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모세야!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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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야!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어라!”

 2019-03-10      제12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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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와 함께 읽는 성경 

디에릭 보우츠의 ‘불타는 떨기나무와 모세’

board image<디에릭 보우츠가 그린 ‘불타는 떨기나무와 모세’(1465~70년 作)>
 

지난해 5월, 일본 아베 총리가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부부가 아베 총리 부부와 함께 한 공식 만찬 석상에서 총리 전속 요리사인 세게브 모셰가 디저트를 구두 모양의 철제 그릇에 담아 내놓았다. 당시 성경적 지식이 없는 언론과 사람들은 이를 두고 ‘외교적 결례’인지 아닌지 논란을 되풀이했다. 성경에서 신발이 상징하는 바를 모르고서는 이 사건 자체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board image<일본과 이스라엘 만찬석상에서 내놓은 신발 모양의 디저트 >

 
모세 앞에 모습 드러내신 창조주 하나님
 
오늘 명화와 함께 묵상할 본문은 출애굽기 3장이다. 
어느 날 모세가 양떼를 몰고 가는데 활활 타오르는 떨기나무를 발견한다. “불꽃이 이글거리는데도 어떻게 나무가 타지 않는 걸까?” 모세가 다가가자 야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모세야! 모세야!” 
모세가 다소곳한 자세로 대답했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모세야!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 너는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출 3:5). 
그 자리에서 모세는 이집트 파라오 밑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동족을 구해 나오라는 소명(召命)을 받는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파라오)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10). 
오늘 본문과 함께 묵상할 그림은 디에릭 보우츠(1415~1475)가 그린 ‘불타는 떨기나무와 모세’이다. 디에릭 보우츠는 플랑드르 르네상스의 거장인 얀 반 에이크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네덜란드 화가이다. 
보우츠는 야훼 하나님 앞에서 신발을 벗는 모세와 하나님 앞에서 맨발로 무릎을 꿇고 소명을 받는 모세의 모습을 하나의 풍경 속에 재치 있게 잘 그려냈다. 보우츠의 그림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모세는 두 손을 들고 있다. 마치 무조건 항복하는 모습으로 순종하는 이 자세를 미술사가들은 ‘오란트(orant; 두 팔을 들어 올린 채 서서 기도하는 모습) 자세’라고 한다. 
모세를 바라보는 하나님도 오른손을 들어 축복해 주신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왼쪽보다 오른쪽이 상대적으로 더 호의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오른쪽은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이 서 계신 쪽이기도 하다. 그래서 통상 하나님은 오른손을 들어 축복하시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림에서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 손가락을 함께 모은 하나님의 손가락은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나머지 세 손가락은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상징한다. 기독교 미술에서 축복을 표시하는 전형적인 제스처이다. 
불타는 떨기나무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왼손에는 투명한 구(球)가 보인다. 원(圓)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을 상징하듯, 구체(球體)도 역시 원처럼 시작도 끝도 알 수 없이 완전하고 측정 불가능한 입체로 신성을 상징한다. 
많은 화가들이 신현(神現) 즉, 하나님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신 것을 구(球)로 표현하는 전통이 있는데 보우츠 역시 이 방식을 택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모세 앞에 모습을 드러내신 창조주 하나님이 이 우주를 상징하는 구를 왼손에 들고 계신다.
 
왜 “신을 벗어라”고 명령하셨을까?
 
하나님은 왜 모세에게 “신을 벗어라”고 명령하셨을까? 심리학적으로 신발은 ‘세상의 더러운 것을 밟는 비천함’의 상징이자 ‘세속적인 권위’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것이 권위이든 더러움이든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을 받는 자리에 세속의 것은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당연히 모세는 신발을 벗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다. 모세가 벗어야 했던 신발은 속세의 더러움이었을 뿐만 아니라 거룩한 소명 앞에서 내려놓아야 했던 세속적 권위 즉, 모세 자신이 집착하는 자아(自我)요, 에고(ego)를 상징한다. 
오늘날 이스라엘과 일본 간 복잡다단한 외교관계를 단순히 만찬에 나온 디저트 하나만 가지고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칫 억지 춘향이 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태인인 현직 이스라엘 총리와 그의 전속 요리사가 앞서 말한 성경 속 모세와 신발에 대한 스토리와 그 상징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히브리어로 세게브(Segeve)는 ‘위대한, 숭고한, 강력한’ 등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모셰(Moshe)는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Moses)를 말한다. 
나의 의심은 이렇다. ‘위대한 모세’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노회한 이스라엘 총리의 전속 요리사 세게브 모셰가 성경적 상징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일본 총리 부부에게 초콜릿을 구두에 담아 먹임으로써 일국의 총리 부부를 한방 먹인 것이 아닐까? 물론 그의 속내를 알 수 없으나 다만 이스라엘 사람들의 심리 속에는 홀로코스트를 자행했던 나치 독일과 일본제국주의를 동일시하는 심리가 모셰에게도 있지 않았을까? 유태인의 나치 콤플렉스와 그들에게서 받은 트라우마는 우리의 상상을 불허한다. 그렇다고 냉정한 국제 외교관계 현장에서 이러한 심리를 직설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을 터이다. 그래서 단순한 의전상의 실수를 가장하여 그들의 마음을 에둘러서 표현한 고도의 외교 전략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 상징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자. 동족을 괴롭히는 이집트인을 보고 격분한 40세 모세가 그를 엉겁결에 살해하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간 지 어언 40년이 흘렀다. 그 40년 세월은 모세에게 ‘개인적인 출애굽’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80세 모세가 일생일대 최대의 전환점에 섰다. 그의 동족과 함께 하는 ‘민족적인 출애굽’이라는 대장정의 출발점에 선 것이다. 
그렇다면 호렙산에서 모세가 본 불타오르는 떨기나무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불은 생명과 동시에 죽음을 뜻한다. 미셸 푀이예에 의하면 ‘통제 불가능한 힘, 걷잡을 수 없는 유동성, 눈부신 찬란함으로 인해 불은 하나님의 상징’이 되었다. 
“이스라엘 동족에게 누가 저를 보냈다고 말할까요?”라며 모세가 물었을 때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3~14).
콜린 스미스는 “다른 모든 불들은 연료가 떨어지면 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불은 아무 것도 태우지 않았다. 스스로 생명력을 지녔다”고 말했다. 그렇다. 불타는, 그러나 다른 것을 태우지 않는 떨기나무는 ‘스스로 타는 불’ 즉,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을 상징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우리의 삶에 개입하신다. 모세에게 비춰진 하나님의 불빛은 이스라엘 민족을 파라오의 압제에서 구해내는 구원의 불, 구원의 빛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일개 양치기에서 위대한 지도자로 거듭나게 하셨다. 당연하게도 모세의 지팡이도 한낱 양치는 도구가 아니라 동족을 노예의 땅 애굽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끄는 지휘봉으로 변모했다.      
 
/ 김진국 집사(한강공동체, 문화평론가, 일.하.세. 아카데미 강사) 
 

<발문>
모세에게 비춰진 하나님의 불빛은 
이스라엘 민족을 파라오의 압제에서 
구해내는 구원의 불, 구원의 빛이다.

 

 작성자   정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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