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미디어] 미디어와 기독교인의 삶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미디어 미디어와 기독교인의 삶 현대 사회에서 미디어의 영향력은 거대하며,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침투해 있다. 스마트폰 하나로 전 세계의 정보를 얻고, 수천 km 떨어진 사람들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 이처럼 미디어는 우리 생활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미디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기독교인이 미디어를 통해 어떻게 하면 더 의미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미디어는 정보의 전달, 교육, 엔터테인먼트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기독교인에게 미디어는 복음을 전파하고, 신앙공동체 내외부와 소통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된다. 2023년 조사에 따르면, 한국 기독교인의 75%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예배와 신앙공동체 활동에 참여한다. 그러나 동시에 미디어는 종종 세속적 가치와 유혹을 전달하는 채널이 되기도 한다. 특히 젊은 세대는 온라인 콘텐츠를 통해 비성경적인 메시지에 노출될 위험이 크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미디어를 사용할 때 분별력을 발휘해야 한다. “미디어는 우리의 영혼을 뒤틀고 있다”고 경고한 바와 같이 기독교인은 미디어 콘텐츠를 소비할 때 그것이 자신의 신앙과 가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세속적인 가치와 비성경적인 메시지를 걸러내고, 우리의 신앙과 가치관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는 콘텐츠를 선택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성경적 원칙에 기초한 영적 분별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모든 정보가 진실이 아닐 수 있으므로 정보의 출처를 확인하고, 검증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다. 미디어 중독도 경계해야 한다. 둘째, 기독교인은 미디어를 통해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유튜브, 소셜 미디어, 블로그, 팟캐스트와 같은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이 시대 기독교인들의 중요한 사명 중 하나다. CGN에서 방영하는 ‘오십쇼’ 콘텐츠가 성경을 쉽게 설명해서 비기독교인의 진입장벽을 낮추었듯, 미디어를 통해 우리는 무수히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줄 수 있었다. 필자가 과거 KBS 근무 시절 전화 한 통화에 1천 원을 모금하는 ‘사랑의 리퀘스트’란 프로그램을 통해 1997년 10월부터 17년 동안 약 874억 원을 모금해 9만여 명에게 따뜻한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셋째, 미디어는 기독교인의 삶에서 공동체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 고립이 심화하는 시대에 미디어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위안과 자원을 제공하는 연결 도구가 된다. 온라인 기도회나 성경공부 모임 등 신앙에 관한 공유와 토론이 개인의 신앙 성장뿐만 아니라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디지털 공간을 활용해서 서로의 경험과 통찰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로써 소속감과 공동체 의식을 촉진하는 더 강력하고, 포괄적인 신앙공동체를 구축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갖고 사는 것이 쉽지 않다. 우리는 영적으로 혼란스럽고 다양한 유혹과 도전 속에서 신앙을 유지해야 하는 영적 전쟁의 시대를 살고 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매일 말씀 묵상과 기도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해야 한다. 기독교 콘텐츠를 제작하는 CGN의 구성원들은 매일 오전 시간에 1시간씩 예배와 큐티, 기도회를 가진 다음 업무를 시작한다. 업무 시작 전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으로써 영적으로 무장한다. 각종 회의 또는 국내외 촬영 현장에서도 시작과 끝은 기도다. 선교와 복음의 가치를 담은 콘텐츠를 통해 세계 어느 곳에, 누구에게라도 전달되어 복음의 씨앗이 열매를 맺게 하는 사명에 충실하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다. 미디어는 기독인의 신앙생활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고, 그 영향력이 막대하다. 이 도구를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신중한 선택과 전략’이 필요하다.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우리의 신앙이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도 빛나게 유지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미디어는 기독교인 신앙생활의 ‘도전이자 기회’다. 올바른 사용법과 성경적 원칙에 기초한 접근 방식을 통해 우리는 미디어를 ‘신앙 성장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강력한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 이 시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각자 삶의 현장에서 미디어 선교사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다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 전진국 집사(CGN 대표, 한강공동체)
2024-04-13 제1487호
[맛있는 말씀 해설]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막 16:18). 맛있는 말씀 해설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막 16:18).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만 읽고, 적용하기에는 상당히 위험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말씀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는 현장에 나타나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온 세상에 나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신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도구로 표적들을 보여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 표적은 귀신을 내쫓고, 새 방언을 말하고, 손으로 뱀을 집어 들며, 독약을 마실지라도 해를 입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아픈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낫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예수님 말씀대로 사도 바울은 멜리데 섬에서 뱀을 잡았으나 해를 당하지 않았다. “그런데 바울은 그 뱀을 불 속에 떨어 버리고,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행 28:5, 표준새번역). 독을 마셨지만, 해를 입지 않은 경우는 교회의 전설이나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세비우스는 유스투스 바르사바스(Justus Barsabasr)가 독을 마셨지만, ‘주의 은혜로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반대로 교회사의 한 사례를 보면 어떤 극단적 이단은 자신들의 믿음을 과시하기 위해서 뱀을 잡기도 하고, 독을 마시다가 죽기도 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는 전체적인 문맥과 상황을 잘 고려할 필요가 있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복음 증거를 위해서 주신 특별한 은사와 능력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특별한 믿음을 가지고, 헌신 된 자들에게 기적과 능력이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마가복음> 16장 18절 말씀의 중요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누리게 될 놀라운 권능과 하나님의 보호를 상징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록된 책이다. 성경은 다양한 문학적 기법으로 기록되었다. 역사적 사실, 이야기, 고대 사회의 지혜 문헌, <시편>, 교훈적인 내용, 상징과 은유적 표현 등을 통해서 진리를 전달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성경의 다양한 문학적 기법과 당시 상황과 맥락 등을 고려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종종 이단들이 성경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종말의 시한을 계산하거나 아픈 성도들에게 의학적 치료를 중단하고, 맹목적인 기도만을 권해서 물의를 일으킨다. 참된 믿음은 문자주의에 매몰되거나 맹목적 기적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 말씀은 기적을 ‘표적’으로 표현한다. 기적과 표적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국어사전에서 기적에 대한 정의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 신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믿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으로 기술하고 있다. 표적은 일종의 사인(sign)을 말한다. 신호등에서 빨간불은 정지 신호이고, 파란불은 통행 신호이듯이, 표적은 그것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 복음서는 종종 기적을 표적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의 기적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을 증거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다. <마가복음> 16장 18절 말씀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이 뱀이나 독과 같은 해로운 것을 만지고 마실지라도 해를 당하지 않을 거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복음 전도자들의 삶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뜻이다. 바른 신앙은 성경의 문자주의와 기적 추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바라보는 것이다. / 오은규 목사(성동광진공동체)
2024-04-13 제1487호
[멘토가 멘티에게] 하나님 앞에 가져가면 더는 결핍이 아니다! 멘토가 멘티에게 하나님 앞에 가져가면 더는 결핍이 아니다! “계속 저의 부족한 모습만 보게 됩니다. 제 안에 있는 결핍을 어떻게 하면 채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때때로 내면의 공허함과 마주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순간의 약함이 아니라 자아 성찰 과정에서 중요한 신호다. 자신의 부족한 면을 인식하는 것이 성찰의 시작점이고, 자아를 발전시키는 길을 찾게 한다. 우선 결핍을 찾아가는 과정을 살펴보자. 먼저 자아의 중요성을 깨닫고, 결핍을 그대로 받아들인 다음, 자기 발전 의지를 다져야 한다. 그래야 단순히 결핍만 채우는 게 아니라 자신의 성장을 지속해서 채워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사회적 연결감을 추구해야 한다. 인간 네트워크를 통해 배우고, 공감하며, 서로의 성장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인내하면서 자신을 존중하는 게 중요하다. 결핍은 외부로부터 무언가를 채우는 게 아니라 스스로 내면을 성장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오는 결핍의 요소 중에는 소속감, 인정, 존중 등이 있다. 소속되어 있는 커뮤니티에서 배제감을 느낄 때, 사회 전반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할 때, 취업의 실패, 직장 내 괴롭힘, 가정 내 폭력, 사회적 편견, 경제적 불안증, 실업, 빈곤 등 무엇보다 인간적인 외로움과 자신에 대한 불만족까지 결핍이 다양하다. 결핍의 반증은 원함이다. 요새 청년들의 가장 큰 고민이 취업과 결혼이라고 한다. 외모, 가정환경, 스펙, 경제력, 신앙 등 어떤 것이든 결핍이 많을수록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자존감이 떨어진다. 비교하는 것이 망조의 지름길이라고 배워왔지만,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 어쩔 수 없이 비교할 때가 많다. 그런데 결핍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면 더는 결핍이 아니다. 세상의 기준과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상대적인 우월감도, 박탈감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그대로 사랑해 주신다. 우리의 관점이 바뀐다면 결핍의 관점도 변하게 될 것이다. 나의 부족함으로 하나님이 드러나고, 나의 연약함으로 하나님의 강함이 나타난다. 그러기에 결핍은 세상에서 볼 때 모자란 부분을 찾는 게 아니라 나는 하나님께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기도가 결핍되어 있지는 않은가?’, ‘말씀과 찬양이 결핍되어 있지 않은가?’,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사랑하고 있는가?’ 등 결핍조차 하나님의 영역과 세상의 영역을 분별해야 한다. 세상의 결핍은 채우기가 쉽지 않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터닝포인트’라는 계기도 필요하며, 세상 말로 운도 따라야 한다. 아무리 채워도 끝이 보이지 않고, 경쟁 사회 속에서 지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결핍을 채우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 안에는 자신을 위한 결핍은 없고, 하나님에 대한 결핍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결핍이 채워진다. 결핍이 채워질 때 자존감이 생긴다. 세상에서의 자존감은 조건의 결핍을 채울수록 커지지만, 하나님 안에서의 자존감은 사랑받는 자녀가 될수록 커진다. 결핍을 채운다는 것은 ‘어디로부터 인정과 평가를 받을 것인가?’의 문제인데, 하나님은 결핍을 결핍으로 보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이 채워주시고, 높여 주신다. 그래서 결핍이 더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나의 달란트적인 부분에서 어떤 결핍을 느낀다면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급급해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 어떤 부분이 결핍되어 있는지를 고민하기를 바란다. 결핍이 더는 결핍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고, 채움도 하나님을 위해서 채워져야 함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을 가지고, 결핍이 채워지는 경험을 하는 청년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세상에서 필요한 결핍의 기준이 무엇이고, 무엇부터 채워야 하는지 우선순위를 정한다면 의미 있는 채움이 될 것이다. / 김희 멘토(인천온누리교회)
2024-04-13 제1487호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예술] 기독교 세계관과 예술이 교차하는 방식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예술 기독교 세계관과 예술이 교차하는 방식 우리는 교회에서 활동과 세상에서 삶을 분리하는 경향이 있다.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것은 주저하지 않을 수 있지만, 자기 일, 직업, 학문영역에서 크리스천의 세계관을 담아낸다는 것이 쉽지 않다. 필자도 작업과 신앙을 연결하는데 많이 고민했다. 마치 독립투사가 된 것처럼 혹은 커밍아웃하듯이 나름 비장한 결단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 결단의 이유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세례로 교육받은 나의 세계관 교정이 필요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종교적 성향의 작업에 대한 동시대 예술 현장의 거북한 시선 때문이기도 하다. 인종, 성별, 민족성, 성 지향성과 같은 개인적 정체성의 표현 등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는 지금의 세상에서 종교는 마지막 금기로 남아있다. 소수민족들의 토속신앙이나 무속마저 통용되는 동시대 미술에서 기독교와 같은 거대종교가 설 자리가 없다. 기독교적 표현이 유일하게 허락된 자리는 냉소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비판하는 경우뿐이다. 이외에도 커밍아웃을 고민했던 더 큰 이유는 세상의 언어,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 통용되는 어법으로 복음과 신앙을 이야기할 수 없을까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제자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전문용어를 사용하시지 않으셨다. 그처럼 세상의 언어, 동시대 미술 현장의 언어로 기독교 세계관을 전할 수는 없을까? 그리스도인으로서 특별은총을 받은 우리는 “일반은총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의 각 영역에 들어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확보하라”는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의 강령처럼, 교회 안에 게토화 되지 않으면서 기독교 세계관을 담아낼 방법이 없을까? 예술과 신앙에 대한 이러한 고민은 비단 필자만의 고민이 아닐 것이다. 예술작품을 대하는 많은 성도가 유사한 고민이 있을 것이다. 기독교 문학의 권위자이자 성서의 문학적 접근을 시도한 리랜드 라이켄(Leland Ryken)은 예술과 기독교의 관계를 “경건한 스타일이나 경건하지 않은 스타일 같은 것은 없다”고 한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의 주장을 인용해서 설명했다. 그러면서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예술은 성경처럼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을 다룰 수 있다고 했다. 그가 제안하는 예술과 기독교 신앙이 교차하는 세가지 방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독교 세계관을 명백히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예술은 작품의 주제가 전적으로 기독교적인 예술, 즉 그리스도의 인격, 기독교 교리, 또는 성경의 인물과 사건을 다룬다. 또한 기독교 어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예술이 신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을 할 때 그것은 기독교 예술로 식별된다. 둘째, 암시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을 표현하는 예술이 있다. 성경 또는 기독교 교리나 기독교 상징을 암시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상징이 의미하는 바가 작품의 주제나 의미와 연관되는 경우에는 암시적 요소가 기독교 세계관적 예술을 정의하는 지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종종 현대 예술가들이 기독교 이미지나 기독교 어휘를 사용해서 비기독교적이거나 반기독교적인 내용을 표현하기에 이는 분별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포괄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을 드러내는 예술이다. 기독교 신앙이나 성경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포괄적이고 내재적 관점에서 기독교의 가치와 시각을 전달한다. 암시적 관점의 예술이 어느 정도 기독교적 요소를 표현하는 것에 비해, 이 경우는 기독교에 대한 직접적 텍스트나 표현이 없다는 게 그 특징이다. 더 나아가 라이켄은 예술가의 의도를 넘어서 그리스도인이 기독교 세계관의 렌즈로 작품을 볼 때, 그 작품이 기독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어도 이 범주에 속한다고 말한다. 몇 년 전 어떤 사극을 시청하다가 드라마의 전개 과정과 여주인공의 캐릭터가 에스더와 많이 닮아서 기독교 세계관이 반영된 드라마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작가나 프로듀서가 기독교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드라마를 시청하는 내내 <에스더서>를 읽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라이켄의 관점에서 이러한 예술을 기독교 세계관을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일반은총의 관점에서 예술을 바라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예술을 바라본다면 조금은 더 자유롭게, 더 넓고 다양한 시각으로 기독교와 예술에 대해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방식이 크리스천 예술가들이 세상에 침투해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 시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예술의 외연을 넓히는 전략 아닐까? / 김지혜 권사(온누리세계관학교, 서빙고공동체)
2024-04-06 제1486호
[주일 강단] 갈등의 물결, 부흥의 파도가 되다 갈등의 물결, 부흥의 파도가 되다 사도행전 6:1~15 / 이재훈 위임목사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갈등이 언제나 존재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에는 교회 밖으로는 핍박이 있었고, 안으로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공동체 안에 서로에 대한 불평이 일어나 갈등이 생겼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 믿는 이들이 늘어나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임으로 인해서 생기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성도들의 숫자가 많아짐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행정적인 문제입니다. 6장 1절에서 “음식을 분배 받는 일에서 누락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의도하지 않은 실수라는 뉘앙스를 보여줍니다. 어떤 이유로든 있어야 할 이름이 빠지고, 마땅히 돌봄을 받아야 될 대상이 누락이 되는 것은 단순한 행정적인 문제일 수 있지만, 관계 문제, 영적인 문제로 확대되기도 합니다. 둘째, 서로 다른 문화 속에 살았던 사람들이 한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생기는 문화적 긴장입니다. 구제 명단에 빠진 사람들은 주로 그리스파 유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유대 사람들에게 불평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파’, ‘히브리파’라는 단어를 쓴 것은 교회 안에 정당처럼 파가 나눠졌다는 게 아닙니다. 언어와 문화에 더 익숙한 사람들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것인데, 문제는 주로 누락이 된 사람들이 그리스파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문화적 긴장 혹은 갈등으로 비화된 것입니다. 우선순위 재정립, 성령과 지혜 충만한 리더십 세우기 사도들은 이 갈등을 그냥 덮으려 하지 않고 해결했습니다. 이 갈등이 도리어 부흥의 촉매제가 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첫째, 우선순위를 재정립했습니다. “그리하여 열두 사도들은 제자들을 모두 불러 놓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분배하는 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 가르치는 사역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형제들이여, 여러분 가운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알려진 사람 일곱 명을 뽑으십시오. 그러면 이 임무는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겠습니다”(2~4절). 갈등 속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각자가 올바른 우선순위에 충실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하나님 말씀에 나타난 우선순위에 충실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또한 각자에게 주어진 우선순위에 충실하고 있는지를 재정립해야 합니다. 사도들이 구제와 봉사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긴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이 힘든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이 일로 인하여 공동체의 영적 생명력이 약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우선순위를 더욱 명확하게 한 것입니다. 갈등이 생길 때 그것을 해결하려다가 우선순위를 잃어버리는 일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이라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을 우선순위로 삼았습니다. 공동체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분명히 알려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을 리더십으로 세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유대교로 개종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뽑았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들을 사도들 앞에 세웠고 사도들은 그 사람들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했습니다”(5~6절). 사도들은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제안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사도들의 권위는 수직적이고, 강압적인 권위가 아니었습니다. 함께 제안하고 대화하는 수평적 권위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여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알려진 일곱 사람을 뽑았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였다’는 것은 사도직과 집사직으로 구분해서 완벽하게 직제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사도들을 돕는 보조사역자로서 일을 분담했다고 봐야 합니다. 또 이들 가운데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 중에서도 뚜렷하게 지혜와 능력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지혜’란 현실에 대한 분별력과 판단력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이성과 판단력을 통해서 결정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이성적 판단력을 제외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적 판단을 사용해서 성령 안에서 결정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성적 판단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신비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성령 안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지혜로 결정해야 할 때가 있고, 때로는 믿음으로 결정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이 두 가지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이성적 판단을 가지고 결정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결정한다’고 할 때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킨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 ‘믿음으로 결정한다’고 할 때도 이성을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지혜롭게 할 때도 믿음을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판단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영역, 하나님의 신비,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응답을 받을 때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예”, “아니오”, “기다려라”입니다. 이 외에 두 가지가 더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믿을테니까 네가 잘 판단해서 결정해 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판단을 존중해 주시는 응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너에게 이미 주어진 지혜를 활용해서 결정하면 내가 밀어줄게”라는 응답입니다. 또 하나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너는 손 떼”입니다. “너는 이제 그만 생각해”라고 믿음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영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일곱 명이 믿음과 지혜가 충만해서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섬기는 사람으로 세워졌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 안에 신실한 리더들, 믿음과 지혜가 충만한 리더들이 계속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두 가지 열매인 지혜와 믿음은 교회 리더십으로 세움을 받는 중요한 자질입니다. 문화적 차이가 있는 사람들을 끌어안다 셋째, 그들은 문화적 차이가 있는 사람들을 끌어안았습니다. 앞서 그리스파 사람들이 명단에서 빠졌다는 것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5절을 보면 일곱 사람들의 명칭이 모두 그리스식 이름입니다. 스데반은 스테파노스(면류관)입니다.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그리고 안디옥 사람 니골라입니다. 안디옥 사람임을 강조하는 것은 이 사람이 완전히 이방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종한 니골라를 새롭게 리더십을 뽑았습니다. 유대인, 예루살렘 출신, 익숙한 문화권에 있는 이들이 아닌 사람 가운데 리더를 세웠습니다. 그동안 소외감을 느끼고, 상처가 있고, 불평이 있었던 문화권 중심에 있는 사람들을 리더십으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도 함께 리더십으로 참여하는 다문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 한국 교회, 온누리교회도 개선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M미션이나 이주자들이 와서 이제는 다문화 공동체가 익숙해졌습니다. 많은 다문화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에 오래 거주하면서 한국인으로서 살아가는 분들이 있다면, 그분들도 온누리교회 리더십으로 세워 드리고, 넓은 다문화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같은 인종, 같은 문화 사람들끼리만 어울립니다. 사실 그것이 편합니다. 사회는 다문화 사회인데 교회는 단일문화가 지속되기를 고집했습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그들의 결정을 보십시오. 당시 유대문화 중심적인 공동체에서 굉장히 파격적인 결정입니다. 새롭게 세워진 일곱 명을 모두 그리스파 사람들로 세웠다는 것이 지혜가 충만한 것입니다. 믿음이 충만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다문화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한국인만 생각한다면 교회 정체성의 심각한 위기가 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배타적인 교회가 된다면 한국 교회가 선교적인 공동체로 쓰임 받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스파 사람들이 명단에서 누락되고 갈등이 생겼지만, 그리스파 사람들에게 더 친숙한 리더십을 세우고, 서로 끌어안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초대 교회에 갈등이 일어났지만 그 갈등이 부흥의 촉매제가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갈등이 부흥의 촉매제로!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널리 퍼져 나갔으며 이로써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도 많이 늘었고 더욱이 수많은 제사장들도 이 믿음에 순종하게 됐습니다”(7절). 말씀이 계속 퍼져나갔고, 믿는 사람이 늘어났고, 심지어 제사장들도 많이 믿게 되었습니다. 부흥의 파도가 일어난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있던 갈등이 심각해져서 깨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흥의 파도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실한 일곱 명이 세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등장합니다. 스데반입니다. 사도들의 영향력보다 스데반의 영향력이 더 컸습니다. 이분에게 꼭 붙여지는 별명이 ‘충만’입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믿음과 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충만합니다. 그래서 이분을 통해 표적과 기적이 나타나고, 그분이 말씀을 전할 때 수많은 영혼이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이 억울하게 심문받은 것처럼 스데반이 성전과 율법에 대해 험담을 한다는 누명을 쓰고 공회원들 앞에 섭니다. 그때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얼마나 긴장되는 순간입니까? 자신을 잡아먹을 듯 고소하고, 억울하게 몰아세우는 그들 앞에서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합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해치려고, 공격하려고 달려드는 사람에게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충만입니다. 충만이란 흘러넘친다는 의미입니다. 우러러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충만입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귀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가 담대한 증인이자 온화하고, 평화롭고, 대적하는 이들 앞에서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는 충만함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초대교회에 갈등이 있었지만 갈등을 녹여내고, 우선순위를 놓치지 않고, 올바른 사람들을 세우고, 서로의 차이를 끌어안았을 때 갈등이 오히려 부흥의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공동체에 때로는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때 공동체가 서로 끌어안는 모습으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 것처럼, 서로를 끌어안는 일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4-13 제1487호
[주일 강단] 부활 생명의 삶 부활 생명의 삶 고린도전서 15:19~24 / 이재훈 위임목사 오늘 본문은 ‘부활 장’이라는 별명이 붙여진 <고린도전서> 15장입니다. <고린도전서> 전반부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후반부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임을 뛰어넘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이 이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 성도들이 부활의 생명으로 살도록 역사하는 사건 첫째,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 대답은 ‘그것을 믿는 성도들이 현재 부활의 생명으로 살도록 역사하시는 사건’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소망이 이 세상의 생명뿐이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19~20절). “만일 이 세상의 생명만을 바라는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이렇게 바꾸어 읽을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그분을 믿는 이들에게 생명이 주어졌기에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는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첫 열매’란 유대 절기 가운데 초실절을 설명합니다. 곧 첫 곡식 다발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다가올 추수에 대한 확신과 감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이 초실절의 성취입니다. 보리 추수 한 단이 하나님 앞에 드려진 것처럼, 예수님이 첫 번째 열매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의 부활이 약속되고 보증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지 미래의 부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지금, 오늘 부활의 생명으로 살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은 과거 죽음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않으셨던, 성육신하시기 전에는 누리지 않았던 생명, 부활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그 생명은 그분을 믿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주실 수 있는 생명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은 미래에 그분과 같이 부활할 것이고, 현재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셨던 그 생명의 능력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변화와 변혁입니다. 우리가 창조된 생명일 뿐만 아니라, 창조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이 독생자를 나으셨던 것과 같이 우리도 태어나는 존재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생물학적, 자연적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순한 어떤 개선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변형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종류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C.S.루이스가 예수님의 부활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예전 단계에서 생명 유기체들은 새로운 단계로 나가는 길에 선택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피조물이 아들로 바뀌는 이 변화, 그것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거부할 수도 있다는 뜻에서 선택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새 사람’의 최초의 사례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의 존재이다. ‘한 새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새 사람’이다. 그는 모든 새 사람의 기원이며 중심이자 생명이다. 그는 조에(ZOE; 영원한 생명)를 유전이 아니라 좋은 전염(믿음)을 통해 전달하신다.” 그것을 우리의 믿음을 통해 전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C.S.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에서 ‘굿 인펙션’이라는 제목으로 ‘좋은 전염’이라는 비유를 들었는데, 믿음은 전염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그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우리 가운데 전염됨으로써 바로 그 새 사람이신 그분 안에 있는 생명을 우리 모두가 함께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셨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 사도 바울은 서신서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우리가 현재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예수님과 함께 살아났다. 예수님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는 표현으로 반복해서 사용했습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가오는 모든 세대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지극히 풍성함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엡 2:4~7). ‘함께’가 세 번 반복됩니다.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셨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본문을 잘 보십시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실 것’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과거형으로 표현한 것은 현재 우리가 살아난 상태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미래에 ‘함께 살리실 것’이라고 미래의 부활만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리셨다’고 말씀합니다. 영어로 표현했다면 모두 현재완료형으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 현재 계속해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죽음을 통과해서 얻은 부활의 생명이며, 지옥과 마귀와 세상과 육신을 정복한 생명이기에 미래의 부활만이 아니라 현재 함께 살리셨고, 일으키셨고, 하늘의 앉힌 바가 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에서도 동일한 맥락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니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마십시오”(골 3:1~2).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니’ 우리는 하늘에 앉힌 바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현 주소는 땅이 아니라 하늘이라는 것이고, 하늘에 앉아있는 상태로 살아감으로 위의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장차 미래에 부활이 약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능력을 전염 받고, 이식받아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모든 권세를 멸하시고, 온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회복시킬 사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에 대하여 어떤 의미가 있는가?”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의 마지막이 오게 될 그때 모든 권세를 멸하시고, 온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시키실 사건입니다.” “그다음에 세상의 마지막이 올 것인데 그때는 그분이 모든 권력과 권세와 권능을 멸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들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두실 때까지 다스리셔야 합니다”(24~25절). “만물을 그분께 복종하게 하신 때는 아들 자신도 만물을 복종하게 하신 분에게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가 되시려는 것입니다”(28절). 나중에 일어날 변화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부터 시작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세상의 종말 때까지 하고 계신 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온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구속하시는 일을 행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권세를 멸하시고, 온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시키시는 일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승리가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에는 사단의 세력,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사단의 권세가 아직도 하나님의 통치에 반역하고, 죄와 죽음을 이용해서 하나님께 대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완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기간에 사단의 세력들을 어떻게 하나님이 소탕해 가시는지, 우주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완전히 회복시켜 가시는 일을 행하고 계신 것을 환상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전투가 나오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 앞에 드리는 참된 예배자 행렬이 나오는 것입니다. 디데이(D-Day)와 브이데이(Victory Day) 여러분, 이 세상은 지금 전쟁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온 세상에 임하도록 지금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것을 2차 대전 마지막에 있었던 ‘디데이(D-Day)’와 ‘브이데이(V-Day)’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2차 대전 당시 연합군이 독일군에 결정적으로 승리하게 된 것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영향입니다. 1944년 6월,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서 독일군을 결정적으로 무찌른 그 전투의 승리로 인하여 이미 2차 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날을 ‘디시전 데이(Decision day)’ 또는 ‘D-Day’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2차 대전의 완전한 승리가 이루어진 것은 1945년 5월 8일 베를린이 함락되었을 때입니다. 독일군이 완전히 포기함으로 연합군이 승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거의 1년 동안 전쟁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래서 1945년 5월 8일을 ‘브이데이(Victory Day)’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D-Day와 V-Day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무엇입니까? D-Day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완전한 승리로 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세력들이 이 땅에 잔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V-Day가 언제입니까? 부활하신 그분이 재림하시는 그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회복되는 그날이 승리의 V-Day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D-Day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V-Day, 마지막 승리의 날까지 하고 계신 일이 있습니다. 이 물리적인 세계는 마지막 V-Day에 해체되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 기간에 사탄의 권세를 완전히 진멸하는 일을 예수 그리스도가 하고 계신 것입니다. C.S.루이스가 그의 책 <기적>에서 부활을 설명할 때 ‘새로운 자연’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지금의 자연 위에 새로운 자연이 존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새로운 자연의 문을 연 최초의 사건이다.”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은 새로운 자연을 우리를 위해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완전한 예배와 통치를 받는 새로운 자연으로 들어가셨고, 우리도 그 새로운 자연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에수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나타나실 때 새로운 자연이 온전히 우리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승리의 날(V-Day), 우리가 누릴 세 가지 모습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날 것입니다”(골 3:3~4).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 감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안 보입니다. 육신의 생명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나타나실 때,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다가올 그 영광의 날, V-Day(승리의 날)에 누릴 그 승리를 바라보게 될 때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요? 우리가 누릴 세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깨어있게 됩니다. 부활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들 안에 있기에 깨어있는 것입니다.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처럼, 깨어있는 청지기처럼 그들이 깨어있게 됩니다. 둘째, 그들은 근신하는 이들입니다. 세상과 사탄은 예수님이 세상의 마지막 날 오실 때 우리가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그리고 감격스럽게 만나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승리의 날에 완전히 진멸될 사탄들이 자신들과 함께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에 한 명이라도 더 포함되도록 지금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근신합니다. 그들은 사탄에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셋째, 무장된 이들로 살아갑니다. 깨어 있든지, 자든지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감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주신 부활의 생명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생명은 미래의 변화만이 아니라 현재의 능력입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완전히 통치하시는 날을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거하며,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 능력이요, 축복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함께 기뻐하고, 부활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4-06 제1486호
[주일 강단] 겸손한 왕, 언약을 이루시다 겸손한 왕, 언약을 이루시다 마가복음 11:1~11 / 이재훈 위임목사 예수님의 공생애 대부분은 갈릴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방문은 12살 때 부모님과 함께 절기를 지키러 갔던 장면 외에는 없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공생애를 사시지 않고, 갈릴리 주변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후 최후의 일주일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생애를 통해서 삼 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 모든 사건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게 예루살렘 입성 이후 최후의 일주일의 삶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셨고, 공생애 모든 표적과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십자가에서 이루시는 것을 보여주고, 깨닫게 하는 사역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복음서가 예루살렘 입성 이후 일어나는 사건을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마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것처럼 오해할 수 있지만 아닙니다. 3년과 일주일을 비교해 보면 그 일주일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벳바게와 베다니는 예루살렘에 오는 사람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어서 생긴 마을입니다. 숙박과 물을 제공하는 마을들이 여러 곳 있었는데 대표적인 곳이 벳바게와 베다니입니다. 여기서부터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이라고 불리는 교회력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최후의 일주일 이전의 주일을 ‘종려주일’, ‘승리의 입성 주일’이라고 부르면서 교회력으로 지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이 공생애를 사시며 보여주셨던 것과 사뭇 다릅니다. 공생애를 사실 때 예수님이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늘 “다른 이들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7장을 보면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신 이후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자신에 대한 소문을 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변화산 사건 이후에도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고, <요한복음>에서는 여러 번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표현으로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시고, 대중에게 주목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오면 산으로 숨으시거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시는 등 줄곧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에게 다가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할 때는 도망가실 정도로 관심을 피하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도리어 자신을 드러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알려지는 것을 경고하시고 막으셨던 예수님이 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스스로 행하셨을까요?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 이 마을로부터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예수님이 직접 연출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온 성이 떠들썩할 정도로 군중의 환호성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실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언약을 이루는 메시아로서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모습을 스스로 기획하시고 연출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절반 이상이 예수님이 두 명의 제자들에게 나귀를 가져오도록 심부름을 시키는 내용입니다. 나귀를 끌고 오는 일이 중요한 사건이 아니라면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사건의 가장 강력한 조연은 나귀입니다. 나귀를 선택하신 의미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디든지 걸어 다니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는 나귀를 타셔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올리브산 근처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예수께서 제자 두 명을 보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저기 보이는 마을로 들어가라. 그곳에 들어가 보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하나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 나귀를 풀어서 이리로 끌고 와라. 만약 누가 ‘왜 이러느냐’고 물으면 ‘주께서 필요하시니 쓰고 제자리에 갖다 놓겠다’고 하라’”(1~3절). 두 명의 제자들에게 누군가의 소유인 나귀를 가져오되 주인의 동의를 구하고, 빌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장소에 가면 나귀가 있을 것이고, 어떤 문제가 있을 것이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상세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하늘과 땅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나귀의 주인이기도 하십니다. “예수님이 나귀가 필요하시니 쓰시겠다”고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쓰고 제자리에 갖다 놓겠다”고 하신 말씀이 눈에 띕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당연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데도 나귀를 빌리고, 제자리에 갔다 놓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평생 빌려서 사셨습니다. 빌린 집에서 사셨고, 빌린 배를 타셨고, 빌린 다락방에서 유월절 식사를 하셨고, 빌린 무덤에서 장사되셨습니다. 여기서는 빌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예수님이 빌린 것을 돌려놓으시는 분이라면 우리도 빌린 것을 확실하게 갚아야겠다는 적용도 해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귀를 갖고 오게 하신 근본적인 이유는 구약에 메시아에 대한 예언 때문입니다. “시온의 딸아, 마음껏 기뻐하여라! 예루살렘의 딸아, 소리쳐라! 보아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다. 그는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시니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슥 9:9). 구원의 왕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겸손하시기에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는 예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모든 사역이 구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직접적인 예언만 200구절이 넘습니다. 이 모든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베들레헴 출생부터 부자의 묘에 안치되는 것까지 직접적인 예언만 200개, 간접적인 것까지 하면 700~800개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예언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스가랴가 예언한 대로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 오시는데, 그분은 겸손한 왕으로서 새끼 나귀를 타십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예수님이 이루고 계십니다. 대개 왕은 무엇을 탑니까? 말을 탑니다. 달릴 수 있는 튼튼한 말을 탑니다. 그래서 왕이 출정을 하거나 전쟁에서 돌아올 때는 웅장한 말소리와 함께 행진을 합니다. 새끼 나귀는 걷는 속도나 모양을 볼 때 왕의 품위나 권위를 상징하기에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구절 자체를 왕정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읽기가 어렵습니다. 새끼 나귀를 타라고 하면 왕을 무시하는 것 같고,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은 상황입니다. 한 마디로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나귀는 전쟁의 동물이 아니라 평화의 동물입니다. 나귀는 싸우는 동물이 아닙니다. 빨리 달릴 수도 없습니다. 평화로울 때 터벅터벅 천천히 걸을 수 있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분이, 구원을 이루시는 왕이 나귀를 타고 오시는 겸손한 왕이라는 예언을 이루시기 위하여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높은 깃발도 없고, 큰 나팔도 없고, 군사들의 호위도 없이 나귀를 홀로 타셨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구유에 누우셨습니다. 우리가 쉽게 ‘말구유’라고 하는데, 사실은 나귀의 구유입니다. 서민들의 집에는 말이 없었습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말은 매우 비싼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누우신 곳도 나귀의 구유입니다. 태어나실 때도 나귀의 구유였고, 마지막 십자가로 나아가실 때도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군중들의 의도와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 예수님이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나귀를 타신 모습은 군중들이 기대하는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이 공생애를 통해 예수님이 행하신 일, 특히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기적은 군중들에게 예수님이 우리를 구해줄 메시아라는 기대를 갖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 관을 가지고 환영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길 위에 겉옷을 깔아 드렸고 또 어떤 사람들은 들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와 길에 깔기도 했습니다. 앞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라가는 사람들이 외쳤습니다. ‘호산나! 복이 있으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여!’ ‘복이 있도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8~10절). 흔히 종려주일에 이 고백과 외침으로 찬송을 부르기도 합니다. 찬양은 찬양인데 오해가 포함된 찬양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환영하는 외침이지만, 군중들의 의도와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가 다릅니다. 그들은 길 위에 겉옷을 깔아드리고, 어떤 사람은 나뭇가지를 꺾어 와 길에 깔고, “호산나” 주님을 환영하며 외쳤지만, 그들이 지금 외치는 구원해 달라는 노래는 영적인 구원, 죄로부터, 사탄의 죽음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구원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구원, 즉 로마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호산나’라는 단어는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간구의 단어입니다. ‘호산나’라는 단어가 정치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렇게 사용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시 118:25). 유대인들은 <시편>을 유대인들을 로마 제국으로부터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줄 것을 간구하는 내용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오실 때 겉옷을 깔았습니다. 세속적인 왕에게 하는 행동입니다. 종려나무가지를 흔드는 것도 민족주의적인 열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종려나무를 지도자를 환영하거나 축복할 때 사용했을까요? 주전 175년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성전이 더렵혀졌습니다. 그때 유대에서 마카비우스라는 사람이 나와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이기고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회복시키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마카비우스로부터 시작된 왕조가 약 100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마카비우스가 승리하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환영하는 도구로 종려나무가지를 흔든 것에서 유래해서 계속 내려온 것입니다. 그 행위를 똑같이 한 것입니다. 마카비우스를 환영할 때 종려나무가지를 들었던 것처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을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능력이 로마 제국을 향해 이루어진다면 전쟁도 이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곧 독립, 해방, 자유를 얻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예수님을 마카비우스를 환영하듯이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환영한 것입니다. 오해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로마 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키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을 때, 유대 민족이 복음화 되었을 때 그 능력으로 로마 제국에서 독립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교회와 학교들이 없었다면 독립 운동이 일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가장 앞선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가장 적은 인원이었지만 가장 많은 사람이 민족대표 33인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크리스천들이 민족주의와 복음적인 신앙이 하나 되어서 민족주의에 흡수되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가 흡수되어서 민족주의화 되었습니다. 그래서 종려나무가지를 흔드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축복은 믿음의 신앙을 민족주의에 넘겨주지 않은 것입니다. 항일운동, 반공운동 등 민족의 저항에 크게 기여했지만, 거기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세계 기독교사에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복음적인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올바르게 저항할 수 있었다는 것, 신앙을 이념화에 넘기지 않았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은 넘긴 것입니다. <시편>의 어느 구절을 읽어도 <시편> 기자가 그런 의미로 쓰지 않았는데, 그들은 모든 것을 ‘로마 제국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고 인용했습니다. 그 모습이 표출된 것이 바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입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가셨을 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오셨으니 환영하자고 연출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연출하신 것은 새끼 나귀를 타고 가신 것뿐입니다. 그런데 군중들은 잘못된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 복잡한 상황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환호하는 군중들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의도가 대중들의 환호가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철저하게 구약에 나타난 예언을 이루시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창과 칼, 무력, 때로는 기적으로 일으키는 평화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이루시는 평화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행위가 나귀를 타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오신 ‘겸손한 왕’ “내가 에브라임에 있는 전차를 없애고 예루살렘에 있는 말을 없애고 전쟁용 활도 부러뜨릴 것이다. 그가 다른 민족들에게 평화를 말하고 그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다스리며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다스릴 것이다”(슥 9:10). 세상의 통치자들은 전차와 말, 활이 있어야 합니다. 무력이 통치의 기본이 됩니다. 세속적인 왕의 모습입니다. 그 모든 것이 없어도 다스려지는 왕이 있습니다. 무력이 아닌, 힘이 아닌, 권력이 아닌 것으로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온유와 겸손, 섬김과 사랑, 희생과 나눔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이루시는 평화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시기와 미움이 가득한 대적들이 음모를 짜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고,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면서 예수님의 정체가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대적들이 예루살렘에만 있어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들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던 이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없었기 때문에 직접 가서 보지 않으면 몰랐습니다. 가룟 유다가 필요한 것도 누가 예수님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없을 때 잡아야 했기 때문에 가까운 제자가 밀고해야 했던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이 준비되고 있을 때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고, 게다가 수많은 사람이 이런 일들을 했으니 확실한 표적이 된 것입니다. 이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 닷새 전입니다. 유월절은 그달 14일입니다. 이날은 10일입니다. 율법에 유월절 양을 취하는 날로 정해놓은 날입니다. 그러니까 닷새 전에 어느 양을 죽일 지를 정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율법에 정해져 있었습니다.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사건 자체가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으로 정해진 것입니다. 대적에게는 표적이 정해졌고, 그때부터 명확한 움직임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성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군중들이 외쳤던 호산나를 우리도 외쳐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의미했던 호산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정치적인 압제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외쳤지만, 우리는 우리를 얽매고 있는 죄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호산나를 외쳐야 합니다. 너무 쉽게 예수님을 버리는 변덕스러운 믿음에서 구원해 달라고 외쳐야 합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탐욕에서 구원해 달라고 외쳐야 합니다. 군중들은 옷과 가지를 깔아 예수님을 세속적인 통치자로 대접했지만, 예수님의 발 앞에 깔아드려야 할 것은 우리의 염려, 근심, 죄와 허물입니다. 그것들을 예수님 발 앞에 내어드려 모든 죄를 짓밟아 승리하신 승리자로 예수님을 영접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구원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오신 겸손한 왕입니다. 모든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그분이 이처럼 겸손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왕이신 그분이 가장 겸손한 나라요, 왕이신 분이 가장 섬기는 나라요, 왕이신 분이 가장 희생하는 나라입니다.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는 백성들은 그 나라를 통치하시는 분과 가까이 있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과 섬김이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의 왕과 닮은 백성이 될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고, 종려주일을 보내며 언약을 이루시는 겸손한 왕이신 예수님을 찬양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3-30 제1485호
[주일 강단] 생명의 물줄기는 막을 수 없다 생명의 물줄기는 막을 수 없다 사도행전 5:27~42 / 이재훈 위임목사 전 세계를 위협하는 테러단체나 무자비한 독재자들의 출현, 그리고 거짓된 이념을 추종하는 사이비 종교들, 이 모든 악의 흐름 이면에 사람들의 믿음을 이용한 거짓된 악이 존재합니다. 왜곡된 믿음, 독이 있는 믿음이 그들 가운데 있습니다. 믿음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무신론자도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 속에 어떤 내용이 들어가는가? 무엇을 믿고 살아가는지’가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합니다.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죽이는 일을 거리낌 없이 행하는 행위 이면에도 독이 있는 무서운 믿음이 숨어 있습니다. 잘못된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사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려는 유대 지도자들의 모습에서도 왜곡된 믿음, 독이 있는 믿음이 발견됩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핍박하는데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테러집단 같은 수준은 아닐지라도 원리는 동일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당시 유대 사회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고, 그분의 부활을 증거하는 이들을 감옥에 잡아 가두고 채찍질하고 협박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이들이 유대 사회에서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독이 있고, 악하고, 잘못된 믿음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그들의 독이 있고, 악하고, 잘못된 믿음을 세밀하게 지적했습니다. 첫째, 그들의 마음에 시기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과 그와 한패인 사두개파의 당원들은 모두 시기하는 마음이 가득해서 들고 일어나 사도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17~18절). 그들의 시기심은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와 동일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겉으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부정하고, 신성을 모독하고, 성전을 모독하고, 로마 황제를 모독하며 반란을 일으킨다는 죄명을 씌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 마음에 시기심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예수라는 사람을 시기하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종교적 이유로 포장해서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의 영향력이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나가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존경하고 따르니까 시기심이 가득해졌기 때문입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이 많은 기적과 표적을 일으키고, 병자들을 고치고, 백성들 사이에서 칭찬을 받고, 믿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자신들의 세상적인 정치권력이 먹혀 들어가지 않는 상황이 초래되니까 시기심이 가득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도들을 감옥에 가둔 것은 단지 예수님의 이름을 전했다는 게 아니라 실상은 자신들의 시기심을 종교의 이름으로, 이념의 논리로 포장한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진실을 왜곡하려고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온 예루살렘을 너희 가르침으로 가득 채우고 이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는구나’”(28절). 마지막 부분의 ‘이 사람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자신들에게 뒤집어씌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거짓된 말입니까? 사도들은 “당신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님을 우리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습니다”라며 진실을 전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불의한 재판과 빌라도의 정치적 압력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일차적 책임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변명하고, 진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셋째,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이념을 절대화했습니다. 사도들을 잡아 가둔 사람들은 대제사장과 한패인 사두개인들입니다. 성전을 관리하는 이들인데,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들을 관망하는 태도를 보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까지는 바리새인들도 동조했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하기 시작할 때는 바리새인들이 움찔하며 귀를 기울였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믿음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전에도 전통적으로 부활을 믿지 않았던 이들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전하는 핵심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의지하는 이들을 통해서 일하신다고 전하니까, 그들의 주장과 이념을 내려놓아야만 했습니다. 그러고 싶진 않았습니다. 사두개파를 지탱했던 것이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당시 사회에서 과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자부했을지 모릅니다. ‘부활이라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며 매우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부활을 증거하니까 자신들이 믿고 의지했던 이념이 무너지는 때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덮고 싶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당시 힘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나 되어서 자신들의 이념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고, 이념을 절대화하려고 핍박을 행한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의 독이 있는 믿음, 잘못된 믿음, 자신들의 생각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진실을 왜곡하는 믿음과 대조적으로 사도들은 모든 상황에서 생명력 있는 믿음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모습에는 활기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메시지에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샘솟았습니다. 단순한 인간의 용기로는 당시 사탄의 종노릇하는 권력자들의 위협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사회적인 정의의 개념이 자리 잡지 못했던 시대입니다. 지도자가 곧 법이 되는 시대였습니다. 악에 사로잡힌 권력자들의 위협 앞에서 모두 벌벌 떠는 시대에 그들 앞에서 담대할 뿐만 아니라 받는 핍박을 기쁨으로 여겼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다는 확신,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새 생명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대답했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기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당신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그 예수를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죄 용서를 주시려고 예수를 그분 오른편에 높이셔서 왕과 구세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의 증인이고 하나님께서 그분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 또한 그 일들의 증인이십니다’”(29~32절). 사도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위협에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이 모든 상황을 이기고, 핍박을 기뻐하며 즐거워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첫째,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발걸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주어진 걸음이라는 것,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회개와 죄 사함을 주시는 구원의 역사에 우리가 참여하고 있고, 쓰임 받고 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다는 확신이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삶 속에서 때로 결정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순종하기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때로 우리가 사람 눈치를 보고, 인간관계를 고려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포기한다면 생명력 있는 믿음을 유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때로는 관계에 불편함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편을 선택할 때 그 관계가 올바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자신들의 안전만 생각한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우리의 안전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발걸음 가운데 있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증인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확신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확신이 어디서 옵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 모든 것을 뛰어 넘을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이 전해짐으로 회개와 죄 사함의 놀라운 구원이 임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둘째, 그들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사도들을 감옥에서 풀어줍니다. 놀라운 기적의 역사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라! 성전에 서서 백성들에게 이 새 생명의 말씀을 모두 전하라”(20절). 그들이 성전에서 새 생명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새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 나타난 기적은 새 생명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들이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새 생명이 그들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모욕당하는 것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새 생명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안에도 새 생명이 있습니까? 새 생명이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세상을 이깁니다. 세상에 속한 육신의 생명으로는 핍박과 환경의 어려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이 있으면 모든 상황에서 넉넉히 이기는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쇠퇴하고, 언젠가 죽음을 맞겠지만, 영원한 생명의 부활이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인지, 사람의 일인지 구분하는 두 가지 질문 오늘 본문에서 사도들이 담대하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위기 가운데 있을 때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을 때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새인이 그들을 절제시킵니다. 가말리엘은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왜 존경을 받았는지 오늘 본문을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감정적으로 치우쳐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이성적으로 판단하도록 인도합니다. 두 가지 역사 사례를 제시하며 절제시킵니다. 그의 말을 보십시오. “그러니 지금의 경우에 대해서도 내가 한마디 하자면 저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둡시다. 만일 그 목적이나 행동이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이 사람들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행여나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적해 싸우는 사람이 될까 두렵습니다”(38~39절). 참된 지도자의 미덕을 보여줍니다. 가말리엘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있습니다. 강압적인 폭력으로 그들을 막을 수 없고, 사람에게 비롯된 일이라면 시간이 흘러갈수록 실패하고 망할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라면 분명히 성공할 것인데 섣불리 나섰다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될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과거 두 가지 사건을 예로 듭니다. 36절에서 ‘드다’라는 사람이 나타나 400명까지 따랐지만, 모두 뿔뿔이 흩어지지 않았냐고 하고, 37절에서 ‘유다’라는 사람이 많은 추종자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 또한 흩어지지 않았냐고 합니다. 그러니까 시간을 두고 내버려두면 이것이 하나님께 난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가말리엘의 검증 방법이 무엇입니까? 내버려 두자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해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지혜였습니다. 가말리엘의 태도가 신중하고, 다른 공회원보다는 지혜로웠지만, 그 또한 결정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흘러서 성공하면 인정하고, 실패하면 해결되는 것이니 내버려두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성공이라는 방법은 세상적인 지혜일뿐입니다. 진리에 기초한 판단이 아닙니다. 시간이 오래 흘러가도 거짓으로 세상을 속이는 종교와 사이비가 얼마나 많습니까? 시간이 흘러서 쇠퇴하는 일들도 있지만, 악의 세력이 시간이 흐를수록 엄청난 세력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가말리엘도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봤을 때 충분히 하나님으로부터 난 일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또한 진정 지혜로운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이들보다는 낫지만, 그것 또한 핑계였습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인지, 사람의 일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두 가지 질문을 던져보면 압니다. 첫째, ‘지금 일어나는 일을 이성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가?’입니다. 사도들을 통해 일어나는 일들은 이성으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기적과 표적, 천사가 감옥에서 나오게 하는 일, 베드로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그림자라도 닿으려고 노력하는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는 일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만 봐도 그들이 인정하고, 사도들의 말을 따랐어야 했습니다. 둘째, ‘지금 일어나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가?’입니다. 핍박 받고 죽음에 처할 위기에 처해 있어도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새 생명이라는 것을 인정했어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마지막 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복되도다! 나 때문에 사람들의 모욕과 핍박과 터무니없는 온갖 비난을 받는 너희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들의 상이 크다. 너희들보다 먼저 살았던 예언자들도 그런 핍박을 당했다”(마 5:11~12). 그들은 팔복의 마지막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들만 누리는 복이 아닙니다. 이 시대에도 새 생명의 역사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복에 참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증거되는 일을 위해서 참여하고 헌신하는 이들만 이 복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 이름을 위해 모욕당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고는 기뻐하며 공회를 떠났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집집마다 다니면서 예수께서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선포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41~42절). 그들은 모욕과 핍박을 기뻐하고,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역사요, 생명의 물줄기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탁류에 끌려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물줄기에 이끌려가고 있습니까? 온누리교회가 <사도행전>의 역사에 참여하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NGO 더멋진세상을 통해 이웃을 구제하는 모든 일이 생명의 물줄기입니다. 열방에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일에 참여하고, 기쁘게 헌신하는 것이 생명의 물줄기인줄 믿습니다. 생명의 물줄기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3-23 제1484호
"이보다 큰 유익과 특별한 은혜가 없다!" -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의 유익 그리고 은혜 이보다 큰 유익과 특별한 은혜가 없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의 유익 그리고 은혜 온누리교회가 말씀과 더 가까워지고 있다. 그 중심에 ‘공동체 성경읽기’가 있다. 지난 3월 4일부터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 ‘공동체 성경읽기 개별 모임’, ‘순 공동체 성경읽기’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는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6시 30분 서빙고온누리교회 비전홀에서 진행되는데, 그 유익과 은혜가 벌써 풍성하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성도들에게 그 고백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만 해도 성경일독을 할 수 있습니다.” “이보다 큰 유익과 특별한 은혜가 어디 있냐”고 고백하는 성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성경일독이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일독을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의 크고 특별한 은혜로 손꼽을 수밖에 없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서는 <우리말성경>으로 매일 신약과 구약을 함께 듣고, 읽는다. 5분 찬양, 15분 공동체 성경읽기, 5분 메시지, 5분 합심기도 순으로 예배가 이어진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를 경험한 성도들이 한 목소리로 “함께 예배의 자리에서 성경을 듣고 읽으면서 누리는 은혜가 정말 특별하다”고 고백했다. 김국중 집사(강촌공동체)는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서 비로소 말씀 읽는 즐거움을 알았다. 그 즐거움이 얼마나 크고 좋든지 매일 새벽 교회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그동안 성경을 끝까지 읽지 못했습니다. 혼자서 성경을 읽으면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중간쯤 가서 포기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만큼 혼자 성경 읽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더니 성경 읽기가 즐겁고 행복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참석하고 있습니다. 매일 정해진 분량의 말씀을 함께 듣고, 읽는 게 가장 좋습니다. 매일 구약과 신약을 균형 있게 읽으니까 지루하지도 않고, 재미있게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시간인지 모릅니다.” 최효은 성도(일산파주공동체)는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더불어 함께 말씀을 듣고 읽으면서 경험하는 은혜가 풍성하다고 했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서 가장 좋은 점이 하나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고 있습니다. 매일 새벽 그 은혜를 기대하며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큰 화면으로 말씀을 듣고, 보면서 더욱 집중할 수 있고, 성경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정말 좋습니다.” 김희선 성도(서빙고공동체)는 성경 읽는 좋은 습관이 만들어졌다. 분주한 삶에서 실천하기가 그토록 어려웠던 성경 읽기가 이제는 즐겁고, 받은 은혜도 깊고 넓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서 받은 은혜가 기도로 이어지는 신앙의 성장도 경험하고 있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서 말씀을 듣고, 읽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특별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묵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 덕분에 말씀과 기도가 균형을 맞춘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김선경 집사(일본어예배공동체)는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 말씀을 더 듣고, 더 읽고 싶고, 더 많이 기도하고 싶어졌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서 함께 말씀을 듣고, 읽고, 기도하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 시간이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 커졌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더욱 닮아가기를 소망합니다.” 한기인 집사(강촌공동체)는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를 한마디로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는 장(場)’이라고 소개했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나면 표현할 수 없는 평안이 가득해진다고 간증했다. “매일 아침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는 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서 구약과 신약, <시편>을 함께 읽는데, 날마다 하나님이 제게 새로운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하루를 말씀으로 시작하는 게 얼마나 큰 감사인지도 깨달았습니다.” 김소망 선교사(TIM)는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서 분주한 마음을 내려놓고, 잠잠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새벽에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새벽이라는 고요한 시간에 함께 성경을 듣고, 읽고,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 안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새벽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제약이 없어서 잠잠히 하나님과 깊이 교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꼭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와보십시오.” 사역칼럼 공동체 성경읽기, 하나님 말씀 듣는 훈련! <느혜미야> 8장 2~3절에서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다”고 말씀한다. 실제 당시 사람들이 일정한 시간과 장소에 모여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성경을 읽을 때 스스로 해설자로 다가가기 전에 경청자로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게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말씀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이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씀을 중심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 자체를 듣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구성을 크게 ‘말씀’과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예배에서는 말씀을 적게는 1절, 많게는 1장 정도 읽고, 메시지(설교)를 길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은 성경을 봉독하는 부분인데, 이 시간이 너무 짧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하시는 말씀을 직접 듣는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여기신 이재훈 위임목사님의 제안으로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의 특징은 본문 길이가 길고, 메시지(설교)가 짧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시간을 늘리고, 특별히 기억해야 할 말씀 또는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을 설명하는 시간을 줄였다. 그리고 메시지(설교)가 끝나면 바로 합심기도로 넘어간다. 그래서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 1년에 성경을 일독하는데, <시편>은 두 번, 신약은 한번 읽고도 <로마서>까지 다시 한번 읽을 수 있게 된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 수도 있지만, 지속하기가 어렵다. 또한 말씀과 기도가 균형이 맞아야 하는데, 혼자서 성경을 읽다 보면 기도가 약해질 수 있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서 이것을 보완할 수 있다. 함께 성경을 읽고, 목사님의 메시지를 듣고, 기도까지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의 가장 큰 유익은 성경을 단순히 통독한다기보다 지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훈련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훈련이 매우 중요하다. 말씀을 듣는 시간을 늘리고, 사람의 목소리는 줄여서 말씀이 말씀하게 하고, 이를 듣는 훈련이 바로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인 것이다. 다시 말해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는 공동체가 함께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는 시간’이다. 공동체 성경읽기 새벽기도회에 참석해서 하나님 말씀에 더욱 귀 기울이는 훈련을 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훈련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말씀과 더욱 가까워지는 성도들이 넘쳐나기를 소망한다. / 강신익 장로(공동체 성경읽기사역팀)
2024-04-06 제1486호
“우리는 십자가의 증인들!” 2024 고난주간 새벽기도회에서 만난 성도들 “우리는 십자가의 증인들!” 2024 고난주간 새벽기도회에서 만난 성도들 2024 고난주간 새벽기도회 ‘십자가의 증인들’이 지난 3월 25일(월)부터 29일(금)까지 국내 온누리교회 모든 캠퍼스에서 이어졌다. 성도들이 십자가 목걸이를 착용하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해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했다. 회개의 십자가에 기도제목을 적어 못 박고, 미디어 금식과 하루 한 끼 금식기도를 하고 헌금을 봉헌했다. 2024 온누리교회 고난주간새벽기도회에서 만난 성도들의 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된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고난주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절기다. 부활절 하루 전 일주일을 경건하게 보내면서 예수님의 고난과 사랑을 묵상하는 기독교의 핵심 절기 중 하나다. 온누리교회 성도들은 2024년 고난주간을 아주 뜻깊게 보냈다. 십자가 목걸이를 착용하고 새벽기도회에 나와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미디어 금식과 하루 한 끼 금식기도를 하고, 그 금액만큼 헌금했다. 이 헌금은 아직 십자가를 모르는 이웃들을 섬기는 일에 사용할 예정이다. 뜻깊은 고난주간을 보낸 성도들의 아주 특별한 고백이 이어졌다. 1년에 한 번 기억하는 고난주간이 아니라 평생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살겠다는 성도, 고난주간 새벽기도회에서 경험한 예수님의 사랑을 이웃들에게 전하겠다는 고백이 이어졌다. 김명란 성도(이수공동체)는 꾹꾹 눌러 담은 기도제목을 회개의 십자가에 못박았다. 기도제목이 박힌 회개의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새삼 깨달았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만 해도 감격스럽습니다. 기도제목을 적어 회개의 십자가에 못박으면서 가족들이 생각났습니다. 이 감격을 가족들과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우리 가정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적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이번 고난주간 새벽기도회에서 예수님이 제게 특별한 마음도 주셨습니다. 저와 끝까지 동행하신다는 마음입니다. 그곳이 어디든지 예수님이 함께 가자고 하시면 무조건 순종할 것입니다.” 권기윤 성도(관악금천공동체)는 순원들과 함께 고난주간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 고난주간 묵상한 말씀을 순원들과 나누면서 풍성한 은혜를 받았는데, 그 은혜를 섬김을 통해 나타내기로 결정했다. “교회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은 순원이 고난주간 새벽기도회에 나오기로 결단했다는 말을 듣고, 그 순원을 섬기려고 함께 참석했습니다. 함께 예수님의 고난과 사랑을 묵상하고, 고난주간 새벽기도회에서 받은 은혜를 정성껏 기록해서 순 단체채팅방에 나눴습니다. 순원들과 은혜를 나눌수록 은혜가 더 커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번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해 울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내 모습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가정과 이웃을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시간도 보냈습니다. 고난주간을 보내며 풍성하게 받은 은혜를 섬김으로 통해 나타낼 것입니다.” 윤정희 성도(찬양공동체)는 고난주간 새벽기도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섬겼다. 성도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사랑을 깊이 묵상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오르간을 연주했다. 그녀의 오르간 연주가 그토록 아름다웠던 이유가 있었다. “하나님이 제게 허락하신 시간과 재능을 오직 하나님을 높이는 데 사용하겠다고 결단하고 섬겼습니다. 그 마음으로 고난주간 새벽기도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섬겼더니 예배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연주하는 오르간 선율을 따라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들에게 흘러가기를, 온전한 예배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온전히 하나님만 드러나기를, 나는 없고 오직 예수님만 높여드리기를 소망하며 연주했습니다.” 김성엽, 이예은 부부(서빙고온누리교회)는 고난주간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서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사랑을 경험했다고 고백했다. 그 덕분에 그들 부부의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가득하다. 지친 삶에서 비로소 벗어나 따듯한 예수님의 품 안에 거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고 간증했다. “사실 오랫동안 교회를 떠나있다가 예배의 자리에 왔습니다. 삶에서 고난을 겪고 있는데 그 힘든 마음을 내려놓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아내와 함께 밤새워 일하고 예배당에 왔습니다. 오랜만에 드리는 예배가 정말 좋았습니다. 오늘을 시작으로 열심히 교회에 나오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바쁜 일상에 치여 고난주간인 줄도 모르고 예배의 자리에 나왔는데, 예수님이 고난 속에 있는 우리 부부를 불러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앞으로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고, 그 사랑을 누릴 것입니다.” 최성연 성도(찬양공동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만 해도 정말 행복하다. 그 행복을 이웃들과 나누는 십자가의 증인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십자가를 잊고 살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고난주간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서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 큰 사랑을 주신 예수님을 생각만 해도 행복합니다. 이 행복을 이웃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이웃들과 함께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번 고난주간에 예수님이 제게 주신 마음은 ‘감사’입니다. 예수님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고난주간 끝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정말 행복합니다. 그 행복을 이웃들에게 전하고자 열심히 전도하고 있습니다. 이 기쁨과 행복을 온 세상에 전하고 말 것입니다.”
2024-03-30 제1485호
"성경 읽는 재미, 제대로 알게 됐다!" - ‘공동체 성경읽기’ 첫 번째 개별모임 공동체 성경읽기 성경 읽는 재미, 제대로 알게 됐다! ‘공동체 성경읽기’ 첫 번째 개별모임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말씀이다. 그 말씀을 먹고 마시는 일이 바로 ‘성경 읽기’다. 그런데 혼자 성경을 끝까지 읽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엄두도 못 낸다는 성도들도 있다. 어떻게 하면 성경을 지치지 않고, 유익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 ‘공동체 성경읽기’가 그 해답이다. 공동체 성경읽기 첫 번째 개별모임에 참석한 성도들이 그 이유를 설명했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성경을 귀로 듣고, 눈으로 읽고,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고, 일상에 적용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3월 15일(금) 서빙고온누리교회 믿음홀에서 열린 ‘공동체 성경읽기’ 첫 번째 개별모임에서 만난 성도들이 한목소리로 고백했다. 40분 성경을 들으면서 읽고, 20분 나눔하고, 30분 신앙서적 들으면서 읽고, 30분 나누고, 식사 교제를 했을 뿐인데 간증이 참 풍성했다. 혼자 성경 읽는 일이 쉽지 않았는데, 함께 성경과 신앙 서적을 들으면서 읽고, 나눔과 식사 교제까지 더해지니까 그 영향력이 굉장했기 때문이다. 일단 공동체 성경읽기 개별모임 참석자들의 표정부터 달랐다. 기대감과 설렘이 엿보였다. 말씀을 먹고 마시는 일을 얼마나 사모하는지가 눈에 보였다. 옹기종기 모여 나누는 담소의 주제도 ‘말씀’이었다. 그 기대감과 설렘이 기자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져 덩달아 신이 났다. 그런데 어떻게 첫 모임부터 참석자들의 마음을 이토록 빼앗을 수 있었을까? ‘공동체 성경읽기’ 개별모임이 시작되자마다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혼자 성경 읽는 것과 함께 말씀을 들으면서 읽는 것 자체가 달랐다. 머릿속에 성경 속 장면이 생생하게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 덕분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말씀에 몰입했다. 성경 읽는 재미를 제대로 알게 됐다. ‘공동체 성경읽기’ 개별모임에는 또 다른 묘미가 있다. 신앙서적을 들으면서 읽고, 나누는 시간이다. 첫 모임에서는 존 스토트의 <성경이란 무엇인가>를 듣고 읽었다. 딱딱하게만 느껴졌던 신앙서적이 함께 들으면서 따라 읽었더니 술술 읽혔다. 그리고 그 내용을 나눴다. 이날 모임에서 유난히 밝은 얼굴을 보이는 성도가 눈에 띄었다. 이현주 성도(S브릿지공동체)가 그 주인공이다. 그녀는 공동체 성경읽기 첫 번째 개별모임부터 특별한 은혜를 경험했다고 털어놨다. 그동안 궁금한 게 정말 많았는데 성경과 신앙서적을 읽으면서 새롭게 배우고,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무엇보다 꾸준히 성경을 읽어야겠다는 도전을 받았다고 했다. “혼자 성경을 꾸준히 읽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저의 고정된 생각으로 성경을 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공동체 성경읽기 개별모임에서 함께 말씀을 듣고, 읽고, 나누면서 정말 특별한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 마음에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신앙서적도 함께 듣고 읽으면서 폭넓은 지식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관점의 나눔을 듣는 재미도 아주 좋았습니다.” 유정원 성도(서대문공동체)도 비슷한 고백을 했다. 평소 집중해서 읽기 어려웠던 성경이 함께 읽으니까 정말 재미있었다고 했다. 함께 말씀을 듣고, 읽고, 나누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정리할 수 있어서 크게 유익했다고 말했다. “매번 성경일독을 다짐하고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에 집중해서 읽기보다 자꾸만 개인적인 묵상으로 이어지곤 했습니다. 묵상이 길어지면서 말씀 읽는 시간이 지체되기도 했습니다. 성경을 집중해서 읽어보려고 공동체 성경읽기 개별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성경을 들으면서 읽으니까 더욱 집중할 수 있었고, 성경 읽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무엇보다 성도들과 함께 나눌 수 있어서 의미 있었습니다.” <전도서> 4장 12절에서 “혼자서는 질 일도 둘이서는 당해 낼 수 있으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혼자서는 어려웠던 성경 읽기가 공동체와 함께하면 즐겁고 행복하게 할 수 있다. 강신익 장로가 공동체 성경읽기 개별모임을 강력하게 추천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혼자 성경 읽기가 몹시 힘듭니다. 신앙생활과 마찬가지로 공동체와 함께 읽어야 합니다. 온누리교회에서는 세 가지 방법으로 공동체 성경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새벽기도회, 개별모임, 순에서 공동체 성경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공동체 성경읽기 개별모임에 참석하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됩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문의: 02-3215-3239/ simonkang@handong.edu 목회칼럼 ‘확신’과 ‘겸손’이 성경을 함께 읽게 한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를 계시하는 책이다. 소위 ‘자연계시’ 혹은 ‘일반계시’라 하는 인간의 이성이나 역사, 자연을 통해 절대자의 존재를 막연하게 인식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그 절대자가 어떤 존재인지, 성품이 어떠한지, 역사하는 관점이 무엇인지 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세상의 근원이자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방법이어야 한다. 그것이 특별계시인데,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다. 이 측면에서 성경은 결코 일반적인 도서가 아니다. 말씀에 의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 없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충분한 책’이기도 하다. 인간의 모든 감정과 경험, 지혜가 담겨 있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충분하고 온전히 담고 있다. 더 나아가 성경은 모든 이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생명의 책이’다. 바울은 “성경은 능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고 말했다. 고대부터 이스라엘은 성경을 함께 읽는 전통이 있었다. 회당에서는 구약 두루마리를 펼쳐서 낭독하고, 이를 함께 듣는 것이 중요한 순서였다. 초대교회에서도 말씀을 읽고, 듣는 것은 중요했다. 특히 구약성경을 읽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들을 살피고, 묵상하는 시간이 강조됐다. 물론 말씀을 선포하며 해설하는 설교와 강해도 있었지만,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고, 듣는 것이 절대 경시되지 않았다. 말씀 자체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고, 사람의 그 어떤 해석보다 우선시하는 건강한 신앙적 문화가 교회사에 존재했다. 교회는 초대교회부터 결국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하나님의 뜻과 계시를 한마음으로 받들고, 하나님을 공동체적으로 알아간다. 동일한 말씀이지만 받는 은혜가 저마다 다름을 나눔을 통해 확인한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가운데 공동체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지속적이고 유기적으로 경험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같은 본문을 묵상한 큐티를 나누고, 예배에서 같은 말씀을 설교 본문으로 삼아 합독하는 것은 말씀이 갖는 공동체적인 측면을 강조한 결과다. 오늘날 우리는 시대적으로 ‘미디어 홍수’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인터넷에 수많은 설교가 있고, 접근이 매우 편리해졌다. 오히려 들은 메시지를 분별하는 게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이때 공동체가 성경 앞으로 모이는 게 매우 중요하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없는 유일한 계시였다.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변함없이 적용되는 진리다. 이를 독려하고 함께하는 게 바로 ‘공동체 성경읽기’다. 말씀을 읽어야 하는 필요성을 공동체적으로 인식하고, 서로 독려하며, 받은 은혜를 나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잠시 읽지 못해도 공동체가 함께하고 있으면 다음 날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하나님 앞에 서는 날까지 그분을 알아가는 거룩한 걸음을 위해 우리의 발목을 서로 묶고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공동체가 합력해서 성경을 읽는 운동을 일으킬 때 그 공동체는 생명력 넘치는 성령공동체가 될 것이다. 공동체 성경읽기가 시작되었다. 각 공동체와 순, 서빙고온누리교회 2부 새벽기도회, 금요일 개별모임에서 공동체적인 성경읽기를 함께하고 있다. 말씀 앞에 모인 성도들과 이야기 나누다 보면 한 가지 분명한 공통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겸손’이다. 성경통독을 몇 번 했든, 성경 지식이 얼마나 풍성하든, 큐티를 얼마나 오랫동안 해왔든 상관없이 하나님 말씀 앞에 절실함과 새로운 기대로 엎드리는 성도가 공동체 성경읽기에 함께 한다. 혼자 하면 된다고 자신하는 성도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매일 꾸준히 성경을 읽는 개인적인 습관이 잡혀있는 분들이 겸손하게 함께 성경 읽는 자리로 나온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자 그분을 계시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는 믿음, 말씀이 오늘날 개인과 사회의 문제에 대한 완전한 답이라는 확신, 공동체적으로 성경을 읽지 않고 혼자서 경건의 능력을 이루지 못한다는 겸손이 공동체 성경읽기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함께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이 뜨거워지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성령의 역사가 교회 곳곳에서 나타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변대섭 목사(공동체성경읽기 담당, 성북공동체)
2024-03-23 제1484호
[2024 온누리교회 선교 방향] 남과 북이 복음으로 통일되는 꿈! 2024 온누리교회 선교 방향 3. 탈북민 선교 남과 북이 복음으로 통일되는 꿈! 온누리교회 탈북민 선교 책임지는 ‘한누리통합팀’ 2024년 온누리교회 선교는 ‘난민 선교’와 ‘이주민 선교’, 그리고 ‘탈북민 선교’에 집중한다. 탈북민 선교는 남과 북이 복음으로 통일되는 꿈을 꾸고 있다. 그 매개가 바로 ‘탈북민’이다. 그런데 한국에 거주하는 탈북민들이 겪는 어려움이 매우 크다. 경제적, 문화적, 외로움 등 탈북민이 겪는 어려움을 설명하는 것조차 크고 버겁다.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고, 복음 통일을 준비하는 사역이 바로 ‘탈북민 선교’다. 통일 이후를 준비하는 사역이다. 온누리교회는 오래전부터 탈북민들의 한국 정착뿐 아니라 신앙생활을 돕고 있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김태희 성도(한터공동체)는 탈북해서 한국에 온 지 20년 정도 됐다. 한국에서 지내면서 온갖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탈북민이라는 이유로 겪은 차별이 괴로웠다. 그래도 교회(한터공동체) 덕분에 잘 이겨낼 수 있었다. “한국에서 직장 구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컴퓨터를 배웠고,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해서 취업했습니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동안 탈북민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했던 차별과 네 명의 자녀를 교육하면서 겪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교회(한터공동체) 덕분에 잘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한터공동체에서 탈북민들을 믿음으로 세워주고, 탈북민 자녀 교육을 성심껏 도와줬습니다.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송바울 팀장(한터공동체)은 탈북민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문화 차이’와 ‘소통’이라면서 탈북민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을 본질적으로 돕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탈북민들이 사회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오면서 겪는 어려움이 엄청납니다.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른 점이 정말 많습니다. 북한에서는 다른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에 와서 ‘이런 세상이 있었구나’하고 놀라기도 합니다. 또 한국에서는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같은 한국어인데도 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 차이와 어려움을 혼자 감당하면서 외로움을 호소하는 탈북민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위로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달란트를 활용해서 살도록 도와야 합니다. 탈북민들이 온전한 회복을 경험하고,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돕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사랑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탈북민들에게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온누리교회에는 탈북민들의 한국 사회 적응과 정착을 돕고, 그들과 친구 되는 사역팀이 있다. 바로 ‘한누리통합팀’이다. 한누리통합팀에서는 ‘한누리사역’과 ‘하나원사역’을 하고 있다. 한누리통합팀에는 5개 탈북민공동체가 소속되어 있다. 서빙고 한터공동체, 양재 하나공동체, 부천 한사랑공동체, 남양주 북사랑공동체, 대전 한누리공동체가 바로 그것이다. 각 지역에 거주하는 탈북민들의 필요를 파악해서 맞춤형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더불어 한국 성도들과 함께 통일을 준비하는 예배 공동체로 세워지는 훈련을 하고 있다. 하나원사역은 탈북민들과 가장 먼저 친구가 된다. 통일부 산하 정부 기관인 하나원에 소재한 하나교회와 연합해서 탈북민들의 한국 사회 정착을 돕는다. 탈북민들이 한국 생활 적응을 위해 교육을 받을 때부터 사회 정착과 신앙생활을 지원한다. 문의: 02-3463-9686
2024-02-24 제1480호
[특집] '전도하러 기차 타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찾아라! ‘전도하러 기차 타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김양신 성도가 매주 토요일 새벽 기차를 타는 이유 <온누리신문>에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찾고 있다. 이번에는 복음 전하는 일이라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가는 사람이다. 그 여섯 번째 주인공은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고백하는 김양신 성도(강남C공동체)다. 김양신 성도는 복음 전하고, 전도자를 세우는 소망을 품고 매주 토요일 새벽 서울에서 광주광역시로 가는 기차(KTX)를 탄다. 매주 이어지는 여정이 몹시 피곤하고 지칠법한데 그녀의 발걸음이 늘 가볍다. 복음 듣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정말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매주 토요일 새벽 기차를 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김양신 성도가 한 마을회관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매주 토요일 새벽 5시 8분, 김양신 성도가 기차에 몸을 싣는다. 목적지는 광주광역시다. 3년째 단 한 주도 거르지 않고 그 시간에 기차를 타고 있다. 물론 유혹이 없는 것은 아니다. ‘조금 더 잘까?’, ‘이번 주만 쉴까?’ 끊임없이 유혹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 유혹이 김양신 성도의 전도 열정을 결코 가로막지 못한다. 복음 듣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몸을 일으키게 된다. 그 뜨거운 전도 열정이 만든 ‘열두 명의 전도자들’ 김양신 성도는 전라남도에서 전도폭발훈련생들을(이하 전남 전도폭발훈련) 교육하는 훈련자다. 매주 광주에 가서 전도자들을 세우는 일을 하고 있다. 지역교회를 다니면서 전도폭발훈련 하기도 하고, 훈련생들과 함께 전라남도 곳곳을 누비며 전도를 한다. 각 지역 기차역과 고속버스터미널, 공원 등에서 노방전도를 하고, 지역교회의 요청이 있으면 직접 방문해서 복음을 전한다. 김양신 성도가 서울에서 첫 기차를 타고 광주광역시에 도착하면 오전 7시다. 역에 도착하자마자 친언니 집으로 향한다. 언니와 함께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전도폭발훈련 훈련을 한 타임 진행한다. 훈련이 끝나자마자 전라남도 함평으로 떠날 채비를 한다. 함평에서 기다리는 또 다른 훈련생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김양신 성도의 토요일은 쉴 틈이 없다. “금요일까지 일하다가 토요일 새벽에 일어나 광주에 가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정말 피곤합니다. 그래도 광주에 도착하면 하나님이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십니다. 전도할 힘을 새로 채워주십니다. 그 덕분에 저는 광주에만 오면 힘이 솟고, 마음에 기쁨이 가득합니다. 거뜬히 해낼 힘을 하나님이 채워주시니까 이곳에 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남 전도폭발훈련에는 방학도 없다. 전도자를 한 명이라도 더 세워야 한다는 김양신 성도의 열정 덕분에 3년째 한 주도 빠짐없이 훈련하고 있다. 아무리 지치고 피곤해도, 전도폭발훈련 수업을 듣는 훈련생이 한 명이어도 달려간다. 그 열정 덕분에 처음에는 전남 전도폭발훈련생이 두 명뿐이었는데, 어느새 열두 명이 됐다. 이 열두 명의 전도자들이 전남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예수님을 전하러 땅끝까지 나아갔던 열두 사도들처럼 말이다. 가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마을회관’ 하루는 전남 전도폭발 훈련생들, 강남C공동체 지체들과 함께 경상남도 남해군으로 전도 아웃리치를 갔다. 천도교 사상이 깊이 뿌리 내린 어느 마을에서 사역하는 목사님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전국적으로 비가 많이 내리던 참 궂은 날씨였다. 걱정을 가득 안고 갔는데, 궂은 날씨마저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다. “마을 어르신들 대부분 농사를 지으시는데, 비가 많이 오니까 일을 못 나가시고 마을회관에 모여 계셨습니다. 그날 세 마을을 돌았는데 마을회관에 어르신들이 가득했습니다. 마을회관에 꽉 찬 어르신들을 보면서 속으로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그곳이 바로 전도의 황금어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을 여는 일은 쉽지 않았다. 평생을 천도교와 불교를 따르던 어르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복음을 전하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급기야 김양신 성도가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농사를 지으시는 분들이라 하늘과 땅, 자연에 친숙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어르신, 농사하면서 비가 안 오면 어떡하나요?’, ‘낮과 밤, 계절, 날씨를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실까요?’ 등의 질문을 던지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어르신들의 마음 문을 열어주셨다. 김양신 성도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기도를 할 테니까 마음에 인정이 되면 “아멘”이라고 대답해달라고 요청했다. 어르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영접기도를 시작했다. 그때 어르신들이 눈물을 왈칵 쏟으며 큰 소리로 “아멘!”을 외치셨다. 어르신들이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가족을 위한 기도를 했다. 그날 이후 남해에서 만난 어르신들이 두고두고 생각났다. 그리움이 너무 깊어서 남해로 2차 전도 아웃리치를 갔다. 이번에는 의료사역팀과 함께 마을회관 네 곳을 다녔다. 어르신들에게 수액을 놔드리면서 한 분 한 분에게 복음을 전했다. 1박 2일 동안 주민 80여 명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79명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마을회관 전도는 계속 이어졌다. 이번에는 전라남도 영광군이었다. 마을 어르신들을 극진한 사랑으로 보살피는 어느 목사님이 사역하는 곳이었다. 그 목사님은 추운 겨울 붕어빵을 직접 구워서 어르신들께 나눠드리면서 복음을 전했다. 전남 전도폭발훈련팀이 힘을 보탰다. 어르신들의 눈높이에 맞춰 예수의 사랑을 전했다. 그다음 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영광백수교회에 어르신 24명이 찾아오셨다. 전남 전도폭발팀에게 마을회관은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다. “이것이 전도의 참맛!” 김양신 성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어디든 가고, 누구든 만난다. 어느 날은 광주요양병원에서 생활하시는 97세 어르신에게 복음을 전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남편의 구박 속에서 7남매를 홀로 키우며 힘들게 살아온 어르신이었다. 그 어르신은 평생 절에 가서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고 의지하며 지내셨다. 교회 다니는 자녀들이 전도하려고 하면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은 부처를 배신하는 일”이라며 한사코 반대하셨다. 자녀들이 목사나 전도사와 함께 방문해도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였다. 그 어르신을 만나러 김양신 성도가 갔다. “쫓겨날 각오를 하고 요양병원에 갔습니다. 가는 길에 복음을 어떻게 전하면 좋을지 고민이 됐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병상에 누워계신 어르신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르신 그동안 힘드셨지요?’라고 물으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평생 이웃 종교를 섬긴 마음을 알고 갔기에, 예수님을 믿는 일이 부처를 배신하는 일이 아니라는 설명했습니다. 그 어르신이 제 이야기를 쭉 들으시고, 영접기도를 하기로 했습니다. “제 말이 인정되면 두 눈을 크게 떠 달라”고 말씀드렸는데 그 어르신이 기도 한 문장마다 두 눈을 보름달처럼 크게 뜨시며 환하게 웃어주셨습니다.” 한번은 함평에 사는 한 남자를 만나러 갔다. 그는 많은 신을 섬기는 사람이었다. 집에 온갖 불상이 가득했다. 그는 세상의 수많은 신을 섬겼지만, 예수만은 거부했다. 어릴 적 교회에 다니다가 상처받은 기억 때문에 교회와 척을 지고 살았다고 했다. 그에게 김양신 성도가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형제님이 처음에는 자신이 섬기는 다른 신들처럼 ‘한번 알아나 보자’는 생각으로 제 이야기를 들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그 형제님을 만나주셨습니다. 제가 부정맥이 있는 그 형제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해드렸는데, 그 형제님이 ‘선생님이 믿는 신이 내가 믿는 신보다 강한 것 같습니다! 내 몸에서 귀신이 나가는 걸 느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에게는 귀신을 쫓는 은사나 치유의 은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많은 신을 섬기는 그 형제님의 상황에 맞춰 기적을 베푸신 것 같습니다. 제가 그 일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그날 이후 그 남자는 예수를 깊이 만났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신은 하나님!”이라고 외치는 전도자가 됐다. 이처럼 수많은 전도 성공 사례가 있으면 으쓱할 법한데, 김양신 권사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이 말을 덧붙였다. “전도는 절대 제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보내시며 ‘내가 너희와 함께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모든 장소에 예수님이 함께 계십니다. 전도는 절대 우리의 지혜와 능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나아가면 그 이후 일은 예수님이 책임지십니다. 온누리교회 모든 성도가 예수님을 의지해서 담대히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전도의 참맛을 경험하기를 기도합니다.”
2024-04-06 제1486호
[특집] '선교지로 떠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찾아라! ‘선교지로 떠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김숙경 권사의 ‘아프리카 우간다 한 달 살이’ <온누리신문>에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찾고 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의 손을 잡아주고, 이주민을 보살피고, 선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복음 전하는 일이라면 오지에 가는 일도 서슴지 않는 주인공도 만난다. 그 다섯 번째 주인공은 김숙경 권사(서빙고공동체, NGO 더멋진세상 실행위원)다. 김숙경 권사는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의료사역과 더불어 현지 교회 청년들의 신앙 교육에 힘을 쏟았다. 김숙경 권사의 가슴 뜨거운 ‘아프리카 우간다 한 달 살이’ 이야기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권사님, 우간다 함께 가실래요?” 2024년 새해가 시작되기 며칠 전, 김숙경 권사에게 메시지가 왔다. 매년 명절에 선교지로 의료사역을 가는 어느 병원 원장이 보낸 메시지였다. 올해 구정 연휴에는 NGO 더멋진세상의 사역지인 아프리카 우간다 북쪽에 있는 남수단 난민촌에 간다고 했다. 김숙경 권사가 NGO 더멋진세상 실행위원이기도 하고, 선교에 관한 일이라면 자다가도 눈이 번쩍 떠지기에 한치의 망설임 없이 “Yes!”를 외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숙경 권사의 우간다 의료사역 일정은 일주일 남짓한 시간이었다. 그녀의 의료사역 일정이 한 달로 늘어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우간다 산골에 있는 구피마을, 하나님이 사랑하는 베드로교회로! NGO 더멋진세상이 의료사역을 하는 남수단 난민촌은 아프리카 우간다 북쪽 남수단 국경 지역과 가까이 있다. 김숙경 권사와 NGO 더멋진세상 의료선교팀은 남수단 근처 ‘모요’에 숙소를 잡았다. ‘모요’는 아프리카에서도 이동이 가장 힘든 지역 중 하나다. 우간다 수도 캄팔라에서 차를 타고 북쪽으로 열 시간 달리고, 중간에서 숙박한 다음, 다시 페리(ferry)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야 갈 수 있는 곳이다. 김숙경 권사는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의료사역만 하고 돌아가기에는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 하나님이 어느 마을을 떠올리게 하셨다. 모요에서 차를 타고 30분을 더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산골짜기 ‘구피마을’이었다. 마침 그곳에 NGO 더멋진세상에서 파송한 선교사가 헌당한 ‘베드로교회’가 있었다. “사역 일정이 너무 짧은 것 같아서 아쉬워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NGO 더멋진세상 사역 보고에서 들었던 ‘구피마을’을 떠올리게 하셨어요. 하나님이 구피마을과 베드로교회가 떠오르게 하시면서 ‘내가 사랑하는 그 교회에 가지 않겠니?’라고 말씀하셨어요. 곧바로 하나님께 ‘네 알겠어요, 제가 갈게요 아버지!’라고 말씀드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순종했어요.” 그렇게 우간다 산골에 있는 구피마을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현재 베드로교회를 섬기는 선교사나 목회자가 없기 때문이다. 베드로교회를 개척했던 선교사 부부는 사역 기간이 끝나서 다른 지역으로 떠났고, 베드로교회를 관리하던 NGO 더멋진세상 우간다 지부장도 사무실을 이전해서 매주 방문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김숙경 권사가 베드로교회에서 사역하려면 숙식과 교통편을 포함한 모든 일을 혼자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70세를 코앞에 둔 여성 혼자 감당해내기에는 버거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붙잡고 결단했다. 기겁하며 도망쳐 나올 법한 그곳에서 사랑에 빠지다 김숙경 권사는 이왕 들어간 그곳에서 제대로 사역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의료사역을 위한 한 달 비자 기간을 꽉 채워서 곧장 항공편을 3주 연장했다. 그리고 기도하며 사역계획표를 만들었다. 사역의 목적과 방식, 프로그램 내용과 진행 방법 등을 빼곡하게 적었다. 사역에 필요한 물품도 샀다. 예배를 위한 키보드, 영어판 일대일제자양육 교재, 전도용 영어 팝업책, 영어 찬송가, 영어 성경, 창조과학 교육을 위한 창조모빌, 전도를 위한 복음 팔찌와 전도지 등 현지 사역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준비했다. 자비량으로 준비하는 중에 아프리카 한 달 선교를 혼자 간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들의 후원금도 들어와서 함께 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며 감사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우간다로 떠나는 날, 식사하다가 오래전 치료한 앞니 세 개가 부러졌다. 순간 크게 당황했지만, 치아가 부러졌다고 일정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구피마을에 꼭 가야 했기 때문이다. 김숙경 권사는 부러진 치아 세 개를 작은 통에 넣고 우간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김숙경 권사의 아프리카 우간다 한 달 살이가 시작됐다. 남수단 난민촌 의료사역을 마치고 들어간 구피마을은 생각보다 환경이 훨씬 열악했다. 빗물을 받아서 식수로 사용하고 있었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밤만 되면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을 뒤덮었다. 당연히 TV나 냉장고를 찾아볼 수 없었다. 문명의 흔적이 드문 오지 중 오지였다. 어지간한 사람은 기겁하며 도망쳐 나올 법한 곳에서 김숙경 권사는 행복을 찾았다. 구피마을과 사랑에 빠졌다. “흙벽돌과 흙바닥 위에 잔 나뭇가지로 지붕을 올린 우간다의 전통 가옥이 참 정겨웠어요. 무더운 날씨지만, 가끔 내리는 소나기를 맞으며 단비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곳이에요. 들판에 자라는 푸른 나무와 풀들, 그리고 그들의 주식이 되는 까사바 열매를 쉽게 얻을 수 있는 환경은 마음에 큰 평안을 주었어요. 무엇보다 커다란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나는 해맑은 얼굴의 어린아이들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어요. 구피마을은 하나님의 사랑이 창조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자연과 그 자연에 순응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작은 호의에도 큰 미소로 감사하는 멋진 사람들이 가득한 아름다운 곳입니다.” “모두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제가 한 일은 순종뿐입니다” 김숙경 권사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구피마을을 찾았다. 우간다에서 김숙경 권사가 보낸 하루는 이렇다. 아침 일찍 일어나 큐티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고, 부러진 치아 세 개를 순간접착제로 조심히 붙인다. 그날 사용할 교재들과 전날 모요시장에서 장을 본 음식과 간식을 챙겨서 썬데이 형제의 차를 타고 모요에서 구피마을 베드로교회로 출근한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베드로교회 청년 리더들과 훈련한다. 제일 먼저 온누리교회 양육의 뿌리인 QT 훈련, 그리고 일대일 제자 훈련, 점심 식사 후에는 예배를 위한 음악 교육을 한다. 악보 보는 법과 키보드 연주법을 가르쳐 준다. 잠깐 휴식 후에는 전도 훈련을 한다. 전도 훈련이 익숙해지면 창조신앙 회복을 위한 창조과학 교육도 했다. 중고등학생들이 하교한 오후 5시부터 6시 30분까지의 교육은 먼저 찬양단을 위한 발성 훈련을 한다. 이후 시간은 청년 리더십들이 맡아서 한다. 집중력도 좋고 성실해서 기대 이상으로 훈련이 잘 진행 되었다. “베드로교회에서 사역하면서 하나님이 왜 저를 이곳에 보내셨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목회자가 없는 이 교회에 훈련된 리더십이 필요한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떠난 후에도 베드로교회 청년 리더십들이 계속해서 교회를 돌보고, 다음세대를 훈련 시킬 수 있도록 그동안 배웠던 모든 것을 전수했습니다. 모든 훈련을 기쁨으로 참여한 마낫세, 패트리샤, 임마누엘의 열심에 정말 크게 감동했습니다.” 김숙경 권사는 3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베드로교회를 찾아가 청년들을 교육하고, 성도들과 어울렸다. 훈련팀과 함께 구피마을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복음도 전했다. 복음이 온 마을에 전해지기를 기대하며 전도하는 날도 만들고 전도용품도 마련해 주었다. 전하는 이나 전도 받는 이들의 얼굴에는 즐거움의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김숙경 권사의 열정이 구피마을과 베드로교회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교회 앞 학교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교회로 초대해서 창조과학 강의도 했다. 아이들은 동양에서 온 아줌마를 신기해하며 매일 교회를 찾아와 함께 찬양을 했다. 이웃 전도를 하면서 만난 마이클 할아버지 가족들은 베드로교회 일원이 됐다. 베드로교회의 리더십들은 김숙경 권사와 함께 예배 순서와 진행 등 예배 과정을 재정비했다. 찬양팀을 신설하고, 어린이 주일학교 분반 담임제도를 만들었다. 모든 성도가 성경통독도 시작했다. 이 놀라운 변화를 보고도 김숙경 권사는 끝까지 겸손했다. “모두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제가 한 일은 순종뿐입니다. 제 삶의 모든 것, 구피마을에서의 일들은 은혜의 흔적들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구피마을과 베드로교회에 제가 잠시 머물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합니다. 은혜와 감동이 넘치는 선교지에서의 한 달 살이를 온누리교회 성도님들께 적극 추천합니다.”
2024-03-30 제1485호
[특집] '화관 만드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찾아라! ‘화관 만드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함께, 묵묵히, 그리고 꾸준히 ‘평택 화관팀’ <온누리신문>에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가 찾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은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기쁨으로 섬기는 사람들이다. 네 번째 주인공은 ‘평택온누리교회 화관팀’(이하 평택 화관팀)이다. 평택 화관팀은 오는 5월 열리는 러브소나타 ‘효고’에서 사용할 화관을 제작하고 있다. 스무 명 남짓 성도들이 일본 복음화를 꿈꾸며 화관을 제작하고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기쁨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평택 화관팀을 소개한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평택온누리교회 5층에서 맛있는 냄새와 익숙한 찬양 소리가 흘러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평택 화관팀이 있었다. 스무 명 남짓한 성도들이 함께 찬양하면서 흰색, 보라색, 초록색의 예쁜 조화를 엮어 화관을 만들고 있었다. 곳곳에 흐드러진 알록달록한 꽃들과 평택 화관팀원들의 얼굴에 핀 웃음꽃이 어우러져 꽃동산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주방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 맛있는 냄새가 향기가 없는 조화에 기분 좋은 냄새를 불어넣고 있는 것 같았다. 평택 화관팀이 있는 자리는 분명 하나님과 뛰노는 꽃동산이었다. 함께하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에 평택 화관팀은 오는 5월 15~16일 막 오르는 러브소나타 ‘효고’에서 사용할 화관을 만들고 있다. 화관 제작은 이름도 빛도 없이 섬기는 일 중 하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일본의 영혼들에게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섬기고 있다. 화관 만드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 글루건(Glue Gun)이 내뿜는 뜨거운 열에 화상을 입기도 하고, 반복 작업을 오래 해서 손가락 지문이 닳기도 한다. 20여 명이 화관 2천 개를 만들기에 제작 기간도 길다. 몸도 고되고 힘든 일이 한둘이 아니지만, 찬양과 미소, 감사가 끊이지 않는다. 함께하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이다. 송현주 집사는 평택 화관팀에서 섬기기 전까지 러브소나타를 잘 알지 못했다. 온누리교회가 일본에서 여는 큰 집회 정도로만 생각했다. 우연한 기회에 평택 화관팀에서 섬기게 되었는데, 함께하는 기쁨을 알아버렸다. “평택 화관팀에서 하루만 일해보면 ‘와!’라는 감탄밖에 안 나옵니다. ‘이렇게 사랑과 감사가 넘치는 공동체가 또 있을까?’ 싶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꽃 한 송이 한 송이에 담긴 의미를 묵상하고, 함께 찬양하며, 화관을 만드는 일이 정말 즐겁습니다. 새벽부터 나와서 작업을 하는 데 꼭 명절에 친척들이 모인 것 같습니다. 평택 화관팀이 모이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이 얼마나 기다려지는지 모릅니다.” 옆에서 박은화 집사가 한마디 거들었다. 박 집사도 함께하는 기쁨에 빠져 2년째 평택 화관팀에서 섬기고 있다. “당연히 힘든 날도 있습니다. 매주 이틀씩 새벽부터 오후까지 작업하려면 피로가 많이 쌓입니다. 꾀를 내서 ‘하루 정도는 빠져볼까?’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화관팀에서만 경험하는 기쁨이 정말 커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습니다. 저희가 만든 화관을 쓰고 예수님을 만날 일본인들을 생각하면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이 올라옵니다. 평택 화관팀은 그 기대와 감격을 함께 나누며 작업하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고, 어색해도 묵묵히 섬기는 은혜 평택 화관팀에 어렵고, 힘들고, 어색한 상황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섬김을 이어가는 성도들이 있다. 임선명 집사는 지난해 말 갑작스레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두렵고 우울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담담하고 평안했다. 하나님이 고쳐주실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술 날짜가 바로 잡혔고, 수술도 잘 끝났다. 임선명 집사의 빠른 회복에 의료진이 놀랄 정도였다. 임선명 집사는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할 방법을 찾았다. 그런데 암 환자라 치료 경과를 살펴야 하고, 항암치료 등을 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몰라서 장기적인 사역에는 참여하기가 어려웠다. “하나님께 정말 감사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는 못 견디겠더라고요. 그래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작은 자를 섬기는 일을 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 마음을 가만히 묵상하는데 하나님을 모르는 영혼들을 위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기쁜 마음으로 참여했던 평택 화관팀에 다시 참여했습니다.” ‘평택 화관팀에 돌아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풍성한 나눔과 교제가 정말 좋았기 때문이다. 일본을 향한 선교의 마음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평택 화관팀에서 섬기다 보면 화관의 꽃송이가 의미하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고, 각자 경험한 은혜를 나누면서 신앙의 깊이를 더해갑니다. 일본 선교에 대한 마음도 커집니다. 러브소나타를 사모하게 되고, 그곳에 모일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한경진 집사는 평택 화관팀에서 ‘한 권사’라고 불린다. 여자 성도들 틈에 남자 혼자 껴서 열심히 섬기는 모습을 칭찬하며 붙여진 애칭이다. 한경진 집사는 아직 러브소나타에 한 번도 참여하지 못했는데, 화관팀원 모집 소식을 듣고 관심이 생겼다. “사실 화관을 제작하는데 제가 할 일이 있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래도 심부름이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평택 화관팀에 왔습니다. 저 혼자 남자라 살짝 후회도 했지만, 무르기에는 이미 늦었더라고요(웃음). 어쩔 수 없이 섬김을 시작했는데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한경진 집사는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다. 꽃을 예쁘게 붙이는 일은 어려워도, 짐을 나르고, 장을 보고, 풀을 엮고, 화관 쌓는 일은 도맡아 할 수 있었다. 어느새 평택 화관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한경진 집사에게도 평택 화관팀이 가장 중요한 사역이 됐다.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여자 집사님들의 수다를 듣는 것도 꽤 재미있습니다(웃음). 그 재미있는 이야기 안에 복음을 향한 순수한 마음들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동화되어서 러브소나타를 더욱 사모하게 되고,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섬김은 섬김을 낳고… 평택 화관팀장 김성옥 권사는 12년째 러브소나타 화관을 만들고 있다. 올해 나이 76세다. 힘에 부칠 때도 있지만, 기쁨으로 꾸준히 섬기고 있다. 양재꽃시장에서 직접 꽃을 고르고, 일정을 조율하고, 매주 왕복 4시간 거리를 오가며 화관을 제작한다. 김성옥 권사의 섬김에 감동해서 평택 화관팀을 찾아온 성도가 한둘이 아니다. 섬김은 섬김을 낳는다. 김순분 권사도 김성옥 권사의 섬김에 감동해서 평택 화관팀을 찾아왔다. 그 추운 날 끼니도 제대로 못 챙기면서 섬기는 성도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날 이후 평택 화관팀의 식사는 김순분 권사가 책임진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아침 식사와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등갈비찜, 짜장밥, 굴만두국, 묵은지 김치찜 등 메뉴도 다채롭다. 평택 화관팀 성도들이 “김순분 권사님 음식 먹으려고 매주 나온다”고 말할 정도로 음식 솜씨가 빼어나다. “다들 맛있게 먹어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작은 섬김에도 큰 기쁨을 돌려주는 분들이 계셔서 더욱 힘이 납니다. 하나님의 일은 누구든지, 어떤 일이든지 동참하면 기쁨을 배로 경험하게 됩니다. 평택 화관팀의 섬김을 보고 더 많은 성도가 러브소나타에 관심을 가지고, 섬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만든 화관을 쓰고 예수님을 만날 일본의 영혼들이 또 다른 이들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통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러브소나타 화관의 의미 중앙 흰 꽃 3개: 성부, 성자, 성령 보라색 꽃: 회개 흰 꽃: 구원 의미: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고, 구원받아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
2024-03-23 제1484호
[신생사역팀을 소개합니다!] ‘원더풀 라이프’ 신생사역팀을 소개합니다! ‘원더풀 라이프’ 사역에는 결코, 은퇴가 없다! 6070 세대를 위한 ‘원더풀 라이프’ 총인구 중에서 65세 이상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7% 이상이면 ‘고령화 사회’, 14% 이상이면 ‘고령사회’, 20% 이상이면 ‘초고령사회’로 분류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고령 인구가 약 19.2%를 차지하는 ‘고령사회’다. 내년에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측한다. 고령화 현상의 여파를 교회도 피해 가지 못한다. 하루빨리 교회에서도 초고령사회를 대비해야 한다. 사회선교본부 신생사역팀 ‘원더풀 라이프’가 출범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6070 세대를 위한 사역팀 ‘원더풀 라이프’를 소개한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이제는 노년 세대를 ‘제2의 주일학교’라고 부른다. 그만큼 교회에 고령 성도가 많고, 계속 늘고 있다. 온누리교회만 해도 60세 이상 64세 이하 성도가 약 1만 4천여 명, 65세 이상 90세 이하 성도가 약 1만 8천여 명이나 된다. 시니어 성도가 3만 명에 이른다. 더 무서운 변화는 사회도, 교회도 고령화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점이다. 70세가 되면 사회에서 대부분 은퇴한다. 교회에서도 70세가 되면 공식적으로 맡은 직분에서 은퇴한다. 그런데 직분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여전히 섬길 힘이 있다. 시간과 물질을 충분히 드려서 섬길 수 있다. 사역에는 결코 은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은 마음과 다른 것 같다.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만 65세 이상 성도 2천여 명을 대상으로 ‘고령 교인 실태조사’를 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시니어 성도 38%가 ‘젊은 사람이 모인 곳에 가면 스스로 위축감을 느낀다’고 응답했다. 22%는 ‘교회에서 나에게 관심이 멀어지는 것 같다’고 응답했다. ‘고령 성도 10명 중 1명이 우울 증상을 보인다’는 결과도 있다. 현재 한국 교회에서는 시니어 성도들이 직분 혹은 사역에서 은퇴한 이후 역할이 없어서 외로움을 겪는 경우가 참 많다. 아직 사역을 감당할 체력과 능력이 충분한데도 말이다. 직분 혹은 사역에서 은퇴했다는 이유로 소외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신생사역팀 ‘원더풀 라이프’가 그래서 출범했다. 6070 성도들이 교회에서 소외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이어가도록 돕기 위해서 만들었다. 그동안 은퇴 이후 역할을 찾도록 도왔던 ‘은빛날개’ 사역이 막을 내리고, ‘원더풀 라이프’가 새로 만들어졌다. ‘원더풀 라이프’는 6070 세대가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경험, 전문성을 살려서 이 땅에 사는 동안 끝까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돕는 사역팀이다. 6070 세대들이 교회에서 그 아름다운 역할을 이어가도록 방법을 모색 중이다. 심리학자 에릭슨은 노년을 3단계로 구분했다. 65세 이상 74세 이하를 노년 초기, 75세 이상 84세 이하를 노년 중기, 85세 이상을 노년 말기라고 정의했다. 현재 온누리교회에는 노년사역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원더풀 라이프’와 ‘시니어아카데미’다. ‘원더풀 라이프’는 노년 초기, ‘시니어아카데미’는 노년 중기를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다. 사회가 고령화하는 만큼 교회에도 시니어 성도가 계속 증가한다. 이에 발맞춰 노년사역의 역할과 필요성이 매우 크고 중요해졌다. 노년 세대가 교회에서 경험과 전문성을 살려 믿음의 경주를 이어가도록 돕는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바로 그 역할을 ‘원더풀 라이프’가 감당한다. 6070 세대 성도들이 하나님 안에서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여러 사역팀과 협력해서 사역을 이어가도록 연결한다. 전도, 농어촌 선교, 이주민 선교, 탈북민 선교, 2000선교 등 사역팀과 연결하고, 일대일제자양육, 큐티, 가스펠프로젝트 등 양육사역에도 참여하도록 돕는다. 배드민턴, 탁구, 골프, 독서, 노래, 미술, 악기 배우기 등 6070 세대 성도들의 관심 분야를 파악해서 여러 취미활동을 할 예정이다. ‘원더풀 라이프’에는 6070 세대 성도 중에서 교회에서 계속 사역하기를 원하는 성도, 그동안 사회생활에 전념하느라 사역을 해본 적 없지만, 은퇴 이후 새로운 마음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고 싶은 성도, 교회에서 친밀한 친구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 시니어 성도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오는 3월 28일부터 4월 11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30분 서빙고온누리교회 두란노홀에서 열리는 ‘원더풀 라이프 세미나’에 참가하면 더 자세한 내용을 설명해준다. 문의: 02-3215-3434 사역칼럼 은퇴를 은퇴하십시오! 인생의 후반을 교회와 함께하는 성도들의 삶이 ‘원더풀 라이프’다. 인생의 황금기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헌신하도록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성도들이 위축되거나 소외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감당하는 영적 라이프 사이클을 늘려가야 한다. 나이가 들면 사회에서 은퇴한다. 교회에서도 모든 직분자가 공식적으로 70세에 은퇴한다. 그러나 은퇴 후에 남은 세월이 참 길다. 그 시간 동안 후배 성도들의 섬김을 받기만 할 수는 없다. 나이 들수록 더욱 의미 있는 활동을 해야 한다. 시니어 성도들은 한국 교회 발전의 주역들이다. 고난을 경험했고, 어려움과 시련을 이겨낸 세대다. 가정과 사회에서 부모님 잘 모시고, 자녀들을 잘 양육했던 국가 발전의 초석이었다. 그들이 사회에서 역할을 다하고 더는 설 곳이 없어지는데, 교회에서마저 그렇게 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6070 세대가 되어도 건강하다. 가지고 있는 소중한 믿음과 지혜, 경험과 지식을 그냥 두기가 너무 아까운 게 사실이다. 6070 세대는 시간과 몸을 드리고, 물질을 드려서 섬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교회에 점점 늘어나는 시니어 성도들이 위축되거나 소외당하지 않고, 생명과 호흡이 있는 날까지 사명을 감당하도록 도와야 한다. 먼저, 목회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세대 간 단절이 일어나지 않도록 교육이 필요하다. 세대 간 단절에서 오는 이질감이나 갈등으로 시니어 성도들이 교회에서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 설 자리가 좁아진 기성세대가 ‘원더풀 라이프’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끝까지 감당하며 마음껏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김형석 명예교수(연세대학교)는 “주위 사람들을 보니 60~75세 무렵에 가장 창의적이고, 아름다운 시기를 보낸다. 좋은 책도 바로 그 시기에 썼다”고 말했다. 교회에도 초고령화 현상이 시작되었다. 2028년이 되면 한국 교회를 이어가는 주력 세대가 60~70세가 된다고 한다. 고령화된 한국 교회는 우리 앞에 실존하는 문제로 다가왔다. 비켜 갈 수 없는 현실이다. 하나님은 시니어 성도들을 소명의 일꾼으로 세우시기를 원하신다. 시니어 성도들은 부흥의 시대를 경험했고, 교회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본 세대다. 신앙의 연륜이 쌓여있고, 시간과 몸을 드리는 여유도 있다. 부르심을 따라 물질을 드려 섬기고 싶은 헌신도 있다. 교회는 시니어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어떻게 쓰임 받을 수 있게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시니어 성도들을 그냥 나이 들게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부르심을 따라 살도록 믿음으로 교육하고, 훈련 시켜서 영적 라이프 사이클을 연장해 줘야 한다. 모세는 80세에, 갈렙은 85세에 부르심을 받았다. 시니어 성도들도 나라와 민족과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다음 세대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줘야 한다. 하나님이 시니어 성도를 위해서 준비하신 ‘제2의 부르심’을 받고, 주체적으로 일어나 부흥을 감당하는 세대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 노인이 많아지고, 개인의 삶에서 노년기가 더욱 길어지고 있다. 다르게 표현하면 지혜로운 어른들이 많아져서 다음세대에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다. 어른은 지혜로운 사회의 주인공이다. 노년 초기에 존경받는 어른으로 살도록 교회에서 교육받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면서 기름 부으심이 넘치는 축복을 받기를 바란다. 그러면 노년 중기와 말기에도 아름답고 존경받는 어른으로 세워질 수 있다. 6070 세대가 은퇴를 은퇴하는 원더풀 라이프를 소망한다. / 심길섭 장로(강촌공동체, 원더풀 라이프 담당)
2024-03-16 제148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