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 밤이 깊을수록 여명이 밝아옵니다

주일강단

주일강단 - 밤이 깊을수록 여명이 밝아옵니다

 2019-12-08      제1273호

공유하기

 

주일강단

 

밤이 깊을수록 여명이 밝아옵니다


로마서 13:11~14
/이재훈 목사

올해 대림절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 예수님의 재림에 초점을 두고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 있는 시간의 흐름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미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역사가 이분되었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BC와 AD로 구분합니다. BC(before Christ)는 예수님 오시기 전, AD(Anno Domini)는 주님 오신 이후를 의미합니다. 어느 한 나라, 일부 사람들이 주장해서 역사를 예수님 오시기 전과 후로 구분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역사의 중심이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뤄졌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역사의 마지막 또한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올해 대림절에는 이 부분을 특별히 강조해서 역사의 마지막이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역사의 마지막과 예수님의 다시 오심

 

역사가들은 역사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애매모호하게 말합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역사의 지극히 일부인 한 시대, 문화의 일부인 역사가들이 어떻게 역사의 방향을 예단할 수 있고, 역사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역사의 창조자이시며, 주관자이시며,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은 분명한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끌어 가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역사의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 있습니다.
역사는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흘러가는 대로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역사의 흐름은 달력에 나오는 숫자에 불과할 때가 있습니다. 그저 “세월이 빨리 흘러가는구나”, “또 한 해가 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역사에 대한 생각의 전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분명히 마지막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역사에는 시작이 있고 마지막이 있습니다. 창조된 때가 있고, 심판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마지막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 문을 열어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역사적인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세상의 그 어떤 역사가들도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 역사의 목적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 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와 시기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영혼이 잠들어 있는
‘영적 몽유병의 상태’

 

“여러분이 이 시기를 알고 있는 것처럼 벌써 잠에서 깨어야 할 때가 됐습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11절).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 증거가 있습니다. 후반부를 보면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왔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받지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에는 세 가지 시제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구원입니다. 또한 “우리는 구원을 받고 있다”도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래의 구원입니다. 과거의 구원과 현재의 구원,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구원이 있습니다. 구원은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지만 구원받아야 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신 말씀이 같은 맥락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구원이 언제 온전히 이뤄집니까?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왔다. 그러므로 우리가 잠에서 깨어야한다”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역사적 믿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을 알고 믿음에도 불구하고, 잠자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오실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그 믿음을 가지고도 잠자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잠에서 깨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잠’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대부분 좋은 의미로 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잠은 영혼의 안식이요, 축복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잠은 어둠에 취해서, 이 세상에 잠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잠들어있는 영혼 안에도 분명히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았고, 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도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취해서, 어둠에 속한 일들 속에서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영혼이 잠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대림절에 잠들어 있는 우리의 영혼이 다시 깨어나기를 바랍니다. 영적 게으름은 죄입니다. 알지만 믿음대로 행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러한 상태를 가리켜 ‘영적 몽유병의 상태’라고 했습니다. 영적 몽유병이 무엇입니까? 영혼이 잠들어 있으면서 예배드리고, 성경 읽고, 봉사 하고, 교제 하고, 헌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잠들어 있으면서 활동은 계속하는 것입니다. 깨어있지 못한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악한 시대이자 은혜 받을 만한 시대

 

왜 우리가 잠에서 깨어야 합니까? 시대의 표적을 분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가 악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려고 우리 죄를 대신해 자신의 몸을 내주셨습니다”고 했습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리고, 타락한 인간들이 만든 치우친 이념을 진리라고 주장하며 살아가는 악한 시대입니다. 매우 선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 시대의 악함은 포용으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요즘 SNS에 가입할 때 프로필을 쓰는데, 거기에 자신의 성을 남자와 여자 외에 ‘커스텀’이라고 하는 성을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어느 SNS에는 자신이 고를 수 있는 성이 56개나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SNS는 이모티콘을 만들어서 올릴 때 동성애를 상징하는 무지개는 포함하는데 십자가는 거절합니다. 동성애의 상징은 들어올 수 있지만, 믿음의 상징인 십자가는 들어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시대입니까? 교묘하게 들어온 이념들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면서 포용을 가장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은혜 받을 만한 시대이기도 합니다.
“말씀하기를 ‘내가 은혜 베풀 만한 때에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입니다”(고후 6:2).
이 시대는 악한 시대이자 은혜 받을만한 때입니다. 은혜 받을 수 있는 때, 은혜를 받아야 하는 구원의 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이런 평가가 나옵니까? 이 시대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예수님이 처음 오셨고, 다시 오실 그 중간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종말의 시작입니다. 이 시대는 종말의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세상의 악함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진화론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과학기술을 통해 세상이 점점 좋아질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허상입니다. 인간의 이념, 인간의 제도, 인간이 만든 질서로 세상이 좋아질 수 없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악해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시점에 “때가 찼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이 왔다는 때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갈수록 악해질 것입니다. 혼란해질 것입니다. 도처에 전쟁과 기근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헛된 문화와 이념들이 득세하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이 시대는 은혜 받고 구원을 받아야 하는 때입니다. 4왜냐하면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역사의 마지막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기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육신의 잠을 자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깨어있어야 합니다. 잠을 자면서도 우리 영혼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온전한 구원이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의 일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동합시다.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고 음행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애쓰지 마십시오”(12~14절).
하나님께서 초대교회 신학자이자 지도자였던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변화시킬 때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밀라노 근처에 있는 친구의 별장에 있는 무화과나무 아래서 자신의 죄를 통회합니다.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근본적인 회심이 일어나기 전부터 성령님께서 이미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참회하는 뉘우침 과정에 있을 때 갑자기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듣게 됩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옵니다.

“나는 내가 지은 죄에 대하여 마음으로부터 통회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말소리가 있었습니다. 그 말소리가 소년의 것인지 소녀의 것인지 나는 확실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계속 반복되었던 말은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눈물을 그치고 어린아이들이 어떤 놀이를 할 때 저런 노래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무슨 놀이를 할 때 부르는 노래인지 들어본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그치고 일어섰습니다. 나는 그 소리를 ‘성경을 펴서 첫눈에 들어온 것을 읽어라’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명령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알리피우스(친구)가 있는 곳으로 급히 되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곳을 떠났을 때 사도의 책을 놔두고 온 까닭입니다. 나는 그 책을 들고 펴자마자 내 첫눈에 들어온 구절을 읽었습니다. 그 구절의 내용은 ‘방탕과 술 취하지 말고 음행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애쓰지 마십시오’(롬 13:13~14)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읽고 싶지도 않고 더 읽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 구절을 읽은 후 즉시 빛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 의심의 모든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냈습니다.”

13절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주고, 14절은 그가 예수님을 만나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죄악들을 여섯 가지로 열거합니다. 방탕, 술 취함, 음행, 호색, 다툼, 시기입니다. 깨어있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잠자고 있는 영혼들은 그 시대에 기승을 부리는 악에 물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어둠의 일들은 오늘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사회 곳곳에 방탕, 술 취함, 음행, 호색, 다툼, 시기가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문화에 익숙해져 있습니까?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툼과 시기에 익숙해져 있습니까?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어둠의 일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 빛의 갑옷이 무엇입니까? 14절 말씀에 나오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타락한 인간과 최후에 회복된 인간을 표시할 때는 언제나 옷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직후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옷을 벗기시고 가죽옷을 해서 입히셨습니다. 그것은 ‘한 생명이 죽음으로 너희 죄가 덮어지고 구속받아야 한다’는 것을 옷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마지막 요한계시록에 우리에게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흰옷을 입은 큰 무리들’이라고 말합니다. ‘어린양의 피로 씻어 희게 한 그 옷을 입은 백성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모습을 마태복음 22장에서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어떤 왕이 결혼 잔치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왕이 초대한 사람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 왕은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이라도 불러 모으라고 합니다. 잔치가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그 잔치 가운데 한 사람이 왕이 제공한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어서 쫓아냅니다. 왜 옷을 잘못 입은 사람을 쫓아냈을까요? 당시 잔치는 반드시 왕이 제공하는 의복과 예복이 주어진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여러분, 왕이 베푼 잔치, 의복까지 제공하는 잔치에 초대를 받았는데 “나는 그 예복을 입기 싫습니다.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잔치를 함께 하기 위해서는 옷을 맞춰 입어야 합니다. 결혼식에서 신부가 웨딩드레스를 입는 것 자체가 기쁨의 표현입니다. 왕이 베푼 잔치에서 왕이 제공한 예복을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왕이시며, 주관자이시며,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회복하기 위해 베풀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베푸신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가 옷 입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었던 옷을 벗고 왕이 제공하는 새 옷을 입는 것은 기쁨입니다. 그것은 힘든 일이 아닙니다. 회개란 즐거운 일을 포기하는 괴로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라고 하면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착각입니다. 회개란 즐거운 일을 위해 괴로운 일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왕의 잔치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의 옛 옷을 벗는 것입니다.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 덧입게 되는 은혜의 옷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과 연합함으로 우리에게 새롭게 변화되어 나타나는 새로운 성품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예비 된 새 하늘과 새 땅, 영원한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깨어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이들은 깊은 어둠속에서 새벽의 여명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더욱 악해집니다. 세상은 더욱 어둡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가오는 여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역사의 새벽은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마지막을 기다리는 자들이 이 땅의 역사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이 누군지를 아는 사람만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 역사의 마지막 때에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거룩한 백성으로 이 땅의 역사를 변화시키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1,042개 글

리스트보기
검색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1 2 3 4 5 6 7 8 9 10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