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성도의 거룩한 탄식

주일강단

[주일강단] 성도의 거룩한 탄식

 2022-09-17      제14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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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거룩한 탄식
 
로마서 7:15~25
/ 이재훈 목사
 
로마서 7장을 읽는 성도 중에 당황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를 기록할 통로가 될 정도로 성령님께 사로잡혀 있는 바울이 자신의 상태에 대한 고백을 했는데 받아들이기 어려운 표현들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죽었고, 죄에 대하여 죽음을 경험하고, 율법에 대해 죽음으로 율법의 구속에서 벗어났다고 고백한 사도 바울이 여전히 죄 아래, 죄의 포로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네 구절을 보면 “나는 내가 행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15절),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을 압니다”(18절),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합니다”(19절),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해내겠습니까?”(24절)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들은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시점이 아니라 과거 그가 불신자였을 때의 상태를 고백하는 거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혹은 불신의 상태는 아닐지라도, 거듭났지만 여전히 육적 상태에 있었을 때의 상태를 말하는 거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로마서 7장에 나타난 복음의 메시지를 잘못 이해하게 만듭니다. 로마서 5장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평을 누리고, 의롭다 함을 받고,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고,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다는 고백 직후에 다시 불신자의 상태, 회심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고백을 한다는 것이 논리의 흐름상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의롭다함을 받은 자로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서,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를 누리는 믿음의 싸움으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 바울의 상태라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몇 가지 근거를 말씀드리면 첫째, 문법적으로 13절까지는 과거 시제를 사용하다가 14절부터 현재 시제를 사용합니다. 한글이나 영어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원문에는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를 쓴 당시의 상태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22절에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속사람’은 거듭난 성도들에게 임한 새 생명으로 인하여 변화된 새사람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불신자에게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불신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법을 속사람이 즐거워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셋째, 21절에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라는 고백에서 선한 것에 대한 강한 의지와 열망이 나타납니다. 비록 행함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선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16절에서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한다면 나는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내적인 갈등
 
로마서 7장 전반부에서는 율법에 대해 죽은 자에 대해 설명합니다. 율법과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그 연장선에서 ‘갈등 가운데 있는 나의 상태가 율법은 선하지만 능력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흐름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앞서 이해하기 어려운 사도 바울의 고백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나는 내가 행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합니다. 나는 사망의 몸입니다”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고백은 성도들이 거룩함에 이를수록 나타나는 탄식입니다. 로마서 7장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을 경험하고, 죄에 대하여 죽은 자, 율법에 대해 죽은 자의 상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신분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여기고 살아갈 때, 믿음의 싸움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의 싸움 가운데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내적인 갈등을 경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바울의 갈등과 탄식은 성령님에 의하여 거룩하게 되지 않은 사람들은 경험할 수 없는 고백들입니다. 죄에 대한 혐오, 자신 안에 있는 악에 대한 혐오, 자신이 원하는 의롭고 선한 삶에 도달하지 못한 것에 대한 탄식은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경험할 수 없는 성도들의 심리상태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여 우리가 더욱 거룩해 질 때 죄의 실체가 더 밝히 드러납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 전부 더러우면 오물이 조금 묻은 것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정말 깨끗한 옷에 흠이 하나 묻게 되면 더 강하게 흠이 느껴지는 것처럼, 우리가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죄에 대해 예민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때로 구원의 확신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안심하십시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고민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은 구원에 대한 고민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구원 받은 백성인가?’라는 고민이 있다면, 구원받은 백성일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런 문장을 남겼습니다. 
“의로운 성인들은 동시에 죄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의롭다.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을 덮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를 담당하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죄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으며 죄의 갈망이 없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의사의 진료가 필요한 아픈 사람들과 같다. 그들은 심각하게 아프지만 오직 소망 안에서 건강하다. 점점 더 나아지기 시작하는 한 그들은 나아지고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은 건강해질 것이다.”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이 
성령 아래 있기를 갈망하는 탄식
 
로마서 7장에 나타난 바울의 고백은 죄에 대하여 죽고,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로서 은혜 속에서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고자 하는 성도의 탄식입니다. 화란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도 “만약 우리가 거듭남으로써 어떤 연약함, 갈등도 없이 완전한 거룩을 이루었다면 이런 간구와 탄식은 필요 없게 되는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우리는 어떤 연약함도 없이 완전한 거룩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23절에서도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의 포로로 잡아가는 것을 봅니다”라고 합니다. ‘죄의 포로’라는 단어만 보고 ‘바울은 항상 죄에 대해 패배하며 살았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하나의 현상을 관찰한 것입니다. 그는 죄의 실체를 영적으로 예민하게 본 것입니다. 항상 죄의 법아래 사로잡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거룩함에 이를수록 자신 안에 있는 죄의 실체를 더 깊이 보고, 느끼고, 고백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바울이 자신을 “사도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도들과 비교해서 자신이 가장 작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목회서신에 나타난 그의 고백은 “죄인 중의 괴수다”입니다. 죄인과 비교해서 자신을 괴수 같은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변화된 이후 갈수록 죄를 많이 지었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더 거룩함에 이르렀을 텐데 더 심각한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자기 안에 있는 죄의 실체를 더 민감하게 느끼고,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죄에 사로잡힌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 아래 있게 됐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 문이 열리고, 길이 열리고, 우리에게 약속이 주어졌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그런데 은혜 아래 있는 상태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탄식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의 능력 아래 존재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탄식은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이 성령 아래 있기를 갈망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이 성령 아래 있기를 더욱 갈망하는 탄식이 바울에게 나타났습니다. 
 
“원함 자체가 행함은 아니다” 
 
거룩한 탄식 속에 나타난 진리들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 안에 있는 원함 자체가 행함은 아닙니다.  
“나는 내가 행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는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오히려 증오하는 것을 행하기 때문입니다”(15절).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합니다”(19절). 
원함은 있습니다. 그러나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선에 대한 소원이 있다고 해서 선을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좋은 생각을 많이 하면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좋은 생각이 있다고 해서 모두 좋은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원이 행함은 아닙니다. 선을 원하는 것 자체가 선은 아닙니다. 우리의 원함이 곧 행함이 아닙니다. 가장 진실한 소원조차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소원이 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는 소원이 있다고 해서 소원이 없는 사람보다 낫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 원함이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죄의 세력이 우리 원함보다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 대하여 죽은 자,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만들어 주셨지만, 우리가 그렇게 여기고 믿음의 싸움을 하려고 할 때 죄가 쉽게 우리를 내어주지 않습니다. 그 장면을 역사 속에서 보여준 것이 ‘바로의 저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10가지 재앙과 심판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바로가 허락했지만, 그 백성들을 쫓아와서 홍해에 수장되기까지 완강하게 놓아주지 않는 것이 바로의 죄의 모습니다. 죄는 천국 문 앞에까지 따라옵니다. 바울은 두 차례나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는 것은 내 자신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는 죄”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행한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가 행한 것이기에 책임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바울의 원함보다 죄의 세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원함이 있다고 해서 거룩함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탄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탄식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간구해야 합니까? 우리의 원함 위에 무엇인가 더해져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임재와 능력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성령님의 사역, 성령님의 임재,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된 능력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모른다”      
 
둘째, 우리는 자신을 모릅니다. 
“나는 내가 행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는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오히려 증오하는 것을 행하기 때문입니다(15절).          
우리가 왜 자신을 모릅니까? 육신의 영향으로 자아가 분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내면의 분열을 볼 수 없었습니다. 자신 안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여 거듭난 새사람이 존재하기 전까지는 마음이 분열된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 안에 거듭난 새 생명이 태어날 때, 새사람이 옛사람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의 자아가 얼마나 분열되어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25절).          
거듭나기 전에는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죄가 얼마나 우리를 분열시켜 놓았는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오히려 증오하는 것을 행하고 있습니다”라고 갈등하고 고백합니다. 굉장히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원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갈등은 절망스러워 보여도 소망입니다.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는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삽니다. 원하지 않는 것도 모르고, 원하는 것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 안에서 분열되어 있는 자신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탄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죄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갈등상태에 있는 우리를 온전한 삶으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도 우리의 분열된 상태를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생명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해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되는 계명이다(마 22:37~38). 
우리의 분열된 상태 때문에 마음과 생명과 뜻을 다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마음에는 있지만 힘을 다하지 않습니다. 힘쓰고 있는 것이 우리 마음에 없을 수 있습니다. 생명을 다하지 않습니다. 뜻을 다하지 않습니다. 머리로 생각하지만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분열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통합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통합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거듭난 우리 영혼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 우리 마음과 생명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으로 통합되는 것이 우리가 창조된 목적입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행복한 상태입니다. 이것은 우리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임재가 필요합니다. 거룩한 탄식이 우리를 소망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합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 가운데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내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거룩한 탄식으로 성령님의 임재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셋째, 거룩한 탄식 속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은 없다는 진리가 나타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25절).    
바울이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곤고합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해내겠습니까?”라고 탄식했습니다. 이 탄식에 대한 대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대답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예수님을 처음 영접할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의롭다함을 받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경험하고, 그 옛사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새 생명 가운데 살아가는 모든 여정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분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고,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살아갈 때만 우리의 모든 삶이 거룩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 아래 있는 성도들에게 가장 큰 의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알고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자 합니다. 나는 이미 얻었거나 이미 온전해진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것을 붙잡으려고 좇아갑니다. 이는 나도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혔기 때문입니다”(빌 3: 10~12).
빌립보서를 쓸 당시 사도 바울은 인생 마지막 여정 가운데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쓴 옥중서신입니다. 로마서는 비교적 초기에 썼던 서신입니다. 로마서를 우리에게 기록해 준 사도 바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능력,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아직도 참여하려 한다”고 합니다. “나는 이미 얻었거나 온전해진 것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여전히 그는 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한 사람인데도 그의 인생에 마지막에 “나는 그것을 붙잡으려고 좇아갑니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자이지만 여전히 죄와 싸워야 합니다. 율법에 대해 죽은 자이지만, 율법이 제시하는 기준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망에서 벗어났지만 새로운 몸의 구속을 입어야 합니다. 이미 우리에게 이루어진 사실이지만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거룩한 탄식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왜 이러한 탄식이 필요합니까?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지만, 죄를 이길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무엇을 의지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가고, 그분을 통해 성령님의 능력을 더 힘입어야 합니다. 모든 경건훈련이 우리를 완전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성경을 바로 아는 것은 예수님을 깊이 아는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연합하고, 그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성경을 꿰뚫은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이 우리를 꿰뚫을 뿐입니다.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알려고 하고, 붙잡으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누가 성경을 정복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 정복당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구원받기 전까지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붙잡으려고 좇아간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거룩에 이르면 이를수록 더욱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지만, 성령 아래 있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은혜 아래 있지만 성령 아래 있기를 더욱 갈망하는 탄식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으로 이어집니다. 로마서는 매우 논리적인 순서입니다. 6장과 7장에 이어 8장에서 왜 성령의 임재가 나옵니까? 거룩한 탄식에 대한 해답이 바로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었던 사도 바울의 탄식은 더욱 거룩하게 되기를 열망하고, 성령 아래 있기를 갈망하는 탄식입니다. 우리가 더욱 그리스도께 가까이 갈수록 죄를 더 깊이 깨닫고 탄식해야 합니다. 그러면 죄의 세력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하고, 우리를 놓아주려 하지 않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거룩한 탄식이 우리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성령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체험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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