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주일강단-엘리야의 기도 

주일강단

주일강단-엘리야의 기도 

 2019-04-21      제1242호

공유하기

엘리야의 기도 
왕상 18:29~40
이재훈 목사 
 
 
엘리야의 기도는 어떤 면에서 모범이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 세력들과의 대결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었다는 점입니다. 이 시대도 엘리야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 세력들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이 땅은 진공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와의 대결과 전쟁 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기도가 참 귀합니다.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이 시대에 드러내기를 소원합니다. 
엘리야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왕 시대에 하나님의 징계를 예언하도록 부름 받은 선지자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7대 왕이었던 아합왕은 그 어떤 왕보다 악하게 우상숭배에 치우쳤던 인물입니다. 
“아합과 같이 여호와의 눈앞에 악을 행하려고 자기 자신을 판 사람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그를 충동질했기 때문입니다”(왕상 21:25). 
우상숭배에 빠져있던 이세벨의 충동질을 이겨낼 수 없었던 아합왕은 ‘자기 자신을 팔았다’고 표현할 만큼 영혼이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땅에 진노하셨고, 그 진노로 3년 반 동안이나 극심한 기근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을 예언하도록 부름 받은 자가 바로 엘리야입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징계가 임했다면 백성들이 아합왕부터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는데 그 누구도 회개하지 않았고 돌이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백성들이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머뭇거린다’는 것은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상 모두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또 ‘머뭇거리다’는 단어는 정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머뭇거리는 백성들 앞에서 엘리야가 강하게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3년 반의 기근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이 있을 때도 돌아오지 않았고, 기근이 극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합왕을 비롯한 백성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기근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전달하는 책임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언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충격적인 요법
 
 
“엘리야는 우리와 본성이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더니 3년 반 동안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했더니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땅이 열매를 냈습니다”(약 5:17~18).
야고보서는 행함에 대하여 강조하는 책이지만 기도에 대해서도 강조를 많이 합니다. 1장에서는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지혜를 구하라”고 말씀하셨고, 5장에서는 “병든 자가 있느냐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고침을 받을 수 있다”, “함께 기도하라”, “죄를 고하고 기도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의 별명이 ‘낙타무릎’입니다. 너무 기도를 많이 해서 무릎이 낙타처럼 되었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야고보가 낙타무릎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기도의 사람이 되게 했겠습니까? 바로 엘리야입니다. 야고보는 엘리야를 본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예언을 전하는 책임만이 아니라 예언대로 이루어질 것을 기도했고, 회복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전도서 8장 11절을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악에 대하여 바로 보응하지 않으시기에 사람들이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200여 년 동안 죄악으로 치우쳤지만 하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 가운데 절정이었던 아합왕 시대에 머뭇거리고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충격적인 요법을 사용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로 우리가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 머뭇거리고 있을 때 하나님이 크게 한 번 치시고, 우리를 다시 살리기 위해 고통 속에 넣으실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런 사건이 오늘 본문 열왕기상 18장에 나옵니다.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 머뭇거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해 충격을 주셨습니다. 이 시대에도 이러한 충격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결을 도전하는 엘리야
 
 
“엘리야가 온 백성들 앞에 나가 말했습니다. ‘너희가 이 둘 사이에서 얼마나 더 머뭇거리겠느냐?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면 여호와를 따르라. 그러나 바알이 하나님이면 바알을 따르라.’ 그러나 백성들은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왕상 18:21).  
엘리야의 촉구에 대꾸하지 않은 것은 거부를 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충격적인 역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바알을 숭배하는 선지자 450명, 아세라 숭배자 400명을 모두 갈멜산으로 모이도록 해서 백성들 앞에서 자신과 대결할 것을 도전했습니다. 아세라 선지자들은 이세벨이 반대해서 모이지 않았지만 바알 선지자 450명이 갈멜산에 모였습니다. 갈멜산은 1,740피트 높이에 동서남북으로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산입니다. 과거에 갈멜산에서 하나님을 경배했던 적이 있는데 아합 시대에는 우상이 가득한 산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엘리야는 우상에게 빼앗겨 버린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거룩한 임재하심을 나타내기를 원했습니다. 엘리야가 “두 마리의 소를 가져와서 한 마리씩 택하고, 그 소를 각을 떠서 제단에 올려놓고, 불을 붙이지 않고 자신들이 하나님이라고 믿는 그 신에게 구해서 불을 내려주는 신이 진짜 신임을 증명하자”고 백성들에게 대결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백성들은 좋다고 했습니다. 불로 임하시는 신이 진짜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자는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좋다고 한 이유는 바알이라는 신이 가나안 땅의 태양신이었고, 날씨와 풍요를 주관한다고 믿었고, 때로는 천둥과 번개를 통해 일한다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말대로 바알이 진짜 신이라면 천둥과 번개를 내릴 뿐만 아니라 불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들이 믿는 신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엘리야는 바알 숭배자에게 순서를 양보했습니다. 바알숭배자들이 바알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라고 구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한 유대 역사가는 당시 바알을 숭배하는 의식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바알 숭배자들은 처음에는 비교적 온건한 태도로 부르짖었으나 그 다음에는 몸을 앞뒤로 흔들어 대며 제단 주위를 뛰어다녔다. 그들의 외침은 더욱 커졌고, 춤도 더욱 격정적으로 변해갔다. 그들은 원을 그리며 선회했고 미친 듯이 가로질러 뛰어다녔다. 그들은 항상 머리를 숙여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으로 땅바닥을 쓸어대며 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백성들이 광란의 몸짓을 하며 부르짖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이렇게 조롱합니다. 
“정오가 되자 엘리야가 바알 예언자들을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더 큰 소리로 하라. 그가 신이니 아마 깊은 생각에 빠졌거나 너무 바쁘거나 여행을 떠났나 보다. 어쩌면 자고 있을지 모르니 깨워야 되지 않나 싶다’”(왕상 18:27).
엘리야의 조롱에 자극을 받은 바알숭배자들은 자해하며, 피를 흘리고, 몸을 상하게 하며 응답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바알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바알이라는 존재가 만들어진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바알을 숭배하는 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인간이 만들어내는 거짓 종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거짓 종교는 인격적인 관계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무조건 간절히 구하고 떼쓰기만 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응답을 만들어가려는 것은 거짓된 종교 신앙입니다. 
둘째, 거짓 종교의 특징은 소수의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비밀 기호 같은 것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중세 교회가 “성경은 누구나 읽고 해석할 권리가 없고 사제만 있다”고 한 것은 거짓된 종교화 된 것입니다. 소수의 특권층만이 알 수 있는 비밀 기호는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고, 모든 사람이 해석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진리입니다. 
셋째, 거짓 종교의 특징은 자신을 불행하게 학대함으로써 신으로부터 응답을 더 빨리 받아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신의 동정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바알숭배자들이 부르짖을 뿐만 아니라 뛰어다니고, 자신의 몸을 학대하고 피를 흘리면서 응답을 받아내려고 합니다. 거짓입니다. 거짓 종교의 흐름을 보면 결국 자신을 학대하는 쪽으로 갑니다. 가정을 파괴하고,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림으로 신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신실하다고 해서 거짓이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 종교에도 신실함이 있습니다. 열심이 있습니다. 충성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거짓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내용이 진리인지가 중요합니다. 악한 자도 효과적으로 악해지기 위해서는 선한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열심, 신실함, 충성은 모두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거짓이라면 그것은 거짓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 역사의 마지막 걸림돌 
 
 
참된 구원의 역사에서 마지막 걸림돌은 사실 종교입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 안에도 있는 종교성이 참된 복음의 진리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9세기 노르웨이의 복음주의 신학교에 오 할레스비(Ole Hallesby)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쓴 이라는 책은 ‘종교와 기독교’라는 장으로 마무리 됩니다. 기독교 안에 있는 종교성이 복음의 마지막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책 문구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종교적임으로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열광과 광신의 모든 위험을 피해온 유일하게 참된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참 기독교에 대하여 얼마나 모르는가는 그들이 그리스도가 생명이 되신 사람과 접촉할 때 가장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들은 그런 사람의 삶이나 간증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삶은 그들에게는 과장과 극단으로 가득한 편협한 삶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들은 참 크리스천이 하나님을 믿는 일과 관련해서 기쁨, 슬픔, 불안, 고통에 대해 말할 때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더 간단한 일이 어디 있느냐는 태도를 가진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죄, 회개, 유혹, 악마, 영적 전쟁 이 모든 것에 대해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 마음이 편해지려고 가는 것이고, 내가 필요할 때 도움을 받으려고 하고,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종교적 생활을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C.S.루이스는 이러한 영역을 ‘물 탄 기독교(Christianity-and-water)’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물 탄 기독교와 같이 그저 종교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눈에 띄는 바알을 숭배하는 거짓 종교, 사이비, 이단들도 있고, 믿는 우리 안에 있는 물 탄 기독교와 같은 생각, 천국과 지옥, 회개, 심판, 재림, 영적 전쟁 모든 것에 대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나 하나님 믿어. 예배에도 출석해. 필요할 때 기도해. 그러면 됐지. 더 이상 요구하지 말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성을 통해 참된 기독교에 물을 타 버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안에도 우상이 들어와 있고, 물 탄 신앙이 되어버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도는 최선의 수단, 최초의 수단
이제 엘리야의 순서가 됐습니다. 엘리야는 맨 처음 무너진 단을 열두 개의 돌로 다시 수축합니다. 왜 열두 개의 돌이냐면 역사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엘리야의 믿음은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생각해 낸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 열두 지파를 통해 역사 속에 실제로 나타나신 하나님, 실제적으로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 출애굽의 역사, 광야 여정의 역사, 이스라엘 민족의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 역사 속에 실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오늘날 믿음도 무엇인가 잘 해보자고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역사가 포함되어 있고, 장구한 역사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증명된 믿음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은 수많은 역사 속에서 검증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입니다. 성경만큼 오랜 역사의 검증을 견뎌온 책이 없습니다. 오랜 역사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고 있는 책입니다. 엘리야가 바로 이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 다음에 주변에 도랑을 만들고, 번제물을 올려놓고, 그 도랑에 4개의 통으로 물을 3번을 부었으니 12통을 부은 것입니다. 왜 물을 부었을까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불이 잘 붙으려면 말라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물을 부었다는 것은 자연적으로 불이 붙기 어렵게 해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불이 임한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물이 있다고 붙지 않겠습니까? 물을 다 태워버릴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엘리야는 매우 간결하지만 간절하고 단순하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즉각적인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응답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간결하지만 담대한 믿음의 기도를 보십시오.          
“저녁 곡식제사를 드릴 시간이 되자 예언자 엘리야가 제단 가까이 나와서 말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과 제가 주의 종이며 이 모든 일을 주의 명령으로 했음을 오늘 알려 주십시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해 주십시오. 오 여호와여, 응답하셔서 주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는 분임을 이 백성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나뭇가지와 돌과 흙을 태웠고 구덩이에 고인 물마저 다 말려 버렸습니다(36~38절). 
오랜 시간 외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을 해치치도 않았습니다. 간결한 그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온전한 헌신이 있습니다. 자신은 완전한 종이라고 고백하는 겸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갈망하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엘리야는 기도를 최후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최선의 수단, 최초의 수단으로 기도했습니다. 갑자기 기도할 때 “이제는 기도밖에 없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단어 속에는 기도가 최후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믿음이지만 엘리야의 간구는 아닙니다. 엘리야는 최초의 수단이요, 최선의 수단이 기도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엘리야의 모든 과정은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에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 의인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고 의롭게 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한 의인의 삶 속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힘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에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과 물까지 태우므로 임하셨습니다. 불이 임한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토록 머뭇거리고 있었던 백성들의 마음,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머뭇거리며 우유부단하던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됐다는 것입니다.  
“온 백성들이 이것을 보자 엎드려 소리쳤습니다. ‘여호와,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여호와, 그분이 하나님이시다’”(39절). 
하나님은 엘리야가 얼마나 위대한지 보여주기 위해 불로 응답하신 것이 아닙니다. 충격적인 사건이 있어야 우유부단하게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우리 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믿음의 사람인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기도가 필요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머뭇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 안에도 머뭇거리고 있는 두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도 엘리야 시대처럼 죄로 강퍅해지고,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있습니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기도는 귀한 기도요, 우리의 모범이 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 대결에서 승리하는 기도가 우리 삶에도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시는구나”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기도를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권찬송 기자

1,046개 글

리스트보기
검색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1 2 3 4 5 6 7 8 9 10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 게시판 처음으로 가는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