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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 들어온 복음이 조선 팔도로!

 2016-07-10      제11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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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가 눈부시게 성장하게 된 통로

 

올 여름 꼭 다녀와야 할 기독교 유적지

  1. 강화도 교회와 한국선교역사기념관
  2. 지리산 왕시루봉 선교사쉼터

 

인천 강화도는 한반도 기독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순교자의 피가 흐르는 거룩한 곳이다. 예수 믿는다고 엄청난 박해와 고난을 당한 아픔이 서린 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화도에 들어온 복음이 지정학적 특성을 살려 평양으로, 한양으로, 조선 팔도로 뻗어 나갔다.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사방으로 날리듯이 강화도에 전파된 복음이 한국 기독교가 눈부시게 성장하게 된 통로를 만들었다. 그 아름답고 의미 있는 땅에 현존하는 기독교 유적지를 소개한다.

/ 이소정 기자 s2868@onnuri.org

 

강화도는 예로부터 유난히 종교의식이 강한 곳이다. 단군신앙부터 불교, 유교, 천주교, 성공회, 개신교까지 수많은 종교들의 뿌리가 깊다. 현존하는 고인돌, 천 년된 정수사, 천주교

순교지 갑곶순교성지, 백년 된 교산교회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주요이동수단이 배였던 시절 강화도를 통해 많은 문물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지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던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외세의 침략을 가장 먼저 당한 아픔의 땅이기도 하다. 당시 강화도는 수도(한양)와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인천 제물포항으로 들어온 선교사가 지정학적 특성을 살리기 위하여 강화지역 전도에 열을 올렸다. 그렇게 강화지역에 전해진 복음이 전국으로 뻗어나갔다. 신미박해, 신유박해, 병인박해 등 수많은 장애가 있었지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현재 강화도에는 교회가 179개나 있고, 인구의 25%이상이 기독교인이다.

 

지정학적 특성 살린 강화지역 선교

 

강화도 지역의 기독교는 감리교에 의해 시작되었다. 179개 교회 중에 120개가 감리교회다. 강화지역 기독교인 중에 감리교 소속이 77.6%나 된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언더우드와 함께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한국 감리교회 선교를 개척한 미감리회 소속 선교사였다. 1893년 존스 선교사가 인천 책임자로 와서 독립계삭회가 구성되면서 선교확장의 열망이 강화지역으로 이어졌다. 당시 강화지역에 대한 감리교의 선교는 제물포교회(현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존스 목사와 인천의 노병일, 김기범, 이명숙, 백헬렌 등 한국인 전도자들이 강화선교에 열성을 쏟았다. 강화도는 우리나라 수도로 가는 관문이며, 북쪽으로는 황해도 해주 방면, 남으로는 덕적도를 경유해 충청도 당진까지 이어지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강화의 복음화는 황해도 전도를 위한 전진기지 확보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했다.

당시 한국 선교를 관리하고 있던 스크랜턴은 1892년 12월 21일에 본국으로 보낸 편지에서 존스가 이미 1892년 말에 강화전도여행을 시도한 것과 더불어 강화지역 선교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제물포와) 이웃해 있는 섬인 강화에는 7만 명 주민이 있는데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충동하고 있습니다. 강화를 얻게만 된다면 우리에겐 값진 보화가 될 것입니다. 사실 발판은 이미 얻어 놓았습니다.”

강화의 최초의 교회는 1893년 세워진 교항교회(현 강화교산교회)다. 양사면 시루미 마을 출신으로 제물포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이승환이 존스 목사를 만나면서 복음이 들어오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존스는 이승환의 모친에게 선상에서 세례를 주고 인천에서 활동하던 전도인 이명숙과 전도부인 백헬렌을 시루미로 파송해 이승환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강화지역의 첫 신앙공동체가 탄생했다. 4~5명으로 시작한 예배는 불과 1년 만에 80명으로 부흥했다. 천민출신이 많은 시루미 마을에서 좀 떨어진 다리목에 살던 양반 김상임이 존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으면서 마을 전체가 개종했다. 김상임이 1894년 자기 집 앞마당에 예배당을 마련하자 시루미 마을교인들이 옮겨왔고 다리목(교항, 橋項)과 시루미(증산, 甑山)의 한자를 따서 교산교회라 이름 지었다.

홍의교회는 교산교회 설립 3년 후인 1896년에 설립되었다. 이 마을 서당훈장이던 박능일이 교산교회의 김상임을 만나고 돌아와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되었다. 서당학생 20여 명, 종순일, 권신일과 함께 자기 집에서 홍의교회를 설립했다. 강화의 두 번째 교회가 탄생했다. 1900년에는 홍의교회에 출석하던 주선일, 박성일, 허진일, 김봉일 등 몇몇 교인이 강화읍 천교하(현 강화읍 신문리)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오늘날 강화중앙교회의 모체(잠두교회)가 되었다. 강화지역 복음 전파 8년 만인 1900년에 수도 강화읍에 드디어 교회가 세워졌다. 1892년 존스 목사가 입성하려다 실패했던 강화읍에 토착교인에 의하여 십자가가 세워졌고, 강화도 전 지역 복음화의 터전을 굳건히 다졌다. 강화복음화의 중심역할을 했으며 한국교회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대표적인 강화도 기독교 유적지

 

교산교회(구)

▲ 강화교산교회(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서사길 296).

1893년 세워진 강화교산교회는 강화 최초로 세워진 강화의 어머니교회다. 미 감리회 존스 선교사가 강화 서사(지금의 교산리) 앞 바다 배 위에서 이승환의 어머니에게 세례를 준 것이 강화에 복음의 겨자씨였다. 그때 어머니와 함께 세례를 받은 이승환의 집에서 4~5명이 예배를 드렸고 교인은 50여 명으로 급속히 늘어났다. 교회 주차장 앞에는 선상세례를 재현한 동상과 모형 배가 있다.

 

홍의교회

▲ 홍의교회(인천광역시 강화군 송해면 홍의길 124).

홍의교회는 박능일이 1896년 선교사의 도움 없이 예배당을 건축했다. 1년 만에 성도가 80명을 넘어 교회 부흥의 열정과 가능성을 보여줬다. 특히 홍의교회 교인들은 그들만의 끈끈한 신앙공동체 의식을 표현했는데 그것은 검은 옷 입기와 개명 운동이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의미로 교인들은 흰옷에 검은 물을 들여 옷을 입고 다녔다. ‘믿음 안에서 하나’ 라는 뜻으로 교인들은 이름의 돌림자를 한 일(一)자로 개명하기도 했다.

 

강화중앙교회

▲ 강화중앙교회(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청하동길 36).

강화중앙교회는 주선일, 박성일 등이 강화읍 천교하의 여섯 칸 반짜리 초가집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설립되었다. 이후 존스 선교사의 협조로 기와집 25칸, 초가집 16칸을 구입하여 현 위치로 옮겨 강화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예배당을 마련하게 됐다. 누에머리를 닮은 잠두 언덕배기에 위치해 설립 초기에는 잠두교회라고도 불렀다. 교회 본당 입구에 위치한 교회 역사관에서는 초가로 지은 초기 예배당의 모습과 100년 이상을 지내온 교회의 역사 유산을 엿볼 수 있다.

 

인천 한국선교역사기념관

▲ 인천 한국선교역사기념관(인천광역시 부평구 장제로 393).

2008년 12월에 개관한 한국선교역사기념관은 기독교 문화와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1층에서는 천지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실제 역사 속에 실현된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한다. 2층에는 한국 기독교 유래를 조망하고 일제강점기의 기독교 민족운동을 살펴 볼 수 있다. 특히 1907년 ‘ 평양 대부흥 운동’ 을 심도있게 다룬다. 3층은 6.25 한국전쟁 당시 공산당의 기독교 박해 때 국민들에게 희망을 준 기독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작성자   이소정 기자 s2868@onnu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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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에 들어온 복음이 조선 팔도로! 한국 기독교가 눈부시게 성장하게 된 통로 올 여름 꼭 다녀와야 할 기독교 유적지 강화도 교회와 한국선교역사기념관 지리산 왕시루봉 선교사쉼터 인천 강화도는 한반도 기독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순교자의 피가 흐르는 거룩한 곳이다. 예수 믿는다고 엄청난 박해와 고난을 당한 아픔이 서린 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화도에 들어온 복음이 지정학적 특성을 살려 평양으로, 한양으로, 조선 팔도로 뻗어 나갔다.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사방으로 날리듯이 강화도에 전파된 복음이 한국 기독교가 눈부시게 성장하게 된 통로를 만들었다. 그 아름답고 의미 있는 땅에 현존하는 기독교 유적지를 소개한다. / 이소정 기자 s2868@onnuri.org 강화도는 예로부터 유난히 종교의식이 강한 곳이다. 단군신앙부터 불교, 유교, 천주교, 성공회, 개신교까지 수많은 종교들의 뿌리가 깊다. 현존하는 고인돌, 천 년된 정수사, 천주교 순교지 갑곶순교성지, 백년 된 교산교회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주요이동수단이 배였던 시절 강화도를 통해 많은 문물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지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던 지역이었다. 이 때문에 외세의 침략을 가장 먼저 당한 아픔의 땅이기도 하다. 당시 강화도는 수도(한양)와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인천 제물포항으로 들어온 선교사가 지정학적 특성을 살리기 위하여 강화지역 전도에 열을 올렸다. 그렇게 강화지역에 전해진 복음이 전국으로 뻗어나갔다. 신미박해, 신유박해, 병인박해 등 수많은 장애가 있었지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현재 강화도에는 교회가 179개나 있고, 인구의 25%이상이 기독교인이다. 지정학적 특성 살린 강화지역 선교 강화도 지역의 기독교는 감리교에 의해 시작되었다. 179개 교회 중에 120개가 감리교회다. 강화지역 기독교인 중에 감리교 소속이 77.6%나 된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언더우드와 함께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한국 감리교회 선교를 개척한 미감리회 소속 선교사였다. 1893년 존스 선교사가 인천 책임자로 와서 독립계삭회가 구성되면서 선교확장의 열망이 강화지역으로 이어졌다. 당시 강화지역에 대한 감리교의 선교는 제물포교회(현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존스 목사와 인천의 노병일, 김기범, 이명숙, 백헬렌 등 한국인 전도자들이 강화선교에 열성을 쏟았다. 강화도는 우리나라 수도로 가는 관문이며, 북쪽으로는 황해도 해주 방면, 남으로는 덕적도를 경유해 충청도 당진까지 이어지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강화의 복음화는 황해도 전도를 위한 전진기지 확보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했다. 당시 한국 선교를 관리하고 있던 스크랜턴은 1892년 12월 21일에 본국으로 보낸 편지에서 존스가 이미 1892년 말에 강화전도여행을 시도한 것과 더불어 강화지역 선교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제물포와) 이웃해 있는 섬인 강화에는 7만 명 주민이 있는데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충동하고 있습니다. 강화를 얻게만 된다면 우리에겐 값진 보화가 될 것입니다. 사실 발판은 이미 얻어 놓았습니다.” 강화의 최초의 교회는 1893년 세워진 교항교회(현 강화교산교회)다. 양사면 시루미 마을 출신으로 제물포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이승환이 존스 목사를 만나면서 복음이 들어오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존스는 이승환의 모친에게 선상에서 세례를 주고 인천에서 활동하던 전도인 이명숙과 전도부인 백헬렌을 시루미로 파송해 이승환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강화지역의 첫 신앙공동체가 탄생했다. 4~5명으로 시작한 예배는 불과 1년 만에 80명으로 부흥했다. 천민출신이 많은 시루미 마을에서 좀 떨어진 다리목에 살던 양반 김상임이 존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으면서 마을 전체가 개종했다. 김상임이 1894년 자기 집 앞마당에 예배당을 마련하자 시루미 마을교인들이 옮겨왔고 다리목(교항, 橋項)과 시루미(증산, 甑山)의 한자를 따서 교산교회라 이름 지었다. 홍의교회는 교산교회 설립 3년 후인 1896년에 설립되었다. 이 마을 서당훈장이던 박능일이 교산교회의 김상임을 만나고 돌아와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되었다. 서당학생 20여 명, 종순일, 권신일과 함께 자기 집에서 홍의교회를 설립했다. 강화의 두 번째 교회가 탄생했다. 1900년에는 홍의교회에 출석하던 주선일, 박성일, 허진일, 김봉일 등 몇몇 교인이 강화읍 천교하(현 강화읍 신문리)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오늘날 강화중앙교회의 모체(잠두교회)가 되었다. 강화지역 복음 전파 8년 만인 1900년에 수도 강화읍에 드디어 교회가 세워졌다. 1892년 존스 목사가 입성하려다 실패했던 강화읍에 토착교인에 의하여 십자가가 세워졌고, 강화도 전 지역 복음화의 터전을 굳건히 다졌다. 강화복음화의 중심역할을 했으며 한국교회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대표적인 강화도 기독교 유적지 ▲ 강화교산교회(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서사길 296). 1893년 세워진 강화교산교회는 강화 최초로 세워진 강화의 어머니교회다. 미 감리회 존스 선교사가 강화 서사(지금의 교산리) 앞 바다 배 위에서 이승환의 어머니에게 세례를 준 것이 강화에 복음의 겨자씨였다. 그때 어머니와 함께 세례를 받은 이승환의 집에서 4~5명이 예배를 드렸고 교인은 50여 명으로 급속히 늘어났다. 교회 주차장 앞에는 선상세례를 재현한 동상과 모형 배가 있다. ▲ 홍의교회(인천광역시 강화군 송해면 홍의길 124). 홍의교회는 박능일이 1896년 선교사의 도움 없이 예배당을 건축했다. 1년 만에 성도가 80명을 넘어 교회 부흥의 열정과 가능성을 보여줬다. 특히 홍의교회 교인들은 그들만의 끈끈한 신앙공동체 의식을 표현했는데 그것은 검은 옷 입기와 개명 운동이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의미로 교인들은 흰옷에 검은 물을 들여 옷을 입고 다녔다. ‘믿음 안에서 하나’ 라는 뜻으로 교인들은 이름의 돌림자를 한 일(一)자로 개명하기도 했다. ▲ 강화중앙교회(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청하동길 36). 강화중앙교회는 주선일, 박성일 등이 강화읍 천교하의 여섯 칸 반짜리 초가집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설립되었다. 이후 존스 선교사의 협조로 기와집 25칸, 초가집 16칸을 구입하여 현 위치로 옮겨 강화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예배당을 마련하게 됐다. 누에머리를 닮은 잠두 언덕배기에 위치해 설립 초기에는 잠두교회라고도 불렀다. 교회 본당 입구에 위치한 교회 역사관에서는 초가로 지은 초기 예배당의 모습과 100년 이상을 지내온 교회의 역사 유산을 엿볼 수 있다. ▲ 인천 한국선교역사기념관(인천광역시 부평구 장제로 393). 2008년 12월에 개관한 한국선교역사기념관은 기독교 문화와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1층에서는 천지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실제 역사 속에 실현된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한다. 2층에는 한국 기독교 유래를 조망하고 일제강점기의 기독교 민족운동을 살펴 볼 수 있다. 특히 1907년 ‘ 평양 대부흥 운동’ 을 심도있게 다룬다. 3층은 6.25 한국전쟁 당시 공산당의 기독교 박해 때 국민들에게 희망을 준 기독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2016-07-10  제110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