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 구원의 검

주일강단

주일강단- 구원의 검

 2019-06-16      제1250호

공유하기

주일강단
시 131:1~3 
이재훈 목사 
 
 
시편 131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의 겸손한 영혼이 기도로 드려진 시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시편 131편은 가장 짧은 시편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우고 고백하기에는 가장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시입니다. 작은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겸손한 영혼의 내면을 보여주는 풍성한 신앙의 시입니다. 
시편 131편은 겸손을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먼저 부정적인 표현으로 ‘겸손은 ~이 아니다’라고 설명합니다. 2절에서는 ‘겸손은 ~과 같다’라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않고 내 눈이 높지 않습니다. 내가 너무 큰일들과 나에게 벅찬 일들을 행하지 않습니다”(1절).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않고, 내 눈이 높지 않고, 또 내가 감당하지 못할 큰일들, 벅찬 일들을 행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겸손을 표현할 때 이렇게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겸손을 배울 때 ‘이것이 겸손’이라고 깨닫고 배우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겸손이 아닌 교만한 일이나 교만에서 파생되는 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교훈을 받고, 깨닫고, 때로는 교만이 주는 아픈 상처들을 체험하면서 겸손이 무엇인지 역으로 깨닫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사랑을 표현할 때 ‘사랑은 ~이다’라는 긍정적 표현보다는 ‘사랑은 ~이 아니다’라는 표현이 훨씬 많습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오만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랑인 줄 알았는데 사랑이 아닌 것을 체험하면서 역으로 사랑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겸손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겸손의 실체를 체험하는 것보다는 겸손처럼 보이지만 겸손이 아닌 것을 통해서 얼마나 겸손이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은 마음이 교만하지 않은 것
 
 
첫째, 겸손은 마음이 교만하지 않은 것입니다. 교만은 마음 깊숙이 숨겨져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열 길 물속보다 깊다고 했는데, 자기 자신도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교만입니다. 겉으로는 잘 포장된 인격, 교양 있는 인격처럼 보이지만, 물을 휘저으면 바닥에 있는 흙으로 인해 물이 흐려지듯이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교만이 삶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에는 교만이 깔려 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교만합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교훈과 훈계와 연단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않고”라는 고백이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기도 속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남성들이 면도를 하고 나왔을 것입니다. 저도 면도를 하면서 ‘이렇게 매일 교만을 깎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고 나면 또 자라는 것이 교만 아닙니까? 매일 깎지 않으면 어느 샌가 자라는 것이 교만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끈한 것 같지만 속에서는 계속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깨어서 기도해야 하는 것이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않고”입니다. 이것이 우리 영혼의 기도가 되어야 할 줄 압니다.
 
 
겸손은 눈이 높지 않은 것
 
 
둘째, 겸손은 눈이 높지 않은 것입니다. 교만은 마음에 숨어있지만 표현은 눈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인격이 나타나는 것이 얼굴이라고 한다면, 얼굴에서 교만이 가장 먼저 표현되는 기관이 눈입니다. 그래서 눈을 영혼의 거울이라고 합니다. 
시편의 표현을 보면 짝을 이루는 경우가 많은데 연관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죄와 함께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비참함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비참함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거룩함과 가장 많이 동반되는 단어는 행복입니다. 행복의 비밀은 거룩에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과 행복, 평강과 형통함, 전쟁과 황폐함 등이 함께 나옵니다. 교만한 마음에는 언제나 같이 나오는 단어가 높아진 눈입니다. 시편 101편 5절을 보면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눈이 높은 것이 교만의 표현입니다. 교만한 눈은 언제나 자기보다 높은 사람은 시기하고, 자기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무시합니다. 우리 눈이 겸손해져서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되기를 바랍니다. 
 
 
겸손은 너무 크고 감당 못할
일에 힘쓰지 않는 것 
 
 
셋째, 겸손은 너무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벅찬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않는 것입니다. 겸손한 영혼은 자신의 은사와 부르심이 아닌 일을 하려고 나서지 않습니다. 
교만했던 사울은 블레셋과 전쟁을 할 때 사무엘이 더디게 오자 자기 스스로 제사장이 되어 제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교만한 영혼은 자신의 부르심이나 은사가 아닌 것까지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교만은 언제나 스스로를 위대하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오랫동안 경영분야에서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스탠퍼드 대학 교수였던 짐 콜린스가 쓴 이라는 책입니다.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좋은 기업을 위해서는 매우 훌륭한 책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를 신앙에 적용하면 안 되고, 오히려 반대로 해야 합니다. ’good'에는 ‘좋은’이라는 뜻도 있지만, ‘선한’이라고 번역하면 다른 문제가 됩니다. 선해지려고 하지 않고 위대해지려고 할 때 교만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위대하십니까? 시편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것을 보면 항상 하나님의 선하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단지 능력이 많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위대하신 까닭은 그분의 전능하심으로 선하신 일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하려고 하기보다는 위대해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Good to Great’이 아니라 ‘Great to Good’으로 살아야 합니다. 위대한 마음을 뛰어넘어 선한 마음을 품으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교만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한다
자신의 능력을 과장하고 과대한 성취욕에 빠지는 것이 교만의 증상입니다. “나에게는 왜 5달란트를 맡기지 않았습니까?”라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런 고백을 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정작 그는 위대한 왕이었고, 큰일을 했고, 우리가 생각할 때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행했던 사람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비밀이 있습니다. 다윗이 왜 골라앗과 싸웠습니까? 많은 사람이 두려워할 때 “나는 할 수 있다”는 야망을 갖고 뛰어든 것이 아닙니다. 그는 형들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려고 심부름으로 갔을 뿐입니다. 골리앗과 싸우기 위해 간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거룩한 분노,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듣고 싸우러 나가려 할 때 그의 형 엘리압이 말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교만해져서 이렇게 나서려고 하는 것 아니냐?” 
오해입니다. 다윗은 교만해서 나선 것이 아닙니다. 그가 사용한 것은 군사기술이 아니었습니다. 양을 지킬 때 사용했던 물맷돌이었습니다. 그는 양을 지키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가 위대한 왕이 되려고 물맷돌 연습을 열심히 한 것이 아닙니다. 골리앗을 무찌르려고 훈련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 떼를 지키기 위해 훈련했고, 단 한 번에 맹수를 무너뜨릴 수 있는 기술까지 발전한 것입니다. 그가 왕이 되려고, 골리앗을 무찌르려고, 사울을 무너뜨리려고 그 순간 감당하지 못한 일을 추구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양을 지키려고 애썼을 뿐입니다. 
준비된 사람을 하나님이 때에 맞춰 사용하시는 것을 교만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큰일을 하면 교만한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부르심이 아니라, 내가 감당하지 못할 일을 스스로 하려고 애쓰는 것이 교만입니다. 다윗은 결코 왕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한 것은 도망 다니는 일이었습니다. 10년 동안 사울을 피해 광야로 도망 다녔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10년 동안 백성들이 처한 곤궁함, 억울함, 동굴에서 억울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에 광야박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광야 곳곳에 어떤 사람들이 어떤 아픔을 겪고 있는지를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되기까지 또 7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17년 동안 그는 도망 다녔고,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을 뿐입니다.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지만, 겸손히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큰일을 하는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한 영혼이 하나님께 어떻게 쓰임을 받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이 교만해져서, 우리 눈이 높아져서, 높아진 마음으로 교만한 눈으로 스스로 위대한 일을 하려고 하면 하나님은 절대 그 영혼을 귀하게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때로 우리 인생이 좌절되고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때 그 원인이 교만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실패를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교만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다윗의 겸손한 기도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입니다.
 
 
겸손한 영혼이 누리는 축복
 
 
“진실로 내가 내 영혼을 가만히, 잠잠히 있게 하니 젖 뗀 아이가 그 어미와 함께 있는 것 같고 내 영혼도 젖 뗀 아이와 같습니다”(2절). 
생각할수록 깊은 영감을 느끼게 하는 고백입니다. ‘젖 뗀 아이가 그 어미와 함께 있는 것 같다’는 표현은 아버지들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어머니들은 젖을 떼는 아이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한 아이가 태어나서 어머니의 젖을 떼고 이유식으로 넘어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단단한 음식을 스스로 소화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영적 성장을 바로 이 모습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젖을 먹다가 젖을 뗄 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정상적인 환경에서 태어난 아이라면 세상에서 처음으로 겪는 고통일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 끊임없이 올라오는 교만으로 인해 세상에 집착하고, 옛사람에 집착하는 우리의 교만한 모습이 끊어지는 것을 아이가 젖을 떼는 고통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서 이것을 가져가십니까? 왜 이것을 나에게서 빼앗아 가십니까?” 우리는 이렇게 울부짖지만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역사로 보면 마땅히 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집착하고 매달렸던 모든 것들이 절대적으로 있어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어느 순간 그것을 떼도록 하십니다. 모두 떨어져야 합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못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아이 스스로는 절대 젖을 떼지 못합니다. 엄마가 떼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옛사람으로부터 절대 분리되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세상에 대한 집착을 절대로 못 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떼시는 겁니다. 처음 젖을 뗄 때는 아이가 고통스러워하지만  어머니가 만들어 준 다른 양식, 단단한 음식을 먹으면서 성숙해 갑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젖을 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고통 속에 죽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또 다른 양식을 공급하셔서 더 성숙하고 성장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진정한 만족은 겸손해야 찾아옵니다. 교만한 자는 절대로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젖 뗀 아이가 여전히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젖을 떼지 못한 상태가 아니라, 어머니에게 의존하던 집착이 아니라, 다른 관계로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것을 집착하고 주장하는 관계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하시고 동행하시는 믿음의 평안함입니다. 아이가 젖을 떼도 여전히 어머니와 동행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경험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의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한 영혼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이 세상의 젖을 떼고 하나님 나라의 양식으로 배불림을 얻으며 살아가는 겸손한 영혼의 축복을 경험하기를 축원합니다.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고, 고요하고, 평온하게
   
 
“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히 여호와를 바라라”(3절). 
겸손한 영혼은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는 충만한 소망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은 다윗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허락된 영적 축복입니다. 
우리 평생 믿음의 숙제는 우리 마음에 숨어있는 교만을 깎고 또 깎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만한 눈을 겸손한 눈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스스로 위대한 인생을 꿈꾸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크게 보이든 작게 보이든, 다윗이 양치는 일에 충성했을 때 그를 하나님이 쓰시는 위대한 인생으로 바꾼 것처럼, 우리에게 맡겨진 소명에 충성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사용하실 줄로 믿습니다. 집착하는 신앙이 아니라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평안한 삶을 누리는 삶이되기를 원합니다. 겸손한 영혼의 기도를 날마다 드림으로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참된 믿음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다윗의 겸손한 기도를 배우기를 원합니다. 
우리 마음에 나도 모르게 높아진 교만들,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 받아야만 한다는 
집착까지도 내려놓는 겸손한 영혼 되게 하옵소서. 
스스로를 높이거나 자신을 위대하게 만들려는 
모든 교만을 내려놓고, 젖 뗀 아이가 엄마와 동행하듯
주님과 동행하며, 주의 뜻을 분별하는 성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권찬송 기자

1,046개 글

리스트보기
검색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1 2 3 4 5 6 7 8 9 10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