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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아브라함의 기도

 2019-02-24      제12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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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기도 
창 18:22~33 
이재훈 목사 
 
 
앞으로 몇 개월 동안 기도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특별히 구약에 나타난 기도들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를 새롭게 하고, 기도 생활이 깊어지고 풍성해지기를 원합니다. 
많은 성도들과 목회자들에게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면 거의 빠짐없이 “기도가 부족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늘 ‘기도를 더 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물 뿐 진정으로 더 깊은 기도로 나아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새해를 맞아 단순한 생각과 바람에만 머물지 않고 더 깊은 기도를 실천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큐티생활도 더 깊어지기를 원합니다. 큐티가 ‘경건의 시간(Quite Time)’이 아니라 ‘퀵 타임(Quick Time)’이 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큐티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말씀을 통해 인도함을 받기를 원합니다. 
 
 
진정한 기도와 특권
 
 
믿음처럼 보이지만 불신앙인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문제 앞에서 “하나님, 다 알아서 하세요. 저는 아무 관심 없습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단한 믿음 같지만 사실은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요, 그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문제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이 아니라 문제 한복판에서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 마음, 의견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내어드리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 가시는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기도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거야. 하나님이 이미 뜻을 정하고 계실거야”라는 생각입니다. 내가 기도해봤자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기도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잘못 강조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영향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올바른 기도에 그 뜻을 바꾸신다는 것을 간과하게 됩니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기도는 하나님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만 맞는 위험한 말입니다. 물론 기도하면 우리 자신이 바뀝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만 바꾸는 것이 기도는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묵상일 뿐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변화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때로 우리의 기도를 통해 역사를 움직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시고, 우리의 기도에 영향을 받으시며, 우리의 기도에 따라 뜻을 바꾸십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우리의 기도에 맡겨 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기도만으로 되겠느냐? 행동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도 없는 행동이 얼마나 위험합니까? 독일 나치에 저항했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라는 분이 있습니다.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그분조차 기도 없는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했습니다. 그는 “기도야말로 세상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파트너십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동일하게 나치에 저항했던 독일의 양심적인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도 “하나님께서 두 팔을 높이 들어 기도하는 그 기도의 손들을 통해 이 지구와 역사를 움직여 가신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설교하던 때가 바로 연합군에 의해 독일 곳곳에 폭탄이 투하되던 시대였습니다. 무엇인가 행동해야할 것만 같은 상황에서 무엇보다 기도의 손이 중요하다, 기도로 하나님 앞에 역사를 올려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역사를 움직이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역사를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통해 세상을 이끌어 가신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것이 기도의 특권입니다. 기도의 특권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신앙의 능력과 축복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친구로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함께 동산을 거니시며 친밀하게 친구처럼 대화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타락이란 하나님과 친구의 관계가 깨어진 것이요, 구원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친구로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속하시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다시 하나님과 소통하고 대화하며 하나님의 친구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의 친구가 될 때 마음을 나눕니다.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공유할 때 친구가 됩니다. 나의 결정과 계획을 미리 알리고 그 의견을 참조하고 싶은 사람을 진정한 친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기 원하시고, 어떤 문제와 사건, 역사에 대하여 우리의 의견을 참조하시고, 때로는 그 의견에 따라 움직인다면 우리를 친구로 초대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가운데 하나님의 친구라 일컬음을 받았던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야고보서 2장 23절에서 그는 하나님의 친구라 불림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 창세기 18장에 나타난 기도는 아브라함이 왜 하나님의 친구라 일컬음을 받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여러 번 계획을 말씀하셨는데 가장 많은 내용이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고,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어지는 모든 족속이 복의 통로가 되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계획을 듣고 응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8장 후반부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른 도성에 대한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악으로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는 계획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땅에 악이 만연하여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아브라함은 강렬하게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애원하며 소돔과 고모라를 구원해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기를 원하시는 기도의 영성이 어떤 모습인지를 알려주십니다.  
 
 
아브라함의 간구와 하나님의 응답
 
 
“아브라함이 다가서면서 말했습니다. “주께서는 의인을 악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만약 그 성에 의인 50명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성에 의인 50명이 있는데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고 정말 쓸어버리시겠습니까? 의인을 악인과 같이 죽이고 의인을 악인처럼 대하시는 것은 주께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인 주께서 공정하게 판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창 18:23~25). 
아브라함의 기도를 보면 마치 하나님을 가르치는 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안에 있는 믿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와 논쟁하기를 기뻐하시는 분처럼 보입니다. 이사야 1장에 보면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라고 하셨고, 창세기 18장 17절에서는 “아브라함에게 나의 생각을 알리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생각을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의인들이 그 성에 있다면 악이 아무리 만연할지라도 남아있는 의인들을 악인들과 함께 동일하게 멸망시키는 일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숫자를 제시합니다. 하나님께 만약 50명이 있다면 의인 50명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그 성을 용서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라고 제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즉시 아브라함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소돔 성에서 의인 50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해 그 온 땅을 용서할 것이다’”(26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에 즉시 “의인 50명이 있다면 내가 그 의인을 위하여 그 땅을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의인 50명을 말해놓고 하나님이 즉시 응답하시니까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다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비록 먼지와 재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감히 다시 말씀드립니다. 5명이 부족한 45명이라도 있다면 용서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즉시 응답하셨습니다. “좋다. 만약 거기서 45명을 찾으면 내가 멸망시키지 않겠다.” 아브라함은 45명을 말해놓고 또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다섯 명을 감한 40명을 제안했습니다. “40명만 찾으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즉시 대답하십니다. “40명을 위해서라도 내가 그렇게 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은 40명에도 자신이 없습니다. 이제는 10명을 감합니다. “하나님, 30명만 찾으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즉시 응답하십니다. “30명만 찾으면 내가 그렇게 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은 30명에도 자신이 없어 다시 10명을 줄여 20명을 제안합니다. “만약 20명을 찾으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즉시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그 20명을 위해 멸망시키지 않겠다.” 아브라함은 이제 20명에도 자신이 없습니다. 다시 10명을 줄여서 10명을 제안합니다. “내 주여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거기서 10명만 찾으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내가 그 10명을 위해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아브라함의 제안에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응답이 동일했습니다. “50명을 위해 내가 용서하겠다, 45명을 위해 용서하겠다, 40명을 위해, 30명, 20명, 10명을 위해 내가 용서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계속 간구하면서 점점 자신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담대했습니다. 하나님을 교훈하듯이 자신감이 충만했는데 30명부터는 자신감이 없어졌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노하실까봐 “하나님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감히 주께 말씀드립니다”라며 점점 확신이 없어졌습니다. 10명까지 내려갔을 때 더 이상은 내려가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의인 10명은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는 무너졌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는 의인 10명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전혀 동요하지 않으셨습니다. 노하시지도 않고, 피곤해하지도 않고, 귀찮아하지도 않고, 아브라함에게 노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숫자를 제시하든지 의인을 위해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의인의 숫자가 줄어도 하나님은 전혀 요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은 이것을 흥정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을 보셨고, 태도를 보셨고, 아브라함의 마음을 기뻐하셨기에 숫자가 계속 줄어도 동일하게 응답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만일 그 성에 의인 1명만 찾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질문했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셨을까요? 의인 1명을 제시해도 “그 의인 1명을 위해서 내가 그 땅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말씀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믿는 두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세상 구원하는 하나님의 법칙과 원리
 

첫째, 아브라함의 간구 속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의인의 숫자를 계속 줄이는 것은 하나님을 놀리거나 흥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움과 겸손 가운데, 때로는 하나님이 노하실까 염려하며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멸망 받을 세상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본 것입니다. 하나님은 멸망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회복하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를 더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멸망 받을 세상을 위하여 중보하는 이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그 땅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멸망하시기로 했으면 멸망당하는 것이 공정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반만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멸망 받기로 계획된 곳이라 할지라도 의로운 중보기도를 통해 구원의 간청이 드려지면 그 기도를 근거로 용서하시고 회복시키기를 기뻐하십니다. 
둘째, 아브라함의 간구에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대표적인 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어떤 이론을 근거로 호소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공정하시기 때문에 의인이 악인과 함께 멸망당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만일 의인이 그곳에 있다면 그 의인으로 인해 멸망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브라함의 기도의 근거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이 주장을 풀어 보면 네 가지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의인은 멸망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의인과 악인이 동일하게 취급되어서는 안 됩니다. 셋째, 악인은 마땅히 멸망당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악인이 멸망당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은 멸망 받아 마땅하지만 멸망 받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의인으로 인해서 악인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기도의 근거에 포함된 내용입니다. 의인은 멸망당할 수 없습니다. 의인은 악인과 함께 멸망당할 수 없습니다. 악인은 마땅히 멸망당해야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의인으로 인해서 악인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간구에 조금도 분노하지 않으시고, 계속 동일하게 응답하신 이유는 이 세상을 이 원리로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멸망당해 마땅합니다. 그러나 만일 세상에 의인이 단 1명이라도 있다면, 하나님은 그 의인을 위해, 의인을 통해, 그 의인으로 인해 멸망시키시지 않으십니다.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세상에 의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의인이 하나도 없는 세상에 의로운 분을 보내셨습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의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의인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세상의 악인들, 바로 저와 여러분이 구원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처럼 한 분의 의로운 행동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습니다”(롬 5:18).
하나님이 의로우신 예수님으로 인해 이 땅에 악인들이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기도를 기뻐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법칙과 원리를 따라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의로우신 예수님의 대속을 믿고 의지하는 모든 이들은 장차 멸망 받을 운명에서 건짐을 받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후손을 통해 세우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의로우신 예수님을 통해 세우시는 의의 나라입니다. 그 의의 나라 백성들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장차 멸망당할 세상이 예수님을 통해 멸망 받을 운명에서 건짐을 받기를 기도하는 백성들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유일한 근거는 의로우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을 늦추시고 참으십니다. 그분의 중보기도를 통하여 세상의 악인들을 용서하고 계십니다. 장차 멸망 받을 이 세상 가운데 건짐 받는 백성들이 충만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했던 하나님의 구원의 법칙과 원리를 붙잡고 담대하게 세상 가운데 있는 이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이 기쁘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이 나라와 민족을 다시 살리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 열방을 구원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 세상의 역사를 변화시킬 줄로 믿습니다.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 역사를 바꾸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처럼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법칙과 원리를 붙잡고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친구로 초대받는 그 영광스러운 특권을 
날마다 누리며 기도를 사랑하게 하옵소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기뻐하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권찬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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