 이 땅에 계셨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흔적입니다. 셋째,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남아있었던 고난의 흔적입니다. 예수님이 온전한 부활을 이루셨는데 십자가 고통의 흔적을 남겨놓으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직접 보고 만져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는 도마와 같은 이들에게 확신을 주시고, 그러한 제자들을 복음과 예수님 부활의 증인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흔적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 예수님 고난의 흔적을 본 자들이 확신을 얻었고, 그들이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 고난의 흔적은 <요한계시록> 기록으로 볼 때 영원한 예배를 돕는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영원토록 천상의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의 중심이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주제, 예배의 내용, 예배의 목적은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분의 흔적을 천국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흔적을 보면서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을 기억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예배하는 귀한 통로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임에도 십자가의 흔적을 남기신 까닭은 선교와 예배에 목적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예수의 흔적을 자랑하는 삶
 
예수님은 당신에게 흔적을 남기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믿는 성도들에게도 흔적을 남기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습니다”(17절).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면서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몸에는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받은 많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는 수없이 매를 맞고, 감옥살이를 하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유대인에게는 40에 하나 감한 매를 39대씩 다섯 번 맞았습니다. 세 번 채찍으로 맞았고, 한번 돌로 맞았습니다. 돌과 채찍에 맞은 흔적과 상처가 그의 몸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습니다”라는 고백이 “내가 이처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많은 고생을 했기 때문에 나는 누구보다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나는 누구보다 대접을 받아야 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나는 누구에게나 인정받아야 하는 교회 역사에서 길이길이 빛나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흔적과 상처를 자랑하는 것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바울이 <갈라디아서> 1장부터 6장까지 써 온 모든 말씀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전체에서 사도 바울이 육체를 자랑하는 것을 책망하고 비판해 왔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교회가 다른 복음을 믿는 것을 분노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믿었던 ‘다른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 같지만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이상한 것은 인간의 의와 공로, 자신의 행함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율법을 준수하는 것, 할례를 행하는 것 등의 육체를 자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말 순수하게 예수님을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고,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며,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복음을 인간의 공로와 헌신, 인간의 의를 가미한 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1장부터 책망하고, 도전하며, 그것이 왜 잘못되어 있는지를 설명하다가 결론 부분에서 “내 몸의 흔적을 보아라”면서 자신이 얼마나 희생했고 헌신했는지를 나타내면서 자랑의 도구로 삼는다면 앞서 권면한 모든 교훈을 뒤집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다. 이 흔적이 내가 얼마나 고생하고 힘든 인생을 살았는지 아느냐?”라는 고백은 인간적인 의와 육체를 자랑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몸에 있었던 예수님의 흔적을 왜 강조했을까요? ‘내가 이렇게 고생했으니 당신들이 알아주어야 한다’ 또는 ‘당신들도 이렇게 고생해야만 한다’는 육체를 자랑하는 신앙을 강조하는 게 아닙니다. 도리어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밖의 요소들은
육체를 자랑하는 것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려고 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것은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핍박을 받지 않으려는 것뿐입니다”(12절). 
예수님의 십자가가 요구하는 희생과 핍박, 헌신을 받지 않으려고 우리는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려고 합니다. 이 시대 교회의 위기는 육체의 겉모양을 꾸밀 때 나타납니다.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 앞에 서기를 꺼려하고, 그것을 교리적인 한계처럼, 이전 것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처럼 십자가의 도를 외면하고, 육체의 겉모양을 자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종교적, 도덕적으로 세련돼 보이는 교양과 같은 종교와 문화 속에 머물 때 육체를 자랑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유로 예배에 참여하십니까? 어떤 분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파이프오르간이 있기 때문에 예배에 참석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에게는 ‘십자가와 부활, 말씀밖에 없는 교회는 지루하다. 무엇인가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지’라는 욕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온통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입니다.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좋은 예화나 감동적인 스토리, 용기를 주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육체를 자랑하는 것이라면, 십자가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이야기라면 어쩌면 갈라디아교회처럼 될 수 있습니다. 매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만 들어서 “새로운 것 없습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새로운 것을 바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교회를 종교적, 문화적으로 만들어 가려하고, 육체를 자랑하려는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육체를 자랑하는 교회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집중하고, 십자가를 자랑했던 사도 바울의 신앙을 이어받는 길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시각에서 보면 나쁘고 악한 사람들만 곤경에 처하는 게 아닙니다. 선한 사람들도 곤경에 처합니다. 십자가에 거치는 것, 십자가의 참혹함, 십자가의 어리석어 보이고 미련해 보이는 하나님의 진리를 외면하고, 세련된 종교의식의 문화로 표현할 때 육체를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가톨릭의 거의 모든 것을 버린 것입니다. 화려한 의식들과 시설, 성상들을 모두 버린 것입니다. “가운이 필요하다면 검정색으로 단순하게 하나를 입어라. 그것도 안 입을 수 있으면 좋다”고 했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성도들과 하나 되고자 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만들어진 예배당을 보면 강대상만 큰 예배당이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의 전통이 강하기 때문에 건물 자체를 바꾸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변은 모두 옛날식으로 했고, 강대상만 앞에 갖다 놓은 예배당도 있습니다. 세계관을 바꾸는 게 그렇게 힘듭니다. 십자가에 집중하기보다 그 밖의 많은 요소들을 더욱 중요시 하고, 어떤 의식이나 절차, 문화와 종교화되는 것들이 결국 무엇을 가로막습니까? 교회의 본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 그리고 복음을 땅 끝까지 증거하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이 모든 것들을 우리는 ‘육체를 자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선교의 걸림돌은 사실 믿지 않는 완악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고, 육체를 자랑하는 교회입니다. 세상 이념에 포로가 되어 있고, 세상에 치우쳐 있는 사람들이 복음의 걸림돌이 아닙니다. 육체를 자랑하고 있는 교회, 선교가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지 않은 교회, 십자가의 체험이 없는 교회가 걸림돌입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을 자랑스럽게 여겼는지를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세상이 내게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해 그러합니다”(14절).     
바울 당시 십자가는 결코 자랑할 것이 못되는 시대였을 뿐만 아니라 가장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십자가가 강렬히 빛이 나는 꿈을 꿨다면 ‘아, 은혜로운 꿈을 꿨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당시에 십자가 꿈을 꿨다면 악몽을 꾼 것입니다. 그만큼 수치스러운 도구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십자가가 경건하고 교양 있고  보수적인 액세서리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십자가를 걸고 다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십자가가 왜 자랑할 것이 되었습니까? 
사도 바울에게 ‘자랑’이라는 단어가 그의 전문 용어라고 할 만큼 자주 사용했습니다. 신약성경 전체에 59번 사용되었는데 바울이 55번을 사용했습니다. 거의 대부분 사도 바울이 사용했고, <고린도전후서>에서는 39번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자랑’이라고 번역했지만, 이 단어와 꼭 맞게 번역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고 합니다. 그 의미를 풀어보면 ‘영광을 구하다’, ‘어떤 것을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다’, ‘어떤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다’ 등입니다. 제가 원문적인 의미에서 ‘자랑’이라는 단어를 세 가지로 정리해 봤습니다.  
첫째, 만나는 사람들에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자랑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둘째, 생각만 해도 너무 기뻐서 삶의 의욕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는 손자가 될 수도 있고, 어떤 분들에게는 재산이 될 수 있습니다. 명예가 될 수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너무 기뻐서 삶의 의욕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셋째, 자신이 믿고 의지하며 삶의 중심이 되고 지탱해주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삶에 자랑이 되는 흔적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에게는 십자가가 자랑의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는 사람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고, 삶에 의욕을 일으켜 기뻐하게 했고, 삶의 중심이 되고 지탱이 되었습니다. 선교의 삶은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인생의 흔적이 되는 삶입니다.
 
십자가만 자랑한 세 가지 이유
 
사도 바울은 왜 십자가만을 자랑했는지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십자가가 그리스도를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흉악한 교수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진리는 사람들에게 거슬리고,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에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둘째, 십자가가 세상을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력을 가리켜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 안에 있는 신념들, 이 시대의 풍조, 그리고 왜곡된 이념들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복음을 시시한 것으로, 교회 안에서만 통용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들만의 세상 논리로 그렇게 여깁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이 세상을 못 박았고, 더는 이 세상이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 없으며,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자가 되었기에 이 세상으로부터 우리는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판단과 평가, 시대의 흐름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셋째, 십자가가 나를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믿고, 그분과 연합한 모든 이들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으로 세상에 대해 죽으셨습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에 대해 더는 할 말이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도 세상에 대해 죽었음으로 더는 세상이 그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만 자랑하고, 
십자가 진리를 증거하는 삶
 
십자가의 도를 믿고 체험하는 삶이 나타나는 게 예수님의 흔적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몸에 남아있는 상처를 자신의 공로로, 자신이 인정받아야 하는 공로로 자랑하는 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를 자랑하는 신앙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 그리스도가 못 박힌 십자가에 자신도 못 박혔고, 세상도 못 박은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고,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삶을 ‘예수의 흔적’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무엇을 흔적으로 남기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하늘로 돌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훈장이 아니라 흔적을 조사하실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긴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흔적을 남긴 바울은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십자가의 진리를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의 흔적이 우리에게 있다면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온누리교회가 예수님의 흔적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온누리교회 모든 성도에게 바울처럼 예수님의 흔적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명의 삶, 증인의 삶, 선교의 삶이 나타나고,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예수님의 흔적을 지니고,
십자가만을 자랑했던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흔적이 있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만을 자랑했던 바울의 신앙이 우리의 신앙이 되고,
바울의 삶 속에 임하셨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임하셔서, 
이 땅에서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삶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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