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위로하는 치유자, 희망 꽃 피우는 전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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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는 치유자, 희망 꽃 피우는 전도자

 2019-10-06      제12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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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는 치유자, 희망 꽃 피우는 전도자
인생의 후반전 선교에 헌신한 장영미, 김성민 선교사
 
“늙었다고 말하지 마세요. 힘들다고 말하지 마세요. 저를 보세요…”
온누리교회 첫 번째 장로은퇴식에서 하용조 목사가 한 말이다. 하나님의 꿈은 나이 들지 않는다. 고로 하나님의 사람들의 꿈도 늙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장영미(64세), 김성민 선교사(69세)가 바로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들은 인생의 후반전을 선교사로 기꺼이 헌신하고, 현지인들과 함께 살면서 위로하는 치유자, 희망을 꽃 피우는 전도자로 살고 있다. 생명이 없는 곳에 새 생명이 움트게 하는 그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났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board image장영미 선교사(셋째줄 왼쪽 끝)와 김성민 선교사(셋째줄 가운데)는 스리랑카에서 선교사로 헌신했다.
 
 
‘와 어쩜 저렇게 인상이 좋으실까?’
장영미 선교사와 김성민 선교사를 보자마자 들었던 생각이다. 유독 선한 인상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이분들은 더 특별했다. 따뜻함과 행복함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장영미 선교사와 김성민 선교사의 첫 인상이 정말 그랬다. 두 사람을 각기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만났는데 동일한 느낌을 받았다. 표정에서부터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 바로 선교다.
 
힘이 닿는 데까지 그들 옆에서
 
“할머니의 일을 대신 할 다른 사람들이 오면 다시 올게”
떠난다는 할머니의 말에 아쉬움의 눈물을 뚝뚝 흘리는 11살짜리 손자의 손을 꼭 잡고 장영미 선교사가 한 말이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손자를 두고 장영미 선교사가 꼭 가야 했던 곳이 있었다. 바로 선교지다. 장영미 선교사의 도움이 꼭 필요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영미 선교사의 첫 번째 사역지는 중국이었다. 중국으로 갈 때만 해도 선교에 대해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였다. 평생을 은행에서 일한 장영미 선교사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조기퇴직 했다. 퇴직 하고나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신학공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하나님이 선교사로 부르셨다. 선교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장영미 선교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애써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냥 두실 리 없었다. 기도할 때, 말씀을 읽을 때, 설교를 들을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셔서 “떠나라”는 마음을 주셨다. 결국 하나님께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자마자 하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을 밀어붙이셨다. 한 장로님을 만나게 하시더니 중국 선교의 길을 열어주셨다. 발급 받기 어렵다는 비자도 한 번에 받게 하셨다. 그렇게 떠밀리듯 간 중국에서 하나님은 장영미 선교사를 다듬어가셨다.
선교사 장영미가 가장 먼저 배운 것은 겸손이었다. 장영미 선교사는 중국에서 한국어 교사로 사역했다. 평생 누구를 가르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고, 가르칠 학생들 중에는 한국어 공부에 전혀 관심이 없는 학생들도 있었기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 학생들은 학업의지가 없고, 몰려다니며 말썽을 부렸다. 휴대폰만 붙잡고 살았다. 장영미 선교사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자신이 그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섬김뿐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과 함께 화장실 청소하고, 식당정리를 하면서 본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눈높이로 내려가 대화하고 어울려 지냈다. 꼬박 2년을 아이들과 함께 뒹굴며 지내다보니 아이들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산만하던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책을 봤다. 어리숙한 선생님이라며 놀리던 아이들이 장영미 선교사의 말에 조금씩 귀 기울이고 있었다. 변화되는 아이들을 보면서 교사로서의 자세를 배울 즈음 현지사정으로 중국선교를 갑자기 종료해야 했다.
선교지 영혼들을 향한 긍휼한 마음과 아이들을 정말 사랑하는 장영미 선교사에게 하나님은 또 다른 사역지를 열어주셨다. 두 번째 선교지는 스리랑카였다. 스리랑카에서 장영미 선교사는  한국어 교사 사역은 물론이고, 은행원으로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처음 2~3년 동안에는 행정과 재정을 처리하는 일을 병행하기도 했다. 사역이 많아지면서 만나는 사람들도 다양해졌다. 학생들은 물론 학부모와 교직원, 이웃주민들까지 모두 친구가 되었다. 장영미 선교사는 그들과 함께 머무르면서 정을 나누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기꺼이 꺼내 놓으며 친구들을 위로했다. 남편을 잃고 밤낮으로 울면서 슬퍼하는 동료 교사에게 다가가 자신도 같은 아픔이 있다는 사실을 털어 놓았다. 젊은 시절 남편을 잃고 홀로 딸을 키우면서 하나님을 만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했다. 자궁을 드러내는 큰 수술을 한 동네 주민을 위해서는 밤새 싱할라어(스리랑카에서 사용하는 인도아리아어)를 달달 외워 가서 기도해주기도 했다. 장영미 선교사의 진심이 담긴 사랑을 보면서 현지인들이 조금씩 예수님을 알아가고 있다. 장영미 선교사는 앞으로도 힘이 닿는 데까지 그들 옆에서 친구가 되어주고 싶다고 했다.
“예수님이 저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저도 선교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요. 그들 곁에서 머물면서 예수님 만나고 변화된 제 삶을 보여주고, 그들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친구들과 함께 있어주는 것이 제 사명인 것 같아요.” 
 
스리랑카 학생들의 미래를 응원 
 
논과 밭에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씨를 잘 가꿔서 열매 맺게 하는 사람이 있다. 김성민 선교사도 그렇다. 김성민 선교사는 다른 사람들이 뿌려 놓은 복음의 씨앗, 사랑의 씨앗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가꿔서 열매 맺게 하는 사람이다.
김성민 선교사는 34년 동안 이어온 미국에서의 잘 나가던 회사생활을 접고 60세에 조기퇴직을 결정했다. 인생 후반전에는 선교하면서 하나님을 전하고 싶은 거룩한 부담감이 마음 한 구석에 늘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성민 선교사는 선교를 준비하며 미국에서 5년 동안 한의학을 공부하여 미국 한의사가 됐다. 의료기술을 가지고 선교지를 다니며 사역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다. 하나님은 김성민 선교사의 달란트를 선교에 사용하기를 원하셨다.
김성민 선교사는 2014년 한국에 돌아와 온누리교회에 등록했다. 선교를 교회의 소명으로 생각하며 힘쓰고 있는 교회이기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온누리교회에서 선교훈련을 받고 선교사 자격을 얻어 2017년 스리랑카 기술학교 담당자로 파송을 받았다. 스리랑카에 도착하여 현지를 알아가며 하나님이 왜 자신을 그곳으로 보내셨는지를 깨달았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익힌 경영과 인재관리 경험이 온누리국제학교와 기술학교에 꼭 필요한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김성민 선교사는 국제학교의 크고 작은 경영 문제부터 해결했다. 그리고 국제학교와 함께 있던 한국어학원의 위치를 스리랑카의 교육도시 ‘감파하’로 옮겼다. 학생들을 위한 일이라면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지 교사들과 선교사들이 그에게 ‘청년’이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였다. 김성민 선교사는 더 많은 학생들이 한국어학원에서 공부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지역 공립고등학교 교장들을 포함한 지역사회 리더십들을 만나 한국어학원을 소개하고 추천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학기를 거듭할수록 학생 수가 꾸준히 늘어갔다. 졸업생 중에는 한국으로 유학을 오는 학생들도 생겨났다. 나타샤라는 친구는 온누리교회와도 인연이 깊다. 나타샤의 아버지 수메다 목사는 온누리교회의 도움을 받아 신학공부를 마치고 스리랑카의 빈민지역에서 사역하고 있다. 지난해 여름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타샤가 한국어학원을 찾아왔다. 등록기간이 2주나 지난 시점에 와서 진도를 따라갈 수 있을지 고민이었다. 나타샤는 예습과 복습을 열심히 하면서 성실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 나타샤를 눈 여겨 보던 김성민 선교사가 한국 유학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2019년 대학민국 정부초청 외국인 학부 장학생(KGSP)’ 선발에 필요한 서류를 함께 준비해서 제출하고, 세 차례에 걸친 추가면접과 심사 준비에도 밤낮없이 뛰어다니며 힘을 보탰다. 최종 면접까지 통과한 나타샤는 스리랑카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올해 2월 한국에 왔다. 현재 경희대학교 어학원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내년부터는 한동대학교에서 공부할 예정이다. 
김성민 선교사는 나타샤의 미래를 응원하면서 더 많은 스리랑카 학생들이 한국에 오는 날을 꿈꾸고 있다.
“나타샤가 한국에 장학생으로 들어온 것이 기술학교 학생들과 국제학교 학생들에게 큰 동기부여가 됐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학생들이 훌륭한 인재들이 되어 스리랑카를 복음화 시키는 선교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작성자   홍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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