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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으면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2019-10-13      제12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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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크리스천을 위한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
1. 체면 

체면 지키느라 무리하고 고단하게 사는 사람들 
타인 시선 의식해서 행동하는 것은 위선, 경계해야
 


요즘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가 유행이다. 미니멀 라이프는 불필요한 물건을 줄이고, 최소한의 것으로 살아가는 생활방식을 말한다. 필요한 것 외에는 가지지 않음으로써 여유를 가지고 다른 중요한 부분에 집중하는 것이다. ‘단순하고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미니멀 라이프다. 비단 일상생활에서만 미니멀 라이프가 필요한 게 아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미니멀 라이프가 꼭 필요하다. 그토록 자유로워야 할 크리스천들을 옥죄고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들이 의외로 많다. 그 첫 번째가 신앙생활에서조차 남들 시선을 의식하는 체면문화다. 체면(體面)은 남을 대하기에 떳떳한 도리나 얼굴을 말한다. 비슷한 말로 ‘낯’, ‘면목’, ‘위신’ 등이 있는데,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무리하고 고단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체면, 버리면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예부터 우리 민족은 체면을 참으로 중요시 여겼다.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쬐지 않는다”, “냉수 마시고 이 쑤신다”,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 한다”, “조선 사람은 낯 먹고 산다”, “체면 차리다 굶어 죽는다” 등 다양한 속담들이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 민족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한국인들은 남의 시선을 참으로 중히 여긴다. ‘남부끄럽다’, ‘남 보기에 창피하다’, ‘남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남의 이목이 있는데’ 등 스스로(가족 포함)에 대한 남들의 평가에 지나치리만큼 신경을 쓴다. 나를 평가하는 남의 시선이 너무 신경 쓰인 나머지 진짜 자기 모습으로 살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K 자매(42세, 타교회)는 대학교 진학 당시 아버지와 갈등이 있었다. 
“부모님이 교사셨어요. 저도 자연스레 교사가 되고 싶어서 교대(지방)에 지원했고 합격했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교대보다 명문사립대 진학을 원하셨어요. 사립대 학비가 부담스러워서 학비가 사립대보다 싼 교대에 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께서 고집을 꺾지 않으셨어요. 큰딸이 남들 알아주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걸 보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교회 사람들에게 자랑도 하고요. 결국 아버지 뜻대로 명문사립대로 진학했는데 그때 교대를 선택했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커요. 왜냐하면 학과 공부가 적성에 안 맞았거든요.” 
이와 같은 일이 비단 K자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사회에서든 교회에서든 이런 사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흔하다.
 
한국, 중국, 일본의 체면문화 
 
사실 체면 문화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유교의 본고장 중국에도 체면문화가 강하다. 중국의 체면문화를 ‘미엔즈(面子)’라고 한다. 미엔즈는 ‘자신의 얼굴 즉 체면을 중시한다’는 의미로 중국인들이 대단히 중요시하는 덕목이다. 死要面子活受罪(체면 때문에 생고생한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중국인들도 체면을 중요하게 여겼다.  
초나라 패왕 항우는 백전백승을 한 영웅이었지만 단 한 번 해하전투에서 패배한다. 그 유명한 사면초가(四面楚歌; 네 방향에서 들려오는 초나라의 노래) 일화가 바로 그것이다. 항우는 이 전투에서 도망쳐서 재기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하들이 죽고 혼자 고향에 돌아갈 체면이 없다며 자결하고 만다. 중국인들은 그런 항우를 역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꼽고 있다. 중국인들이 거리에서 큰소리로 싸우는 것도 미엔즈문화에 기인한다. 별것 아닌 문제에도 주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본인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더 크게 언성을 높이는 것이다. 식당에서 음식을 과도하게 주문하거나 손님에게 상다리 휘어질 정도로 음식을 차려 대접하는 것, 성대하고 화려한 결혼식 등이 바로 중국의 체면문화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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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미엔즈문화가 있다면 이웃나라 일본에는 ‘하지(恥; 수치, 부끄러움)’문화가 있다.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일본은 부끄러움의 문화’라고 규정지은 데서 파생되었다. 일본의 하지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사무라이(무사)들의 할복(割腹)이다. 봉건시대 사무라이들에게 있어서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은 죽음과 같았다. 단적인 예가 바로 ‘시미즈 무네하루’라는 무사다. 시미즈 무네하루는 모리가문에 채용된 전국시대 무사였다. 모리가문을 정벌하러 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모리가문과 화친을 맺으면서 화친 조건으로 시미즈의 할복을 요구했다. 시미즈는 도요토미의 요구를 승낙했고, 며칠 뒤 자신의 형과 함께 성 앞에 배를 타고 나와 할복했다. 도요토미는 시미즈가 죽는 순간을 끝까지 지켜보며 “이것이 진정한 무사의 죽음”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그 이후 책임을 지거나 명예를 입증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할복이 정립되었다. 명예 즉,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택한 것이다. 
 
성경에도 나오는 체면문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도 체면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사울 왕이다. 하나님이 사무엘 선지자를 사울에게 보내 아말렉 사람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멸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사울과 그의 군대는 그 명령을 어겼다. 
“그러나 사울과 그의 군대는 아각(아말렉 왕)뿐만 아니라 양과 소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과 살찐 송아지와 어린 양들을 비롯해 좋은 것들은 없애지 않고 남겨 두었고…”(삼상 15:9).
불순종한 사실을 지적하는 사무엘에게 사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고 거짓말하고(삼상 15:13), 변명을 늘어놓기 바빴다(삼상 15:20~24). 죄가 명백하게 드러났을 때에도 회개하기는커녕 자신의 체면 지키는데 급급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내 백성의 장로들과 이스라엘 앞에서 내 체면을 세워주십시오. 나와 함께 가서 내가 여호와 당신의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해 주십시오”(삼상 15:30). 
분봉왕 헤롯도 체면을 지키기 위해 세례 요한을 죽였다. 세례 요한은 예수의 친척 형으로, 예수에게까지 세례를 베풀 정도로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세례 요한이 동생의 아내(헤로디아)를 취하고 왕위를 찬탈한 헤롯의 잘못을 지적했고, 이에 분개한 헤롯이 세례 요한을 옥에 가뒀다. 헤롯은 그를 죽이고 싶었지만 백성들이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에 두려웠다. 이에 헤로디아가 계략을 꾸민다. 헤롯의 생일날 헤롯의 조카이자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에게 헤롯 앞에서 춤추게 한 것. 헤롯은 자신을 기쁘게 한 소녀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소녀는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다. 이에 헤롯은 남들의 눈을 의식해 소녀가 해달라는 대로 세례 요한의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
“헤롯왕은 난감했지만 자기가 맹세한 것도 있고 손님들도 보고 있으므로 소녀의 요구대로 해 주라고 명령했습니다”(마 14:9). 
반대로 체면을 내려놓으면서 구원의 은혜를 입은 인물도 있다. 바로 세리장 삭개오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로 유대인에게 부과된 세금이 많았다. 로마 총독에게 징수를 위탁받은 산헤드린 공의회는 유대인 중에서 세리를 고용했는데 대다수 세리들이 세금을 징수하는 과정에서 폭리를 취했다. 삭개오도 그런 세리 중 하나였다. 삭개오는 권력을 이용해서 재물을 많이 모았지만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았다. 어느 날 삭개오가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를 만나면 삶이 변하고, 기쁨과 평안을 누린다는 소문을 듣고 삭개오는 예수 만나기를 갈망했다. 예수가 여리고를 지나갈 때 삭개오는 먼발치에서라도 보려고 했다. 그런데 키가 작아 군중에 둘러싸인 예수를 볼 수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거기서 그만두고 돌아갔을 텐데 삭개오는 포기하지 않았다. 체면을 내려놓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 그런 삭개오를 발견한 예수님이 발길을 멈추고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 
예수님을 영접한 삭개오는 회개했고 놀라운 고백을 한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철저한 삭개오의 회개 앞에 예수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라고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하는 행동을 위선이라고 하시면서 경계하셨다(마 6:1~2). 
전셋집에 살면서도 자동차는 비싼 외제차를 사야 하고,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 자녀의 적성보다 학교 이름이 더 중요하다며 강요하고,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자신의 몇 개월 월급보다 비싼 명품백을 할부로 사는 것도 체면의식에 사로잡힌 행동이다. 
크리스천들도 체면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어려운 문제가 생겼지만 체면 때문에 순원들에게 공개하고 기도제목을 알리는 것이 불편하거나, ‘교회 다닌 지가 얼만데, 집사(장로, 권사) 직분은 받아야 하지 않나?’ 혹은 ‘동료 장로(권사)들이 저만큼 헌금하니까 나도 이 정도는 해야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무리하고 자유하지 않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체면문화에 사로잡힌 행동들이다. 신앙생활에서 체면치레는 불필요하다. 체면을 내려놓아야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기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예수님의 영성을 따라 단순하게 살아야
 
오늘날 우리는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온갖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다. 물론 풍요 속에서도 빈곤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문명의 혜택을 누리면서 살고 있다. 풍요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도시마다 넘쳐나는 음식물은 물론 플라스틱을 포함한 각종 쓰레기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풍요로운 삶이 환경을 파괴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결과이다. 오로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목표였던 시절을 넘어서 이제는 정말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왔다. 
 
예수님은 ‘미니멀리스트’
 
이러한 상황에서 크리스천들이 취해야 할 대응방법이 무엇일까? 그 해답을 2010년부터 영미권에서 시작된 ‘미니멀 라이프 운동’에서 찾고자 한다. 미니멀 라이프란 불필요한 물건을 줄이고 단순함을 추구하면서 본질에 더 충실하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인생의 여정에서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전제로 삶의 본질을 추구하면서 더 행복한 생활을 하자는 것이 미니멀 라이프의 근본정신이다. 절제하면서 꼭 필요한 물건만으로도 만족과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을 미니멀리스트(minimalist)라고 한다. 이들은 행복을 소유에서 찾지 않고 삶의 본질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철저한 미니멀리스트이셨다. 그 증거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어디를 가시든 따라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마 8:19~20)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삶의 의미를 소유에서 찾지 않고 영적인 것에서 찾고 계심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분의 삶은 단순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주머니에 금도 은도 동도 지니지 말라. 여행 가방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챙기지 말라”(마 10:9~10)고 하셨다. 물론 이 말씀은 제자들이 전도를 목적으로 떠나는 여정이었기 때문에 그 상황에 맞는 요구를 하셨지만, 단순한 생활에 대한 예수님의 생활철학이 담겨있다고 느껴진다. 이처럼 예수님은 미니멀 라이프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집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당신의 몸과 입고 있는 옷이 전부였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삶의 패턴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족함 없이 생활하셨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하셨던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그것을 증거해준다. 예수님은 소유하는 것보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면서 사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셨다.  
기독교 영성에서도 단순한 생활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할 일이 많고, 가야할 곳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은 생활환경 속에서는 결코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시간을 가질 수 없다. 바쁘게 많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현대인의 특징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라이프스타일은 정서적, 영적으로 병들기 좋은 조건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리 바빠도 한적한 곳을 찾아가 아버지와 교제하는 시간을 가지셨다. 이 시간은 예수님이 하실 많은 일 중에서 우선순위였다. 그러므로 현대 크리스천들에게도 단순하게 생활하는 영성이 필요하다. 재정, 만남, 일, 쇼핑 등에서 꼭 필요한 것부터 순위를 매겨보라. 그리고 끝 순위부터 하나씩 정리를 해보라. 정리된 것들 때문에 삶에 지장을 초래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복잡하게 살던 삶의 패턴을 점점 단순하게 사는 패턴으로 바꿔보라. 이것은 영성을 깊이 있게 해주는 좋은 일상의 훈련이 될 것이다. 
 
미니멀 라이프가 주는 선물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산다. 집안 살림 중에서 1년에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이 분명히 있다. 버리기는 아깝고, 남 주기는 그래서 집안에 쌓아둔 물건이 얼마나 많은가? 꼭 필요해서 산 것이 아니라 좋아 보여서 혹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해 사놓은 물건이 얼마나 많은가? 또 우리는 너무 많은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 현대인들의 특징 중 하나는 바쁘게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복잡하고 바쁜 시간의 흐름을 따라 살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나 자신은 없고 일과 타인만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잠시 여기에서 발을 멈추고 다음 질문에 답을 달아보자.
“그렇게 바쁘게 살면서 나는 무엇을 얻었는가? 그렇게 많은 일을 하면서 나는 무엇을 얻었는가?”
영적인 삶에도 미니멀 라이프가 필요하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내 시간은 없고 예수님을 위한 시간만 있는 것이 헌신이라고 오해했다. 그래서 죽도록 충성하다가 병들어 쓰러지는 교인이 많았다. 그러나 이것은 건강하지 못한 생각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참 예배자가 되는 것과 일상에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갖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신앙생활에서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이다.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다이어트가 필요하듯 정서적, 영적 건강을 위해서는 관계 다이어트와 스케줄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사람이 관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단순한 생활을 위해서는 많은 모임과 만남을 줄일 필요가 있다. 과감하게 스케줄을 줄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이요, 자기를 살리는 길이다. 왜냐하면 관계와 스케줄 다이어트가 자신을 건강하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미니멀 라이프는 우리에게 몇 가지 선물을 제공해 준다.
첫째, 재정의 자유를 준다. 꼭 필요한 물건만 구입하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지출되는 돈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재정의 압박 대신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또한 물건을 적게 소유하는 대신 좋아하는 일을 할 수도 있다. 자기발전을 위한 투자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둘째, 시간의 여유를 준다. 꼭 필요한 모임과 만남, 일을 하면서 살기 때문에 시간의 여유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간을 더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다.
셋째, 안식을 준다. 재정과 시간이 단순화되면 일단 스트레스가 감소된다. 재정과 시간이 주는 압박에서 벗어나게 되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게 된다. 삶의 쉼을 얻게 된다. 쉼이 있는 삶이 창조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다.
넷째, 영성을 깊게 해준다. 바쁘게 많은 일을 하면서 살면 하나님을 건성으로 만나게 된다. 그분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그렇게 살다보면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는 신앙인으로 살게 된다. 그런 모습으로는 온갖 시험을 싸워 이길 수가 없다. 그러나 안식이 있는 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몸과 마음과 영이 건강해질 수밖에 없다. 
 
체면치레에서 벗어나라!
 
우린 너무 체면치레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체면치레는 특히 혼인예식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체면 때문에 혼수를 남들만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평생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라며 결혼예식에 막대한 돈을 들이는 것, 꽃값을 5천만 원에서 1억 원을 쓰는 것, 그동안 투자한 축의금을 회수하기 위해서 잔치를 크게 벌이는 것 등은 모두 체면치레에 불과하다. 세상 사람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크리스천은 체면치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결혼식의 본질은 신랑신부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지 화려한 잔치가 아니다. 수백만원짜리 결혼사진을 찍고 얼마 못 살고 헤어진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거액의 결혼식을 치러놓고 불행하게 살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거창한 혼수를 장만해놓고 힘들게 살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결혼의 본질은 행복하게 사는 것이지 화려한 잔치가 아니다. 요즘 젊은 층에서 스몰웨딩에 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허례허식보다 결혼의 본질을 택하겠다는 성경적 생각이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주신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내게 주신 은혜를 힘입어 여러분 각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롬 12:3).
그렇다. 분수에 맞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의 방법이다. 크리스천의 미니멀 라이프는 삶을 단순하게 만들고 나머지를 하나님으로 채우는 영성의 과정이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많이 먹고, 너무 많이 소유하고, 너무 많은 일을 하고, 너무 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왔다. 이제는 예수님의 영성을 따라 단순하게 살 시대가 되었다.
/ 이기훈 목사(사회선교본부장) 
 
<발문>
“크리스천의 미니멀 라이프는 삶을 단순하게 만들고,
나머지를 하나님으로 채우는 영성의 과정이다.”

 작성자   정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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