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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사선을 뛰어넘는 선택

 2019-01-27      제12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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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을 뛰어넘는 선택
수 2:1~13 
이재훈 목사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때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사람을 사용하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부도덕한 사람을 사용하시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을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굳게 믿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복음의 대적자였습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사도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도이자 복음 증거자로 변화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누구도 막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그 누구도 거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자 하면 그 누구도 제한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변화시키시고자 하면 변하지 않을 영혼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의 사람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다니엘, 기드온 등 성경의 중요한 스토리를 만들어낸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을 ‘믿음의 전당’, ‘믿음의 영웅들’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명단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라합’이라는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부도덕한 삶을 살았습니다. 여호수아서에서는 기생이라고도 하고 창녀라고도 불리는 여인입니다. 여리고성에서 몸을 팔아 살아가는 이 부도덕한 여인이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놀랍게도 여호수아서의 주인공인 여호수아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라합이 선택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라합이 선택되었을까요? 라합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혈통 가운데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라합과 정탐꾼 
 
 
“믿음으로 창녀 라합은 정탐꾼들을 평안히 맞아들여 불순종한 사람들과 함께 죽지 않았습니다”(히 11:31).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았습니다. 다윗은 원래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인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마 1:5~6). 
라합은 룻이라는 여인의 남편인 보아스의 어머니입니다. 유다 족속의 족장이었던 살몬과 결혼하여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라합이 메시아의 조상이 된 이유는 남편을 잘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 때문입니다. 라합의 변화에 대해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믿음을 가지지 않는 한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존귀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 반면에 이교도적이고 타락한 사람들 속에서마저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던 사람이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천사들의 날개 그늘 아래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여호수아 2장에는 라합이 믿음으로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영접하여 멸망당하지 않았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합이 어떻게 멸망의 대상에서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는지를 살펴보면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여호수아 2장의 스토리를 요약하면 여호수아가 두 명의 정탐꾼을 여리고성으로 보냈습니다. 여리고성이 워낙 견고하고 치안이 치밀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보낼 수 없었습니다. 정탐꾼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고 숨어서 정보를 얻기 쉬운 곳이 라합의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리고성의 보안이 철저했기 때문에 외부 침입자가 라합의 집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여리고 경찰들이 알게 되었고 라합의 집에 들이닥치게 되었습니다. 
라합은 경찰들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고, 정탐꾼을 지붕 위에 숨겨두고 거짓말로 여리고 경찰들을 따돌렸습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을 살려주면서 자신의 믿음을 고백했고,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할 때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지인들을 살려 주겠다는 약속 받았습니다. 
살기 위해 죽기를 각오한 믿음  
첫째, 라합의 믿음은 살기 위해 죽기를 각오한 믿음이었습니다. 라합이 정탐꾼을 살려주고, 여리고 경찰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생명을 내건 위험한 선택이었습니다. 라합에게 가장 안전한 선택은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여리고의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정탐꾼들이 살려달라고 부탁하지도, 숨겨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라합이 주도적으로 계획한 일입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위험한 선택을 했을까요? 살기 위해서입니다.  
“정탐꾼들이 잠자리에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 위로 올라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호와께서 이 땅을 당신들에게 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에 대한 두려움에 우리가 사로잡혀 있고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들 때문에 간담이 서늘해져 있습니다’”(8~9절).
라합은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정복해 들어오면 결코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가 정복당한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탐꾼들을 돕는 것이 자신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생명을 내건 위험한 선택을 해야 했지만 결국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위험한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라합의 선택은 죽음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죽게 되는 상황에서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아무리 위험할지라도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라합의 믿음에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동일한 원리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생명과 죽음을 결정짓는 선택입니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다가오는 종말의 심판 앞에서 살 수 있는 길이 아무리 위험해 보여도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음이란 우리가 육체의 죽음을 결코 피할 수 없어도 영원한 죽음은 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이 있고 영원한 죽음이 있는데 육체의 죽음이 두려워 영원한 죽음을 피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육체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를지라도 영원한 죽음을 피할 수 있다면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 올바른 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살기 위해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선택입니다. 어거스틴은 “우리는 죽지 않기 위하여 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앞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이요, 죽어야 하는 죽음은 우리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죽음입니다. 살기 위해 자신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내어주고, 어떤 대가와 희생이 요구될지라도 영원한 생명을 선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이 살 길입니다. 라합은 살기 위하여 죽기를 각오하는 믿음을 보였습니다.  
 
 
은혜로 얻은, 전인격적 믿음
 
 
둘째, 라합의 믿음은 은혜로 얻은 믿음입니다.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전도를 받아서 믿음을 갖게 된 것이 아닙니다. 정탐꾼들이 찾아오기 전에 이미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믿음이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소문에서 나온 것입니다. 라합은 누구보다 그 소문을 빨리 알고 있었습니다. 소문이 라합에게 믿음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로 인하여 퍼져 나간 소문이 가져다 준 믿음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은혜로 얻은 믿음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잃어버린 영혼의 구원은 우리가 전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인하여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믿음을 가질 때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앞서 임하여 준비시킵니다. 
셋째, 라합의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전인격적 믿음입니다.  
“당신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여호와께서 당신들을 위해 어떻게 홍해의 물을 말리셨는지, 당신들이 요단강 건너편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을 어떻게 진멸시켰는지에 대해 우리가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마음이 다 녹아내렸고 당신들 때문에 모두 용기를 잃었습니다. 당신들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과 아래로는 땅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10~11절).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소문으로 들었다는 것은 지식적인 영역입니다. 그 소문을 들었을 때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녹아졌다, 두려워했다, 용기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감정적인 영역입니다. 라합은 지식과 감정에 기초하고, 의지가 움직여서 정탐꾼들을 숨겨주는 행동을 했습니다. 전인격적인 믿음입니다. 전인격적인 믿음에는 내용이 있고, 감정이 있고, 행동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은 전인격적인 믿음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서도 라합이 행함으로 믿음이 증명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창녀 라합도 첩자들을 숨겨 주고 다른 길로 가게 했을 때 행함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지 않았습니까? 마치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약 2:25~26). 
 
 
세상과 맞선 믿음
 
 
넷째, 라합의 믿음은 세상과 맞선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소문은 라합만 들은 것이 아닙니다. 여리고성의 모든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들었는데 라합만 믿음으로 반응했습니다. 여리고성의 모든 사람들이 심판의 소문을 듣고 두려워했지만 믿음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여러분, 다른 모든 사람들이 믿을 때 따라 믿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을 홀로 믿는 것은 너무 힘든 일입니다. 마틴 루터가 1517년 반박문을 내건 것은 누군가 자신의 생명을 아무도 모르게 죽일 수 있는 거대한 종교적 악의 세력과 맞선 것입니다. 매우 위험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사선을 뛰어넘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A.D. 4세기경 초대교회는 삼위일체 논쟁으로 매우 혼란했습니다. 그 논쟁으로 혼란스러울 때 아타나시우스가 “예수님의 신성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황제로부터 이단으로 몰렸고 다섯 번이나 유배를 당하는 엄청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믿는 정통교리를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정통교리를 말한 사람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시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가 위험한 선택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이 시대 우리들에게 참된 믿음이 전수될 수 있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와 마틴 루터처럼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아도 자기가 깨달은 믿음이 세상과 맞설 수 있어야 합니다. 라합은 바로 그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참된 믿음은 세상에 대항할 수 있는 믿음이자 세상과 정반대의 길을 걸을 갈 수 있는 믿음입니다.      
 
 
최소한의 지식으로 최고의 믿음을 
 
 
다섯째, 라합의 믿음은 최소한의 지식을 가졌지만 최고의 믿음을 보여줬습니다.  
“당신들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과 아래로는 땅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11절b).
라합이 들었던 소문의 내용은 많지도, 복잡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시킬 때 홍해를 가르셨다는 것, 요단 동편에 있는 아모리 두 족속을 진멸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라합이 깨달은 것은 “당신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하늘과 땅의 진정한 신이시다”는 것입니다. 라합의 믿음이 위대한 것은 최소한의 지식으로 최고의 믿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많은 지식과 진리의 분량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진리를 붙들고 있느냐 입니다. 단 하나의 진리를 진정 믿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 해도 믿음으로 굳게 붙잡지 않으면 정보와 지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지식이 많지 않더라도 그것을 굳게 붙잡으면 그 영혼을 살리고, 삶을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성경 지식이 없어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진리를 믿음으로 붙잡지 않기 때문에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동굴에서 갈 길을 몰라 헤매고 있을 때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동굴 전체가 환해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굴 어디선가 비치는 희미한 불빛을 향하여 걸어 나오면 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이 모든 것을 깨달아 아는 지식이 아니라도 단 하나의 진리의 빛이 우리 영혼에 비친다면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더욱 풍성하게 하려는 시도보다 알고 있는 진리를 믿음으로 붙잡고, 순종하느냐에 영적 생명이 달려있는 줄로 믿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믿음이란 어둠 속에서 비추어오는 한줄기 빛을 보고, 자기의 몸을 그 빛에 내던지는 모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참 이스라엘인이자 
 
 
구원으로 인도하는 믿음
 
 
여섯째, 라합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참 이스라엘인의 믿음입니다. 라합은 아모리 족속이었습니다. 멸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그 누구보다 참 이스라엘인의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라합의 고백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말해줍니까? 참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육신의 혈통에서 난 자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이가 참 이스라엘인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뜻으로 난 사람이 진정 이스라엘인입니다.  
어떤 윤리학자들은 라합이 거짓말한 것을 가지고 끊임없이 물고 늘어집니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좋아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라합이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은 그녀의 부도덕한 삶과 거짓말까지 모두 좋은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라합의 문화 수준에서 그 이상의 다른 대화를 찾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윤리적으로 반듯한 삶을 살아야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죄와 허물과 연약함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믿고 응답하는 것이 것입니다. 스스로 삶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라합의 죄와 실수를 부각시키기보다 라합에게 있는 칭찬 받을 만한 믿음, 모든 사람들에게 모델이 될 만한 믿음을 부각시킨 것입니다. 세상은 선한 일은 간과하고 악한 일을 들춰내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정반대입니다. 그 사람에게 많은 단점, 연약함, 허물이 있을지라도 그 안에 선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을 보고 구원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최소한의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 영접해 주십니다.   
일곱째, 라합의 믿음은 다른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라합은 자기만 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여호와를 두고 내게 맹세해 주십시오. 내가 당신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으니 당신들도 내 아버지의 집에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고 내게 확실한 징표를 주십시오. 내 부모와 내 형제자매들의 목숨을 살려 주고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지켜 주며 당신들이 우리 생명을 죽음에서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12~13절).” 
여리고가 멸망당할 때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친척,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구원 받기를 원했다는 것이 라합의 믿음이 참되고 진실하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믿는 믿음이 참되고 진실하다는 증거는 누군가에게 “구원의 길로 가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라합의 행동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우리도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믿음을 소개해야 합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라합의 행동은 가장 위험해 보였지만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습니다.  지혜로운 선택은 당장의 위기를 극복하는 선택만이 아니라 먼 미래를 확실히 보장받는 선택입니다. 라합은 믿음으로 이스라엘의 일원이 되었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고, 육체의 죽음을 피했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았습니다. 부도덕한 삶을 살았던 라합이 믿음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허락 받았습니다. 라합이 익숙했던 여리고를 배반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믿음의 삶을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믿음은 때로 익숙한 세상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맞서는 것입니다. 과거의 허물과 죄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믿음의 관계로 들어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족보가 우리의 믿음을 좌우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상 가운데 불미스럽거나 부끄러운 과거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것은 장애물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이 그것을 변화시키셔서 새로운 믿음의 역사를 이끄실 수 있습니다.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권찬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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