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신문 - “선교사님들 무료로 사진 찍으러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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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님들 무료로 사진 찍으러 오세요!” 

 2019-02-24      제123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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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에 이끌린 사람들
 
사진관 운영하며 나눔과 봉사 실천하는 ‘탁우영 작가’

board image탁우영 사진작가가 찍은 인물사진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한 소년이 있었다. 비좁고,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지하 단칸방에서 치매 걸린 할머니까지 다섯 식구가 무려 20년을 살았다. 그래도 행복했다. 경제적으로는 궁핍했을지언정 가족들은 세상 누구보다 화목하고 단란했다. 물론 지하 단칸방에 살면서 고난이 없었던 건 아니다. 소년의 어머니는 열악한 환경 탓에 수술을 몇 번이나 했다. 그 힘든 나날을 보내던 소년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건 교회 사람들이었다. 소년은 다짐했다. 훗날 자신이 도움 받은 것처럼 남을 돕겠노라고. 성인이 된 소년은 그 다짐을 잊지 않았다. 사진작가가 되어 선교사와 어린이들을 위해 자신의 달란트를 기꺼이 기부하고 있다. 그 소년이 바로 사진작가 탁우영(서초D공동체)이다.  
/ 정현주 기자 joo@onnuri.org
 
 
양재 온누리교회 벽화 속 예수님이 엎드리면 코 닿을 곳에 아주 특별한 사진관이 있다. 탁우영 작가(서초D공동체)가 운영하는 ‘조이어스 탁 포토스튜디오’다. 사진관에 들어서자마자 문에 달린 ‘기적의 가게’(매출액의 일정액을 NGO 기아대책에 기부하는 가게) 현판이 눈에 띄었다. 스튜디오 곳곳에서 기아대책 후원자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동전 모으기 저금통과 스마트저금통 ‘기대함’(후불교통카드를 대면 자동으로 결제금액이 기부됨), 기아대책 브로셔까지 기아대책 후원을 위한 가게처럼 보였다. 
또한 탁 작가는 '필란트로피 서포터즈 1호'(기아대책 재능나눔자)로서, 후원금을 기부하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기아대책 홍보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일의 우선순위를 기아대책 사진촬영에 두고 있을 정도다. 지난주 화요일(19일)에도 기아대책으로부터 급하게 사진촬영 요청이 들어왔다. 탁 작가는 예약되어 있던 고객에게 정중히 양해를 구하고 일정을 재조정하면서까지 기아대책 사진촬영을 우선했다. 
“우선순위의 문제인 것 같아요. 예전에 안태환 장로님이 ‘크리스천의 선행은 밥 먹고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고 하셨어요. 그 말씀 그대로에요. 제가 나눔과 기부를 하는 것은 자랑할 게 아니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그의 나눔은 이뿐만이 아니다. 선교사들의 사진을 무료로 찍어주고 있다. 자신이 찍은 사진으로 만든 기도편지를 보고 후원하는 일도 잊지 않는다. 
“제가 선교하러 나가지 못하니까 선교사님들 사진이라도 찍어드리고 싶었어요. 그렇게나마 선교에 일조하고 싶었거든요. 제가 양재 온누리교회 앞에 사진관을 차린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교회와 가까우면 선교사님들이 부담 없이 촬영하러 올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기부와 나눔을 우선하다보니 돈 안 되는 일 천지다. 사진관을 운영하는데 어려움은 없을까?  
“힘들 때도 있었지만 나눔과 봉사를 우선하니까 오히려 일이 더 잘 됐어요. 사진 찍으면서 나누고 봉사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합니다.”
 
나의 꿈은 사회사업가!
 
탁우영 작가의 장래희망은 중학생 때 이후로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사회사업가’가 되는 꿈이다.
“제가 초등학생 때 아버지 사업이 망하고 온 식구가 지하 단칸방에서 살았어요. 아버지, 어머니, 저, 여동생, 치매 걸린 할머니까지 5명이 그 단칸방에서 무려 20년을 살았어요. 돈이 없어서 힘들긴 했지만 우리 가족은 너무 행복했어요. 단칸방의 유일한 장점은 가족들이 얼굴을 맞대고 대화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갈 데라곤 방 한 칸뿐이거든요(웃음).”
지금이야 유쾌하게 말하지만 그 시절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머니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사는 환경이 좋지 않았던 탓에 병까지 생겼어요. 큰 수술을 몇 번이나 했어요. 그때 교회 사람들이 정말 많이 도와주셨어요. 어린 마음에도 너무 고마워서 ‘나중에 크면 그분들이 했던 것처럼 나도 남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제 꿈은 사회기업가가 되는 거였어요.”
성인이 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여유가 생겼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 꿈이 떠올랐다. 가장 먼저 한국에서 열악하게 사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돕고 싶었다. 그런데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 방법을 온누리교회에 와서 찾았다. 
“여호수아공동체 예배에 와서 주보를 봤는데, ‘외국인 근로자 사랑부’라는 부서가 있더라고요. 그걸 보고 바로 온누리교회에 등록했어요. 외국인 근로자들을 승합차에 태워서 체육대회에도 가고, 안산M센터에서 봉사도 했어요. 외국인 근로자들을 섬기러 수원과 평택 등지에도 갔고요.”
7년 동안 의료선교팀 CMN 마노아팀 총무로 섬기기도 했다. 일주일 내내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나눔과 봉사를 우선순위에 뒀더니…
 
탁 작가가 11년이나 다닌 대기업을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을 찾고 있을 때였다. 
“아는 선교사님께 연락이 왔어요. 자기 동생이 일산에서 베이비스튜디오를 하는데 몇 달 정도 봐줄 수 없겠냐고 부탁을 하시더라고요.” 
그날 이후 공교롭게 화보 촬영 등 사진 관련 된 일들이 들어왔다. 
“한번은 청담동에서 웨딩스튜디오를 하는 친구 일을 도왔어요. 화보 촬영하는 지인의 일을 도운 적도 있고요. ‘리터쳐’라고 사진을 보정하고 편집하는 일인데 그걸 하면서 기술도 배웠고요. 본의 아니게 사진 관련 일을 배우고 실습하게 됐어요.” 
탁 작가는 그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새 직장 대신 양재 온누리교회 앞에 사진관을 차렸다. 물론 사진관이 처음부터 잘 된 건 아니었다. 임대료, 전기세, 카드값 등 각종 대금 내는 날이 다가오는 게 무서울 정도로 적자가 심했다. 날이 갈수록 빚이 쌓여 갔다. 
“각종 대금 내는 날은 다가오는데 손님이 없더라고요. 걱정과 스트레스로 잠이 안 올 정도로요. 전기세가 아까워서 조명을 모두 끄고 지냈을 정도였어요. 빚이 눈덩이처럼 쌓이기 시작하니까 정말 막막하더라고요.”
3년 동안 그 깜깜한 터널을 지나야 했다. 그 어려운 시절을 다름 아닌 나눔과 봉사의 힘으로 이겨냈다. 사진관을 교회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무료로 빌려주고, 기아대책에 먼저 연락해서 사진 찍는 봉사를 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주일에 모임 할 장소가 마땅치 않은 성도들에게 사진관을 빌려줬어요. 어차피 비는 공간 의미 있게 쓰고 싶었거든요. 시간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봉사를 시작했어요.”
나눔과 봉사를 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의 입소문과 도움으로 사진관이 잘 되기 시작했다. 
“어떤 분이 그러더라고요. ‘지금 네 처지가 그럴 처지냐? 돈도 안 되는데 쫓아다닐 처지가 아니지 않냐?’고요. 그런데 신기한 건 나눔과 봉사를 우선순위에 뒀더니 제가 걱정하던 일들이 조금씩 풀리더라고요.”  
탁 작가는 지금 딱 한 가지 아쉬운 거 빼고는 너무나 만족스럽다.  
“선교사님들이 제가 운영하는 사진관에 무료로 사진 찍으러 많이 와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선교사님들이 부담스러워하시는 것 같아요. 저에게 폐 끼치는 것 같다면서요. 제가 선교사님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사진 찍는 것 밖에 없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정말 부담 갖지 말고 마음 편히 사진 찍으러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작성자   정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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