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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7 고난속의 승리-프랜시스 챈 강의7 고난속의 승리 디모데후서 3장 12절 프랜시스 챈 강력한 말씀을 선포하고 사람들은 아멘으로 열광적으로 답변합니다. 그러나 변화는 없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제 마음을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왜냐면 저는 자꾸 벗어나는 자신을 보이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편안한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 질문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재물과 나를 동시에 따를 수 없다고 말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핍박을 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입니다. 도망갈 방법 없습니다. 하나님 정말 이 방법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일까요. 예수님도 그러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아버지 이것 외에 다른 방법 없겠습니까? 그러나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하나님 뜻대로 추구하면 핍박을 받는 것이 맞습니까. 그러면 아버지 뜻대로 되길 바랍니다. 당해야할 고난을 당하겠습니다. 주님을 닮고 싶습니다 부활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고난 가운데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고난당하신 것처럼 자신도 고난을 받고 싶다고 이렇게 고백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십시오. 지금 핍박가운데 있지 않으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는지 어제 밤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우리들이 예배드리는 것을 보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면서 매력을 느끼고 끌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런 것들을 본다고 해도 모두가 매력을 느끼고 끌릴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부하거나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그들이 미워하는 것은 교회의 위선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았기 때문에 미움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싫어합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이 하나라는 것에 시험받습니다. 주님이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진노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마땅히 여겨야 합니다. 그들이 거부했다고 해서 실패가 아닙니다. 거절당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바로 실패입니다. 어떻게 해야 주변에 믿지않는 형제자매가 복음을 믿을 수 있을까요. 그는 계속 거부합니다. 제가 뭘 잘못하는 것입니까. 제가 부족해서입니까, 전문 사역자를 데려와야 합니까, 제게 은사가 없나봅니다. 그러나 복음은 복음이고 있는 그대로를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복음 이외에 자꾸 어떤 것을 추가하면 진짜 복음의 능력이 상실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약함 가운데 나아갈 때 엄청난 강함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심히 두려워하며 떨며 복음을 전하는 자리에 섰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 하나라고 말입니다. 내가 복음 위에 인간적 지식이나 지혜를 더한다면 십자가는 더 이상 능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겸손하고 낮은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면 그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있는 분 있으십니까? 좋습니다. 그런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 외쳐야합니다. 복음을 있는 그대로 최선을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믿겠습니다. 복음을 들으면 저를 미워하고 핍박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 이 방법을 저는 택하겠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대변인이 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주님은 때때로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시지만 매사에 부흥을 일으킨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부흥보다 반대의 역사를 약속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박해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에게도 그렇게 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말세가 오면 사람들은 교리에서 벗어날 것이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면 너로부터 도망갈 것이라고 말입니다. 자신들이 듣고 싶은 복음을 전하는 거짓교사를 찾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들을 심판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받고 아모스 선지자는 전했습니다. 아모스의 용기에 저는 감동했습니다. 제가 은혜를 받은 것은 아모스의 반응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전 예언자 아닙니다. 저는 예언자 될 사람도 아닙니다. 제 아버지도 예언자가 아닙니다. 저는 양을 치고 있을 뿐입니다. 뽕나무 가지를 치고 있을 뿐 저는 아무도 아닙니다. 근데 하나님이 어느 날 나를 위해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전능하신 그분이 나를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할 것입니다. 하나님 위해 일하는 것만으로도 큰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담대한 태도가 있습니까? 여러분, 저 역시 선지자가 될 사람이 아닌데도 되었습니다. 저는 인기있는 학생도 아니었고 공부도 잘 못했습니다. 저는 그냥 재능이 없는 한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왜 여기 서있습니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라는 대로 저는 말할 뿐입니다. 어차피 이 자리는 제가 있어야할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대변인이 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길 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은 사도입니다. 정말 모든 사람들이 거절하여도 “영광입니다”라고 말하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복음 외에 덧붙이는 것이 없도록 하십시오. 약함과 두려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절대제자, 바로 우리가 해야할 일은 가서 다른 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내 삶 가운데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당연히 두려울 것입니다. 좋은 것입니다. 그 두려움 떨림을 갖고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대변인이 되었다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십시오. 거절당하면 더 큰 영광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왜냐하면 예언자들도 거절당했기 때문입니다. 그 반열에 섰다면 영광일 것입니다. 세상으로 나가십시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십시오. 그들을 위해 계속해서 기도하십시오. / 정리 조유진 기자 ujin@onnuri.org
2013-10-15 제970호
강의6 사도로 부르심-데이비드 플랫 강의6 사도로 부르심 사도행전 11장 19~30 데이비드 플랫 안디옥교회를 말씀을 통해 접하면서 하늘의 위로가 임하길 축복합니다. 쿠바에 있는 교회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쿠바는 공산국입니다. 그 나라에 가면 교회를 쉽게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교인들을 만나기 전까지 쿠바에서는 교회를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쿠바 이곳저곳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두셨습니다. 가정집에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든지 그 누구보다 열심히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숫자는 배가운동하고 제자를 낳고 있습니다. 쿠바에서 한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어떤 역경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공산당원들 직원들이 와서 심문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어르신(목사님)이 돌을 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책상위에 얹혀놓고 말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말씀을 증거하는 것을 막는다면 이 돌이 하나님 말씀을 증거할겁니다. 공산당원들은 그를 미쳤다고 생각하고 돌려보냈습니다. 그 목사님이 지금도 제자를 낳고 있습니다. 그가 만든 한 교회가 60개의 교회를 낳았습니다. 그 중 하나를 가보니 그 교회 또한 20여 개의 교회를 또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어떻게 교회를 만들고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저희 교회는 제자를 만드는 것에만 전념합니다. 그게 다입니까? 창조적인 다른 방법 없습니까? 저희 교회는 그저 단순하게 정말 제자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제가 고향으로 돌아와서 목회현장의 문화를 봤습니다. 교회가 더 커지기 위해서 더 낳기 위해서 여러 수단들을 나열해보았습니다. 때로는 교회를 짓고 새로 개척하는 무브먼트에 돈을 투자하거나 지교회들을(캠퍼스교회) 세웁니다. 디비디(DVD)를 담아서 목회하거나 합니다. 이런 모든 방법들이 틀렸다가 아닙니다. 만약 어떠한 미디어를 통해 설교를 잔파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부를 주지 않으셔서 캠퍼스를 세울 수 없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다른 이 세상 많은 교회가 경험하듯이 가난속에 있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있고, 성령을 붙잡고,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라면 교회가 배가운동하는 충분한 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주신 지상명령을 알고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안디옥교회는 중요합니다. 많은 선교사를 보냈고 방방곳곳에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이 교회를 개척했는지 보셨습니까? 스데반 선교사가 핍박받은 후 흩어진 제자들이 교회를 세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흩어졌는지 보면, 사도행전 7장 후반~ 8장 1절 후반부에 큰 핍박이 일어나 유대와 사마리아에 뿔뿔이 흩어졌다고 나와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를 세운 이들은 누굽니까? 사도들입니까? 사도들은 모두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고 이름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흩어져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사도라는 단어를 잘 인식하길 바랍니다. 요즘 교회를 보면 사도라는 단어를 잘못 인식하는 곳이 많습니다. 나도 사도다, 그 의미는 큰 힘을 군림할 수 있는 직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도라는 의미는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보내심을 받은 우리들은 모두 사도라고 칭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배가운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디옥 교회 세운 사람들의 이름을 성경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날 때 그들은 지식도 없고 신학생도 아니고 교회를 어떻게 세우는지 훈련을 받은 사람도 아닌 보통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위대한 교회를 세운 장본인입니다. 그냥 보통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십시오. 보통사람들이 되십시오. 놀라운 하나님의 파워를 부여받은 보통사람들이 되십시오. 비범한 일을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보통사람들이 비범한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받아 제자를 삼는 꿈을 꾸시길 바랍니다. 모두가 성경의 비밀을 믿는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교회가 배가운동하는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정말 큰 은혜를 받는 특별한 사람들만을 위한 운동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사도행전에 나오는 모든 교회들은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구축되고 시작되었습니다. 이 땅에도 그런 역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제가 경고하고 싶습니다.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 11장을 보면서 여러분이 지상명령 수행하기 위해 당연히 받아드려야 할 것은 주께서 주신 고난입니다. 스데반 선교사의 일로 핍박 받아서 흩어진 사람들이 교회를 세웠습니다. 여러분 스데반 선교사가 돌에 맞아 찢겨죽은 후에야 사람들은 흩어졌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사도행전 교회는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복음이 증거된다면 고난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전파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니라 복음을 붙잡으면 알게 됩니다. 복음의 핵심은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자가 십자가 달려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모두의 죄가 사함을 받았습니다. 고난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고난을 통해 온 땅에 전해질 줄로 믿습니다. 세상과 똑같은 것을 추구하고 목적을 갖는다면 세상은 절대로 우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빼앗김을 당할 때에도 너무 귀하고 소중한 것을 기꺼이 내어 놓으며 예수그리스도를 찬양한다고 한다면 여러분 내면의 세상은 놀라고 그들도 변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라갈 때에 어려움은 닥치기 마련입니다. 그런 고통을 통과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그 때 세상에 비치는 우리 모습이 복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나와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더 많은 것을 추구하고 더 성공하길 원하고 누리길 원하면 정말 우리의 마음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국한되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고난이 닥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주신 미션은 멈출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도행전 8장의 그림이 좋습니다. 스데반 선교사가 돌로 죽임을 당할 때 사단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드디어 내가 승리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 후에 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해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그 증인이 되었습니다. 복음은 더 크게 전파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진리가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끝이라고 사단은 생각했겠지만, 우리 모두가 그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계속해서 교회는 번져나갔습니다. 결국에는 안디옥에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성령님은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안일함을 주는 모든 물질을 내어버리고 생명자체도 버릴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도 복음은 전해지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순교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집니다. 어쩔 수 없이 이 사명을 위해서는 슬픔과 아픔을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승리는 이미 우리 것입니다. 이 복음은 지구 끝까지 전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 일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부여받아 보내심을 받은 우리를 통해 이루실 것입니다. 저 또한 그 일부가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길 축복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 사명에 함께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 정리 조유진 기자 ujin@onnuri.org
부흥집회1 나를 따르라 – 데이비드 플랫 목사 데이비드 플랫 목사 마태복음 7:21~23 오늘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은 ‘크리스천’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때로는 기도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제가 크리스천이 되기를 원합니다’ 고백하지만 다음 날 보면 그의 삶이 세상 사람들의 삶과 다를 바 없습니다. 크리스천인 남편들도 아내 외에 다른 여자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좇아 일합니다. 여자들도 크리스천이라고 고백하면서 사실은 외모를 주님삼아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7장은 어떻게 보면 성경에서 우리 마음을 가장 불편하게 하는 구절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구절을 읽을 때마다 목회자로서 마음이 불편합니다. 성도님들 가운데에서도 상당수가 어쩌면 심판의 때에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정말로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당신은 진정한 크리스천입니까? 그저 그런 크리스천이 아닌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크리스천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에 국한하여 볼 때 당신은 제자이십니까? 우리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정말 크리스천인가? 정말로 예수를 따르고 있는가?’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습니다. 마태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여섯 번 나옵니다. 첫째는 마태복음 4장 18~22절입니다. 19절에 ‘와서 나를 따르라’고 나옵니다. 둘째는 마태복음 8장 18~22절입니다. 예수를 따르려는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22절 마지막 부분에 ‘나를 따르라’고 나옵니다. 셋째는 마태복음 9장 9절입니다.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가 자기 자신을 부르신 예수님을 묘사하는 장면입니다. 넷째는 마태복음 10장 34절입니다. 다섯 번째는 마태복음 16장에 나옵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내용과 비슷합니다. 16장 24~26절입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마태복음 19장 16~30절입니다. 여섯 가지의 성경구절에는 네 가지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의미 네 가지 중 첫 번째는 ‘래디컬(radical;절대적, 급변적, 극단적)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상해보십시오. 수많은 무리와 함께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모든 사람들을 다 지나쳐 세리 마태에게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업신여기고 고통을 주던 그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거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먼저 예수님을 찾아간 이가 없습니다.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은 예수님을 버리고 다 다른 길로 갔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크리스천이 아닌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왜 여러분은 크리스천이고 그분들은 아닙니까. 여러분이 그들보다 낫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자비 때문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래디컬한 희생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희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8장에도 이런 희생을 감안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십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온 청년에게 물은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전의 삶을 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에는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큰일입니다. 이 사실 잊고서도 크리스천으로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과 맞닥뜨리게 된다면 우리의 죄는 씻기고 그의 영으로 가득차며 우리는 완전하게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세상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예수를 만났다는 사람들이 변화가 없습니다. 성공이라는 단어의 기준이 세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절대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래디컬한 희생을 요구합니다. 세 번째는 래디컬한 사명을 좇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제자를 낳는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사들만의 사명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는 이 사명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크리스천 중에는 1년, 10,년, 50년 믿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한 명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려고 우리가 크리스천이 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제자를 낳고 낳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자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무엇을 시키시든지 순종해야 합니다. 독특한 크리스천들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정한 크리스천입니다. 네 번째는 래디컬한 하나님의 상급을 사모하며 사는 인생입니다. 모든 나라가 주님의 보좌 앞에 모여 한 목소리로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상상초월할 정도로 기쁠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희생할 수 있었는지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이해될 것입니다. / 정리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2013-10-13 제970호
강의3 주권 – 데이비드 플랫 목사 데이비드 플랫 목사 이곳에 계신 많은 사람 중에 지금은 웃고 있지만 사실은 어려운 일을 겪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가정의 아픔, 육체의 질병, 그 무엇이든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자녀들과의 대화 단절, 직장 안에서의 갈등 안에 있을 수도 있고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오는 핍박을 당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은 각기 다른 문제들을 붙잡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저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믿음만 붙잡으십시오. 조금만 더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자녀를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진리와는 다릅니다. 교계 안팎에 신학적인 여러 가지 논지가 있습니다. ‘번영신학’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조금만 더 주님을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평탄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번영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고는 그들 모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해 자기 생명을 잃는 사람은 구하게 될 것이다”(눅 9:23~24). 여러분, 우리에게 번영을 주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냥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길을 가고 있는데 한 사람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겠습니다’”(눅 9:57).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려거든 머리를 둘 곳도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먹고 자고 쉴 곳을 주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이 번영신학이 성도들의 마음을 꽉 잡고 있는 것을 볼 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에 번영신학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소망을 갖되 소망이 진리 위에 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소망을 갖길 바랍니다. 그런 소망을 갖게 되면 예수님의 절대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번영신학의 열 가지 문제점에 대해 나열하겠습니다. 첫 번째, 우리가 갖고 있는 물질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준다는 것입니다. 물질과 부를 비성경적인 것으로 보게 합니다. 돈을 많이 갖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신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좋은 집에서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건강한 사람 중에서도 하나님을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건강하고 돈이 많은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면 예수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잘 곳도 없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총애를 받지 못한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저는 많은 나라들을 방문했습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만지고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적인 축복의 목적에 대해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축복하셨는지 목적을 흐리게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은 우리가 안락하게 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인 축복은 남에게 베풀고 살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다른 사람들은 편안하게 하고 여러분은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공평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면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이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주어 서로 공평하게 될 것입니다”(고후 8:13~14). 우리 모두가 조심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물질적인 부가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 망각하게 합니다. 건강한 것, 돈이 많은 것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물론 이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상당한 장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젊은 청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가진 것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그는 시무룩해져서 슬픈 표정을 짓고 떠나갔습니다. 그에게 재물은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 장애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의 경고를 들으십시오.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고 만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한다”(딤전 6:9). 성경은 부를 사랑하는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지옥에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부를 갖는 것을 즐겨하고 사랑한다면 그것을 원하는 그 마음이 여러분의 삶을 멸망으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더 많이 가지라고 더 많이 오르라고 하지만 복음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그런데 번영신학은 우리가 갖고 있는 부에 대한 착각을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부를 사랑하는 마음이 악하다고 말합니다. 네 번째는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변하는 부에 대한 개념의 변화를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번영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구약을 많이 인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많은 땅과 자녀를 약속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한 민족을 택해 축복을 주셨다면 신약에서는 모든 민족에게 축복을 주셨습니다. 신약에서는 성전을 지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우리가 살고 있는 몸 자체가 성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약의 한 구절이라도 순종하면 부를 주겠다고 쓰여 있지 않습니다. 번영신학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왔던 하나님의 변화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다섯 번째는 내가 가진 것을 다 나누어주는 것을 잊고 많은 것으로 나를 채우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나를 위해서만 쓰려 합니다. 번영신학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번영신학은 모든 사람을 다 덮어놓고 무시하고 살아가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섯 번째 문제는 내가 가진 육체가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죄를 짓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것을 좋아합니다. 저도 좋은 것이 좋습니다. 번영신학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주님이 축복하셔서 더 주신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는데 번영신학은 절대 이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일곱 번째는 시간이 지나면 없어질 것에 대해 전부를 걸고 투자하게 만듭니다. 성경은 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부를 이 땅에 축적하지 마십시오. 번영신학은 썩어 없어질 것에 투자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학벌을 잘 취득하고 좋은 배경의 자리에 가길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이 모든 것들은 불에 타버릴 것입니다. 500년 뒤에 이런 것들이 가치있겠습니까? 번영신학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축복을 그르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여덟 번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선물 주시는 분 위에 두는 것입니다. 선물을 주시는 이보다 선물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은 좋은데 하나님 자체에서는 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는 이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들을 우상 삼아 숭배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가진다해도 예수님을 놓친다면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번영신학은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홉 번째는 하나님 아버지를 수단으로 하락시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준다고 말하며 부를 취하고 건강해지려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합니까. 열심히 기도했는데 사랑하는 이가 낫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 얼마나 실망하겠습니까. 이것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이런 분들에게 기도는 어떻게 해서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수단입니다. 번영신학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이용하려고만 합니다. 마지막 열 번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허락하신 슬픔과 아픔과 질병의 목적을 희석시킵니다. 아픔과 어려움이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일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번영신학은 아픔과 핍박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욥기에 보면 사탄이 하나님께 다가와서 욥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 멋대로 말합니다. 그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었기에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여러 일들이 일어납니다. 인류 역사상 욥기 1장보다 더 참혹한 일들이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자녀들이 죽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립니다. 그런데도 성경이 말하길 그는 하나님을 경배했다고 합니다. 그때 또 다른 일들이 일어납니다. 건강을 잃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도 하나님을 대적하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을 경험하면서도 욥은 하나님을 욕한 적이 없습니다. 길고긴 40장에 걸친 아픔이 그에게 벌어집니다. 이 일들은 욥이 잘못해서 벌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다가와 죄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번영신학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욥기 42장을 보십시오. “그러자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며 말했습니다. ‘나는 주께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고 계획하신 일은 무엇이든 이루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고 주님의 뜻을 가린 자가 누구입니까? 내가 알지도 못하는 일들을 말하고 너무 기이해서 알 수 없는 일들을 내가 내뱉었습니다. 간구하오니 들어주십시오. 내가 말하겠습니다. 내가 여쭙겠으니 대답해 주십시오. 내가 주에 대해 지금까지 내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 내 눈으로 주를 보게 됐습니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한탄하며 티끌과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합니다”(욥 42:1~6). 하나님은 절대 주권을 가진 분이시며 우리의 아픔 가운데 함께하는 분이십니다. 지금 여기에 오신 여러분들 가운데에서도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러분들의 인생을 만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참된 복음으로 위로하고 싶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다면 잘 들으십시오.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시련과 어려움은 언젠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할 때 기억해야 할 네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산다는 자체가 어려움을 내포합니다. 그러나 첫 번째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욥기 초반부에 보면 사탄이 모든 것을 자기 맘대로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욥기 전체에 일어났던 모든 일은 하나님의 허락 안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 인생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관 아래 일어나는 일인 것입니다. 사탄이 절대 주관할 수 없습니다. 정말 좋은 소식 아닙니까? 오직 한분만이 우리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시험을 당할 때 절대로 하나님의 주권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목적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을 조금 더 견고하고 완벽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키우기 위해 주시는 아픔인 것입니다. 시련을 겪어야만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믿기 원하십니다. 때로 시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인생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세 번째는 하나님의 완벽한 지혜를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욥은 그 아픔을 경험했지만 사탄과 하나님의 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여러분, 욥기를 천국의 눈으로 보면 어떠할까요. 십만 명의 천사들이 욥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욥기 땅에 주저앉더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것을 보았을 때 하늘의 천사들은 기뻐 찬양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고통이 욥처럼 천국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단위를 넘어서 천국의 시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베푸시는 사랑을 의지하십시오. 정말 좋은 소식은 우리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십니다. 고통의 터널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자비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언젠가는 죄와 아픔이 없는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 쓰여 있듯이 언젠가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참된 복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목숨을 바쳐 따를 수 있는 복음입니다. / 정리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강의2 복음의 능력 – 데이비드 플랫 목사 데이비드 플랫 목사(브룩힐즈교회 담임)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당신이 홀로 이 큰 예배당에 있습니다. 그리고 딱 한분이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당신은 예수님 옆에 앉아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무릎을 맞대고 앉아있습니다. 아무도 없고 당신과 예수님 단둘이라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겠습니까? 우리의 문제, 직장의 어려움, 그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겠습니까.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저와 아내는 수년 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자녀를 허락해달라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한 달 시간이 지나면서 왜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시지 않는가 고민하게 됐습니다. 어느 날 문득 하나님께서 2년이라는 시간을 말씀하신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낳지 못한다면 입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발견한 것이 입양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답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저의 첫째 아들을 카자흐스탄에서 데려오게 되었습니다. 정말 기뻤습니다. 그런데 2주가 지나고 제 아내가 임신을 했습니다. 수년 동안 임신하지 못했는데 입양하고 나서 2주 뒤에 바로 아이가 생긴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임신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는 기대하지 않으려고 작정했습니다. 임신한지 9개월이 지난 어느 날 밤, 아내가 말했습니다. “이제 9개월 됐는데 병원에 가긴 가야 할 것 같아. 그런데 너무 기대하지마.” 그때는 겨울이었고 굉장히 추웠습니다. 아내가 출산을 해야 하는데 방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이었습니다. 왠지 이 상황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습니까? 결국 아내는 정말 작은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몇 시간이 흐른 후, 간호사가 제게 와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저와 제 아내가 드디어 서로 눈을 바라보며 이제는 기대해도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내가 출산했을 때 제가 아이를 받았습니다. 방에 들어가 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썼습니다. 제 눈에 제 아들의 머리가 보였습니다.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저는 아이를 아내의 무릎에 앉혔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놀라우신 분이셨습니다. 그 경험 이후, 또 셋째를 갖고 싶었습니다. 1년, 2년, 3년이 지났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입양을 결정했습니다. 이번에는 중국에서 딸을 안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3개월 후, 제 아내가 다시 임신을 하게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저희 가정에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상황을 만드셨는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 위대한 분은 아버지가 없는 분에게 아버지가 되게 하십니다. 그분은 제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카자흐스탄, 중국에 가게 하시고 부모가 없는 아이를 데려와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미국에서도 입양에 대한 오해가 많이 있습니다. 카자흐스탄에서 온 아들을 볼 때 사람들은 저의 자녀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게 진짜 아들도 있냐고 묻습니다. 오직 육체에서 난 자녀만이 진짜 자녀라고 생각하는 세계관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4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모두가 제 자녀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그 자녀들의 부모들이 자녀가 입양된 사실을 알고 있냐고 묻습니다. 저는 당연히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제 아내와 제가 아이들의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세계관에서만 살고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됨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자녀로 입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가 차자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습니다. 이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구속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아들의 신분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이 아들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속에 보내셔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더 이상 종이 아니고 아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들이면 또한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상속자입니다”(갈 4:4~7). 하나님은 우리의 신분을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님이 자녀삼기 전에 우리가 종노릇하고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의 사회적 위치 때문에 그들이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좋은 차, 좋은 집을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죄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에서도 종노릇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교회들의 문제도 그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으면 인정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제대로 지키기만 하면 주님의 보좌로 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일 성수를 잘하고 새벽기도를 열심히 한다면, 성경을 매일 읽는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그런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일을 해야지만 괜찮은 삶, 만족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추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이것은 죄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악 가운데 하나님을 뿌리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분리된 삶을 살고 있는 이 상황이야말로 영적으로 고아된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고아됨과 육체적으로 고아됨의 한 가지 큰 차이점은 육체적으로 고아된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 큰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부모를 잃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도망을 간 것입니다. 어느 날 제 아들이 아내의 품에 안겨 엉엉 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한 어머니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은 그 어머니를 위해 기도해주길 원했습니다. 중국에서 데려온 제 딸은 태어나자마자 상자에 담겨 버림받았습니다. 그런데 저의 두 아들딸의 상황이 우리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종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보십시오. 갈라디아서 4장 4~7절 중 4절입니다. “그러나 때가 차자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습니다”(4절). 얼마나 영광스러운 구절입니까. 카자흐스탄에서 아들을 입양하기 위해 우리가 노력하고 있을 때는 아직 아들이 태어나기 전이었습니다. 일 년 동안 노력하며 입양과정을 겪었고 그 이후에 우리는 아들을 만났습니다. 그 과정을 거치고 때가 찼을 때, 아들이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때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는 바로 비행기 티켓을 구했고 2월 15일에 아들을 만났습니다. 절묘한 타이밍이었습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사랑 가운데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우리를 예정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양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하나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엡 1:3~6). 제 평생에 읽은 글 중에 이보다 아름다운 글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 땅의 기초가 세워지기도 전에, 태양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친히 나무와 산들을 만들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 한명 한명의 영혼을 바라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입양된 아들딸로 맞이하기 위해 바라보신 것입니다. 입양하려면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조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서류를 작성하고 인터뷰를 해야 합니다. 이 많은 절차를 경험하게 되는 이유는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자격과 조건이 맞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조건을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절묘한 시간에 모든 조건을 갖고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여려분, 온 세상에 고아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은 바른 마음을 가진 부모가 나타날 때까지 버려져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종노릇하며 재판관 앞에 서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때에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모든 필요조건을 다 갖추신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오신 것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의 모든 죄와 고민을 내려놓고 오직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역사를 바라볼 때 우리는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마치 종노릇하듯 하나님을 대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고 섬겨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여서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는 재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더 이상 종이 아니고 아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들이면 또한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상속자입니다”(갈 4:7). 여러분 상속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 삼으심으로 우리의 미래를 바꾸셨습니다. 제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 됨에 부여되는 모든 축복을 그들은 누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도전합니다. 하늘에 아버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상속자로 받을 수 있는 것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세상 어떤 것도 그것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주님 안에서 온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탁드립니다. 만약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앞에 여러분을 드리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여러분이라면 오늘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소망합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가족이 되길 기도합니다. 제가 아들을 입양하고 싶었던 이유도 하나님께서 저를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량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시기를 원합니다. 이 사랑에 대해 심오하게 생각해보십시오. 한국에도 수많은 고아원이 있는 것을 압니다. 엄마, 아빠를 부를 수 없는 아이들이 그곳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한국도 입양에 대한 오해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혈통이라는 것이 중요한 유산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하늘이 지명해주는 형통은 그 어떤 것보다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길 바랍니다. 문화를 존중함과 동시에 그것을 딛고 일어나길 바랍니다. 입양할 때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것이 아닌 영광을 느끼기를 바랍니다. 모든 분들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를 수 없는 사람들이 복음의 힘을 경험하길 바랍니다. 때로는 성경으로 우리가 돌아갈 때 우리는 우리 문화를 거스르고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치있는 일입니다. 오늘 제가 했던 첫 질문의 대답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겠습니까? 이 큰 예배당에서 홀로 예수님과 마주보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내뱉는 단어는 이것일 것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절대 제자는 이 사랑을 온전히 깨달을 때만 알게 되는 축복임을 믿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출발점을 기억하십시오. 출발점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랑입니다. 제자로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길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 정리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강의 1 절대제자 – 이재훈 목사 이재훈 목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요청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제자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한국문화가 신앙생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있다면 이름 뒤에 붙는 직책, 타이틀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유교문화에 젖어 있었기에 서로의 이름을 부를 때에도 그 뒤에 직책을 붙여줍니다. 000 집사님, 000 목사님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름만 부르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저는 그저 이름으로만 부르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기 원하시는 것은 거룩한 백성 즉 성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집사 직분을 받지 않은 분에게 ‘성도님’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거룩한 백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불러주십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에게는 합당하지 못한 모습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거룩함이 아닌 하나님께서 덧입혀주시는 의로 인해 성도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습니다. 그 호칭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호칭이 되길 바랍니다. 또한 성도라고 불리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저희 목회자들도 스스로 성도라는 것을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모든 직분자들이 그 직분보다도 성도됨을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하게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도라고 불러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그렇게 불러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흘 동안의 집회에서 강사님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자신의 삶과 가치관, 철학을 나눌 때 그것이 이 자리에 참여한 모든 분들의 것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고는 그들 모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눅 9:23~24). 예수님께서는 제자됨의 초석이 되는 귀한 말씀이자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삶은 이 말씀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시작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삶을 얻기 위해 나의 삶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많은 철학들, OO주의라고 하는 것들은 우리에게 ‘자신을 즐기라’고 주장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네 자신을 십자가에서 부인하고 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들은 ‘자기 십자가’라는 말을 나름대로 해석합니다. 주로 자신이 감당하기 힘들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을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의 자아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십자가의 원색적인 이유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예수님의 제자됨은 시작됩니다. 제자의 삶은 한마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옛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입니다. 사흘의 기간 동안 자신의 옛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길 바랍니다. 못 박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통과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늘부터 사흘간의 집회를 통해 누가복음 9장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초청에 응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로운 생명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경험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 정리 정지은 기자 jji@onnuri.org
2013 부흥축제, 3일의 현장 스케치 3천여 명 절대제자 되기 위해 모여 9일 공휴일의 쉼도 마다하고 말씀을 듣기 위해 첫날 아침부터 현장 등록처가 북적였다. 온누리 성도부터 횃불트리니티 신학생, 선교사, 농어촌 미자립교회 목회자와 사모, 중국 리더십 등 절대제자를 소망하는 3천여 명의 참석자들이 자리를 메웠다. 이재훈 목사는 “제자의 삶은 옛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 생명의 부활로 변화되는 것”이라며 절대제자의 삶을 그렸다. 데이비드 플랫 목사는 “제자 된다는 것은 제자를 낳는다는 것을 결단하는 것”임을 강조했고, 프랜시스 챈 목사는 말씀만 먹고 행동하지 않는 한국 성도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정말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다면 행함이 수반되어야한다”라고 말했다. 마지막 날 부흥집회에서 강단에 함께 오른 두 목사는 “세상으로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과 친구가 되고 복음을 전하라”라며 성령 안에서 동일한 메시지를 전했다. 제자는 결국 제자를 낳아야 진정한 의미임을 강조했다. 마지막 말씀 후 두 목사는 이재훈 목사를 위해 안수기도 했고 이어 성도들이 손을 뻗어 이 목사를 위해 함께 눈물로 기도했다. 집회 중간에 열린 특순도 다양한 모습으로 제자의 이야기를 전했다. 샌드애니메이션은 절대제자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표현했고, 장로합창단과 세라핌은 함께 힘찬 목소리로 승전가를 노래해 참석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가수 박기영 자매와 교역자들의 은혜로운 찬양에 참석자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고, 가브리엘 오보에 연주와 연합성가대의 찬양은 사랑홀을 아름답게 울렸다. / 조은실 기자 ces@onnuri.org 집회 현장 이모저모
2013 온누리 부흥축제 ‘절대 제자’, 그 거룩한 부르심의 자리로 “가서 제자 삼으라” 3일 동안 전해진 하나님의 사랑은 마음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차고 넘쳤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표현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마음을 찔렀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사랑의 메시지로 다가오신 예수님. 친히 우리를 만나러 이 땅에 내려와 자신의 삶을 통해 절대제자의 모형을 보여주신 예수님. 제자로의 삶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예수님은 다시 손을 내미셨다. 절대제자로의 그 거룩한 부르심에 우리는 ‘아멘’으로 화답하며 세상으로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부흥축제 ‘절대제자’는 제자의 삶을 헌신하고 결단하는 시간이었다. 다시 말씀으로, 십자가로 돌아가 다시 사명으로 뻗어나갔다. 절대제자는 데이비드 플랫 목사의 ‘복음’과 ‘주권’, ‘제자의 삶’, ‘사도로 부르심’, ‘나를 따르라’에 대한 말씀으로, 프랜시스 챈 목사는 ‘권리 포기와 순종’, ‘새 계명을 주노라’, ‘고난 속의 승리’의 메시지로 김춘근 장로는 ‘헌신’으로 각각 모습을 드러냈다. 또 삶에서 제자의 삶을 살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실천하는 두 목사의 실제 삶을 이야기했다. 3천여 명의 참석자들은 말씀을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삶에서도 행할 것을 다짐했다. 헌신, 결단의 자리로 메시지는 성도들을 실천의 자리로 이끌었다. 오랫동안 입양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해왔다는 김해안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확인받고 그 사랑을 나누기 위해 입양을 결단했다. 계속해서 저를 통해 하나님이 하실 일들이 기대된다”라고 고백했고, 스위스에서 온 진혜원 성도는 “고아와 과부, 양자 삼으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족을 양자 삼으며 한국을 떠나기 전에 가족들에게 꼭 복음을 전하겠다”라고 말했다. / 조은실 기자 ces@onnuri.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