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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단-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2018-11-11      제12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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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엡 6:10~20
이재훈 목사 
 
 
신앙의 진가는 참된 기도생활에서 나타납니다. 우리는 영적 생명의 호흡인 기도를 통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매튜 핸리 목사는 “기도하지 않고 사는 성도가 존재할 수 있다면 숨 쉬지 않고 사는 사람도 존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혼의 기도>를 쓴 포사이스는 “기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죄요, 깜짝 놀랄 만큼 공공연한 죄며, 기도하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은 죄 이면에 감추어진 또 다른 죄”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기도 없이 사는 것은 영적 전쟁에서 적에게 항복하고 사는 것이요, 기도가 막혀 있는 것은 영적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우리의 기도를 방해합니다. 우리가 기도만 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을 하든지 내버려 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려고 하면 무순 수를 써서라도 막으려고 달려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것은 바르게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저절로 우리를 보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는 가운데서만 사용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토해내게 하신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해 늘 깨어서 모든 일에 인내하며 성도를 위해 간구하십시오”(18절).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영생에 이르도록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십시오(유 1:20~21).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해 줍니다.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것’과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서로 공존합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영적 전쟁 승리자들이 경험하는 축복입니다.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은 평신도였습니다. 존 번연은 당시 영국국교회가 나눠준 공동기도서만 의존해서 기도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평신도로서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했습니다. 그러자 영국국교회가 존 번연을 “왜 당신은 성직자로 안수를 받지 않았는데 성경을 가르치고 공동기도서를 이용하지 않고 기도합니까?”라며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는 수감 기간 동안 <나는 성령으로 기도하리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는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우리의 진정하고 분별력 있으며 사랑이 담긴 마음과 영혼을 하나님께 쏟아놓는 것이다.”
이 내용을 이 시대에 보면 너무나 당연한 정의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도는 교단에서 나눠주는 공동기도서를 읽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이 없는 기도,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과 상관없는 기도였습니다. 존 번연은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으로 기도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만약 존 번연이 이것을 포기하겠다고 하고, 교단에서 가르쳐 준대로 기도할 것이라고 하면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지 않겠다고 하면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식서에 나타난 기도문을 무시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식서에 있는 것만 기도라고 생각하는 형식적이고, 제도적이고, 무미건조한 생명 없는 기도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을 직접 경험한 사람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그것을 말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면 반드시 두 가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첫째, 자신이 얼마나 악하고 추하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체험 속에는 반드시 죄에 대한 깊은 회개와 통회가 포함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얼마나 많은 잡념이 일어납니까? 기도하려고 하면 얼마나 많은 생각이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게 합니까?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무디고 냉담합니까? 믿지 않는 영혼을 위해서 기도할 때도 우리 마음이 얼마나 차갑습니까?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지극히 열심을 내면서, 다른 사람의 고통과 문제에 대해서는 얼마나 형식적으로 기도합니까? 하나님의 수많은 약속을 믿지 않고 기도합니까? 성령님이 이 모든 상태들을 뒤집어엎으면서 죄를 회개하고, 이 모든 마음의 상태가 올바른 상태가 아님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시고, 집중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게 하십니다. 불신과 죄악 가운데 살았던 우리의 죄를 토해내게 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신다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마땅히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하지만 오직 성령께서 친히 말로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이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롬 8:26~27). 
성령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연약함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도록 막는 그것을 뛰어 넘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한 시간도 기도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한 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는 순간에도 그들은 깨어 있지 못하는 연약함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리지 않고,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 같았습니다. 성령님께서 임재하시기 전까지 우리는 기도하고 싶은 마음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성은 기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정도 기도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감정이 좋으면 기도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내 판단으로 계획을 이루는 것이 낫지 멈춰서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불필요한 시간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의지도 기도를 원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청교도 토마스 보스톤은 우리의 기도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인간은 떡 대신 돌을 구하고, 물고기 대신 전갈을 구하고, 우리 자신에게 해를 끼칠 것을 구하고,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대적하며 기도하기 쉽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대적하며 기도하고, 둘째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것을 구하며 기도하고, 셋째 우리의 죄악 된 욕망을 채울 것을 구하고, 넷째 우리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을 구하지 않고, 다섯 째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여섯 째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질병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지 못해서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세 번 기도하고 나서야 그 질병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기도로 아들을 살렸습니다. 어거스틴이 집을 떠나려고 할 때 집을 떠나면 하나님을 떠나 더 방황할까봐 붙잡아두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집을 떠나 밀라노에 있으면서 회심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됐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신학자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근시안적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조차 시야가 좁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것을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셔서 하나님의 뜻으로 인도하십니다. 
오늘 본문 26절에서 ‘말로 할 수 없는’이라는 문장의 정확한 표현은 ‘말 없는’입니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말없이 탄식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줄도 모르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것을 구하니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성령의 탄식을 듣고 우리가 성령 안에서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성령의 탄식에 이끌려 드리는 기도입니다.  만일 우리가 전혀 기도하지 않는다면 성령님께서는 혼자라도 탄식하며 기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 성령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인도하셔서 성령의 탄식을 따라하고,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님은 기도하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악함을 보게 하시며, 하나님의 뜻 밖에 있는 모습을 보게 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지 않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 경험
   
 
성령 안에서 기도하면 나타나는 경험 두 번째는 오직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경험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밀함 속으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 거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대화하기는커녕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인도하시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마음에 보내셔서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우리 언어 중에 가장 친밀한 단어가 ‘아빠와 엄마’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자라면서 언어로 처음 표현하는 단어도 ‘아빠와 엄마’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가 여러분의 마음눈을 밝게 하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유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힘의 능력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를 위해 베푸신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권능이 어떠한지 여러분으로 하여금 알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엡 1:17~19).  
이 말씀은 바울의 기도입니다. 바울의 기도가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 안에서 기도할 때 반드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며, 영광의 아버지이시며, 성령 안에서 우리를 변화시키셔서 하나님입니다. 
 
 
마음의 눈을 밝히시는 성령님
 
 
성령님은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는 분입니다. 무엇인가 눈에 보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있어야합니다. 하나는 눈이 보여야 되고 또 다른 하나는 빛이 있어야합니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빛이 있어도 볼 수 없고, 또 눈이 보여도 빛이 없으면 볼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주시고, 빛을 비추어주셔서 우리가 밝히 하나님의 영역을 볼 수 있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소망이 무엇인지를 보게 해주십니다. 우리의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하나님께도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 안에 온전히 거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 안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소망과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에베소서 1장 19절에서는 능력을 두 번이나 강조했습니다. 창조 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큽니까? 아니면 우리를 구원하실 때 임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더 큽니까? 청교도 목사 아더핑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인을 변화시켜서 변화시키는 것은 사람을 창조하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이며 더 큰 능력이 필요하다.” 
교구시대의 유명한 설교자 크리스토 솜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것보다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더 큰 능력이다”고 했습니다. 
창조는 어떤 피조물을 단순히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반대방향으로 가는 것을 돌이켜 세우는 것입니다. 창조 때는 어떤 거부반응도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거부반응이 있습니다. 타락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구원은 거부하는 이들을 돌이키는 것이기 때문에 능력이 더 필요합니다. 창조에는 도움이 없지만 반대도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에는 악한 영들의 반대와 방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와라!”라고 하자 나사로가 순종하여 나왔습니다.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에게 “다비다야 일어나라” 했을 때 다비다도 즉시 나왔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보다 죄 가운데 있는 영혼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더 큰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우리가 성령 안에서 기도할 때 보게 됩니다. 믿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악한 세력들을 꺾으시고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는 능력입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을 알아가게 됩니다. 성령 안에 기도할 때 스스로의 연약함을 깨닫게 되고, 동시에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귀한 사역을 맡기실 것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승리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 안에서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의지하십시오. 그때 성령님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작성자   권찬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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