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길, 진리,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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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길, 진리, 생명

 2023-01-07      제14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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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진리, 생명 
 
요한복음 14:1~6
/ 이재훈 목사
 
우리 인생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이 시대 성도들이 직면한 상황이 매우 심각합니다. 대표적으로 영국에서는 예배당이 술집으로 팔려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문화재 법으로 건물 외형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내부를 술집으로 바꾸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공공장소에서 십자가를 목에 걸었다고 해고 위협을 받는 일도 일어난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공립학교 교사가 수업시간에 자신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혔다는 이유만으로 징계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자신이 무슬림이라고 밝힌 교수는 소수종교보호법에 보호를 받는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그런 흐름으로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배당이나 개인의 사생활에서만 적용되어야 한다는 흐름이 있습니다. 영국이나 미국도 거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기독교 사립학교에서도 건학이념에 따라 자유롭게 성경을 가르칠 수 없도록 많은 규제를 받습니다. 이런 현상이 최근에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수세기 동안 흘러온 흐름이 최악의 상황으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미 18세기 중반부터 진리와 권위로 받아들여졌던 모든 사실을 이성과 경험으로 의심하고 비판하는 문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회의와 의심이 전염병처럼 온 세계에 퍼져나갔습니다. 다음 세대로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신앙보다 의심과 회의가 존중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절대적 권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신념과 사상이 절대적인 진리처럼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위치에 인간이 오르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느낌은 어떤 것이든지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판단할 수 없다는 이념이 절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절대적 권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만큼은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모순과 거짓, 앞뒤가 맞지 않는 사상이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이것을 규정해서 이름을 붙인다면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는 우리가 믿는 복음이 ‘사실(fact)’의 세계가 아니라 개인의 선택 사항인 ‘가치(value)’의 세계라고 주장합니다.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의 선택영역이기에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할 진리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이라는 단어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각자 가치 있게 여기는 것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계시된 진리는 수많은 이데올로기, 마치 상점에 전시된 수많은 상품 중에서 하나의 브랜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는 진리의 기준을 믿고 찾는 것은 독선적이고, 분열을 일으키며, 차별을 조장하는 태도라고 비난합니다. 옳고 그름은 존재하지 않고, 진리와 거짓의 구분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거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주장의 다섯 가지 명제가 있습니다. 첫째, “어느 종교가 모두를 위한 절대적 진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류에 대한 배신행위에 가깝다.” 둘째, “모든 종교는 같은 범주에 속하기에 궁극적으로는 같은 진리에 이를 수 있어서 표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믿음을 전하려는 소위 전도는 예의가 아니고 대화의 수준에 멈춰야 한다. 그것은 강요가 될 수 있고 심지어 폭력이 될 수 있다.” 넷째, “어떤 종교든 진리라고 주장하지 못하게 해야 하며, 하더라도 자신들의 영역 내에서만 주장하도록 허락해야 한다. 특히 공적 영역에서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 “누군가 무엇인가를 진심으로 믿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누구든지 ‘이것이 나에게는 진리다’라고 말해야 하고, ‘이것이 바로 진리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명제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바로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 혹은 종교다원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는 역사 속에서 항상 수많은 종교와 사상들과 씨름해 왔습니다. 구약과 신약,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교와 사상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초대 교회는 유대교와 씨름해야 했고, 그 후에는 로마의 여러 종교와 사상, 고대 그리스 종교, 여러 종교의 도전과 씨름했습니다. 요즘은 이주로 인해서 종교적으로 다원화된 세상이 되었습니다. 다원화된 세상 자체를 부정하고, 다른 종교는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며, 교회만 존재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미 중세시대에 실패했습니다. 문화적으로 다원화된 세상을 우리가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화적 다원주의와 잘못된 이데올로기로 만들어진 다원주의는 구별해야 합니다. 
문화적 다원주의란 무엇입니까? 사회 안에 다양한 문화와 생활방식을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다원주의,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는 무엇입니까? 종교 간의 차이가 진리와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진리에 대한 각자의 선택의 차이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서로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 진리이고, 절대적인 진리인가는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각자에게 진리라고 여겨지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진리를 같이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 혹은 종교적 다원주의입니다. 이 근본적인 사회 현상의 이면에 흐르는 사상을 우리가 규명하고 진단하지 않으면 휩쓸려 갑니다. 언어적인 화려함으로 성도들의 삶을 옭아매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길, 유일한 진리, 유일한 생명
 
예수님은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가 출연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도마의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유일한 길, 유일한 진리, 유일한 생명이 있다는 말씀이고, 그 유일한 길, 유일한 진리, 유일한 생명이 곧 예수님이라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를 따라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갈 것인지 둘 중 하나일 뿐이지 양립할 수 없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지만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가 맞는 것 같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양쪽에 설 수 없습니다. 둘 다 포함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선명하게 구별되는 주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은 “세상에 유일하고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주장이고, 또 한편은 “유일하고 절대적인 것이 있으며 그것이 곧 예수님”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역사에 절대적인 것이 없다’는 것은 증명할 수 없는 하나의 주장일 뿐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의 가치일 뿐입니다. 우리 삶을 지탱하는 것들은 모두 절대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빛의 속도가 절대적이지 않고 계속 변한다면 어떻게 과학을 공부합니까? 빛의 속도가 일정하기 때문에 일정한 속도를 대입해서 연구하지 않습니까? 태양을 중심으로 태양계가 움직인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태양이 언제나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일정한 거리에 따라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과 역사, 세상을 지탱하는 움직일 수 없는 진리가 존재합니다. 과학의 영역에도 존재하듯이 우리의 삶과 역사에도 절대적인 옳고 그름이 존재합니다. 
교계에서도 이 시대는 다원주의 시대가 되었으므로 세상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도 전부 상대적으로 바꿔서 동성애를 죄라고 하는 것은 그 시대의 생각이지 이 시대는 아니라면서 성경도 다시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소위 ‘퀴어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동성애를 합법화할 수 있는 신학적 근거를 만드는 것입니다. 중국 공산당 정부가 그들에게 맞게 성경을 다시 쓰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이 유일한 주님”이시라고 선포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이 살던 시대도 다원화된 세상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 시대와 그리스 시대 수많은 종교와 사상, 그 시대 다원적인 세계에서도 “예수님은 유일한 주님”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세속 권력이 종교화돼서 황제를 ‘큐리어스(주님)’이라고 불러야 했던 시대에 “예수님이 주님”이고 고백했던 이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입니다. 어느 시대든 그 시대의 흐름과 조류를 거스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시대의 흐름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진정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이 사실이 아니라면 교회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 시대 교회가 세상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습니다. 교회가 사회적으로 유익한 일을 많이 안 했기 때문에 더 많은 사회사업을 해야 한다고 결론 낸다면 저는 잘못된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인 봉사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더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사회봉사에만 집중하면 세상이 흐름을 바꿀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별개의 문제입니다. 오히려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졌던 순교의 각오로 이 시대가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에 사로잡혀 휩쓸려 갈 때 “유일한 진리가 있습니다.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유일한 생명이 있습니다”라고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이 교회가 세상에게 신뢰 받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더욱 견고히 하는 것이 교회가 사회로부터 신뢰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서 교회마저 참된 신앙고백을 희석시키고, 지켜야 할 진리를 포기하고, 질서를 내어 줘서는 안 됩니다. 유럽과 미국의 교회가 그래서 문을 닫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적 성을 받아들였던 영국의 교회가 일주일에 평균 10개 정도 문을 닫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길과 진리, 생명 되셨음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증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중요한 말씀을 세속의 이념에 내어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얼마나 견고하게 믿고, 주장하는가에 따라서 대한민국 성도들이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느냐 아니면 세속의 이념의 먹이가 되느냐가 달려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는 정말 중요한 해입니다. 대한민국 역사에 교회가 영향을 미치는 공동체가 될 것인지 아니면 세상에 먹이가 될 것인지 기로에 서 있는 해라고 느낍니다. 온누리교회 성도들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고, 그 신앙고백을 증거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심판자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는 분명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십니다. 그분이 성육신하셨습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분명 죄인들을 대신해 죽으셨고, 십자가의 피로 모든 것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분명 다시 살아나셔서 그 대적이 모두 항복할 때까지 지금 아버지 곁에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분명 다시 오실 것이며, 그분의 영광스러운 통치가 온 천하에 밝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죽으셨고,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사셨고, 말씀하신 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분의 오심이 역사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역사를 B.C.와 A.D.로 구분하는 것은 그 영향력입니다. 역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며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것입니다. 대개 어떤 지도자든 살아 있을 때 영향력을 미치고, 죽고 난 이후에는 그 영향력이 점점 사라집니다. 기념일은 있지만 그 영향력이 점점 쇠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향력은 그분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분의 부활하심이 사실이고, 그분의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세주이시며, 심판자이십니다. 우주에 있는 모든 악을 이기는 승리의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이 고백을 개인의 가치 영역, 책 속에, 예배당 안에 가둬 버리면 우리는 이 세상의 거센 이념과 사상의 물결에 휩쓸려 버리고, 몸만 예배당에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세속의 사상에 팔아넘긴 배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신과 모든 판단에 예수님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굳게 믿고 체험하기를 축원합니다. 
도마가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질문 범위를 훨씬 뛰어 넘는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6절). 
우리 모두는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 우리 존재의 근원이시며, 우리 삶을 주관하시고 역사를 심판하신 그분께로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분께 인도하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15세기 토마스 아 켐피스라는 수도사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다시 풀어썼습니다. 
“길이 없이 가는 곳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진리가 없이 앎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생명 없이 살아가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너희가 따라가야 될 길이며, 너희가 믿어야 할 진리이며, 너희가 소망해야 할 생명이다. 나는 침범할 수 없는 길이며, 흠이 없는 진리이며, 영원한 생명이다. 나는 가장 올바른 길이며, 진실로 옳은 진리이며, 축복된 생명이다. 너희가 나의 길에 거하고, 나의 진리를 안다면 너희는 영원한 생명을 붙잡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모든 길이 산꼭대기로 통화기에 어느 길로 가든지 꼭대기에만 가면 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틀린 말입니다. 어떤 길은 낭떠러지로 향하고, 어떤 길은 골짜기로 빠지고, 어떤 길은 막다른 길입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십니다. 요즘 사람들은 ‘진리’라는 단어를 싫어합니다. 신학자들도 진리라는 단어가 분열을 시키기 때문에 사랑이란 말만 있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틀린 말입니다. 거짓을 믿도록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를 설명하는 대표적 예화가 있습니다. 다원주의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인용하는 예화입니다. 
어떤 인도의 왕이 기르는 코끼리의 존재를 알기 위해서 서로 코끼리를 만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상아를 만지고, 어떤 사람은 다리를 만지고, 어떤 사람은 꼬리를 만지고, 어떤 사람은 몸통을 만졌습니다. 각기 다른 부분을 만지면서 다리를 만진 사람이 “아, 코끼리는 엄청난 둔탁한 벽과 같다”고 하고, 꼬리를 만진 사람은 “밧줄과 같다”고 합니다. 각기 다른 부분을 만지고 다르게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체를 못하기 때문에 부분을 만지고, 부분을 말하는 것이 때문에 모든 사람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무시하지 말고 존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으로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 버립니다. 그런데 핵심적인 부분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코끼리의 다른 부분을 짚고, 다르게 이야기하는 것을 “틀렸다”고 평가할 수 있는 왕이 나옵니다. 코끼리인 줄 알고, 코끼리를 몇몇 부분만 알고 잘못 이야기한 것을 상대적이라고 말하는 상황을 평가하는 왕이 있습니다. 틀리게 말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왕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왕의 이야기는 싹 빼버리고,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부분을 만지고, 그 부분을 전부라 말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전체를 알고, 전체를 평가할 수 있는 존재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창조하시며, 모든 것을 판단하실 만왕의 왕이 계십니다. 교회가 절대적이라는 게 아닙니다. 절대적인 왕이 계십니다. 여러분, 말씀을 굳게 붙잡고 세상 속에 나아가 보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가야 할 영원한 집으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이 수많은 종교와 사상, 우상 속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겠습니까? 그분들을 지탱해주는 게 무엇입니까? 말씀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위로입니다.
아프리카에서 25년 사역하고 본국으로 귀환하는 미국 선교사 부부가 있었습니다. 지치고, 힘들고, 건강도 무너지고, 미래도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은퇴한 그 선교사들이 배를 타고 귀국하는데, 그 배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합니다. 항구에 배가 도착하자 루즈벨트 대통령을 환영하는 팡파르와 환영 인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 부부를 환영하는 인파는 없었습니다. 선교사 부부가 낙심과 절망 속에 배에서 내렸습니다. 남편 선교사가 아내에게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이야. 우리는 선교지에서 수십 년 동안 생명을 다해서 사역을 했는데 아무도 환영해 주지 않고, 대통령은 여행을 다녀오는데 환영을 받는 거는 불공평한 일이야.” 낙심에 빠져 있는 선교사 아내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함께 기도합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처와 아픔, 불평을 쏟아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고쳐주셨어. 나의 아픔, 불평을 쏟아냈더니 하나님께서 내 어깨에 손을 얹어 주신 걸 느꼈어.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 ‘아들아, 너는 아직 집에 도착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직 집에 도착한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집에 도착하지 못하도록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말하고, 진리가 없다고 말하고, 유일한 것은 없다고 말하고 속입니다. 이 세상의 헛된 이데올로기와 다원주의에 속지 않고, 우리가 진정가야 할 영원한 집으로 확신 있게 걸어가십시오. 수많은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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