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 - 교육] 현대사회에서 기독교 교육의 길을 묻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 - 교육 현대사회에서 기독교 교육의 길을 묻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교육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 왔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비춰 볼 때도 기독교는 진로 결정과 교육 경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평생의 업이 되고, 미래 방향이 될 수 있는 전공을 결정하는 고3 시절이었다. 담임선생님이 내 부모님이 기독교인임을 아시고 사회사업학과(현재 사회복지학과) 진학을 권하셨다. 여러 어려운 사람을 돕는 전공인데 교회 사람들이 많이 하는 것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필요한 분야라는 설명을 듣고 그 전공을 선택했다. 내 첫 직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복지기관인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이었다.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은 1921년 설립되었는데, 당시 남감리회 여선교회가 모아 준 헌금으로 종로에 있는 순화궁을 사들여 개조했다. 그리고 여성을 위한 교육, 선교, 사회사업을 했다. 가정으로부터 버림받고, 생활고에 시달리던 여성들의 교육 그리고 위생과 영양 상태가 나빴던 어린이들의 건강한 양육 등을 돕는 다양한 사업을 실시하며 근대 한국 사회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초기 관장들은 벽안(碧眼)의 선교사들로 우리나라의 교육, 사회복지, 보건의료 영역에서 지대한 공헌을 하신 분들이었다. 기독교가 교육을 통해 사회변화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지식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는 특성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성경적 지식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읽고, 해석하고, 전달하는 능력이 믿음을 위한 기초가 되어왔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인물들은 매우 높은 영성을 가진 동시에 뛰어난 지성을 겸비한 사람들이었다. 이집트의 문물을 배운 요셉, 왕자 신분으로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모세, 포로의 신분으로 바벨론에 끌려갔지만, 왕궁의 교육을 받으며 대제국의 총리를 담당했던 다니엘은 기독교 가정에서 자녀의 모델이 되기를 희망하는 대표적 인물들이다. 그동안 기독교 교육이 교육의 정의적(affective) 측면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루어냈다고 생각한다. 교육학자인 크래쓰웰(Krathwohl)은 교육의 정의적 영역을 설명하면서 내면화의 원리를 따라 교육이 이뤄지는 다섯 단계를 설명했다. 이것은 인간의 가치와 태도를 형성하는 것과 관련 있다. 말씀을 듣고 집중하는 수용단계, 말씀을 들으며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반응단계, 몸이 아프고 바쁜 일이 있어도 예배를 우선하는 가치화 단계, 일상의 다차원적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 및 통합하는 조직화 단계를 거쳐 성경적 사고와 반응이 일관되게 내면화되어 성격을 이루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주일학교 교육, 기독교 가정 교육, 성인을 위한 예배와 소모임 등이 모두 이 원리를 실현해 왔다. 가르쳐줄 선생님도, 학교도, 교재도 부족해서 기독교 선교단체와 교회의 지원 없이는 사회가 계몽될 수 없었던 시절은 지났다. 이제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지식인들이 만든 전달력 좋은 유튜브 채널이 얕고 넓은 지식에서부터 깊고 심오한 지식까지 전달해주는 시대가 왔다. Chat GPT를 위시한 첨단 인공지능이 단 몇 초 만에 필요한 정보를 유려한 문장으로 요약, 정리, 분석까지 해주는 작금의 상황에서 기독교 교육이 세상의 변화, 새롭게 대두되는 사회 문제와 관련하여 성경적 해답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는 충분한 대응이 되어 있을까? 미국의 사회적 이슈와 대중의 인식, 인구사회적 변화를 조사하는 명망 있는 비영리 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에서 동일한 연구를 세 번의 시간대에 나눠 수행한 결과를 소개했다. 과학자 1천 명에게 신(기독교의 하나님 또는 초월적 존재)을 믿는지를 1914년, 1996년, 2009년에 각각 조사했다. 1914년 첫 조사가 시작된 후 과학기술이 급속히 발전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첫 번째 조사보다 신을 믿는다는 응답률이 낮아질 거로 전망했다. 그런데 세 번의 시간대 모두에서 믿는다는 응답과 믿지 않는다는 응답이 유사한 비율로 나타났다. 과학기술의 발전 자체가 지성인들이 초월적 존재를 믿는 여부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과학자가 아닌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는 신을 믿지 않는다는 응답보다 믿는다는 응답이 과학자들보다 두 배 이상 높게 나타났다. 지식을 탐구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초월적 존재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유의미하게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술변화, 세계정세의 변화, 환경의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나는 시기에는 가치의 혼란이 동반된다. 사람들은 과거에 했던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다시 묻고, 다양한 딜레마 속에서 그에 대한 기독교의 답을 요구할 것이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정의적 차원에서의 기독교 교육이 더욱 발전해야겠지만, 인지적 차원에서 통합적 사고를 동원해 유연하면서도 성경의 본질을 설명하는 사고력을 기르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분명 성령의 감동하심과 깨닫게 하심 없이 인지적 요소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대한 지식, 세상의 원리를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지식이 분명 영적 깨달음의 도약대로서 기능한다. 지금은 일반인들도 과학자들만 접근할 수 있었던 정보, 사유의 방식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교회 공동체와 기독교 인재들이 다양한 지식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지 우리 스스로 성찰해 볼 때가 아닌가 싶다. / 정상원 집사(온누리세계관학교, 강남C공동체)
2024-03-23 제1484호
[맛있는 말씀 해설] “…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0:34). 맛있는 말씀 해설 “…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0:34).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신’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오직 하나님만 신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향해서 신이라고 부를까? <요한복음> 10장 34절은 예수님이 <시편> 82편 6절 말씀을 인용하신 부분이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신의 아들’로 지칭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신’에 대한 논쟁을 하는 배경은 다음과 같다. 유대인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이 ‘동일한 존재’라고 말씀하신다. 이를 들은 유대인들은 인간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신’이라고 하는 것에 분노한다. 유대의 율법에는 하나님을 모독한 죄를 돌로 치는 형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한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 논증으로 유대인들의 공격을 방어하신다. 첫 번째 논증은 <요한복음> 10장 34절 말씀에 등장하는 <시편> 82편 6절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시 82:6). <시편> 82편 6절의 내용은 부정한 재판에 대한 경고다. 재판을 위임받은 사람들이 부정한 방법을 그만두고, 가난한 자와 죄 없는 자들을 옹호하라는 권고의 말씀이다. 재판장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도움과 공정을 가져오기 위해서 파견된 자다. 그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 생각은 <출애굽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출애굽기> 21장 1~6절을 보면 ‘노예는 7년째마다 풀어줘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출 21:6a). 여기서 ‘재판장’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이다. 엘로힘은 ‘신들’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하나님에게서 특정한 사명을 위임받는 사람을 ‘신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예수님은 성경이 그렇게 부르는 것을 인용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위임받은 내가 나에 대해서 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두 번째 논증은 <요한복음> 10장 36절 말씀에 있다.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요 10:36).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셔서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왔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재판관들처럼, 예수님은 진리와 정의, 사명을 위해서 구별되어 이 세상에 보냄받은 자이기 때문에 자신을 ‘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오직 성경에 기초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당시 유대교 랍비들의 입장에서 보면 압도적 설득력이 있는 이론이었다. 랍비들은 그동안 성경 말씀을 근거로 반론을 해 왔기에 예수님의 말씀에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참 신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살아갈 때 하나님께 ‘신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게 될 것이다. / 오은규 목사(성동광진공동체)
2024-03-23 제1484호
[맛있는 말씀 해설] “네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막 10:21)” 맛있는 말씀 해설 “네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막 10:21)” 종교적 열심을 가진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영생을 얻기 위해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막 10:17)”라고 질문한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네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막 10:21)”고 답하신다. 이 말씀은 물질을 포기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노력으로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청년의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주신 것이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막 10:27). 영생의 길, 구원의 길이 곧 제자의 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 16:24)”고 말씀하셨다. 자기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다. ‘자기 부인’의 모델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창조주 하나님이신 영적인 존재이시다. 그런데 우리의 구속을 위해 사람이 되심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셨다. 그리고 어린 양의 제물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셨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기 부인을 통해 죄인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스스로는 그 어떤 노력으로도 ‘자기 부인’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 부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기에 죽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 나의 정체성에서 나올 수 없다. 나의 정체성이 부인되고, 새로운 정체성을 입기 위해서는 나의 정체성을 초월하는 하늘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바울은 ‘자기 부인’을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갈 2:20)”이라고 표현했다. 또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고 고백한다. ‘자기 부인’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 없는 사랑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 수 있다. 자녀를 위해 죽음마저 불사하는 부모의 숭고한 사랑도 ‘자기 부인’과는 거리가 멀다. 부모의 정체성이 희생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불교 등에서 주장하는 자기를 비우는 것도 ‘자기 부인’이 아니다. 비움의 목표가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자신이 신이 되거나 신과 하나가 된다는 허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살처럼 자신을 실제로 죽이는 행위는 ‘자기 부인’이 아니라 자기 파괴다. 죽음도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물질주의와 진화론에 사로잡힌 세상은 ‘자기 부인’을 알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다. 오직 육체와 물질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의 감정도 화학물질의 작용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과 관련된 호르몬이 분비되는 것이 아니라 호르몬이 분비되기 때문에 내가 사랑한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설명하는 기묘한 주장을 사람들은 과학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는 존재임을 부인하기 때문에 과학이 도리어 실재를 왜곡하고 있다. ‘자기 부인’은 오직 영적인 존재인 인간만이 표현할 수 있다. 또한 영적 실체인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기 부인’을 통해 제자의 정체성을 입었다면 삶의 주어가 달라진다. 부자 청년은 ‘내가’라는 주어로 질문했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하나님’이 주어가 된다. 나는 단지 하나님이 시키는 일에 순종한 ‘물 떠온 하인’과 같은 기적의 증인일 뿐이다. 삶의 주어가 바뀌면 삶에서 일어나는 고난과 결핍도 영광이 된다. 이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을 통해 진정한 나를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고, 하나님이 나의 삶을 인도하시는 놀라운 복이 우리에게 가득하기를 기도한다. / 이은일 장로(성동광진공동체,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2024-03-16 제1483호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 영화 주인공이 되어 살아가는 삶 기독교 세계관으로 살아가기 영화 주인공이 되어 살아가는 삶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막 1:1). <마가복음>은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소식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포다. 그리고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통해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를 위해 길을 예비하게 될 것을 선포한다. 나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도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보았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시는 하나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먼저 길을 곧게 하는 세례 요한, 마침내 그 일을 온전히 십자가에서 완성해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여신 예수님, 그리고 그 구원의 길을 가고자 하는 이 땅의 백성들과 동행하시는 성령 하나님. 영화의 흐르는 장면처럼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내 머릿속에 흘러간다. 그리고 생각하게 된다. 영화를 이루는 이 수많은 장면 중에 과연 나는 어디에 들어가 그 영화의 완성을 도울 수 있을까? 필름을 되돌려 내가 과거 한 장면으로 들어갈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미 그 장면들은 세례 요한을 비롯한 수많은 신앙의 선배가 만들어 놓은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특이한 점은 아직 이 영화가 완성된 게 아니라 지금도 제작 중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도 앞으로 제작되는 영화 일부분에는 참여할 수 있다. 영화의 절정을 ‘클라이맥스’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시는 부분이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될 수 있다. 나도 예전에는 이 영화의 절정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영화의 절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아니라 그 이후 이어지는 크리스천들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 이후 살아내는 모습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같다. 일반적인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짧은 순간을 화려하게 불태우고 사라진다. 관객은 절정의 시원함과 통쾌함을 경험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절정의 순간이 계속 이어진다. 수많은 크리스천이 자신의 삶을 통해 절정을 만들고, 이어가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영화가 기획될 때 초점은 크리스천들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다. 크리스천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삶이 변하고, 진정한 인생을 살아내는 모습이 영화의 초점이자 절정이다. 이것이 영화 제작자인 하나님의 의도다. 크리스천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은혜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살아가는 모습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장면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반드시 그 장면의 주인공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인류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 대신 죽게 하셨다. 그 부분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로 기획되었었다면, 이 영화는 이미 끝났어야 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으로 인해 영원한 생명을 얻은 크리스천들의 삶이 이어지는 모습으로 영화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그렇기에 제작자의 의도는 십자가 사건은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영화의 강력한 도입이다. 감독이 기획한 이 영화는 크리스천들의 삶이다. 크리스천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고, 만들어가는 진정한 삶에 관한 이야기다. 창조주와 태초의 그 아름다운 관계를 회복한 크리스천들의 새로운 삶 이야기다. 그것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라는 생각을 더욱 확신한다. 결국 내가 이 영화의 완성을 이루어가는 수많은 주인공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나는 제작자가 꿈꾸는 위대한 영화의 절정을 만들어 가는 주인공 중 하나’라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확신하는 것은 내가 교만해서가 아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창조자의 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크리스천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분명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주인공다운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영화감독의 의도에 충실한 삶의 장면들을 만들어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이 영화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올려 드린다. / 이광순 장로(노원공동체)
2024-03-16 제1483호
[주일 강단] 생명의 물줄기는 막을 수 없다 생명의 물줄기는 막을 수 없다 사도행전 5:27~42 / 이재훈 위임목사 전 세계를 위협하는 테러단체나 무자비한 독재자들의 출현, 그리고 거짓된 이념을 추종하는 사이비 종교들, 이 모든 악의 흐름 이면에 사람들의 믿음을 이용한 거짓된 악이 존재합니다. 왜곡된 믿음, 독이 있는 믿음이 그들 가운데 있습니다. 믿음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무신론자도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 속에 어떤 내용이 들어가는가? 무엇을 믿고 살아가는지’가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합니다.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죽이는 일을 거리낌 없이 행하는 행위 이면에도 독이 있는 무서운 믿음이 숨어 있습니다. 잘못된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사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려는 유대 지도자들의 모습에서도 왜곡된 믿음, 독이 있는 믿음이 발견됩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핍박하는데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테러집단 같은 수준은 아닐지라도 원리는 동일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당시 유대 사회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고, 그분의 부활을 증거하는 이들을 감옥에 잡아 가두고 채찍질하고 협박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이들이 유대 사회에서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독이 있고, 악하고, 잘못된 믿음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그들의 독이 있고, 악하고, 잘못된 믿음을 세밀하게 지적했습니다. 첫째, 그들의 마음에 시기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과 그와 한패인 사두개파의 당원들은 모두 시기하는 마음이 가득해서 들고 일어나 사도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17~18절). 그들의 시기심은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와 동일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겉으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부정하고, 신성을 모독하고, 성전을 모독하고, 로마 황제를 모독하며 반란을 일으킨다는 죄명을 씌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 마음에 시기심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예수라는 사람을 시기하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종교적 이유로 포장해서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의 영향력이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나가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존경하고 따르니까 시기심이 가득해졌기 때문입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이 많은 기적과 표적을 일으키고, 병자들을 고치고, 백성들 사이에서 칭찬을 받고, 믿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자신들의 세상적인 정치권력이 먹혀 들어가지 않는 상황이 초래되니까 시기심이 가득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도들을 감옥에 가둔 것은 단지 예수님의 이름을 전했다는 게 아니라 실상은 자신들의 시기심을 종교의 이름으로, 이념의 논리로 포장한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진실을 왜곡하려고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온 예루살렘을 너희 가르침으로 가득 채우고 이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는구나’”(28절). 마지막 부분의 ‘이 사람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자신들에게 뒤집어씌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거짓된 말입니까? 사도들은 “당신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님을 우리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습니다”라며 진실을 전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불의한 재판과 빌라도의 정치적 압력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일차적 책임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변명하고, 진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셋째,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이념을 절대화했습니다. 사도들을 잡아 가둔 사람들은 대제사장과 한패인 사두개인들입니다. 성전을 관리하는 이들인데,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들을 관망하는 태도를 보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까지는 바리새인들도 동조했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하기 시작할 때는 바리새인들이 움찔하며 귀를 기울였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믿음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전에도 전통적으로 부활을 믿지 않았던 이들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전하는 핵심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의지하는 이들을 통해서 일하신다고 전하니까, 그들의 주장과 이념을 내려놓아야만 했습니다. 그러고 싶진 않았습니다. 사두개파를 지탱했던 것이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당시 사회에서 과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자부했을지 모릅니다. ‘부활이라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며 매우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부활을 증거하니까 자신들이 믿고 의지했던 이념이 무너지는 때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덮고 싶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당시 힘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나 되어서 자신들의 이념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고, 이념을 절대화하려고 핍박을 행한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의 독이 있는 믿음, 잘못된 믿음, 자신들의 생각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진실을 왜곡하는 믿음과 대조적으로 사도들은 모든 상황에서 생명력 있는 믿음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모습에는 활기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메시지에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샘솟았습니다. 단순한 인간의 용기로는 당시 사탄의 종노릇하는 권력자들의 위협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사회적인 정의의 개념이 자리 잡지 못했던 시대입니다. 지도자가 곧 법이 되는 시대였습니다. 악에 사로잡힌 권력자들의 위협 앞에서 모두 벌벌 떠는 시대에 그들 앞에서 담대할 뿐만 아니라 받는 핍박을 기쁨으로 여겼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다는 확신,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새 생명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대답했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기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당신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그 예수를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죄 용서를 주시려고 예수를 그분 오른편에 높이셔서 왕과 구세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의 증인이고 하나님께서 그분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 또한 그 일들의 증인이십니다’”(29~32절). 사도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위협에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이 모든 상황을 이기고, 핍박을 기뻐하며 즐거워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첫째,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발걸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주어진 걸음이라는 것,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회개와 죄 사함을 주시는 구원의 역사에 우리가 참여하고 있고, 쓰임 받고 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다는 확신이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삶 속에서 때로 결정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순종하기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때로 우리가 사람 눈치를 보고, 인간관계를 고려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포기한다면 생명력 있는 믿음을 유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때로는 관계에 불편함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편을 선택할 때 그 관계가 올바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자신들의 안전만 생각한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우리의 안전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발걸음 가운데 있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증인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확신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확신이 어디서 옵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 모든 것을 뛰어 넘을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이 전해짐으로 회개와 죄 사함의 놀라운 구원이 임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둘째, 그들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사도들을 감옥에서 풀어줍니다. 놀라운 기적의 역사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라! 성전에 서서 백성들에게 이 새 생명의 말씀을 모두 전하라”(20절). 그들이 성전에서 새 생명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새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 나타난 기적은 새 생명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들이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새 생명이 그들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모욕당하는 것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새 생명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안에도 새 생명이 있습니까? 새 생명이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세상을 이깁니다. 세상에 속한 육신의 생명으로는 핍박과 환경의 어려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이 있으면 모든 상황에서 넉넉히 이기는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쇠퇴하고, 언젠가 죽음을 맞겠지만, 영원한 생명의 부활이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인지, 사람의 일인지 구분하는 두 가지 질문 오늘 본문에서 사도들이 담대하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위기 가운데 있을 때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을 때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새인이 그들을 절제시킵니다. 가말리엘은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왜 존경을 받았는지 오늘 본문을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감정적으로 치우쳐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이성적으로 판단하도록 인도합니다. 두 가지 역사 사례를 제시하며 절제시킵니다. 그의 말을 보십시오. “그러니 지금의 경우에 대해서도 내가 한마디 하자면 저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둡시다. 만일 그 목적이나 행동이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이 사람들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행여나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적해 싸우는 사람이 될까 두렵습니다”(38~39절). 참된 지도자의 미덕을 보여줍니다. 가말리엘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있습니다. 강압적인 폭력으로 그들을 막을 수 없고, 사람에게 비롯된 일이라면 시간이 흘러갈수록 실패하고 망할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라면 분명히 성공할 것인데 섣불리 나섰다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될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과거 두 가지 사건을 예로 듭니다. 36절에서 ‘드다’라는 사람이 나타나 400명까지 따랐지만, 모두 뿔뿔이 흩어지지 않았냐고 하고, 37절에서 ‘유다’라는 사람이 많은 추종자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 또한 흩어지지 않았냐고 합니다. 그러니까 시간을 두고 내버려두면 이것이 하나님께 난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가말리엘의 검증 방법이 무엇입니까? 내버려 두자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해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지혜였습니다. 가말리엘의 태도가 신중하고, 다른 공회원보다는 지혜로웠지만, 그 또한 결정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흘러서 성공하면 인정하고, 실패하면 해결되는 것이니 내버려두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성공이라는 방법은 세상적인 지혜일뿐입니다. 진리에 기초한 판단이 아닙니다. 시간이 오래 흘러가도 거짓으로 세상을 속이는 종교와 사이비가 얼마나 많습니까? 시간이 흘러서 쇠퇴하는 일들도 있지만, 악의 세력이 시간이 흐를수록 엄청난 세력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가말리엘도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봤을 때 충분히 하나님으로부터 난 일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또한 진정 지혜로운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이들보다는 낫지만, 그것 또한 핑계였습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인지, 사람의 일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두 가지 질문을 던져보면 압니다. 첫째, ‘지금 일어나는 일을 이성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가?’입니다. 사도들을 통해 일어나는 일들은 이성으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기적과 표적, 천사가 감옥에서 나오게 하는 일, 베드로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그림자라도 닿으려고 노력하는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는 일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만 봐도 그들이 인정하고, 사도들의 말을 따랐어야 했습니다. 둘째, ‘지금 일어나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가?’입니다. 핍박 받고 죽음에 처할 위기에 처해 있어도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새 생명이라는 것을 인정했어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마지막 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복되도다! 나 때문에 사람들의 모욕과 핍박과 터무니없는 온갖 비난을 받는 너희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들의 상이 크다. 너희들보다 먼저 살았던 예언자들도 그런 핍박을 당했다”(마 5:11~12). 그들은 팔복의 마지막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들만 누리는 복이 아닙니다. 이 시대에도 새 생명의 역사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복에 참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증거되는 일을 위해서 참여하고 헌신하는 이들만 이 복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 이름을 위해 모욕당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고는 기뻐하며 공회를 떠났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집집마다 다니면서 예수께서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선포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41~42절). 그들은 모욕과 핍박을 기뻐하고, 마땅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역사요, 생명의 물줄기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탁류에 끌려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물줄기에 이끌려가고 있습니까? 온누리교회가 <사도행전>의 역사에 참여하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NGO 더멋진세상을 통해 이웃을 구제하는 모든 일이 생명의 물줄기입니다. 열방에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일에 참여하고, 기쁘게 헌신하는 것이 생명의 물줄기인줄 믿습니다. 생명의 물줄기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3-23 제1484호
[주일 강단] 거룩한 충격, 각성을 일으키다 거룩한 충격, 각성을 일으키다 사도행전 5:1~11 / 이재훈 위임목사 하나님은 때로 충격적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각성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 어떤 모습에 있다 할지라도 버리지 아니하시며 사랑하십니다. 그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때로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서 그 사랑에 합당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도록 일깨우시는 일을 행하십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타난 충격적 사건이 하나님의 의도 속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성경 역사 속에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을까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여러 번 나옵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에서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성소에서 다른 불을 분향했을 때 죽임을 당했습니다, 또 가나안을 정복하러 갔을 때 아간이라는 사람이 전리품 중 일부를 도둑질 했을 때 그의 족속이 모두 멸망당합니다. 다윗 시대에 법궤를 모셔올 때 웃사라는 사람이 흔들리는 법궤를 붙잡음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죽어나가는 일들, 하나님의 엄한 징계가 임하는 일들이 역사 속에서 종종 나타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서 그 시대 백성들을 일깨우시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거짓도 들어오지 않고, 거룩을 일깨우려는 ‘충격적인 일’ 초대교회 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초대교회에 임한 성령으로 인해서 공동체가 거룩하고, 순결하고, 성령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 공동체가 최대한 거룩을 지키며,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하는 일에 쓰임 받아야 하기에 조그마한 거짓도 들어오지 않도록 거룩을 일깨우려고 충격적인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이 부부가 땅을 팔아서 헌금을 했는데, 판값의 일부를 감추고 그것이 전부라고 교회에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거짓말의 대가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내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 그래도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겠다고 헌금한 부부에게 너무 심한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거짓의 대가가 얼마나 큰 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새롭게 시작하시는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 충격적인 사건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모든 경우를 충격적인 사건으로 다루시지는 않습니다. 헌금으로 거짓말 한 대가로 죽는 일을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다루신다면, 역사적으로 각 교회에서 헌금 시간에 죽는 사람이 많이 나왔을 것입니다. 충격적인 일을 일반화하지 않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샘플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저는 주일학교에서 이 이야기를 읽었을 때 굉장히 두려웠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주일학교 때 헌금으로 과자를 사 먹고 헌금을 내지 않는 사실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같은 일을 한 번 이상 저지른 분들은 모두 이 본문에 읽을 때마다 가슴이 떨릴 지도 모릅니다. 이 사건이 충격적인 이유는 그 결과가 죽음이라는 것 외에도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살펴본 <사도행전> 4장에서 자기의 재물을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않고 헌신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랬다는 게 아닙니다. 그 중에 헌신된 이들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초대교회에서 리더십 역할을 하는 헌신된 가정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참여한 것은 일종의 특별헌금 성격이었습니다. 4장 후반부를 보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필요를 따라 함께 나누고, 때로 땅이나 집을 팔아서 헌금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소개하는 한 인물이 바나바였습니다. 레위족 사도들이 요셉을 ‘바나바’, 즉 ‘위로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바나바가 헌신한 사건을 <사도행전> 4장 마지막 부분에 기록한 것은 그의 헌신이 가장 모범적이고, 대표적인 헌신이며, 그러한 영적인 물결을 일으킨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 이후 <사도행전> 4장 마지막 구절에 바나바의 헌신과 대조적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장절을 다시 구분한다면 저는 <사도행전> 5장 1~11절도 4장에 넣겠습니다. 그러면 바나바의 헌신과 아나니아와 삽비라 문제가 대조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도 이것을 의도적으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람직한 모델로서 바나바의 헌신을 기록하고, 모두에게 충격을 주고 각성을 주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사건도 있었지만, 충격을 주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책망하는 두 가지 이유 “아나니아라는 사람은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재산을 팔았습니다. 그는 그 돈의 일부를 떼어 자기 것으로 숨겨 두고는 나머지를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와 바쳤습니다. 그의 아내도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1~2절). 부부가 함께 결정했습니다. 일부를 떼어 숨겨 두고는 전부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분별의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를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아나니아야, 어떻게 네가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 성령을 속이고 땅값으로 받은 돈의 일부를 네 것으로 몰래 숨겨 놓았느냐 그 땅은 팔기 전에도 네 소유였고 또 팔고 난 뒤에도 네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이런 일을 마음에 품었느냐? 너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다’”(3~4절). 베드로가 책망하는 것은 두 가지 내용입니다. 첫째, 사단이 아나니아의 마음에 가득해서 성령을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일이 사단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동시에 이 일은 아나니아 스스로 마음에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베드로가 아나니아를 전부를 내지 않고 일부는 자신이 가졌다고 책망하는 게 아닙니다. “너희들은 왜 전부를 안 넣느냐?”가 아닙니다. “전부를 내지 않고 왜 일부를 내었느냐?”가 아니라 “일부를 냈으면서 왜 전부를 넣었다고 거짓말하느냐?”입니다. 베드로가 전부를 헌금하지 않았다고 책망했고, 하나님이 전부를 안 냈다고 그들을 죽음으로 취하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말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언제 당신에게 헌금하라고 강요했느냐? 아무도 강요한 적 없고, 하나님은 강요하신 분도 아니다. 바나바는 아무도 강요하지 않고 요청하지 않았지만, 자진해서 기쁨으로 헌신했고, 기쁨으로 모두에게 위로가 되었다. 당신도 그렇게 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당신이 얼마를 헌금하든 그것은 우리가 관여할 바도 아니고, 땅을 판 것도 당신 소유의 재산이요, 그중에 아주 작은 일부만 냈어도 그것은 당신의 자유다. 문제는 당신이 일부를 내놓고 전부라고 부풀려서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이것이 베드로의 책망입니다. “그 땅은 팔기 전에도 네 소유였고, 또 팔고 난 뒤에도 네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지 않았느냐?”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이 필요하신 분도 아니요, 당신에게 요구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당신의 자유에 맡기신 것입니다. 팔아서 일부만 헌금해도 되는데, 그것이 전부인 듯 포장한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속인 게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행위보다 동기를 보신다 아나니아가 책망을 듣는 순간 쓰러졌고, 죽었습니다.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그로부터 3시간 뒤 아나니아가 그렇게 된 것을 모르는 삽비라가 베드로에게 왔습니다. 베드로는 삽비라에게 남편에 관한 소식을 전하지 않고 질문했습니다. “땅을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네. 이뿐입니다.” 그 순간 삽비라 역시 죽었습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의 상황을 말해주지 않은 것은 삽비라가 “아닙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면, 그에게는 기회가 주어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삽비라에게 기회를 주고자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삽비라도 거짓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왜 이 부부가 일부를 내면서 전부를 냈다고 거짓말하는 결정을 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왜 마음을 사탄이 이용하도록 내어줬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앞서 <사도행전> 4장 바나바의 헌신과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 부부에게 비교의식이 작동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가 순수한 헌신을 통해서 모두에게 위로를 주고, 존경받고, 영적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했고, 바나바처럼 재산의 전부를 내놓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전부를 내놓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서 전부를 내놓은 사람이 되려니 거짓말하는 방법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바나바의 헌신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헌신이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내면을 하나님이 보고 계셨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실제보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습니다. ‘위선’입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영적으로 헌신하고, 사람들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과 더 가까운 사람처럼 인정받고 싶었던 위선의 죄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얼마를 내놓는지에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행위인가보다 어떤 동기인가를 중요하게 보십니다. 하나님 두려워하고, 사탄의 역사에 경각심 “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니 나를 아실 것입니다. 내가 앉고 서는 것을 아시고 멀리에서도 내 생각을 아십니다. 주께서는 내가 길을 다니는 것과 내가 눕는 것을 아시니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샅샅이 알고 계십니다”(시 139:1~3).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위선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사건을 엄하게 다루시고, 충격을 주심으로 우리에게 교훈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첫째, 초대교회가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고, 사탄의 역사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지도록 하셨습니다. “온 교회와 이 일에 대해 소문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11절).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교회를 더욱 거룩하고 순결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게 하셨고, 그 결과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새롭게 시작한 이 공동체를 거룩하게 하심으로 구약의 율법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롭게 시작할 때 나답과 아비후를 엄하게 다루신 것처럼, 다윗 왕국이 새롭게 시작할 때 그를 엄하게 다루신 것처럼, 새롭게 행하시는 시기에 매우 엄하게 다루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다른 사람보다 나를 더 엄하게 다루신다는 느낌이 든다면 “내가 하나님 역사의 중요한 시점에 서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면 맞을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는 백성이 되게 하셨고, 그 결과 사탄의 역사에 경각심을 가지고 깨어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 거짓 없는 진리 위에 세워지고 성장해야 둘째, 교회는 거짓 없는 진리 위에 세워지고 성장해야함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 후반부를 보면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함으로 여러분의 영혼을 깨끗하게 해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청결한 마음으로 서로 깊이 사랑하십시오”(벧전 1:22). 진리에 순종함으로 거짓 없는 사랑이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사랑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거짓을 얼마나 미워하시는지를 교회가 깊이 깨달을 때, 하나님이 그 교회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것처럼 포장하는 것만큼 위험한 게 없습니다. 때로 우리에게는 믿음의 영역에서 잘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고백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그대로 인정하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온전한 것처럼, 믿음이 좋은 것처럼 포장할 때 그 거짓 속에 세워진 신앙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순에서 자신의 연약함, 때로는 불신과 의심 등을 있는 그대로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은 척하는 관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진리에 함께 순종해 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그 공동체를 견고하게 하실 것입니다. 또 다른 형태의 사랑과 은혜 셋째, 하나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또 다른 형태의 사랑과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처분이 가혹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사탄의 종노릇하며 살지 않도록 먼저 데려가신 것입니다. 유다와 같이 심각하게 망가진 영혼이 되지 않도록 하려고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취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지옥에 갔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은 자들이었다면 영원한 죽음은 피했을 것입니다. 때로는 이 땅에 오래 있는 것보다 빨리 데려가는 게 그 영혼을 위해서도 좋다고 생각하실 때 하나님이 또 다른 형태의 은혜를 베푸실 수도 있습니다. 성령 충만했던 초대교회조차 사탄의 공격을 받았다면 이 시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성령공동체에는 얼마나 많은 영적 공격이 있겠습니까? 외부의 공격은 우리를 결코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부에서 일어나는 위선, 거짓, 속임수는 우리를 사탄의 먹이로 내어줍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처럼 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의식할 필요 없이 하나님만 의식하면 됩니다. 하나님만 의식한다면 자신을 포장할 필요가 없고, 자신을 위선으로 포장할 필요가 없다면 사탄이 공격할거리가 없어집니다. 온누리교회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거짓 없는 사랑, 진리 위에 세워지는 견고한 공동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사탄이 틈타지 못하고, 사탄이 공격할거리가 없는 강건한 교회가 되어서 이 시대에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쓰임 받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3-16 제1483호
[주일 강단] 나눔으로 채우고, 위로로 세워가다 나눔으로 채우고, 위로로 세워가다 행 4:32~37 / 이재훈 위임목사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충만한 부어주심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 기적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첫째,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어떠한 위협이 오더라도 피하지 않고 담대하게 전하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둘째, 세상을 다르게 살아가는 공동체로 변화되었습니다. 궁핍한 이들에게 기쁨으로 자신의 물질을 나눠 주는 기적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세계관이 바뀌고, 인생관이 바뀌고, 물질관이 바뀝니다. 물질에 대해서 자유롭게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드리고 싶어지고, 궁핍과 가난 가운데 있는 이들의 필요를 돌보고 싶어집니다. 누군가의 강요나 부탁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행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구조적으로 살펴보면 33절에서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다”고 하고, 32절과 34~35절에서는 “사도들이 자신의 재물을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아니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 공동체가 되었다”고 합니다. “큰 권능으로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말씀 앞뒤에 필요를 나누는 모습이 감싸고 있습니다. <신명기> 15장 4절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무튼 너희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없어야 하는데 그것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차지하라고 주시는 그 땅에서 그분이 너희를 넉넉하게 복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신 15:4). 당시 예루살렘교회 성도 중에는 가난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사회 신분이 종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최저생계조차 유지할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또 한편으로 했던 일이 가난한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을 위한 구제헌금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는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기꺼이 얼마를 기부했기 때문입니다”(롬 15:25~26). 사도 바울의 중요한 사역을 보여줍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예루살렘교회 성도들로부터 은혜를 받고 빚진 자가 되었으니 이제 그들의 물질에 필요를 도와 그 빚을 갚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냐”는 말씀도 다른 서신에 나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어떤 치유나 기적의 영역으로만 제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중요한 역사는 성품의 변화, 내면의 변화, 관계의 변화, 공동체의 변화입니다. 연약한 지체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 그리고 어떤 성도에게 진정으로 성령님이 임했는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이 두 가지 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어떻게 참여하고 있는가와 동시에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고 돕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가입니다. 자기중심주의와 이기심 넘어서는 공동체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됐습니다.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고 가진 것을 모두 공동으로 사용했습니다”(32절). “그들 가운데 부족한 것이 있는 사람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따금씩 땅이나 집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바쳤습니다. 그러면 누구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 주었기 때문입니다”(34~35절). 이 말씀은 공동 소유, 강제적 재산 공유를 지향하는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게 아닙니다. 이들에게는 여전히 사유재산이 있었습니다. “집집마다 함께 모였다”는 말씀이 있고, “이따금씩 땅이나 집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이 그것을 팔아서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에게 바쳤다”고 했습니다. 개개인의 소유권을 부정하는 어떤 이념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넘어선 것은 사유재산이 아니라 이기주의였습니다. 그들은 평등이라는 이념을 세우는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평등’이라는 말 자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 단어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어떤 필요가 있는 이들에게 기꺼이 나눠 줄 수 있는 공동체, 자기중심주의, 이기심을 넘어서는 공동체였습니다. 이념과 제도로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평등이라는 이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본질적 차이를 법과 제도로 제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평등한 사회는 차이를 제거하는 게 아니라 차이를 넘는 사랑, 어떤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연약함을 보듬는 일이 자발적으로 이뤄질 때 가능합니다. 법과 제도를 통해서 평등이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대한민국 교육시스템도 평등하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자는 의미에서 평준화 정책을 했습니다. 내년이 50년 째 될 것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평준화’라는 이념이 가져온 교육 정책이 우리나라의 엄청난 잠재력을 일으키기보다 둔화시켰습니다. ‘평준화’가 아니라 ‘평둔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학교를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사립학교들이 커리큘럼을 재량껏 세울 수 없게 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많은 기독교 사립학교가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대신 종교학을 배웁니다. 종교학 교과서를 보면 불교나 이슬람에 많은 지면 할애가 되어 있는데, 기독교는 2~3페이지입니다. 모든 사립학교가 그것을 의무적으로 행하게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이 평준화라는 정책입니다. 모든 학생들을 평등하게 가르친다는 이념이 잘못 적용된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잠재력이 말살될 것입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출산율이 저하 된다고 국가에서 여러 일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학교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라”, 가정의 중요성, 남성과 여성으로 구성된 가정을 가르치도록 허용해 주면 되는데, 몇 십 년 동안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고 종교학을 가르친 결과 중 하나입니다. 물밀듯이 포스트모더니즘과 가정 해체주의가 들어와서 그 속에서 자라난 다음 세대들이 가정을 잊어버리고 해체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것의 결과가 저출산입니다. 교육 평준화가 초기에는 기여한 바가 있지만, 갈수록 우리나라를 묶고 있고, 병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평등’이라는 이념을 교육에 들이댄 것입니다. 평등이라는 단어가 잘못됐다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법과 제도로 그것을 실현하겠다는 게 잘못된 것입니다. 경제,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잘못 적용하는 것입니다. 재정과 물질에 대한 시각의 변화 성령님이 임하셨을 때 각자의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 사랑하고, 축복하는 공동체가 나타났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재정과 물질에 대한 세 가지 시각의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첫째, 소유가 아니라 관리자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셨을 뿐입니다. 우리는 물질의 청지기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하나님 위치에 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주인이시며, 우리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둘째, 독점이 아니라 나눔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이 시키는 것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여러 종류의 종이 있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것도 안하는 종이 있고, 시키는 것만 하는 종이 있고,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하는 종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공동체의 모습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스스로 했습니다. 그들이 참된 청지기 입니다. 셋째, 욕심이 아니라 필요입니다. 필요와 욕심은 다릅니다. 자신은 필요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 보면 욕심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필요로 가장해서는 안 됩니다. 필요와 욕심을 구분하고, 도와주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도 구분해야합니다. 나는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필요가 아니라 욕심이면 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평등은 인간적 차이를 제도적으로 제어할 때 찾아오는 게 아닙니다. 모든 차이를 뛰어넘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모습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믿음 안에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습니다. 자발적으로 함께 나눴기 때문입니다.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요, 독점이 아니라 나눔이요, 욕심이 아니라 필요를 채우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들에게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들을 칭찬하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도들은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증언했고 풍성한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 임했습니다”(33절). 큰 권능과 풍성한 은혜가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나눔과 필요를 채우는 공동체였습니다. 9월 열리는 서울 제4차 로잔대회 주제가 ‘교회여,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자’(Let the church declare and display Christ together)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고 증언하자는 것입니다. 바로 이 공동체의 모습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내는 것입니다. 선포는 말로 하는 것이지만, 나타내는 것은 삶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공동체의 모습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세상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위로의 아들 ‘바나바’ “키프로스 출신인 요셉이라는 레위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를 바나바라고도 불었는데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의 밭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36~37절). 키프로스는 그가 태어난 지역 이름입니다. 레위는 조상이고, 이름은 요셉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바나바’입니다. 그 뜻을 ‘위로의 아들’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사도들이 그를 요셉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별명을 부르기를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별명이 바나바인데, 그 뜻은 위로의 아들입니다.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히브리인이었기에 ‘~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히브리어에는 형용사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형용사적인 표현을 할 때도 명사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형용사가 없기 때문에 “사랑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하며 너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리니”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우리가 원수까지 사랑해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입니다. 자녀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속 썩이는 자녀가 있고, 불순종하는 자녀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아버지를 닮은 자녀가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자녀라는 의미입니다. ‘빛의 자녀’는 다른 사람을 비춰주는 삶을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위로의 아들’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데 최고인 사람, 그를 만나면 누구나 위로를 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명사를 통해 형용사적인 최상급을 표현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위로를 주었습니다. 격려해 주었습니다. 자신의 밭을 팔아서 교회에 내놓은 것만으로 그 별명을 얻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눔을 통해 자기를 과시하고, 자기가 영광 받기 원한다면 위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나눔을 기뻐하고, 그가 다른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느껴졌기에 이름을 ‘위로의 아들’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가 왜 위로의 아들이라고 불렸는지 알 수 있는 사례가 <사도행전> 11장에 나옵니다. 바나바의 이름이 <사도행전> 곳곳에 나오는데, 11장을 보면 그가 예루살렘교회의 파송을 받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공동체의 기적 나눔 그리고 격려와 위로 “이 소식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전해지자 그들은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 도착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온 마음을 다해 주께 끝까지 충성하라고 그들 모두를 격려했습니다. 그는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 나오게 됐습니다”(행 11:22~24). 그가 안디옥에 파송을 받았습니다. 안디옥에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파송을 받아 기뻐하며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가르쳤다’는 단어가 나오지 않고, ‘격려했다’고 합니다. 똑같은 가르침인데 어떤 사람은 책망을 하고, 어떤 사람은 격려합니다. 똑같은 내용을 가지고 격려하며 세우는 사람이 있고, 정죄하며 비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행한 주된 일은 격려하는 일이었습니다. 위로와 격려는 결이 같은 사역입니다. 바나바는 물질적인 나눔만이 아니라 마음에 가득한 위로를 나누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가 위로의 사역, 격려의 사역으로 행한 가장 중요한 일은 바울을 세운 것입니다. 다소에 있던 바울을 데리고 와서 안디옥에 세웠습니다. 바울이 사역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는데 겨우 세워진 게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 이력,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던 이력 때문에 자책감, ‘메시아를 몰라봤다’는 절망감과 씨름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의 절망감과 자책감을 씻어 준 인물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의 위로와 격려 없었다면 바울이 <사도행전> 전면에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세웠기에 <사도행전> 역사가 달라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2차 전도여행을 함께 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바울의 이름이 주로 나오지만, 바울 곁에 는 늘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위로와 격려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물질적인 나눔만이 아니라 위로와 격려를 나누는 사람이었습니다. 꼭 나눌 게 있어야 나눔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물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위로와 격려에 목마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절망과 좌절과 낙심과 자책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바나바의 위로와 격려가 물질의 나눔보다 클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공동체의 기적은 한편으로는 나눔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위로였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바나바가 되어서 위로와 격려가 가득하고, 나눔이 가득하고, 그것을 세상에 흘려보내는 온누리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3-09 제1482호
[주일 강단] 합심기도, 진동을 일으키다 합심기도, 진동을 일으키다 사도행전 4:23~31 / 이재훈 위임목사 기도를 배우는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 기도함으로써 배웁니다. 기도에 관한 많은 책을 읽고, 세미나를 듣는다 할지라도 개인이 직접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를 배울 수 없습니다. 자신이 실제 기도하지 않는 한 기도는 배워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를 배우고 싶어서 기도에 관한 많은 책을 펼쳐 놓고 읽었는데도 도저히 알 수 없어서 무릎 꿇고 하나님께 외쳤습니다. “하나님 모르겠습니다. 가르쳐 주십시오.” 그 순간 기도를 배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실제 기도함으로써만 배울 수 있습니다. 둘째, 다른 성도들의 기도를 듣고 배웁니다. 성경에 믿음의 사람들의 기도가 나타납니다. 특히 예수님의 기도가 나타납니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기도가 나타나고, 대제사장의 기도, 수많은 <시편>의 기도, 장로님들의 대표기도, 다른 성도들의 기도, 부모의 기도 등을 들으면서 배웁니다. 어린 자녀가 가정에서 부모의 언어를 들으면서 배우듯이, 기도 또한 믿음의 삶을 사는 성도들의 기도를 들음으로써 배웁니다. 셋째, 함께 기도함으로써 배웁니다. 이것은 개인이 기도하는 것이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고, 성령님의 임재가 임할 때 기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제자들의 모습에서 주목할 것은 그들이 함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선물, 곧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을 때 그들이 함께 모여 기도했습니다.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세우는 과정에서도 그들이 함께 기도했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고 난 이후 그들은 더욱 힘 있고 강하게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며 빵을 떼는 것과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행 2:42). <사도행전> 4장 마무리 부분에서도 성전 문 앞에서 있었던 기적의 파장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놀라운 기적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베드로가 몰려든 회중에게 회개를 호소하며 설교했고, 남자만 4천 명 이상 회심했습니다. 또 한편의 파장은 그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가로 막으려는 이들의 움직임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 사두개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가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지 못하도록 가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권세자의 위협도 진실을 가둘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풀려났고, 그들이 교회 공동체에 일어난 일을 함께 나누고, 대제사장으로부터 받았던 위협까지 모두 전했습니다. 그때 그들이 함께 소리 높여 기도 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영적 능력 “그들은 이 말을 듣고 함께 소리 높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24절). 베드로와 요한의 보고를 듣고 함께 소리 높여 기도한 것은 그들이 풀려난 것을 기뻐하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고난과 핍박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위협하는 대적자들이 망하게 해 달라는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어떤 위협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주의 말씀을 전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주여, 그들의 위협을 보고 주의 종들을 도와 주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게 하소서”(29절). 그 사람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알려면 기도 내용을 보면 됩니다. 무엇을 기도하는지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이 담대하게 전파되는 것을 소리 높여 기도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능력과 복음의 능력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로 인생의 위기 앞에서 실패합니다. 위기 때 실패하는 것은 기도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고난과 유혹이 우리를 쓰러뜨리는 것 같지만, 실상 우리를 쓰러지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힘이 사라지고, 기도가 우리 삶 속에서 능력을 잃어버렸기에 고난과 유혹 앞에서 쓰러지는 것입니다. 면역력이 강한 사람은 어떤 바이러스와 병균도 이겨내지만, 면역력이 약하면 큰 타격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가 영적 면역력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외부의 고난과 유혹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안에 그것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 능력은 기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기도를 통해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위기 속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도한 모습이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기도해야 할지를 보여줍니다. 복음이 전해지기 위해서는 합심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각자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각자의 문제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이 증거되는 사명을 위해서는 합심해서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함께 성령의 임재를 위해서 기도했고, 사도들을 세우는 일에도 함께 기도했습니다. 또 말씀과 교제를 나누며 함께 기도했고, 주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기 위해서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다가오는 핍박으로부터 피할 길을 구하지 않고, 핍박을 견디고 이기는 담대함을 구했습니다. 다가오는 핍박에 대해 그들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고 더욱 열리기를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 있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합심기도의 능력은 함께 소리 높여 기도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나만 아는 은밀하고, 조용하고, 친밀한 기도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깊은 고요함 속에서 침묵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함께 공동체가 소리 높여 간절히 기도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함께 소리 높여 드리는 기도는 머리에서 나오는 기도가 아니라 가슴에서 나오는 기도입니다. 아무나 소리 높여 기도하는 게 아닙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만이 소리 높여 기도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소리 높여 기도 했던 몇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깨어진 마음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이 무너진 고국의 현실을 보면서 깨어진 마음에서 소리 높여 기도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성전이 훼파되고, 나라의 주권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능욕 받는 것을 보며 깨어진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바울도 복음을 증거하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영혼들을 위해서 깨어진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제자들에게 합심기도를 요청한 때가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함께 기도하기를 요청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합심기도는 쉬운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다”고 하셨는데 왜 두세 사람입니까? 두세 사람이 합심해서 소리 높여 기도하는 게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소리 높여 기도하는 것과 깨어진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서 나옵니다. 합심기도의 신앙적 기초는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 그들이 함께 소리 높여 기도할 때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소리 높여 함께 기도할 때 하늘과 땅,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이 여전히 역사하고 있음을 선포했습니다. 모든 기도의 가장 중요한 토대는 하나님의 주권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인간의 죄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그분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반역한 무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그분을 대항하고, 그분이 보내신 이를 대적하며,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도에서 고백하고 있는 게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섭리 가운데 있다는 고백입니다. “주의 능력과 뜻에 의해 미리 정하신 일을 그들이 단지 이룬 것뿐입니다”(28절). 여러분, 능력 있는 기도가 되려면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깊은 고백과 신뢰가 선포되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통치자들, 세상의 권세,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이 여전히 통치하고 계신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이 밑바닥에 깔려 있어야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고, 세상을 통치하시며 섭리하시고, 세상의 그 어떤 세력과 악한 무리들도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날 수 없고,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구원하시고,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항할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소리 높여 기도하는 근거입니다. 합심기도의 중요한 신앙적 기초는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도 늘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의식해야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기도가 하나 되어서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함께 기도하는 것은 단지 의무가 아닙니다. 놀라운 특권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도들의 합심기도는 하나님께 단지 도움을 얻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 동역자가 되는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기 위해 기도하며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한 피조물이고, 우리의 필요를 구하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도들은 기도하면 할수록 점점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변화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바뀌는 것입니다. 서서히 바뀔 수도 있고, 일시적으로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마음이 뒤집어져서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도움을 얻기 위해, 필요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로 나가는 사람들은 절대로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움과 필요를 구하고, 기도하는 영혼들을 이끄셔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제자들처럼, 함께 소리 높여 기도하는 동역자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주의 말씀이 담대하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때때로 표적과 기사도 나타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복음이 전해지도록 표적과 기사를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함께 모여 기도할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 “주의 손을 펴서 주의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을 통해 병을 고치게 하시고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소서”(30절). 그들이 유명해지고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이 전해지기 위해서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신 것도 사람들이 복음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기도를 해 보십시오. “이 치유의 기적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고,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놀라운 표적과 기사를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그들이 기도를 마치자 모여 있던 곳이 진동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져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31절). 그들이 함께 합심해 소리 높여 기도했을 때 더욱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고 충만해지는 깊이가 더 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이 합심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합심해서 소리 높여 기도할 때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구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 징표가 바로 모인 곳이 진동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모인 곳이 진동하는 것처럼, 우리 삶에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함께 모여 기도할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2024-03-02 제1481호
성경 읽는 재미, 제대로 알게 됐다! ‘공동체 성경읽기’ 첫 번째 개별모임 공동체 성경읽기 성경 읽는 재미, 제대로 알게 됐다! ‘공동체 성경읽기’ 첫 번째 개별모임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말씀이다. 그 말씀을 먹고 마시는 일이 바로 ‘성경 읽기’다. 그런데 혼자 성경을 끝까지 읽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엄두도 못 낸다는 성도들도 있다. 어떻게 하면 성경을 지치지 않고, 유익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 ‘공동체 성경읽기’가 그 해답이다. 공동체 성경읽기 첫 번째 개별모임에 참석한 성도들이 그 이유를 설명했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성경을 귀로 듣고, 눈으로 읽고,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고, 일상에 적용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3월 15일(금) 서빙고온누리교회 믿음홀에서 열린 ‘공동체 성경읽기’ 첫 번째 개별모임에서 만난 성도들이 한목소리로 고백했다. 40분 성경을 들으면서 읽고, 20분 나눔하고, 30분 신앙서적 들으면서 읽고, 30분 나누고, 식사 교제를 했을 뿐인데 간증이 참 풍성했다. 혼자 성경 읽는 일이 쉽지 않았는데, 함께 성경과 신앙 서적을 들으면서 읽고, 나눔과 식사 교제까지 더해지니까 그 영향력이 굉장했기 때문이다. 일단 공동체 성경읽기 개별모임 참석자들의 표정부터 달랐다. 기대감과 설렘이 엿보였다. 말씀을 먹고 마시는 일을 얼마나 사모하는지가 눈에 보였다. 옹기종기 모여 나누는 담소의 주제도 ‘말씀’이었다. 그 기대감과 설렘이 기자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져 덩달아 신이 났다. 그런데 어떻게 첫 모임부터 참석자들의 마음을 이토록 빼앗을 수 있었을까? ‘공동체 성경읽기’ 개별모임이 시작되자마다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혼자 성경 읽는 것과 함께 말씀을 들으면서 읽는 것 자체가 달랐다. 머릿속에 성경 속 장면이 생생하게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 덕분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말씀에 몰입했다. 성경 읽는 재미를 제대로 알게 됐다. ‘공동체 성경읽기’ 개별모임에는 또 다른 묘미가 있다. 신앙서적을 들으면서 읽고, 나누는 시간이다. 첫 모임에서는 존 스토트의 <성경이란 무엇인가>를 듣고 읽었다. 딱딱하게만 느껴졌던 신앙서적이 함께 들으면서 따라 읽었더니 술술 읽혔다. 그리고 그 내용을 나눴다. 이날 모임에서 유난히 밝은 얼굴을 보이는 성도가 눈에 띄었다. 이현주 성도(S브릿지공동체)가 그 주인공이다. 그녀는 공동체 성경읽기 첫 번째 개별모임부터 특별한 은혜를 경험했다고 털어놨다. 그동안 궁금한 게 정말 많았는데 성경과 신앙서적을 읽으면서 새롭게 배우고,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무엇보다 꾸준히 성경을 읽어야겠다는 도전을 받았다고 했다. “혼자 성경을 꾸준히 읽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저의 고정된 생각으로 성경을 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공동체 성경읽기 개별모임에서 함께 말씀을 듣고, 읽고, 나누면서 정말 특별한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 마음에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신앙서적도 함께 듣고 읽으면서 폭넓은 지식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관점의 나눔을 듣는 재미도 아주 좋았습니다.” 유정원 성도(서대문공동체)도 비슷한 고백을 했다. 평소 집중해서 읽기 어려웠던 성경이 함께 읽으니까 정말 재미있었다고 했다. 함께 말씀을 듣고, 읽고, 나누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정리할 수 있어서 크게 유익했다고 말했다. “매번 성경일독을 다짐하고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에 집중해서 읽기보다 자꾸만 개인적인 묵상으로 이어지곤 했습니다. 묵상이 길어지면서 말씀 읽는 시간이 지체되기도 했습니다. 성경을 집중해서 읽어보려고 공동체 성경읽기 개별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성경을 들으면서 읽으니까 더욱 집중할 수 있었고, 성경 읽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무엇보다 성도들과 함께 나눌 수 있어서 의미 있었습니다.” <전도서> 4장 12절에서 “혼자서는 질 일도 둘이서는 당해 낼 수 있으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혼자서는 어려웠던 성경 읽기가 공동체와 함께하면 즐겁고 행복하게 할 수 있다. 강신익 장로가 공동체 성경읽기 개별모임을 강력하게 추천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혼자 성경 읽기가 몹시 힘듭니다. 신앙생활과 마찬가지로 공동체와 함께 읽어야 합니다. 온누리교회에서는 세 가지 방법으로 공동체 성경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새벽기도회, 개별모임, 순에서 공동체 성경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공동체 성경읽기 개별모임에 참석하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됩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문의: 02-3215-3239/ simonkang@handong.edu 목회칼럼 ‘확신’과 ‘겸손’이 성경을 함께 읽게 한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를 계시하는 책이다. 소위 ‘자연계시’ 혹은 ‘일반계시’라 하는 인간의 이성이나 역사, 자연을 통해 절대자의 존재를 막연하게 인식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그 절대자가 어떤 존재인지, 성품이 어떠한지, 역사하는 관점이 무엇인지 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세상의 근원이자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방법이어야 한다. 그것이 특별계시인데,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다. 이 측면에서 성경은 결코 일반적인 도서가 아니다. 말씀에 의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 없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충분한 책’이기도 하다. 인간의 모든 감정과 경험, 지혜가 담겨 있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충분하고 온전히 담고 있다. 더 나아가 성경은 모든 이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생명의 책이’다. 바울은 “성경은 능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고 말했다. 고대부터 이스라엘은 성경을 함께 읽는 전통이 있었다. 회당에서는 구약 두루마리를 펼쳐서 낭독하고, 이를 함께 듣는 것이 중요한 순서였다. 초대교회에서도 말씀을 읽고, 듣는 것은 중요했다. 특히 구약성경을 읽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들을 살피고, 묵상하는 시간이 강조됐다. 물론 말씀을 선포하며 해설하는 설교와 강해도 있었지만,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고, 듣는 것이 절대 경시되지 않았다. 말씀 자체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고, 사람의 그 어떤 해석보다 우선시하는 건강한 신앙적 문화가 교회사에 존재했다. 교회는 초대교회부터 결국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하나님의 뜻과 계시를 한마음으로 받들고, 하나님을 공동체적으로 알아간다. 동일한 말씀이지만 받는 은혜가 저마다 다름을 나눔을 통해 확인한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가운데 공동체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지속적이고 유기적으로 경험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같은 본문을 묵상한 큐티를 나누고, 예배에서 같은 말씀을 설교 본문으로 삼아 합독하는 것은 말씀이 갖는 공동체적인 측면을 강조한 결과다. 오늘날 우리는 시대적으로 ‘미디어 홍수’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인터넷에 수많은 설교가 있고, 접근이 매우 편리해졌다. 오히려 들은 메시지를 분별하는 게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이때 공동체가 성경 앞으로 모이는 게 매우 중요하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없는 유일한 계시였다.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변함없이 적용되는 진리다. 이를 독려하고 함께하는 게 바로 ‘공동체 성경읽기’다. 말씀을 읽어야 하는 필요성을 공동체적으로 인식하고, 서로 독려하며, 받은 은혜를 나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잠시 읽지 못해도 공동체가 함께하고 있으면 다음 날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하나님 앞에 서는 날까지 그분을 알아가는 거룩한 걸음을 위해 우리의 발목을 서로 묶고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공동체가 합력해서 성경을 읽는 운동을 일으킬 때 그 공동체는 생명력 넘치는 성령공동체가 될 것이다. 공동체 성경읽기가 시작되었다. 각 공동체와 순, 서빙고온누리교회 2부 새벽기도회, 금요일 개별모임에서 공동체적인 성경읽기를 함께하고 있다. 말씀 앞에 모인 성도들과 이야기 나누다 보면 한 가지 분명한 공통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겸손’이다. 성경통독을 몇 번 했든, 성경 지식이 얼마나 풍성하든, 큐티를 얼마나 오랫동안 해왔든 상관없이 하나님 말씀 앞에 절실함과 새로운 기대로 엎드리는 성도가 공동체 성경읽기에 함께 한다. 혼자 하면 된다고 자신하는 성도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매일 꾸준히 성경을 읽는 개인적인 습관이 잡혀있는 분들이 겸손하게 함께 성경 읽는 자리로 나온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자 그분을 계시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는 믿음, 말씀이 오늘날 개인과 사회의 문제에 대한 완전한 답이라는 확신, 공동체적으로 성경을 읽지 않고 혼자서 경건의 능력을 이루지 못한다는 겸손이 공동체 성경읽기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함께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이 뜨거워지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성령의 역사가 교회 곳곳에서 나타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변대섭 목사(공동체성경읽기 담당, 성북공동체)
2024-03-23 제1484호
[2024 온누리교회 선교 방향] 남과 북이 복음으로 통일되는 꿈! 2024 온누리교회 선교 방향 3. 탈북민 선교 남과 북이 복음으로 통일되는 꿈! 온누리교회 탈북민 선교 책임지는 ‘한누리통합팀’ 2024년 온누리교회 선교는 ‘난민 선교’와 ‘이주민 선교’, 그리고 ‘탈북민 선교’에 집중한다. 탈북민 선교는 남과 북이 복음으로 통일되는 꿈을 꾸고 있다. 그 매개가 바로 ‘탈북민’이다. 그런데 한국에 거주하는 탈북민들이 겪는 어려움이 매우 크다. 경제적, 문화적, 외로움 등 탈북민이 겪는 어려움을 설명하는 것조차 크고 버겁다.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고, 복음 통일을 준비하는 사역이 바로 ‘탈북민 선교’다. 통일 이후를 준비하는 사역이다. 온누리교회는 오래전부터 탈북민들의 한국 정착뿐 아니라 신앙생활을 돕고 있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김태희 성도(한터공동체)는 탈북해서 한국에 온 지 20년 정도 됐다. 한국에서 지내면서 온갖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탈북민이라는 이유로 겪은 차별이 괴로웠다. 그래도 교회(한터공동체) 덕분에 잘 이겨낼 수 있었다. “한국에서 직장 구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컴퓨터를 배웠고,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해서 취업했습니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동안 탈북민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했던 차별과 네 명의 자녀를 교육하면서 겪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교회(한터공동체) 덕분에 잘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한터공동체에서 탈북민들을 믿음으로 세워주고, 탈북민 자녀 교육을 성심껏 도와줬습니다.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송바울 팀장(한터공동체)은 탈북민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문화 차이’와 ‘소통’이라면서 탈북민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을 본질적으로 돕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탈북민들이 사회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오면서 겪는 어려움이 엄청납니다.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른 점이 정말 많습니다. 북한에서는 다른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에 와서 ‘이런 세상이 있었구나’하고 놀라기도 합니다. 또 한국에서는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같은 한국어인데도 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 차이와 어려움을 혼자 감당하면서 외로움을 호소하는 탈북민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위로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달란트를 활용해서 살도록 도와야 합니다. 탈북민들이 온전한 회복을 경험하고,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돕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사랑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탈북민들에게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온누리교회에는 탈북민들의 한국 사회 적응과 정착을 돕고, 그들과 친구 되는 사역팀이 있다. 바로 ‘한누리통합팀’이다. 한누리통합팀에서는 ‘한누리사역’과 ‘하나원사역’을 하고 있다. 한누리통합팀에는 5개 탈북민공동체가 소속되어 있다. 서빙고 한터공동체, 양재 하나공동체, 부천 한사랑공동체, 남양주 북사랑공동체, 대전 한누리공동체가 바로 그것이다. 각 지역에 거주하는 탈북민들의 필요를 파악해서 맞춤형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더불어 한국 성도들과 함께 통일을 준비하는 예배 공동체로 세워지는 훈련을 하고 있다. 하나원사역은 탈북민들과 가장 먼저 친구가 된다. 통일부 산하 정부 기관인 하나원에 소재한 하나교회와 연합해서 탈북민들의 한국 사회 정착을 돕는다. 탈북민들이 한국 생활 적응을 위해 교육을 받을 때부터 사회 정착과 신앙생활을 지원한다. 문의: 02-3463-9686
2024-02-24 제1480호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에서 만난 사람들] 작은예수로 변화된 40일!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에서 만난 사람들 - 그 마지막 이야기 작은예수로 변화된 40일!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될 사람들!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이하 새벽기도회)가 대장정을 마쳤다. 그만큼 은혜도 풍성했다. 하나님 안에서 회복된 성도, 새로운 삶으로 변화된 성도, 전도를 실천한 성도들이 가득하다. 작은예수로 변화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소개한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최훈 집사(동대문중랑공동체)는 말씀의 힘으로 지친 삶을 회복했다. 지금은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새 힘으로 하루 하루를 힘차게 보내고 있다. “이번 새벽기도회에서 하나님이 제게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어진 환경과 조건을 바라보지 않고, 그 상황을 뛰어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는 하나님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동안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쳤었는데,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새 힘을 얻었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김종임 성도(여의도제일교회)는 온누리교회 SNS청년부에 소속된 자녀를 따라 새벽기도회에 왔다. 자발적으로 새벽기도회에 가는 자녀가 부럽기도 하고, 함께 참여할 수 있어서 무척 감사했다. “자녀와 함께 새벽기도회에 올 때마다 도전을 받았습니다. 매일 새벽 감사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젊은 시절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게 소원이었는데, 은퇴하고 나서 이뤘습니다. 그래도 자녀와 함께 참여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무엇보다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 회개하고, 순종하는 삶을 회복했습니다. 앞으로도 거룩한 삶을 지켜나가기 위해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이 되겠습니다.” 아주 특별한 은혜 그리고 변화 이숙자 집사(강남A공동체)는 이번 새벽기도회에서 선교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그리고 어디서나 선교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 비결은 기도였다. “새벽기도회에 나와 기도하는 성도들을 보면서 저도 더욱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새벽에 함께 기도하는 동역자가 있다는 사실이 정말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가득한 새벽기도회에서 선교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어디서나 선교가 가능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싶습니다.” 김정숙 권사(이촌공동체)는 특별한 변화를 목도했다. 바로 남편의 변화였다. 역시 하나님은 그녀의 기도와 생각보다 풍성하고 깊게 응답하셨다. “새벽마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남편을 위해, 남편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특별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남편의 변화입니다. 전에는 남편이 ‘신앙 언어’를 낯설어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남편이 출근하는 제게 매일 새벽기도회에서 들은 말씀으로 축복기도를 해줍니다. 남편의 변화된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에 벅찬 감동과 감사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정수진 성도(하모니공동체)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마음이 넓어졌다. 아직 예수님을 모른 사람들도 마음에 품었다. “그동안 제 신앙생활에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서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으로서 세상에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 도전하게 되었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는 삶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직장 동료들에게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삶의 모든 장면에서 ‘전도’ 이군자 권사(분당A공동체)는 이번 새벽기도회에서 하나님과 첫사랑을 회복했다. 하나님을 처음 만나고 너무 기뻐서 사람들에게 자랑했던 그때 그 마음을 되찾았다. “제가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전도를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전도에 소홀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새벽기도회에서 그 마음을 회복했습니다. 누군가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전도대상자들을 위해 오늘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수제 집사(강남B공동체)는 새벽기도회에 참여하는 내내 독거 어르신들이 떠올랐다. 독거 어르신들의 외로운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채워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번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서 제 마음에 기도의 불이 붙었습니다. 기도하면서 전도의 열정이 다시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장례지도사로 일하면서 봤던 고독사하는 분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독거 어르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앞으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오직 전도에 힘쓸 것입니다.” 박덕순 집사(서초A공동체)는 전도의 열매를 맺었다. 그 열매가 얼마나 풍성하고 달콤한지 앞으로도 전도하는 삶을 살겠다고 고백했다. “전도대상자를 정하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연말, 전도대상자들을 교회에 초청했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다. 올해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이라는 표어처럼, 예수님을 담대하게 전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전에는 전도하는 게 어렵고, 소명이 있는 사람만 전도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저부터 앞장서서 삶의 모든 장면에서 전도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도를 가장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 한 줄 소감> “선교하고자 하는 꿈을 다시 한번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제게 다시 힘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석태월 권사(도곡공동체) “하나님께서 새벽기도회를 통해 저의 마음을 만져주셨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으로 세상에 나아가겠습니다.” / 박선희 권사(송파B공동체) “작은 순종의 발걸음을 한발 두발 내딛기만 하면 나머지 다음 순종의 걸음은 친히 이끄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 김지수 자매(SNS청년부) “선교사님들의 소식과 간증을 들으면서 하늘 보좌를 더욱 바라보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혼탁한 세상 가운데 놓인 우리 자녀들과 차세대를 위해, 온누리교회에 주신 소명을 위해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 이지원 권사(강남E공동체)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에 참여하면서 작은 믿음을 가지고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으로 세워주실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 선혜린 성도(이수공동체) “담대하다는 것은 ‘겁이 없고 용감하다’라는 뜻입니다. 올해에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이 되어 세상에서 주눅 들지 않고, 용감하게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 김소희 성도(양재온누리교회)
2024-01-20 제1476호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에서 만난 사람들] 새벽을 깨우는 아이들!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에서 만난 사람들 새벽을 깨우는 아이들! 은혜와 도전, 행복한 추억과 기쁨이 선물 새벽을 깨우는 아이들이 있다. 온 가족이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차세대 가정이 그 주인공이다. 부모님과 함께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 예배당 예배에 참석하는 차세대 가정에 출석 도장을 찍어주는데, 은혜도 함께 채워지고 있다. 부모들도 아이들과 함께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서 큰 은혜를 받고 있다. 은혜와 도전, 행복한 추억과 기쁨을 선물 받는 새벽을 깨우는 아이들과 그 부모들의 이야기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조하이 학생(초등1부)은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게 정말 좋아서 친구도 데려왔다. 친구와 함께 출석 도장을 받으러 가는 얼굴에 벌써 천국이 임했다. “엄마랑 할머니랑 같이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게 정말 좋아서 친구도 데리고 왔어요. 친구와 함께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출석 도장도 받고, 예배드리니까 더 행복해요.” 그 친구가 남연희 학생(초등1부)이다. 친구 따라서 난생처음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지금은 새벽마다 출석 도장 받는 게 익숙하고, 즐겁다. “친구 따라서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에 왔어요. 매일 새벽마다 교회 오는 게 무척 재밌어요. 끝까지 나와서 출석 도장을 다 받을 거예요.” 송지은 성도(가정사역공동체)는 두 아이와 함께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있다. 아이들을 데려다주려고 온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에서 풍성한 은혜를 받고 있다. “첫째 아이가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에 가고 싶다고 해서 데려다줬습니다. 처음에는 아이가 새벽기도회에 꾸준히 참석하는 게 어려울 거로 생각했는데, 정말 즐겁게 참석하는 모습을 보고 둘째 아이도 데리고 왔습니다. 아이들 덕분에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는데, 오히려 제가 풍성한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윤영삼, 송남행 성도 부부(한강공동체)의 아이들도 열정적으로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있다. 먼저 일어나 부모를 깨울 정도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부모가 도전을 받고 있다. “저희 가정이 새벽에 교회 나오는 것 자체가 특별한 은혜입니다. 아이들이 새벽마다 저희를 깨워줍니다. 아이들이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에 가겠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감동이고, 열정적으로 예배드리는 모습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움입니다. 아이들이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김영우 성도(한강공동체)는 자녀에게도 행복하고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손을 잡고 새벽기도회에 갔던 기억을 떠올리면 마냥 행복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따라 새벽에 교회에 갔던 추억을 떠올리며 아이와 함께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저의 행복한 추억을 자녀에게도 선물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출석 도장 찍는 재미도 있고, 함께 기도하는 것도 큰 은혜입니다. 이번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가 하나님 앞에서 자녀를 위해 더 깊이, 더 열심히 기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송지선 성도(이촌공동체)는 매일 새벽 가족과 함께 걸어서 교회에 온다. 길이 어둡고 춥지만, 가족과 함께라서 기쁘고 설렌다. “아이들이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참석하고 있습니다. 매일 새벽 온 가족이 함께 걸어서 교회에 오는데 그 길이 정말 행복합니다. 교회에 오는 길부터가 은혜입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새벽을 깨워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박서인 학생(파워웨이브3부)은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 완주가 목표다. 그만큼 새벽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가 크기 때문이다. “새벽에 일어나는 게 힘들기도 하지만, 더 자는 것보다 교회 오는 게 더 좋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래서 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회 완주를 목표로 세웠습니다. 새벽 공기를 마시는 것도 상쾌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돼서 행복합니다.”
2024-01-13 제1475호
[특집] '화관 만드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찾아라! ‘화관 만드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함께, 묵묵히, 그리고 꾸준히 ‘평택 화관팀’ <온누리신문>에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가 찾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은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기쁨으로 섬기는 사람들이다. 네 번째 주인공은 ‘평택온누리교회 화관팀’(이하 평택 화관팀)이다. 평택 화관팀은 오는 5월 열리는 러브소나타 ‘효고’에서 사용할 화관을 제작하고 있다. 스무 명 남짓 성도들이 일본 복음화를 꿈꾸며 화관을 제작하고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기쁨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평택 화관팀을 소개한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평택온누리교회 5층에서 맛있는 냄새와 익숙한 찬양 소리가 흘러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평택 화관팀이 있었다. 스무 명 남짓한 성도들이 함께 찬양하면서 흰색, 보라색, 초록색의 예쁜 조화를 엮어 화관을 만들고 있었다. 곳곳에 흐드러진 알록달록한 꽃들과 평택 화관팀원들의 얼굴에 핀 웃음꽃이 어우러져 꽃동산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주방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 맛있는 냄새가 향기가 없는 조화에 기분 좋은 냄새를 불어넣고 있는 것 같았다. 평택 화관팀이 있는 자리는 분명 하나님과 뛰노는 꽃동산이었다. 함께하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에 평택 화관팀은 오는 5월 15~16일 막 오르는 러브소나타 ‘효고’에서 사용할 화관을 만들고 있다. 화관 제작은 이름도 빛도 없이 섬기는 일 중 하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일본의 영혼들에게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섬기고 있다. 화관 만드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 글루건(Glue Gun)이 내뿜는 뜨거운 열에 화상을 입기도 하고, 반복 작업을 오래 해서 손가락 지문이 닳기도 한다. 20여 명이 화관 2천 개를 만들기에 제작 기간도 길다. 몸도 고되고 힘든 일이 한둘이 아니지만, 찬양과 미소, 감사가 끊이지 않는다. 함께하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이다. 송현주 집사는 평택 화관팀에서 섬기기 전까지 러브소나타를 잘 알지 못했다. 온누리교회가 일본에서 여는 큰 집회 정도로만 생각했다. 우연한 기회에 평택 화관팀에서 섬기게 되었는데, 함께하는 기쁨을 알아버렸다. “평택 화관팀에서 하루만 일해보면 ‘와!’라는 감탄밖에 안 나옵니다. ‘이렇게 사랑과 감사가 넘치는 공동체가 또 있을까?’ 싶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꽃 한 송이 한 송이에 담긴 의미를 묵상하고, 함께 찬양하며, 화관을 만드는 일이 정말 즐겁습니다. 새벽부터 나와서 작업을 하는 데 꼭 명절에 친척들이 모인 것 같습니다. 평택 화관팀이 모이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이 얼마나 기다려지는지 모릅니다.” 옆에서 박은화 집사가 한마디 거들었다. 박 집사도 함께하는 기쁨에 빠져 2년째 평택 화관팀에서 섬기고 있다. “당연히 힘든 날도 있습니다. 매주 이틀씩 새벽부터 오후까지 작업하려면 피로가 많이 쌓입니다. 꾀를 내서 ‘하루 정도는 빠져볼까?’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화관팀에서만 경험하는 기쁨이 정말 커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습니다. 저희가 만든 화관을 쓰고 예수님을 만날 일본인들을 생각하면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이 올라옵니다. 평택 화관팀은 그 기대와 감격을 함께 나누며 작업하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고, 어색해도 묵묵히 섬기는 은혜 평택 화관팀에 어렵고, 힘들고, 어색한 상황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섬김을 이어가는 성도들이 있다. 임선명 집사는 지난해 말 갑작스레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두렵고 우울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담담하고 평안했다. 하나님이 고쳐주실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술 날짜가 바로 잡혔고, 수술도 잘 끝났다. 임선명 집사의 빠른 회복에 의료진이 놀랄 정도였다. 임선명 집사는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할 방법을 찾았다. 그런데 암 환자라 치료 경과를 살펴야 하고, 항암치료 등을 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몰라서 장기적인 사역에는 참여하기가 어려웠다. “하나님께 정말 감사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는 못 견디겠더라고요. 그래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작은 자를 섬기는 일을 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 마음을 가만히 묵상하는데 하나님을 모르는 영혼들을 위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기쁜 마음으로 참여했던 평택 화관팀에 다시 참여했습니다.” ‘평택 화관팀에 돌아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풍성한 나눔과 교제가 정말 좋았기 때문이다. 일본을 향한 선교의 마음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평택 화관팀에서 섬기다 보면 화관의 꽃송이가 의미하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고, 각자 경험한 은혜를 나누면서 신앙의 깊이를 더해갑니다. 일본 선교에 대한 마음도 커집니다. 러브소나타를 사모하게 되고, 그곳에 모일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한경진 집사는 평택 화관팀에서 ‘한 권사’라고 불린다. 여자 성도들 틈에 남자 혼자 껴서 열심히 섬기는 모습을 칭찬하며 붙여진 애칭이다. 한경진 집사는 아직 러브소나타에 한 번도 참여하지 못했는데, 화관팀원 모집 소식을 듣고 관심이 생겼다. “사실 화관을 제작하는데 제가 할 일이 있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래도 심부름이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평택 화관팀에 왔습니다. 저 혼자 남자라 살짝 후회도 했지만, 무르기에는 이미 늦었더라고요(웃음). 어쩔 수 없이 섬김을 시작했는데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한경진 집사는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다. 꽃을 예쁘게 붙이는 일은 어려워도, 짐을 나르고, 장을 보고, 풀을 엮고, 화관 쌓는 일은 도맡아 할 수 있었다. 어느새 평택 화관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한경진 집사에게도 평택 화관팀이 가장 중요한 사역이 됐다.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여자 집사님들의 수다를 듣는 것도 꽤 재미있습니다(웃음). 그 재미있는 이야기 안에 복음을 향한 순수한 마음들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동화되어서 러브소나타를 더욱 사모하게 되고,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섬김은 섬김을 낳고… 평택 화관팀장 김성옥 권사는 12년째 러브소나타 화관을 만들고 있다. 올해 나이 76세다. 힘에 부칠 때도 있지만, 기쁨으로 꾸준히 섬기고 있다. 양재꽃시장에서 직접 꽃을 고르고, 일정을 조율하고, 매주 왕복 4시간 거리를 오가며 화관을 제작한다. 김성옥 권사의 섬김에 감동해서 평택 화관팀을 찾아온 성도가 한둘이 아니다. 섬김은 섬김을 낳는다. 김순분 권사도 김성옥 권사의 섬김에 감동해서 평택 화관팀을 찾아왔다. 그 추운 날 끼니도 제대로 못 챙기면서 섬기는 성도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날 이후 평택 화관팀의 식사는 김순분 권사가 책임진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아침 식사와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등갈비찜, 짜장밥, 굴만두국, 묵은지 김치찜 등 메뉴도 다채롭다. 평택 화관팀 성도들이 “김순분 권사님 음식 먹으려고 매주 나온다”고 말할 정도로 음식 솜씨가 빼어나다. “다들 맛있게 먹어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작은 섬김에도 큰 기쁨을 돌려주는 분들이 계셔서 더욱 힘이 납니다. 하나님의 일은 누구든지, 어떤 일이든지 동참하면 기쁨을 배로 경험하게 됩니다. 평택 화관팀의 섬김을 보고 더 많은 성도가 러브소나타에 관심을 가지고, 섬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만든 화관을 쓰고 예수님을 만날 일본의 영혼들이 또 다른 이들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통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러브소나타 화관의 의미 중앙 흰 꽃 3개: 성부, 성자, 성령 보라색 꽃: 회개 흰 꽃: 구원 의미: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고, 구원받아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
2024-03-23 제1484호
[신생사역팀을 소개합니다!] ‘원더풀 라이프’ 신생사역팀을 소개합니다! ‘원더풀 라이프’ 사역에는 결코, 은퇴가 없다! 6070 세대를 위한 ‘원더풀 라이프’ 총인구 중에서 65세 이상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7% 이상이면 ‘고령화 사회’, 14% 이상이면 ‘고령사회’, 20% 이상이면 ‘초고령사회’로 분류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고령 인구가 약 19.2%를 차지하는 ‘고령사회’다. 내년에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측한다. 고령화 현상의 여파를 교회도 피해 가지 못한다. 하루빨리 교회에서도 초고령사회를 대비해야 한다. 사회선교본부 신생사역팀 ‘원더풀 라이프’가 출범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6070 세대를 위한 사역팀 ‘원더풀 라이프’를 소개한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이제는 노년 세대를 ‘제2의 주일학교’라고 부른다. 그만큼 교회에 고령 성도가 많고, 계속 늘고 있다. 온누리교회만 해도 60세 이상 64세 이하 성도가 약 1만 4천여 명, 65세 이상 90세 이하 성도가 약 1만 8천여 명이나 된다. 시니어 성도가 3만 명에 이른다. 더 무서운 변화는 사회도, 교회도 고령화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점이다. 70세가 되면 사회에서 대부분 은퇴한다. 교회에서도 70세가 되면 공식적으로 맡은 직분에서 은퇴한다. 그런데 직분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여전히 섬길 힘이 있다. 시간과 물질을 충분히 드려서 섬길 수 있다. 사역에는 결코 은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은 마음과 다른 것 같다.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만 65세 이상 성도 2천여 명을 대상으로 ‘고령 교인 실태조사’를 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시니어 성도 38%가 ‘젊은 사람이 모인 곳에 가면 스스로 위축감을 느낀다’고 응답했다. 22%는 ‘교회에서 나에게 관심이 멀어지는 것 같다’고 응답했다. ‘고령 성도 10명 중 1명이 우울 증상을 보인다’는 결과도 있다. 현재 한국 교회에서는 시니어 성도들이 직분 혹은 사역에서 은퇴한 이후 역할이 없어서 외로움을 겪는 경우가 참 많다. 아직 사역을 감당할 체력과 능력이 충분한데도 말이다. 직분 혹은 사역에서 은퇴했다는 이유로 소외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신생사역팀 ‘원더풀 라이프’가 그래서 출범했다. 6070 성도들이 교회에서 소외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이어가도록 돕기 위해서 만들었다. 그동안 은퇴 이후 역할을 찾도록 도왔던 ‘은빛날개’ 사역이 막을 내리고, ‘원더풀 라이프’가 새로 만들어졌다. ‘원더풀 라이프’는 6070 세대가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경험, 전문성을 살려서 이 땅에 사는 동안 끝까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돕는 사역팀이다. 6070 세대들이 교회에서 그 아름다운 역할을 이어가도록 방법을 모색 중이다. 심리학자 에릭슨은 노년을 3단계로 구분했다. 65세 이상 74세 이하를 노년 초기, 75세 이상 84세 이하를 노년 중기, 85세 이상을 노년 말기라고 정의했다. 현재 온누리교회에는 노년사역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원더풀 라이프’와 ‘시니어아카데미’다. ‘원더풀 라이프’는 노년 초기, ‘시니어아카데미’는 노년 중기를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다. 사회가 고령화하는 만큼 교회에도 시니어 성도가 계속 증가한다. 이에 발맞춰 노년사역의 역할과 필요성이 매우 크고 중요해졌다. 노년 세대가 교회에서 경험과 전문성을 살려 믿음의 경주를 이어가도록 돕는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바로 그 역할을 ‘원더풀 라이프’가 감당한다. 6070 세대 성도들이 하나님 안에서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여러 사역팀과 협력해서 사역을 이어가도록 연결한다. 전도, 농어촌 선교, 이주민 선교, 탈북민 선교, 2000선교 등 사역팀과 연결하고, 일대일제자양육, 큐티, 가스펠프로젝트 등 양육사역에도 참여하도록 돕는다. 배드민턴, 탁구, 골프, 독서, 노래, 미술, 악기 배우기 등 6070 세대 성도들의 관심 분야를 파악해서 여러 취미활동을 할 예정이다. ‘원더풀 라이프’에는 6070 세대 성도 중에서 교회에서 계속 사역하기를 원하는 성도, 그동안 사회생활에 전념하느라 사역을 해본 적 없지만, 은퇴 이후 새로운 마음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고 싶은 성도, 교회에서 친밀한 친구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 시니어 성도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오는 3월 28일부터 4월 11일까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30분 서빙고온누리교회 두란노홀에서 열리는 ‘원더풀 라이프 세미나’에 참가하면 더 자세한 내용을 설명해준다. 문의: 02-3215-3434 사역칼럼 은퇴를 은퇴하십시오! 인생의 후반을 교회와 함께하는 성도들의 삶이 ‘원더풀 라이프’다. 인생의 황금기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헌신하도록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성도들이 위축되거나 소외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감당하는 영적 라이프 사이클을 늘려가야 한다. 나이가 들면 사회에서 은퇴한다. 교회에서도 모든 직분자가 공식적으로 70세에 은퇴한다. 그러나 은퇴 후에 남은 세월이 참 길다. 그 시간 동안 후배 성도들의 섬김을 받기만 할 수는 없다. 나이 들수록 더욱 의미 있는 활동을 해야 한다. 시니어 성도들은 한국 교회 발전의 주역들이다. 고난을 경험했고, 어려움과 시련을 이겨낸 세대다. 가정과 사회에서 부모님 잘 모시고, 자녀들을 잘 양육했던 국가 발전의 초석이었다. 그들이 사회에서 역할을 다하고 더는 설 곳이 없어지는데, 교회에서마저 그렇게 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6070 세대가 되어도 건강하다. 가지고 있는 소중한 믿음과 지혜, 경험과 지식을 그냥 두기가 너무 아까운 게 사실이다. 6070 세대는 시간과 몸을 드리고, 물질을 드려서 섬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교회에 점점 늘어나는 시니어 성도들이 위축되거나 소외당하지 않고, 생명과 호흡이 있는 날까지 사명을 감당하도록 도와야 한다. 먼저, 목회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세대 간 단절이 일어나지 않도록 교육이 필요하다. 세대 간 단절에서 오는 이질감이나 갈등으로 시니어 성도들이 교회에서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 설 자리가 좁아진 기성세대가 ‘원더풀 라이프’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끝까지 감당하며 마음껏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김형석 명예교수(연세대학교)는 “주위 사람들을 보니 60~75세 무렵에 가장 창의적이고, 아름다운 시기를 보낸다. 좋은 책도 바로 그 시기에 썼다”고 말했다. 교회에도 초고령화 현상이 시작되었다. 2028년이 되면 한국 교회를 이어가는 주력 세대가 60~70세가 된다고 한다. 고령화된 한국 교회는 우리 앞에 실존하는 문제로 다가왔다. 비켜 갈 수 없는 현실이다. 하나님은 시니어 성도들을 소명의 일꾼으로 세우시기를 원하신다. 시니어 성도들은 부흥의 시대를 경험했고, 교회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본 세대다. 신앙의 연륜이 쌓여있고, 시간과 몸을 드리는 여유도 있다. 부르심을 따라 물질을 드려 섬기고 싶은 헌신도 있다. 교회는 시니어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어떻게 쓰임 받을 수 있게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시니어 성도들을 그냥 나이 들게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부르심을 따라 살도록 믿음으로 교육하고, 훈련 시켜서 영적 라이프 사이클을 연장해 줘야 한다. 모세는 80세에, 갈렙은 85세에 부르심을 받았다. 시니어 성도들도 나라와 민족과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다음 세대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줘야 한다. 하나님이 시니어 성도를 위해서 준비하신 ‘제2의 부르심’을 받고, 주체적으로 일어나 부흥을 감당하는 세대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 노인이 많아지고, 개인의 삶에서 노년기가 더욱 길어지고 있다. 다르게 표현하면 지혜로운 어른들이 많아져서 다음세대에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다. 어른은 지혜로운 사회의 주인공이다. 노년 초기에 존경받는 어른으로 살도록 교회에서 교육받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면서 기름 부으심이 넘치는 축복을 받기를 바란다. 그러면 노년 중기와 말기에도 아름답고 존경받는 어른으로 세워질 수 있다. 6070 세대가 은퇴를 은퇴하는 원더풀 라이프를 소망한다. / 심길섭 장로(강촌공동체, 원더풀 라이프 담당)
2024-03-16 제1483호
[신생사역팀을 소개합니다!] ‘도시 미자립교회 지원팀’ 신생사역팀을 소개합니다! ‘도시 미자립교회 지원팀’ 그 어려운 상황에도 더 어려운 이웃을 돕는 “도시 미자립교회를 도와주십시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수많은 도시 미자립교회가 결국 문을 닫았다. 큰 어려움을 호소하는 도시 미자립교회도 정말 많다. 누군가는 위기에 놓인 도시 미자립교회를 도와야 한다. 바로 그 일을 하는 신생사역팀이 있다. 지난 1월 공식 출범한 사회선교본부 소속 ‘도시 미자립교회 지원팀’이다. 도시 미자립교회 지원팀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벌써 도시 미자립교회 21곳을 탐방했다. 도시 미자립교회 지원팀이 탐방한 교회들의 사연을 바탕으로 이 사역이 왜 필요하고, 어떻게 그들을 도와야 하는지를 진단했다. / 김다애 기자 daa2@onnuri.org 서울시 도봉구에 있는 예수비전교회는 개척한 지 12년 됐다. 10명이 안 되는 성도들과 99.17m2(30평) 남짓한 예배당에서 매주 예배드리고 있다. 예수비전교회 박형미 목사는 매년 겨울만 되면 난방비를 걱정한다. 아무리 어려워도 성도들이 따뜻한 예배당에서 예배드리게 하고 싶은 마음에 미리 난방하는데, 경제적인 부담이 상당하다. 이 같은 고민이 비단 예수비전교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난방비, 월세뿐만 아니라 성도들과 교제할 경제적 여유조차 없는 도시 미자립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도시 미자립교회 지원팀에서는 도시에 있는 성도가 10명 미만인 교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호소하는 교회들을 찾아가 돕는다. 도시 미자립교회들이 자립해서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들을 섬기도록 아낌없이 지원하고 있다. 도시 미자립교회들이 협력해서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역할도 한다. 교회 규모는 작아도 도시 미자립교회의 역할이 매우 크다. 아프고, 외롭고, 연약한 이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교회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수비전교회는 매일 오후 5시에 노방전도를 나간다. 전도를 마치면 교회에 모여 성경 공부와 기도 모임을 한다. 배가 고픈 청년들이 예수비전교회를 찾아왔다가 성경 공부와 기도 모임에 참석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오랜 시간 정신 질환을 앓던 청년이 예수비전교회에 와서 회복되는 일도 있었다. 부산 고백교회는 교회 건물을 더 어려운 교회와 공유하고 있다. 주일 오전 예배가 끝나면 마땅한 예배당이 없는 교회에게 장소를 빌려준다. 평일에는 교회가 한부모나 조손가정 아이들이 노는 작은 도서관으로 변신한다. 희년중앙교회는 수십 년을 알코올중독자로 지냈던 노숙인에게 교회를 제공했다. 놀랍게도 그 노숙인이 교회에서 지내면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이제는 술을 끊고, 말끔한 차림으로 교회 문 앞에서 안내 봉사를 하고 있다. 변화된 노숙인의 모습을 보고, 동네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오기도 한다. 이처럼 도시 미자립교회에는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 그곳에서 따뜻한 예수의 사랑을 느끼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모이지는 않지만, 도시 미자립교회에서 지역의 연약한 사람들이 위로받고, 예수를 만난다. 바로 이것이 도시 미자립교회가 그 어려운 상황에도 사역을 이어가는 이유다. 도시 미자립교회 지원팀은 올해 세 가지 사역을 계획하고 있다. 첫째, 사회선교본부 사역팀과 도시 미자립교회를 연결하는 것이다. 이웃사랑팀, 엔젤트리, 사르밧 프로젝트 등과 도시 미자립교회를 연결할 계획이다. 둘째, 도시 미자립교회 현황 조사를 하고, 탐방할 예정이다. 도시 미자립교회를 직접 방문해서 함께 예배드리고, 성도들과 교제하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파악하는 게 목적이다. 셋째, 도시 미자립교회와 온누리교회 다락방을 ‘1다락방1사역’으로 연결할 생각이다. 수도권에 있는 도시 미자립교회를 매주 주일 온누리교회 순이 돌아가며 방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도시 미자립교회와 온누리교회가 동역자가 되면 큰 변화가 나타날 게 자명하다. 함께 예배드리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도시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에게 “무엇이 가장 큰 힘이 됩니까?”라고 물었더니 “항상 소수의 성도와 예배드렸는데 더 많은 사람과 함께 예배드리고, 교제하며, 기도하는 시간이 가장 큰 힘이 됩니다”라고 고백했다. 국중대 팀장(도시 미자립교회 지원팀)이 온누리교회 성도들에게 도시 미자립교회를 돕는 일에 발벗고 나서달라고 호소했다. “도시 미자립교회를 탐방하면서 깨달은 게 참 많습니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예배를 사모하는 성도들을 보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식사하는데 92세 되신 어르신이 시각장애인의 식사를 돕는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했습니다. 한 식탁에서 교제하는 일이 얼마나 크고 특별한 은혜인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 어려운 상황에도 더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도시 미자립교회를 도와주십시오. 도시 미자립교회가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 성장하도록 선교비를 지원하고, 예배와 전도에 전념하도록 힘을 보태주십시오.” 문의: 국중대 팀장 010-8227-9751 온누리교회에 보내는 편지 서울의 사각지대에서 잔칫집으로! 저는 서울시 도봉구 창동에서 13년째 예수비전교회를 섬기는 박형미 목사입니다. 최근 1년 동안 예수비전교회에 임하신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를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비전교회는 10년 이상 광야에서 외로운 기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그동안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함께해 주셨습니다. 예수비전교회 심규철 형제는 10년 동안 정신 질환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골방에 칩거하며 지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심규철 형제를 예수비전교회로 보내시고, 기도하는 가운데 깨끗이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 일로 심규철 형제의 아버지가 함께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10년 동안 아픈 자식을 바라보면서 힘겨워했을 그의 아버지도 위로해 주셨습니다. 최근 예수비전교회 청년이 1명에서 7명으로 늘었습니다. 저는 매일 오후 5시 청년들과 함께 노방전도를 나가고, 교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습을 기뻐하시는 것 같습니다. 전도를 마치고,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3시간 동안 기도 모임을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꿈꾸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저는 힘이 닿는 한 배고픈 청년들에게 맛있는 집밥을 대접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육신을 배불리고, 영도 살찌우는 66세 행복한 목사가 되렵니다. 한겨울에 노방전도를 하고, 손과 발이 꽁꽁 얼어도 청년들에게 맛있는 밥을 먹이려고 찬물에 손을 담가 채소를 씻고, 저녁을 짓고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일상입니다. 이렇게 섬길 수 있도록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예수님 이름으로 모여 전도하고, 기도하며, 교제하는 교회가 천국이 아닌가 싶습니다. 66세에도 성도들을 섬길 수 있어서 저는 참 행복한 목사입니다. 예수님의 숨소리와 온기가 느껴지기에 보잘것없고, 누추한 곳에서도 열심히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방황하는 청년들과 버림받은 것 같은 한부모가정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전심으로 뜨겁게 예배드립니다. 하나님이 이 모습을 기뻐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고, 충만한 은혜를 부어주셔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행복한 교회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배고픈 청년들과 함께 전도하고, 하나님의 비전을 품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저녁마다 맛있는 밥을 지어서 함께 식사하도록 지원해 주신 온누리교회 도시 미자립교회 지원팀에 감사드립니다. 매월 전도 물품 구입비가 50만 원 정도 드는데, 아끼지 않는 사랑의 후원 덕분에 행복하게 사역하고 있습니다. 도시 미자립교회는 서울의 사각지대입니다. 서울의 사각지대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주는 일이 쉽지 않은데, 늘 관심과 사랑으로 섬겨주시는 도시 미자립교회 지원팀 이영근 장로님과 국중대 팀장님께 감사드립니다. 그 사랑의 수고 덕분에 예수비전교회가 계속 부흥하고, 청년들이 하나님 안에서 꿈을 꾸고, 기도응답을 받아서 날마다 잔칫집입니다. 온누리교회 이재훈 위임목사님과 성도님들, 도시 미자립교회 지원팀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 박형미 목사(예수비전교회)
2024-03-09 제1482호
[특집] '이주민 섬기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찾아라! ‘이주민 섬기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 수원비전센터 박재두 장로와 이명화 권사 부부 <온누리신문>에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찾아 나섰다. 생명을 살리고, 전도하고, 선교사를 후원하고, 이주민을 돌보는 등 일상에서 예수를 드러내고, 전하고, 증인된 삶을 사는 성도들 말이다. 그 세 번째 주인공은 이주민을 섬기는 박재두 장로, 이명화 권사 부부(수원온누리교회)다. 이들 부부는 수원역 근처에 ‘수원비전센터’를 차리고 이주민들에게 무료로 한글을 가르치고, 법률 및 의료 상담 등을 지원하며, 함께 예배드리고 있다. 이주민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나눠주는 그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 홍하영 기자 hha0@onnuri.org 수원비전센터에서 이주민들을 가르치고 돌보면서 조건 없는 사랑을 나눠주는 박재두 장로, 이명화 권사 부부(수원온누리교회). 수원역 9번 출구로 나와 다섯 발자국 걸으면 좁은 골목길이 나온다. 그 골목길 끝에 ‘수원역전시장’(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매산로 2-10)이 있다. 수원역전시장은 수원역 앞에 있는 오래된 시장인데, 큰 건물 하나가 시장을 이루고 있다. 수원역전시장의 명물은 단연코 지하에 있는 ‘다문화푸드랜드’다. 다문화푸드랜드는 2011년 다양한 국가의 문화를 이해하는 소통의 공간을 마련하고자 개업했다. 캄보디아, 베트남, 태국, 우즈베키스탄, 몽골 등 세계 각국의 전통 음식을 맛볼 수 있다. 현지인 요리사가 직접 조리한 음식을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는 매력적인 장소다. 수원역전시장 교통이 발달 되어 원근 각처에서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 가정 등이 많이 찾아오는데 이주민들이 향수에 젖어 드는 공간이기도 하다. 수원비전센터, 이주민과 함께 울고 웃는다 세계 각국 문화가 공존하는 수원역전시장에서 박재두 장로와 이명화 권사(수원온누리교회) 부부를 만났다. 이들 부부는 수원역전시장 A동 2층에서 이주민지원센터인 ‘수원비전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주민들의 왕래가 활발해서 자주 접촉할 수 있고, 그들의 문화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 이곳을 택했다. 수원비전센터 공간이 크지 않다. 5평 남짓한 방 두 개가 전부다. 그런데 이곳에 14개 국가에서 온 16개 종족이 매일 방문하고 있다. 함께 모여 예배하고, 한국어를 공부하고, 삶을 나눈다. 수원비전센터는 한국을 찾아온 이주민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한국 생활에 필요한 한국어 교육, 문화 교육, 법률 및 의료 상담 등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봉사자 30여 명이 연중무휴 이주민들을 섬기고 있다. 수원비전센터는 그야말로 이주민들에게 그리스도를 담대히 전하는 증인들이 모인 선교 현장이다. 수원비전센터는 2022년 1월 개원했다. 그 역사가 짧은데 벌써 이주민 120여 명(평일반 50여 명, 주말반 70여 명)이 이곳을 찾고 있다. 이주민들과 함께 울고 웃는 수원비전센터가 입소문을 탔기 때문이다. 수원비전센터를 찾는 이주민들은 주로 외국인 근로자, 결혼 이주 여성, 불법체류자 등이다. 캄보디아에서 온 한 자매는 한국에서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두 자녀를 기르면서 혼자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이 자매는 수원비전센터에서 한국어 수업을 받을 뿐 아니라 수원온누리교회 사회선교부의 도움을 받아 쌀을 지원받고 있다. 또 다른 캄보디아 결혼 이주 여성 자매는 한국에서 처음 만난 남편이 장애인이었다. 그와 자녀를 낳았는데 아이에게도 장애가 있었다. 아이는 보육원으로 보내지고, 그 자매는 집에서 구박만 받다가 쫓겨났다. 얼마 전에 이 자매가 비자를 연장할 수 없는 어려운 형편에 있을 때 온누리교회 한 장로님의 도움으로 비자를 연장받을 수 있었다. 태국에서 온 어느 외국인 근로자는 휴일에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종이 상자 더미에 쭈그려 앉아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 이처럼 수원비전센터를 찾는 이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 안타까운 사연을 가지고 있다. 박재두 장로와 이명화 권사를 비롯한 봉사자 30여 명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울고 웃으며, 기도하고, 꼭 필요한 도움을 준다. 이주민들의 모든 삶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그들이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도록 돕고 있다. 무엇보다 이주민들에게 참 소망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그 덕분인지 수원비전센터를 찾는 이주민들은 박재두 장로와 이명화 권사 부부를 부모처럼 의지하며 따른다. “이주민들이 밤낮없이,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수원비전센터를 찾아와도 마냥 기쁩니다. 이주민들이 친정 부모를 찾듯이 정말 힘들고,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저희를 찾아오는 것 자체가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거리낌 없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는 이주민들을 보면 ‘우리가 그들에게 의지할 수 있는 울타리가 되어주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뿌듯합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이주민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는 것 같아 감사합니다.” 은퇴는 없다, 수원이 땅끝이다! 수원비전센터 벽면에 ‘은퇴는 없다, 수원이 땅끝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 문구가 바로 수원비전센터의 비전이다. 세상일에는 은퇴가 있지만, 선교에는 은퇴가 없고, 수원이 땅끝이라는 생각으로 선교 열정을 불태우자는 의지를 담았다. 박재두 장로와 이명화 권사 부부의 삶도 그 비전대로 흘러가고 있다. 수원비전센터는 박재두 장로와 이명화 권사 부부의 오랜 기도제목이었던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이명화 권사는 선교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결혼할 때부터 박재두 장로에게 “내가 돈 벌 테니까 당신은 선교사 준비하세요”라고 말할 정도였다. 평생 선교에 대한 마음을 품고 살았다. 그러나 박재두 장로는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선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몸도 약해서 해외에서 현지인들을 섬기고, 돌보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래서 아내의 선교 제안을 번번이 거절했다. 그런데 박재두 장로가 20여 년 전 온누리교회에 오면서부터 달라졌다. “선교를 가든지 보내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故 하용조 목사의 말이 가슴에 깊이 박혔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의 역사를 계속 써야 한다는 온누리교회 비전이 그의 마음을 울렸기 때문이다. 박재두 장로는 10여 년 동안 온누리교회 순장, 다락방장, 사역팀장 등으로 섬겼다. 그러면서 일상을 선교지로 생각하고 섬기는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을 많이 만났다. 함께 예배드렸던 순원들, 동고동락했던 팀원들, 늘 배우고 의지했던 리더십 등 수많은 성도를 보면서 삶의 모든 자리가 선교지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박재두 장로와 이명화 권사 부부는 지난 2019년 선교에 대한 마음을 새로이 품고, 장소가 아닌 사람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사람들이 한국 땅을 찾아온 나그네 ‘이주민’이었다. 하나님이 이들 부부에게 이주민 선교에 대한 마음을 주셨다. 이주민 선교에 도움을 주는 선배 사역자들도 만났다. 특히 오성연 장로(인천온누리교회)와 유해근 목사(나섬교회)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오성연 장로가 운영하는 ‘1클래스1스쿨’ 수업에 참가해서 전국을 다니며 선교지를 탐방했고, 유해근 목사에게 이주민 선교를 배웠다. 그 후 꼬박 1년 기도하고, 준비하고, 공부하고 나서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2년 수원비전센터를 개원했다. 박재두 장로와 이명화 권사 부부는 ‘이주민 선교사’라는 꿈을 날마다 새로 꾸고 있다. 수원비전센터에서 이주민들에게 한국어를 무료로 가르쳐 주면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복음을 전하고, 더 나아가 이주민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고향에 교회를 세우기를 소망하며 기도하고 있다. “더 많은 이주민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소망하며 오늘도 수원비전센터 문을 열고 있습니다. 이주민들이 이곳에 와서 열심히 공부하고, 함께 예배하기를 기도합니다. 이곳을 찾은 이주민들이 훗날 역파송 선교사가 되고, 대한민국 리더로 성장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수원비전센터를 위해서, 한국 사람들과 이주민들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수원비전센터 수업 및 예배 시간 1. 한국어 교실 평일반: 매일 오전 9시~오후 6시 일요반: 매주 일요일 오후 12시~오후 6시 2. 이주민 자녀 수업(수학) 매주 월요일 오후 4시 3. 이주민 예배 이주민 한국어 예배: 매주 일요일 오후 2시 태국어 예배: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30분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을 찾습니다! 대상: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으로 사는 온누리교회 성도 제보 및 문의: 메일(hha0@onnuri.org) 또는 전화(02-6959-0001)
2024-02-24 제1480호