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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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 -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019-11-03      제12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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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9~10절 
/ 이재훈 목사
 
사람들이 가장 피하고 싶어 하는 질문이 “나는 진정 어떤 사람인가?”입니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단장을 하지만, 영혼의 얼굴 앞에 서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수많은 문제의 원인이 바로 이 질문 앞에 정직하게 대답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된 회개를 통해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 질문 앞에 담대하고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고백한 대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삶 속에서 생생하게 체험하는 고백입니다. 세상의 질서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위대한 발견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모든 가치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에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이 은혜는 핍박자였던 자신을 전도자로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자신을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핍박자를 전도자로 바꾸는 변화가 복음의 능력입니다. 은혜만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무서운 채찍은 옳은 일을 하도록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무서워서 흉내는 낼 수 있겠지만 옳은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은 은혜만이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또한 은혜는 자신이 어떤 위대한 일을 성취했다 할지라도 자랑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게 하는 것입니다. 
 
핍박자에서 전도자로 변화
 
며칠 전 난민선교를 하는 사역자들과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오신 한 분이 간증을 하셨습니다. 유스프라는 분인데 그분은 원래 이슬람 학자였습니다. 이슬람계를 사상적으로 이끄는 엘리트 중 한 분입니다. 프랑스 전 대통령 사르코지 대통령의 이슬람 자문이었고, 그분이 대통령이 되도록 프랑스에 있는 모든 이슬람을 이끌어 지지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분에게 여섯 살 난 딸이 있는데 그 딸이 사고를 당해 수술을 받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사망했다는 통보를 받고 누군가 곁에서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하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슬람 최고 학자인 그분이 예수님을 간절히 찾았는데 한 시간 반 후에 다시 딸이 살아났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분이 딸이 죽었던 모습과 살아난 이후 사진을 보여주셨습니다. 180도 바뀌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회심한 것입니다. 과거에 그는 겉으로는 평화를 말하지만 뒤로는 알카에다 같은 단체를 지원하고, 겉과 속이 다른 지도자였는데 그것을 다 버리고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혼자 성경을 공부하고, 인터넷으로 신학을 공부해서 많은 이슬람교도들을 전도하고 구원하는 이 시대 사도 바울 같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많은 테러 위협에 시달리고 있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고 있습니다. 딸의 기적적인 소생을 통해 임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은 이처럼 놀라운 것입니다. 대적자, 핍박자, 철저한 이교도 지도자들까지도 변화시키셔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바로 그 은혜를 사도 바울이 경험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지만 결코 자신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처럼 복음 전파에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신약의 2/3가 사도 바울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설명해 준 복음을 통해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깨닫지 않습니까?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고린도전서 등 우리가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놀라운 도구로 쓰임을 받았습니까? 얼마나 귀한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을 나는 전했을 뿐”이라고 고백합니다. 세상에서 위대한 발견을 하고, 그 지식을 전하는 사람이 그것을 자기 것처럼 여기고,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그 고백을 모두 무력화하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신앙고백
 
고린도전서 15장은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8절까지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부활하셔서 10여 차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사도 바울에게도 나타나셨다고 고백합니다. 9~10절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을 나는 전했을 뿐”이라고 고백을 한 이후 다시 12절부터 58절까지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이 샌드위치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명하는 한 가운데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이런 구조로 썼을까요?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이 글을 쓰면서 “나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하고 그냥 넘어가지 않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본 것입니다. 자신이 지나온 여정을 돌아보면서 그동안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받았던 많은 고난, 오해, 상처, 아픔, 테러의 위협들, 수많은 죽음의 위기들을 돌아보면서 깊은 상념에 빠졌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고백을 적으면서 사도 바울이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지나온 복음 전파 여정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면서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다른 어떤 사도들보다 더 큰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유대 지역에 있었으면 동족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보호를 받고 숨어 지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많은 오해를 받았습니다. 이방인들과 유대인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테러의 위협을 당했고, 채찍에 맞고 돌에 맞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했을까요? 그가 과거에 핍박자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수하신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데 있어서 복음의 순수성, 복음의 능력, 복음의 가치가 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고난과 상처, 아픔을 모두 뛰어넘고도 남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깊은 고난 속에 처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기쁘게 참으셨던 것처럼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며 받은 고난을 기쁘게 참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다녔던 여정은 오늘날에도 여행하기 힘든 지형입니다.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 대륙을 다니는 3차에 걸친 이 긴 여행은 오늘날 비행기와 버스를 타고 다니기도 벅찹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지로 성지순례를 다녀오신 분들은 지칩니다. 예루살렘만 가시는 분들은 수월하지만, 사도 바울을 따라가면 버스로 10시간을 가야 하는 곳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지형을 그 시대에 다닌 것입니다. 물론 로마가 닦아 놓은 도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었습니다. 가는 데마다 고통과 핍박과 죽음의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이는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신앙의 고백입니까? 참된 회개를 경험한 사람은 바로 이러한 참된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 속에 이와 동일한 고백이 있다면 승리한 믿음의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상처 받지 않는 방법
 
사도 바울이 이 위대한 신앙고백을 쓸 때 지나온 여정에 있었던 상처, 아픔, 수치심을 되돌아봤을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얼마나 많은 수치를 겪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사도 바울에게 상처로 남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힌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귀한 믿음의 모범입니다. 
우리가 흔히 “상처 받았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쓰는 것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으로부터 수치스러운 평가를 받았을 때 자기 스스로도 그 평가를 받아들이고 믿었을 때 그것이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부당한 이유로 나를 수치스러움에 처하게 할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말을 듣고도 어떤 사람은 깊이 상처를 받고, 어떤 사람은 그냥 지나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말을 깊이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그냥 흘려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용조 목사님께서 습관처럼 누군가 여러분에게 상처를 준다면 “노 땡큐”하고 받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왜 본인이 받아서 상처 속에서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죄를 이기고, 상처를 이길 수 있는 면역력이 있을 때 상처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땅히 수치스러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더 깊은 상처를 이미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기 전에 상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누구인지 기억해라 
너는 내 아들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수치심은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생물학적인 수치심(Biological Shame)입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겪는 수치심입니다. 성장하면서 자연히 없어집니다. 그러나 어릴 때 사랑으로 용납 받지 못하면 심각한 수치심을 경험하게 되고 결국 상처가 됩니다. 
둘째, 성경적인 수치심(Biblical Shame)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우리가 느껴야 하는 수치심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회개로 나아가게 됩니다. 
셋째가 문제입니다. 죄 가운데 있었던 인간에게 남아 있었던 상처로 인해 우리를 속박하는 수치심(Binding Shame)입니다. 이 수치심에 얽매어서 스스로를 올바른 눈으로 보지 못하고, 올바른 자화상을 갖지 못하며, 다른 사람이 부당하게 주는 수치심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니면 마땅히 느껴야 하는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을 정당화하고, 상처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증인된 삶을 살면서 받았던 수많은 고난과 아픔과 상처가 상처로 남아있었다면 그는 심각한 문제를 가진 사람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는 복음을 전하면서 받았던 모든 상처와 아픔이 상처로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극복하고, 치유하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한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모든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시킨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의 빛으로 자신을 바라볼 줄 알았을 것입니다. 
유명한 애니매이션 라이언킹(Lion King)의 줄거리를 다 아실 것입니다. 무파사라는 사자가 다스리는 동물의 왕국에서 그의 동생이 형을 반역하고 왕이 되고자 하는 스토리입니다. 그래서 무파사의 아들 심바라는 작은 사자를 이용해서 형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어서 황폐화시켜 버립니다. 그 아들 심바는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다는 자책감, 죄책감, 무력감, 자신에 대한 실망감, 모든 자신의 실수가 상처가 되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심바가 “네가 누구인지 기억해라. 너는 내 아들이다”라는 아버지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심바를 사로잡고 있던 죄책감, 실패감, 열등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습니까? “네가 누구인지 기억해라. 너는 내 아들이다”라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짜 누구인가를 깨닫는 것은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이 아닙니다. 나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소유, 내가 누구의 소유인가, 내가 누구에게 속한 존재인가, 나를 지켜보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진짜 내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죄가 있고, 허물이 있고, 상처가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주인 되신,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내가 속해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서고 회복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속박할 수 있는 부정적인 요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과거에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그의 이력이 죄책감으로 남아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객관적인 이력으로 볼 때 그는 다른 어떤 사도보다 훨씬 훌륭했기 때문에 교만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와 정반대로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고동락한 체험이 없었기 때문에 사도로서의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는 다른 어떤 사도보다 많이 일했습니다. 그가 더 많이 일한 것은 그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서였을까요? 자기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였을까요?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더 많은 일을 해야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까요? 더 많이 일하는 것이 잘못된 동기가 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멀어집니다. 더 많이 수고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 아니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종의 신앙생활이 됩니다. 용납 받으려는 영적 굶주림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내가 더 많이 일을 해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상처에서 비롯된 봉사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더 많은 것을 해야 하나님께서 용납하신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용납하셨습니다. 자녀로서 용납하신 은혜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더 많이 수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종은 더 많이 수고해야 인정받는다고 생각하지만, 자녀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더 많이 수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고백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진짜 누구인가를 알려면 내가 진짜 누구에게 속한 존재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C.S.루이스는 이런 문장을 남겼습니다. 
“지금 우리가 자신이라는 것을 몰아내고 하나님이 우리를 취하실 수 있게 할수록 우리는 더욱 진정한 자아가 되어간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께 저항해서 내 마음대로 인생을 살려고 발버둥 칠수록 우리는 물려받은 유전과 성장배경, 환경과 자연적인 욕망에 더욱 지배당하게 된다.” 
죄와 상처에 지배받고, 환경에 영향을 받고, 자신의 욕망에 지배를 받는 인생으로 점점 추락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고백은 매우 소중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고백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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